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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참모습은 이곳의 누구인가.
나만 잘났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
나만 예의범절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천하게 보지 말라.
좋은 일은 내가 했고 나쁜 일은 다른 사람에게
돌리며 정당화시키지 말라.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는
취사선택을 하지 말라.
오직 바르게 가라.
사람들에게는 묘한 심리가 있다.
결코 커다란 비밀이 있어 숨기자는 뜻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도 탈고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다.
어느 날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한 거사가
침통한 표정으로 법봉 스님을 찾아왔다.
성 운:스님! 영혼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스 님:있지.
성 운:그럼, 귀신이라는 것도 있나요?
스 님:있다네.
성 운:영혼도 있고, 귀신도 있다면
굿이라는 것도 해야 하나요?
스 님:굿하고 귀신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성 운:비명횡사한 영가가 있다면
굿을 해야 그 영혼이 달래져
집안이 편안해지며, 남편이 출세하고,
자손이 번창하며, 온 가족이 건강하여
무병장수 한다는……
스 님:이 세상에서 노력과 고통의 열매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특별한 묘법이 있던가?
만일 묘법이 있다면 매일 굿만 하면
모든 게 원하는 대로 잘 되겠구먼.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평생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그러한 비결이 있다면
굿 아니라 그 어떠한 것이라도 나도 하게
하나만 가르쳐 주게.
그건 그렇고,
자네 그 영혼이라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성 운:없습니다.
스 님:그런데 어떻게 영혼을 달랠 수 있고,
어떻게 영혼이 달래진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성 운:사실 지금 저의 집에서는
굿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데,
어제 아침에 여기 오느라
아들 녀석이 역까지 차를 태워 주면서
귀띔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굿을 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들 녀석이 얘기를 해 주어서가 아니라
지금 생각하니 마누라의 행동이 올해 초부터
좀 이상했던 것 같습니다.
실은 결혼하기 전에 사귀던 여자가
있었는데, 어렴풋이 그 사실에 대해
마누라가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피차간 굳이 지난날 들추어 가며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고,
알아서 좋을 일도 아니라 모른 척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언제인가 마누라가
제가 알던 과거의 여자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었습니다.
나이가 예순이 넘고 손자까지 본 마당에
뒤늦게 노망을 부리는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갔습니다.
새로운 여자라도 사귀고 있다면 몰라도
지금부터 삼십 년도 훨씬 지난 일에 대해 물으니까요.
사실 제가 사귀던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죽었다는 말을 우연히 전해들은 적이 있기는 합니다.
그게 그 여자에 대해서 제가 알고 있는 전부이거든요.
느닷없이 마누라가 어디 가서 점을 치니까
제가 남과 같이 크게 출세를 못하는 것은
제가 과거에 알던 여자의 죽은 귀신이
저를 따라다니며 방해를 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여자의 원혼을 달래주지 않으면
머지않아 우리 집안에 큰 화가 생기는데
그 화가 가족에게까지 미친다는 겁니다.
이 말을 곧이들은 마누라는
제가 알면 강력히 반대할 것이 뻔하다
제게는 모든 것을 비밀로 한 채
아들놈과 둘만 알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제 어미가 굿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들놈도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식구들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하니까
어찌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제게 어차피 몰랐던 일이니까
모른 척하고 회사 교육이나 잘 다녀오라며
제게 위로까지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속이 끓어올라
당장 회사 일이고 무엇이고 다 때려치우고
굿판에 가 아내에게도 무당에게도
호통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가정의 일을 회사까지 끌어들여
연결 짓고 싶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한 회사의 책임자로서
무책임하게 행동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지금의 제 마누라 행동에 대해
전혀 이해를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제게도 책임이 있으니까요.
제 마누라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쉽게 굿이나 할 사람이 아니죠.
무당이 얼마나 무서운 소리를 했으면
굿까지 하게 되었을까 하는 안쓰러움도 들어요.
그리고 크게 출세 못하는
저와 자식들의 안전을 위해서 그런다고 하니
마누라의 정성에 마음 한구석에 찡함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리 이해하며 지나치려 해도
도저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스 님:그렇군.
듣고 보니 자네의 심정도 이해가 되는군.
그래서 영혼이라는 게 있어
그 영혼을 위한 굿이라도 해 달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에 이른 모양이구먼.
성 운:네, 그렇습니다.
저 역시 죽은 여자에 대해서
전혀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거든요.
어제는 하루 종일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말처럼 그 여자의 넋이 있어
굿을 하던 무엇을 하든
그 여자의 혼을 좋은 곳으로 천거할 수 있고,
우리 가정도 두루두루 좋다면
서로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생각도
없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스 님:음. 그것 좋은 생각이구먼.
그 여자의 영혼은 자네의 한 생각에 의해
달래질 수도 있지.
성 운:그렇게도 될 수 있습니까?
스 님:음, 그러하네.
자네의 생각에 따라서
자네와 인연된 둘레의 모든 영혼이 변하지.
그러면 지금 그 여자 영혼의 실체는 무엇인지,
어떤 게 그 영혼의 모습인지.
한 번 확인해 보자구.
내 둘레에는
영혼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
영혼을 본다든가,
영혼의 소리를 듣는다든가,
또는 영혼이 있는 곳을 찾아가기도 하고
영혼을 불러온다고도 하고.
또한 그 영혼 때문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지.
이러한 현상의 공통점은
정신력이 급격히 약해졌거나
혼수상태에 있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무엇인가에 의해
정신적으로 시달려 의지가 약해졌을 때
자주 일어난다는 현상일세.
모르는 사람들은 영감이 강하다,
정신력이 강하다고들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
비유로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걸세.
우리들의 몸속에는 온갖 잡균이 도사리고 있어.
그럼에도 우리가 금방
그 균에 의해서 병들지 않는 것은
이 균을 이겨내는 강한 힘,
즉 면역성이 있기 때문이지.
그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거야.
하지만 몸이 약해지면
면역성이 약해져 몸속에 도사리고 있던 균이
금방 몸 전체에 번지고
외부의 응원까지 받아가며 몸을 썩게 하고 말지.
정신적인 작용도 마찬가지여서
정신력이 약해졌을 때
중음신인 영혼이라는 게 나타나
우리를 방해도 하고 괴롭히기도 하는 거네.
그러므로 영혼의 문제는
있다 없다 와는 별개이지.
자기의 정신력이
얼마나 건강하냐. 약하냐. 하는 게 문제이네.
현재 우리들이 앉아 있는 이곳에도
많은 중음신인 영혼이나 괴이한 신으로 꽉 차 있다네.
오직 인간들은
형체가 있는 것밖에는 볼 수 없으므로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하나의 환상으로밖에 간주할 수 없는 것뿐이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영혼이라는 것은
인류가 생기면서부터
또한 인류가 소멸할 때까지
있다 없다 하면서 끝없는 논쟁이
계속될 문제 가운데 하나일 걸세.
문명의 발달로 영혼이라는 것을
판별하는 기계가 나오지 않는 한.
성 운:스님은 어느 쪽입니까?
스 님: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있다는 쪽이네.
여기서 자네의 생각과 다른 것은
영혼이라는 것이
하나의 굿으로 처리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지.
간단한 비유를 또 하나 들면
여기 자네가 갖고 온 빵으로 하겠네.
이 빵 하나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밀이라고 하는 씨앗이 있어야 하는데,
씨앗이라는 게 그냥 생겨라 해서 생긴 게 아니지.
씨앗을 뿌리면
그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열매가 여물면
그 열매를 가지고 여러 공정을 거친 후
빵을 만드는 것 아닌가?
빵 하나도
빵의 전생에 해당하는 밀이 있어야 하고,
그 밀의 전생에는 또 다른 성분의 합성이 있어서
지금의 밀이 있게 되는 것이네.
영혼의 세계도 마찬가지여서
영혼의 유전이 부정된다면
마치 밀을 심었는데 콩이 되어 나온다든가,
콩을 심었는데 밀이 되어 나온다든가
하는 돌연변이가 나타나게 되지.
또한 전생이 없다면
밀은 심지도 않았는데 밀이 나오고,
콩도 심지 않았는데 콩이 나오고 말 걸세.
물질세계에 관해서는
현대에 들어 와 많은 진화론의 발달로
상당 부분 유전학적으로 성과가 있지만
아직 영혼의 세계에 있어서는
물질세계만큼 성과가 없는 실정이네.
그 원인은
형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영혼의 세계를
정리한다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도 되지만
현재 과학 문명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서양의 가치관이
신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기도 하네.
지금까지 학계를 주도해 왔던 서구 이론들은
신을 중심으로 한 사상이어서
그 이상의 논리가 진전되지 못하고 있는 걸세.
그러나 정신세계를 중심으로 형성해 온 동양이
주도권을 잡고 과학 문명을 발달시킨다면
단순히 물질세계뿐만 아니라
정신세계도 물질세계의 수준까지
끌어올릴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에너지가
새로운 물체의 형성에 있어서
유전적으로
―불교에서 인과 윤회로서 인연법이라고 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며
이 정신적 파장이
물질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며
어떻게 형성해 가느냐 하는 것을 정립시킴으로써
생존적 질서가 새롭게 정립될 걸세.
요즈음 인간성 상실과
인간성 회복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나는 이 말이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형성되었는지 모르겠어.
무엇이 상실되었고 무엇을 회복한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이 말은 엄밀히 따져 보면
서양의 가치관에서 나온 것인데,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 더 솔직해져 보자고,
인간성 회복을 부르짖는 서양인들
자신들이 인간성을 상실시켜 놓고,
어느 순간 아차 싶었는지
이제 와서
자신들이 이 시대의 마지막 휴머니스트인 것처럼
인간성 회복을 부르짖는
우스운 광대역할을 하는 것일세.
그러니까 인간성 상실이란
순수한 인간 본질을
가상으로 만들어 놓은 허상인 신에 빼앗기고,
또한 지금에 와서는 기계 문명에까지 중독되어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번지수를 상실한 것이네.
그러므로 신이란 무엇인가 하는
그 근본을 생각하게 되지.
그런데 신이란 어떤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자네가 형성하고 있는 세계,
영혼이라는 것이 그대로 신이네.
자기가 본래 갖고 있던 주인공을 찾았을 때에
자기의 신을 찾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네.
우리들은 이것을 영혼이라고도 하고
마음이라고도 하지.
그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육체가 사라져도
육체와 함께 형성되어 왔던 하나의 주인공이
육체와 분리 되면서 떨어져 나온
그 에너지 작용이
혼이라고 말하는 것이네.
거기서 존재하는 에너지 형태가
어떤 것이냐고 물으면
지금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영혼관 하고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네.
따라서 그것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라고 하는 사람이 한 세상 동안
육체를 형성하고 정신을 단련시키며 살아가지.
그러나
가 죽으면 육체는 사라져 자연으로 돌아가나
그 육체와 함께 오랫동안 집착하며 뭉쳐 왔던
라고 하는 혼은 육체가 사라져도
그 동안에 강하게 뭉쳐진
에너지의 강도만큼 존속하면서 다음의
라고 하는 인연을 찾게 되지. 그
는 인간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고,
별다른 물체일 수도 있고,
자연 그대로 일 수도 있다네.
의 영혼은 업에 의해서
자기와 닮은꼴의 모양을
인력과 같이 결부시키려고 하는 강한 힘의 작용을 일으키나
자기와 똑같은 는 있을 수 없으므로
와 제일 인연이 깊은 를 선택하게 되지.
즉 + = 와 같이
는 와 제일 인연이 깊은
를 선택하여 를 구성되게 되지.
설령 인간으로서 다시 환생한다 해도
는 로서 환생하는 게 아니라
와 제일 가까운 와 연결되어서
로 탄생하는 것이네.
그러나 와 다른 로 변했다 해도
속에는 의 성질도 의 성질도
숙업으로 잠재되어 있지.
잠재된 전생의 도 의 숙업도
그 강도에 따라 의 성질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하고
의 성질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하지.
이렇게 전생에 길들었던 업의 성품이
현상계에 있어서 인식하지 못했던 감각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도 작용하게 마련이네.
지금 자네가 말하는 그 여자의 영혼은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전생에 응축된 업의 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떠한 인연과 결부하고자 방황하고 있는 상태라네.
이것을 불교에서는 중음신의 상태라고 말하지.
즉 중음신이란
자기가 가야 할 곳이나 결탁해야 할 상대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상태이네.
만일에 그의 상대가 자네라면
자네가 제일 먼저 알고 느껴야 하는데
당사자인 자네가 모르는데
누가 그것을 알겠나.
성 운:무당은 그런 환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스 님:그렇지 않다네.
무당이 그와 같은 환상인 허상을 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상대방의 호응 없이는 확인할 길이 없네.
그리고 무당뿐만 아니라 보통의 인간도
그와 비슷한 중음신은 다 갖고 있어.
수행으로 자기의 정신을 확실히 했거나
평상시에 업을 바르게 길러 원만하게 살아간 사람들은
비록 죽어서 몸을 이탈하나
평상시에 가졌던 생각 그대로가 힘이 되어
자기 갈 길을 찾아가게 마련이네.
그렇지 못하고 집착과 욕심에만 허덕이던 사람은
죽어서 자유스럽게 된 영혼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생전에 가졌던 욕심이나 원망의 집착에만 꽉 차 있어서
얽히고설킨 인연만 좇으며,
사랑했으면 사랑한 만큼
미워했으면 미워한 만큼
분별 못하는 그 혼의 에너지만 남아서
이리저리 방황하며 집적거려도 보는 것이네.
지금 자네가 말하는 영혼도
그러한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라네.
성 운:그러면 그 영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리고 지금 마누라가 하고 있는 행동도
잘하고 있는 것입니까?
스 님:자네가 지금 말하는 것과 같이
혼이 참으로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네.
그러나 누가 그것을 확인했다고 하던가?
내가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이네.
죽은 여자의 영혼이 붙었다는 장본인은
자네가 아니었나?
그렇다면 그 영혼을 본 사람은
무당이 아니라 자네가 되어야만 하지.
설령 성운,
자네가 보지 못한다 하여도
그에 버금가는 어떤 느낌 같은 것은
있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렇다면 자네에게 묻겠네.
그와 같은 느낌을 한 번이라도
느껴 본 적이 있었는가?
성 운:…… 별로 느낌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스 님:그러면 자네의 부인이나 자식들한테서도
그와 같은 것을 느꼈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고?
성 운:그런 말도 못 들었습니다.
스 님:그러면 어떻게 무당의 말 한 마디로
그것을 100%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만일 그 무당이 하나의 환상을 보았다거나
상술적인 수단에 의해서
꾸며 낸 일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성 운:상술이라니요!
상술로 그렇게 하는 무당도 있습니까?
스 님:전부 그런 것은 아니라네.
살기 위해서 직업으로 무당 노릇을 하는 사람도 있지.
답답하고 궁금하고 불안해서 찾아온 사람에게
상대가 관심 끌 만한 말 몇 마디,
즉 몇 대조가 달라붙었다든가,
비명횡사한 원한에 죽은 귀신 등
호기심을 유발할 만한 이런 저런 말을 토해 내다
그것에 상대방이 말려들거나 관심을 보이는가 싶으면
그것이다 하고 결정을 짓게 마련이네.
성 운:그러면 그 환상이라는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입니까?
스 님:처음에도 말했듯이 내 둘레에는
그러한 것을 본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많다기보다는
그러한 현상에 휘말린 사람들이 가끔 찾아와서
이러저러한 것을 묻곤 하지.
그래서 묻는 말에 답변을 해준 결과
자신들이 하나의 환각 현상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된다네.
그 후 그들은 그러한 현상의 시달림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물색하게 되지.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기 전에
육체적으로 심하게 앓았다거나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을 때
무엇인가의 환각 현상을 일으키게 되고,
보인다. 들린다. 맞춘다. 하게 되는 것이네.
그러한 현상이 일어날 때에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은
어느 때보다 고집이 세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기주장을 하는가 하면
때로는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면서
고통스러워하고,
누가 강하게 말을 하면 풀 죽은 듯이 고분고분 하다가
그 자리를 벗어나 조금 시간이 흐르면
엉뚱한 행동을 하며
무엇이 보인다거나 들린다고 말한다네.
성 운:그게 신이 들어오는 어떠한 징조가 아닐까요?
스 님:신은 무슨 신이 들어오는가.
그러한 징조는 자기 인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어느 잡귀의 환상에 눌려서
헤매고 있는 것이라네.
그들은 그러한 징후를 한결 같이 미화시켜서
옥황상제니 칠성님이니 하지만
그것은 자기의 정신 상태가
지금까지 인식했던 이미지가
어떠한 환상으로 변했을 따름이네.
성 운:그러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속에 잠재되어 있던 인식이
환상 화된 것에 지나지 않다는 말씀입니까?
스 님:그렇다네.
그 사람들이 보인다고 하는 것을 하나하나 분석해 보면
그 형체가 결정적으로 누구라고
정해져 있지 않다는 거네.
사람으로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대개 사자를 의미하고,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은 사람은
할머니라든가 아주머니를 뜻하고,
어린 아이는 대개 무슨무슨 동자,
관을 쓰고 울긋불긋한 도포를 두른 사람을
옥황상제라든가 칠성 하는 것이네.
짐승으로는 용이 주로 나타나지만
신화에 나오는 짐승으로
천사도 인간도 아닌 형체가 나타나는 수도 있네.
따라서 처음에는 그와 같은 형체가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고유 명사를 갖고 있지 않아.
거기에 무엇 무엇이다,
즉 할머니다, 어머니다, 칠성님이다 하고
고유 명사 같은 것이 붙는 것은
자기가 지금까지 인식해 왔던 범위 내에서라네.
여기서 그것이 환상일 수밖에 없다는 증거는,
보이는 환상의 세계가 있는 것만은 틀림없지만
보이는 세계가 자기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의 범위를 못 벗어난다는 것이지.
서양의 신들린 사람들을 보면
예수를 보네
동양적 옥황상제나 칠성 등을 보는 것 하고는 다르지
어쨌든 그로부터 그 환상 체는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는 현실체로 군림하게 되는 것이네.
이러한 현상을 불교에서는 중음 신을 본다,
또는 일반적으로 귀신을 본다.
하고 말하게 되는 것이라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어느 형체를 벗어난 에너지,
즉 혼이라는 것이 되고,
그것을 인간이 보고 느낀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가 인식하고 있던 세계에 불과한 것이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들의 초기 상태라네.
그때는 지나온 과거에 대해서 놀랄 정도로 잘 알아맞히거나
미래에 대해서 예언적인 말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사람들은 불가사의한 신의 세계가 별도로 있어서
예시한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음신의 세계에서 본
착란 현상에 불과하다네.
따라서 절대적인 증거나 신용할 만한 것은 못 되는 것이네.
그러나 이런 것은 있다네.
무녀의 경우인데,
자기가 중음신의 환상에 휩싸이게 되면
그 중음신의 입장에서
나무나 벽 같은 것으로 가려져 있어도
상대방의 형상을 느낄 수 있음은 물론이고,
그 사고의 움직임까지도
때로는 거의 정확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이네.
현대 과학이
방사선을 이용해서 목적하는 것을 보듯이
본다고 하면 이해가 되겠나?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판단력이네.
일반적으로 신들린 사람들의 결점은
판단력이 흐려져 있다는 것이네.
대개 그런 사람들은 집중력이 부족하지.
그렇기 때문에 사회성이나 자기의 삶에 대해서
구심점도 별로 없어.
그래서 그에 나타는 중엄신도 확실한 것이 아닌데다가
자기의 판단력도 확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답 또한 확실하지 않고 횡설수설하는 것이네.
그렇게 여러 말을 하는 과정에 사람들은
자기와 조금 연관되는 말이 튀어나오면
맞네. 안 맞네 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것뿐이지.
성 운:그러면 모두가 환상이라고 보아 무시해도 됩니까?
스 님:그것 또한 이렇다 하고 확실한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네.
환상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그 환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그것 또한 무시는 못하는 것이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하는 것은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그에 지배당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있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 인간들의 갈등이 계속되는 것이네.
없으면 없고
있으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사람에 따라서 그에 지배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와 같은 현상이라든가 느낌도
안 갖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일세.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형체가 있어서
지배하는 힘의 소유자가 있다면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신이 나타난다든가,
영혼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 개인의 정신 상태에 의해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어디까지나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 환상에 지배당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탈이지.
자네만 보아도 그래.
그 여자의 영혼이 현재
자네에게 붙어 있건 붙어 있지 않건
그것과는 아무 관계없이 자네는 이미 그 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그 영혼의 소리에 지배당하고 있는 걸세.
여기서 우리들이 중요하게 생각해야만 되는 것이 있네.
최면 화된 환상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 방법이라네.
인생의 근본을 확실히 꿰뚫어 아는
강한 정신의 소유자나 아니면
누구든지 그 환상의 영혼에 휘말려 들어
지배당할 가능성을 갖고 있네.
그런데 그러한 환상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길은
첫째 확실한 인생에 있어서
근본 실체의 작용을 꿰뚫어 안다든가,
둘째 어떠한 종교를 믿어
그에 철저히 의존하고 맹신하며
더욱 자기를 최면 화시켜 안심한다든가,
셋째 굿 같은 것으로
최면 상태로 안심시켜서
불안으로부터 해소시켜 주는 것이네.
자네의 집에서 지금 굿을 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실은 그 굿이라는 행위도
불안한 어떤 최면으로부터 해소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네.
경우에 따라서는
심술이 나쁘고 상술에 능한 욕심쟁이 무당을 만나면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마음 상태를
편안한 상태로 풀어주는 게 아니라
더욱더 최면 화시켜서 집안이 망할 때까지
계속 굿을 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경우도 있지.
지금 자네 부인이 어떠한 무당을 만나서
무슨 굿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굿 자체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네.
만약 굿을 하여 자네의 부인이
지금까지 지배당해 오던 어떠한 환상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다면 말일세.
오늘 이야기의 경우에서처럼
꼭 그 여자의 혼에서만 벗어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자네 아내가 갖고 있던
다른 불안까지도 해소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정작 장본인인 자네에게는
아직도 그 의문의 수수께끼가 남아서
깔끔히 해소가 안 된 것 같아 보이는군.
어떤가?
성 운: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스님 말씀을 들어 어느 정도 이해는 했으나
그 의문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스 님:자네는 자기의 본래 모습,
즉 인습이나 인식에 의해 길들여진 자기가 아니라
자기가 본래 갖고 있는 본질을 근본적으로 알아야 하지.
그런데 자네는 자기의 본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
성 운:어느 것이 저의 본래 모습인지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지만
언제나 가지고 있는 이 모습이
저의 본래 모양이 아닐까요?
스 님:어떻게 생겼나?
성 운:글쎄요. 머리는 희끗희끗하고
주름살도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이
저의 모습이지요.
스 님:그것만이 자네 모습의 전부인가?
지금까지 영혼이 있네. 없네,
환상이네 아니네 하며 말하던 사람은
자네가 아니었는가?
눈으로 보이는 모습만이 자네인가?
성 운:알 것 같으면서도 힘든데요.
그 이상 말씀드리기에는.
스 님:그래, 인간은 자기의 모습은 볼 수 있지.
다른 동물은 자기의 형상마저 망각한다고 할까,
관심이 없다고 할까.
그렇지만 인간들은
자기의 생김새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어.
그러면서도 다른 동물보다도 자기의 실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있지.
다른 동물은 자연에 순응해 가며 살아가는데,
인간들은 다른 동물과 감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영리해서 더 잘 알 것 같으면서도
다른 동물보다도 더 몰라 허덕이고 있는 실정이라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두껍고 요란하게 얼굴에 바르고
그것도 모자라 몸에는
세상에서 좋다는 것으로 온통 감싼 채
그게 본래의 자신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지.
아니 그렇게 하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도 할 수 있지.
그러고 보면 그들과는 달리
자네에게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신중히 생각해 보려고 하는,
삶에 대한 진실한 모습이 있다네.
성 운:가당치도 않습니다.
스 님:아니야.
자네의 지금 모습은 굉장히 멋있어.
조금 전에도 인습이니 인식이니 하는
업의 노예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 인간들은
몸뚱이만 치장해 온 것이 아니라
정신도 오랫동안 치장에 치장만 거듭해 온 걸세.
그 정신을 치장하며 길들여 온 것을
불교에서는 업이라고 말하고,
사회적으로는 인습이나 습관 성품이라고 말하고 있다네.
생물의 역사가 40억 년이라고 하니까
현재의 우리 인간이 형성되기까지는
하나의 단세포에서부터 시작되어 40억 년이 걸린 걸세.
그 40억 년 동안 우리들 생명체는
변화와 진화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우주의 실상과는 달리
인간만이 이성을 지닌 생물체로서
특수한 생명체의 구성을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부작용만 낳는 현상이 일어났다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불안과 괴로움이 많다는 것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지.
결과적으로
인간에게만 이성의 세계가 별도로 구성되지 못하는 것은
우주라고 하는 거대한 에너지원의 작용을
한 치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네.
그러나 고도의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은
욕망이 인간만은 별개로 존재하여
죽어서도 인간의 혼만 별도로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걸세.
이를테면 땅에 뿌리를 둔 나무가
자기의 생명선인 뿌리 속의
흙이나 물이나 영양분의 존재성을 망각하고
한 송이의 꽃,
한 알의 씨앗만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
이와 같이 인식의 세계란
마치 병 속에 꽂아 놓은 꽃과 같아서
물이 있는 동안은 일시적으로 꽃을 피우며
생명을 이어갈 수 있으나
뿌리는 내릴 수 없듯이
그 실체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걸세.
그런데 인간들은 뿌리 없이 성장시켜 놓은
인식의 세계에 물들어 허덕이며,
영원히 허상의 욕망 속에서
고뇌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집착의 늪에 생각을 두고 판단하는 모양을
불교에서는 상(相)이라 표현하네.
다시 말하면
인습이나 인식에 의해서 나타난
의식적 구조를 의미하네.
나만이 영원히 고정되어 존재하려고 하는
의식적 관념이라고 할까?
그래서 죽어서까지
나만의 영혼을 별도로 존재시키려고 하는
의식의 작용으로
우리들이 눈이나 촉감으로 확인하는 물체와 마음에
이미지화된 현상을 말할 수 있다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당과 같이
어느 환상을 보고
그것을 마치 실제인 양 착각하여
그것을 좇아가며 지배당하는 세계가 있는가 하면
지금 우리들의 눈앞에 존재하고 있는 모양이
실제로 영원히 나의 것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욕심내는 모양이 그것이라네.
불교에서는 이것을 공이다. 무다. 하여
영원히 고정되어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을 증명하며,
그 이외 우리들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현상도
결국 인습이나 인식에 의해서 집약된 현상이므로
그 역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잘 꿰뚫어 보아 설명해 놓은
사상이 있는데
(四相:중생이 실재라고 믿는 네 가지 상으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말함)
《금강경》에 나온다네.
첫째가 아상(我相)이네.
아상이란 오온이 화합하여 생긴 것으로
몸과 마음에 실재의 내(我)가 있다고 하고,
또 나(我)의 소유라고 집착하는 좁은 견해를 말하네.
즉 아상이란 나라고 하는 모양을 말하는데,
나만 잘났다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을 말하네.
재물이 좀 있다고 해서 뻐기고,
좀 안다고 하여 남을 무시하고,
배경이 좀 좋다고 하여 으스대는 것이지.
자네에게 한 가지 물어보겠네.
자네는 어떤 형태로든 우월감을 가진 적은 없는가?
그리고 무엇인가 뜻대로 안 되면
다른 사람을 탓한 적은 없는가?
성 운:왜 안 그랬겠습니까.
마음 한 구석에는
‘그래도 고등 교육도 받았고,
그럴 듯한 회사에서 높은 직책도 맡고 있으니
이 정도면 남보다 뛰어나지’
라고 자처하는 느낌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을 때도 있지요.
그것뿐이 아닙니다.
회사의 일을 예로 든다면
어떤 일을 기획한 결과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 일이 잘못된 원인에 대한 분석도 하지 않고
인상을 쓰며 누가 잘못했기 때문이라며,
그 사람 탓만 한 적도 많습니다.
후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전적으로
그 책임이 저에게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스 님:그랬구먼.
아상은 바로 그런 것이네.
남을 업신여기고 나만 잘났다며
불필요한 자기 모양을 나타내는 것 말이야.
우리 사람들은 그러한 것 모두가 나의 것인 양
아상을 나타내며 허덕이다
끝내는 자신의 모습을 상실하여 당황하고
결국에는 괴로워하게 되지.
둘째는 인상(人相)이네.
인상이란 나(我)는 인간이다.
즉, 축생의 무리와는 다르다고 집착하는
좁은 소견으로
교만하여 남을 멸시하는 것이네.
즉 인상이란
나만이 인격과 예의범절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며
나 이외의 것을 얕잡아 보는 것이네.
사회적으로 명예도 얻고
지식이라든가 돈도 좀 있는 기득권층의 사람들이
나만 잘났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을 깔보는 것을 의미하지.
인상은 수행 경력이 좀 있거나
불교 경전에 대한 지식이 좀 있는
우리 승려들 중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형태라고 할 수 있네.
존경하는 것과 굽실거리는 것은
엄연히 다른데,
대개 이런 사람들은
힘 있는 사람에게는 비위를 잘 맞추는 반면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호통을 치며 혹독하게 굴곤 한다네.
특히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이성적 인간이
이 인상(人相)에 제일 적합하지.
동물을 비롯하여
자신이 옳다고 믿는 종교에 따르지 않는 사람을
이성적 인간과는 다르다고 본 것이네.
셋째는 중생상(衆生相)이네.
중생상이란
나(我)는 오온 법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라고
집착하는 좁은 소견을 말하네.
즉 중생상이란 나는 중생상이다,
죄 많은 중생이라 어쩔 수 없다
하고 자기를 중생이나 죄인으로
규정지어 놓는 것을 말하네.
그러며 사회생활을 속에서는
네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네가 못났니. 내가 못났니라고 떠들어대면서
짓찧고 볶으며 살아가는 모양을 말하네.
이러한 것을 중생 노릇이라고 표현하지.
넷째는 수자상(壽者相)이네.
수자상이란
나(我)는 일정한 기간의 목숨이 있다고
집착하는 좁은 소견을 말하네.
즉 수자상이란 오래 살고 싶어 하는
모양을 말하는 것이네.
간혹 예외는 있겠지만
인간은 대개 일찍 죽고 싶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일 걸세.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서든
보다 오래 살고 싶어 하지.
그렇긴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삶에 집착하고 있어도
꼴불견이라 할 수 있네.
그런가 하면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목숨의 운명이
이미 얼마만큼 정해져 있다고 하면서
떠들어대는 것도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니라네.
사람들이 찾아와서 죽음을 애통해 한다든가
해결하기 힘든 삶의 고통에 대해 하소연할 때에는
나도 가끔은 태어난 업이니, 운명이니 하는 말을
끄집어내는데,
이것도 수자상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네.
불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방편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러 말 중에서 제일 편리하게 사용하곤 하지.
그렇긴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본질에 어긋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숨어 있다네.
어쨌든 사상(四相)이란
존재하는 것의 무상함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세계에
집착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네.
여기서 우리들이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얽매인 업을 풀고
찌들은 운명을 벗겨 내는 일 아니겠는가?
“마음의 껍데기를 벗긴다.”
고 하는 말은
인습에 찌든 업의 껍데기를 벗긴다.
하는 말이네.
그런데 무엇이 그리 얽히고설켜 있기에
마음의 껍데기를 벗기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는가?
성 운:글쎄요.
스님 식으로 생각한다면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
선과 악, 생과 사, 극락과 지옥, 성인과 범부, 좋고 나쁜 것 등이
다 얽히고설켜서
오랫동안 인습화된 업이
곧 마음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 아닌가요?
스 님:자네도 이젠 제법이야.
불교에서 상을 버려라,
상에서 벗어나라 하는 말을 자주 한다네.
이 말뜻은 자네의 말대로 마음의 형상,
그 마음의 껍데기에서 벗어나라는 의미이네.
눈으로 보아 확인할 수 없고
만져서 느낄 수 없는 모양을 상이라 한다네.
그러나 상이라는 것은 형체가 없다네.
그러므로 이것을 일러,
즉 모두가 마음의 집착으로부터 나오는 형상을
상이라 이름 지은 걸세.
그래서 상이란 본래 실체가 없다네,
본래 아무것도 없는 모양에서
마음의 형상이 한 생각을 일으켜 집착하는 것을
상이라 이름 지은 것이라네.
그러니 이 상은
이 상은 도공이 흙을 주물러서
그릇을 만들 듯
자기 마음이 창조자가 되기도 하지
그 창조자가 번뇌의 악마를 창조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지만,
수행인을 비롯하여 일반 사람들이
선한 것이 좋다고 하여 선함만 취하고
악함을 멀리한다고 하여
악이 없어질 것 같은가?
성 운:잘 모르겠습니다.
스 님:그러면 선은 악으로부터 나오고
악은 선으로부터 나오는
상관관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있는가?
성 운: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스 님:잘 모르겠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했나?
그럴 수도 있을 걸세. 괜찮네.
선과 악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네.
선은 악에 뿌리를 두고
악은 선에 뿌리를 두고,
선은 악으로부터 나오고
악은 선으로부터 나오지.
그러니 악이 없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선이라는 것 자체가 없어져야
악이라는 것도 없어지겠지.
이것은 수행을 하는 우리들에게도 많이 있는 형상이네.
그런데 그 본질은 모르고
나만 수행을 많이 했다거나
복을 많이 닦았다는
쓸데없는 자부심에 꽉 차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올바른 수행이라고 할 수 있겠나?
내가 방금 말한 이런 것을
수행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네.
영혼도 마음의 집착인 응어리로부터 일어나는 상이니까
정신세계의 집념에 의하여 뭉쳐진 하나의 형상을
영혼, 혼이라고 부르는 것이네.
그러므로 이것은
영원히 고정된 실체를 가질 수 없다네.
불교에서 이것은 무(없음)니,
저것은 공(비었음)이니 하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것은 있고 없고,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네.
다만 고정되어 영원히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관념에 대한 부정일뿐이네.
즉 나라고 하는 존재가
영원히 나이다.
라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것을
부정하는 것이지 내가 없다는 것이 아니네.
오늘의 내가 내일의 네가 되고,
내일의 네가 모레는
어느 들녘의 예쁜 꽃이 되어
피어나는 것이 됨을 말하는 것이라네.
그래서 그 예쁜 꽃이
언젠가는 내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고.
이와 같이 나라는 존재가
우주 속에 나로서 고정되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우리들은 나만 영원히 나의 것으로 착각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걸세.
그러나 내 것이라고 하는 소유욕이
나쁘다고만 말할 수 없지.
내 것이야말로 인간이 세상을 형성해 놓은
특수성이기 때문이네.
우리가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네.
그것은 다른 동물의 세계에도
소유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물에 있는 소유욕은
자연에 순응하며 형성되기 때문에
인간처럼 자연을 침범하면서까지
자기 이외의 욕망으로 사로잡히지는 않는다는 것이네.
그런데 인간들은 어떤가?
자연을 이용한다,
문화를 발달시킨다. 하면서
야단법석을 떨곤 하지.
하지만 결국엔 이러한 행위가
자연을 파괴하는 형태로 변질되고,
자연을 해치면 해친 만큼
고통과 분열이 나타남을 자네도 자주 보았을 걸세.
이 고통이라는 형상은
인간이 자신의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끝없는 투쟁이라고 보면 될 걸세.
그래서 수행을 하게 되는 것이고,
본질을 찾고자 노력하는 것인데,
본질에서 이탈하여 형성해 놓은 모양을
상이라고 하는 것이라네.
수행에 대해 잠깐 말하면
수행은 자기에 집착된 허상에서
실상의 세계로 돌아가는 작업을 일컫는 거지.
바로 이것이 불교에서 실천하려는
목표라고 할 수 있다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자네가 말하는 그 여자의 영혼이
구제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나.
성 운:…….
스 님:자기의 본래 모습을 보라,
자기의 본래 모습을 알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그리 쉽게 되지 않는 것은
날마다 보는 나이지만
순수한 본질에서 나를 보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길들여진 모양,
즉 인식이나 인습에 의해서 보기 때문이라네.
그래서 번뇌에서 벗어나라,
괴로움에서 벗어나라고 말하는 것도
우리들 자신이
우리들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길들여진
인습의 노예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뜻이라네.
수행에 있어서도
모든 잡념을 버려라 버려라,
모든 잡념을 끊어라 끊어라 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본래 버리고 끊을 것도 없는 곳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얽어 놓은 게 있으니까
그것을 버려라, 끊으라 하는 것이라네.
혹자는 수행에 대해 그릇되게 인식하여
수행이 삶의 목표인 양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수행은 어디까지나 방법이고 방편이고 과정일 따름이네.
단지 그 방법상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뿐이네.
참선은 어떠한 상징적 이미지를 하나 규정해 놓고,
그 상징에 인생 전체를 하나로 뭉뚱그려 놓고
나란 무엇인가
그 나의 본질을 추구해 가는 것을 말하지.
그리고
그 상징에 자기 인생 전체를 싣는다는 것은
어떠한 언어적인 상징 하나에
자기 인생 전부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을 말하지.
그래서 그 의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집중력이 강해지므로
의심이 더욱 똘똘 뭉쳐 강하게 되고,
그 의심이 풀렸을 때
깨쳤다, 체득했다.
하고 말하게 되는 것이네.
신을 믿는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네.
그러나 이 방법은
자기의 실체를 근본적으로 깨쳐서 파악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가상의 존재를 두어서
그의 말이 진리이고,
그가 절대자라 믿고,
그에게 절대 복종하고
절대 의존하게 하는 것이네.
꼭두각시를 만드는 것뿐이야.
이걸 맹신이라고 하지
여기에서 무당이 하는 굿도
신을 신봉하는 원리와 같아서
하나의 환상적인 세계에
자기를 맡김으로써 순간적이나마 절대 믿는 순간은
안심하게 되는가 하면 최면화 되어
불안의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지.
그렇기는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사람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며,
감정도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이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자네 부인의 경우도
굿을 함으로써 자신 속에 인식되어 있는
여러 가지 불안한 관념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된다고 할 수 있지.
자네는 그렇게 해서 구제가 되겠는가?
성 운:글쎄요. 어쨌든 제 인생을
굿에 의탁해서 해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스 님:중생을 위해서 수행을 하고,
중생을 위해서 몸을 바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누구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나?
오늘은 자네가 주인공이니까
예전에 죽은 여자의 영혼을 위해
법당에 가서 진짜 굿을 한 번 해보세.
법당에 앉아 계신 부처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데
겨울에 온 사람은
부처님이 춥다고 하시니
문을 닫으라 하고
여름에 온 사람은
부처님이 덥다고 하시니
문을 열라 하네.
인간들은
저마다 자기 귀신을 끌고 다니면서
어느 때는 신이라 하고
어느 때는 귀신이라 하네.
인간들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네가 그랬다, 네가 속였다 하네.
자신을 보라
자신을 보라 하지만
참 나의 모습은
어디에 있나?
있는 것 같으면서도
찾으면 모르는 것
그건 왜인가?
실질적인 자기가 없기 때문이라네.
모양에 심취하여 자신을 내세우나
비어 있는 모양 속에
무엇이 보이겠는가?
그대의 영혼이
그곳에 있어
영혼이 있어 좋지 않은가?
그대의 영혼이
그곳에서 산화되어
영혼이 없어 좋지 않은가?
그대와 나는
둘이 아니면서
그대와 나는 분명히
떨어져 존재하고
그대와 나는
모습을 달리하면서도
그 어느 것 하나 어긋남 없이
모양도
마음도
같이 하고 있는 것
그래서 지금
그대의 영혼 속에
그 모든 영혼도
같이 하고 있는 것
날아라.
날아라.
모두 다 날아라.
그대 속에 있는
모든 영혼아!
본래 사랑도 없고
미움도 없고
삶도 없고
죽음도 없고
원한도 없느니라.
있다고 하는 것은
그대 마음 작용이
아무 당처도 없이
허망하게
움직이고 있을 따름인 것을……
첫댓글 본래지 맑은 마음자리 공부.. 좋은법문 감사합니다..().
감명깊게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_()_()_()_
_()()()_
그렇군요...좋은말씀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나무석가모니불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