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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5일(화)의 J3 Club 백두대간 18차 팀의 12차 산행 진고개 에서 닭목령 까지.
진고개에서 닭목령 으로간다.
여름 기간중에 강원도 권역을 주파 하자는 계획대로 이제 진부령 졸업구간 과 또 하나는 진고개 에서 닭목령 구간을 북진이나 남진이냐 만 남기고 있었기에 12회차 위로 가던 아래로 내려오던 개인적으로 인연이 많은곳이다.
남진으로 통보를 받았다.
진고개 에 젊은날의 추억과 닭목령 고루포기 건너 안반덕 에 형님 농장이 있는 관계로 자주 넘나들었던 고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대관령(면)이 나의 고향이고 늘 만나고 싶은 부모님이 대관령에 잠들어 계신다.
18차 우리는 첫 출정의 지리 천왕봉을 오르며 빗줄기를 시작으로 성삼재를 걸었고 두 번째도 그렇게 비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것이 분명하다.
기상청 예보전에 윈드파인더 등 몇 개 글로벌 기상을 파악한바 일주일전 대관령의 예보는 비 와 심한 바람이다.
그런데 우리 기상청은 흐림 그리고 바람 2m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
그리고 2일전에 기상청은 비 예보로 슬쩍 바꿔치기하고 바람은 여전히 미약하다.
18차 단톡방에 심한 비바람에 대비해야 한다고 캡쳐하여 올리니... 겁 주지마라 하시는 분도 있다.
해서 내가 그곳을 잘아는 대관령 출신이니 라고도 했다....ㅎㅎ
매봉 선자령 대관령 구간 이번에 심한 비바람 이라는 것 이 어떤것인지 체험을 잘 하신분들도 계실것이다.
많이 추울것이다.
바람은 줄기차게 20m 정도로 불어 줄것이고 최고 40m/h 로 태풍과 같은 느낌을 받을것이라 했다.
비오는것에 익숙해져 있고 매번 힘들고 지치지만 갈때 버스에서 만큼은 반갑게 만나 소풍같이 즐겁게 가게 되지만 오늘은 그냥 비 가 아니라 겨울로 가는 대관령의 비바람에 즐겁지 않은 긴장감이 버스안에 들어있다. ▼
아직 빗줄기는 미약 하지만 그래도 진고개 의 밤공기가 싸늘하니 서둘러 플랜카드를 펼치고 늘 하여 익숙해진 출정 인증샷 을 찍는다. ▼
조금씩 굵어지는 빗방울 을 단단히 여민 우비 자락에 튀기며 노인봉 을 향해 진고개를 벗어난다. ▼
여느때 같이 시작할때 의 재잘 거림이 들리지 않았다. ▼
싸늘한 밤공기에 더해진 우빗자락 펄럭이게 만드는 바람과 늦 가을의 빗 방울이 개구리 동면으로 들어가 입을 닫아 버리듯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는 누가 시작을 하지도 않았고 그저 앞선자의 걸음을 따라 로봇같이 걷기만 한다.
누군가 찍어준 카메라 속에 나는 떨고있다. ▼
후두둑 후두득 빗줄기 나뭇잎 을 때리고 지나도록 만드는 바람이 찍사의 손도 떨리게 만들었나보다.
속전속결이다. ▼
후다닥 노인봉 정상석을 담고 되돌아 내려 노인봉 무인관리 대피소에 잠시 멈추고 모두가 다시한번 금줄통과 에 대한 작전을 논하고 잠시쉬며 본격 오늘의 하일라이트 노인봉에서 매봉 까지의 구간 돌파를 주의한다.
방장님 올 해 이곳을 통과한 후 자세한 감시센서 와 카메라 까지의 상세 설명을 몇 번에 걸쳐 지도를 펼치고 거리 시간 그리고 위치에 대한 대응 우회등등 을 숙지했다.
침투 ▼
그렇듯 우리는 금줄을 넘어 어둠보다 현대 기술이 만들어낸 감지센서 라는 과학에 겁먹고 걸어가고 있다.
첫 번째 는 200m ▼
방장님의 자세한 기록에 의지하여 150m 지점 부터는 서서히 그리고 자연이 아닌 인공 구조물을 찾았다.
이질감 이라는게 이런것이구나...!
그러 생각이 들만큼 백두대간 나무 숲속에 인공구조물 쇠 파이프는 초등학교 소풍날 보물찾기 보다 쉽게 발견하고 우회...
소황병산 으로 간다. ▼
첫 관문을 잘 통과한 우리는 아침이 올세라 부지런히 두 번째 목표점 소황병산 으로 헤드라이트 빛 줄기에 비추어지는 참나무 떡갈나무 잎들은 비를 머금어 반짝 거리며 수북히 쌓여 그 낙옆속이 불안 하지만 조심하며 빠르게 전진했다.
백두대간 을 하며 저런(불법.통제.초소)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
이번 구간 같은경우는 정말 소는되고 사람은 안되고 머 이렇게 표현 하는것이 맞는것같다.
울타리 너머 150m 좌측 이라는 지침에 주의하며 맨 앞머리에 희망새 대장님 앞장서 주시고 몇 번째 뒷편에서 따르며 헤드렌턴의 각도를 높여서 진행하다 바로 발견하여 좌측 나무숲으로 서슴없이 들어서니 우회로다.
나는 귀는 어둡고 눈은 밝은가 보다.!
일렬종대 대형으로 진행을 했기에 뒤 따르는 모두가 우회 하는것을 보고 알것이라 생각하고 두 번째도 잘 통과 하였으니 한참을가 세번재 그리고 네번째 까지 무사히 넘어가자 라고 생각하며 가는데 갑자기 무전기에 전해지는 내용이 뒷 편에서 센서에 감지 당했으니 가능한 빠른 속도로 매봉까지 돌파 하라는 내용이 전해진다.
어둠속을 빠르게 뛰듯이 내달렸다. ▼
가랑잎에 덮혀진 등로는 길인듯 아닌듯 하지만 개의치 않고 빠르게 빠르게 진행을 하다보니 앞머리에 3명이 되었고 무전기 에서는 삼삼오오 자연스레 진행하며 모두들 짧게나마 알바를 하고 본 궤도로 들어오고 하고있다.
그러다 보니 어둠이 가시고 목장 언저리 길을걷고 있다.
방수 카메라 를 가지고 왔다.
물속에서 찍을수도 있고 떨어 뜨려도 되는 그런데 화질은 영 꾸리 하지만 그래도 이런날에는 제격이라 배낭에 매달아 덜러덩 거리다 떼어서 찍으면 되는데 렌즈에 물방울 맺힌거나 습기가 차는것은 어쩔수 었다.
그저 2016년 10월 25일 백두대간 일정의 한 부분을 담아 내는것이 중요 하기에 좋은 화질은 아니라도 좋다. 라 하고 비올때 마다 가져 오지만 사진을 들여다 보면 이게뭐야 이따꾸로 나왔어 라고 하게된다....ㅋㅋ
몇 회차를 나오지 못하다가 이번회차 에 나온 해송님 흔들린 사진속의 비옷의 펄럭임이 이날의 바람의 세기를 나타내는것 같다. ▼
갑장 청학님 ▼
우리 18차 에서 등력향상 1위 인것 같으시다.
언제 부턴가 앞머리에 등장 하시더닌 이제는 최 선두에 늘 자리하신다.
파이팅~~!
비 그리고 바람 ▼
셧터가 눌려지는 순간에도 빗줄기가 렌즈에 스치는것이 그대로 보인다.
나는 하의 오버트라우저 를 입어서 덕분에 우비신 의 효과마저 좋아져서 물한방울 등산화에 들어가지 않는날 만들었다.
삼양축산 제2 축사단지 ▼
1970년대 에 개발되었습니다.
삼양식품 이 앞장선 주인공 이였으며 지금도 삼양의 블로그나 그런곳에는 즈그들의 업적만 위대 하다고 하고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 이 지시하여 춥고 배고프고 영양상태 안좋은 국민들에 우유좀 멱여볼까 해서 개발된 국책사업 같은것 이였고요.
개발에 투입된 인원은 "개척단" 이라고 하는 과거 감호원 제도같이 출소 후 바로 이곳으로 투입되어 개쳑의 역사를 만든 사람들이 있어고요
이들은 개발 후 대관령 면에 일부 정착하여 살았으며 70년대 국가에서 대관령 "축산고등학교" 라는 특목고 를 만들어 전국의 수재들을 불러 들여서 100%기숙사 에 졸업후 소 한마리 를 준다고 하였던...
3번 과 4번의 감시 구조물을 통과 ▼
3번째 센서로 된 곳은 날이 밝아서 멀리로 시선하여 진행하다 멀찌감치 발견 우회하며 뒤따라오는 동지들에 전파하고 마지막 4번째 는 언덕위에 이질감 높게 세워져 있어서 언덕을 오르기도 전 에 저것일수 있겠다 하고 진행하여 70m 접근 거리에서 대치 센서가 아닌 양방향 무인카메라 감시...
좌측의 잡목숲 을 살폈으나 우회로 가 없슴.
목장 초지를 우측으로 멀찌감치 돌아서 진행하니 목초로 뒤 덮혔지만 작업로 였던곳을 걸어서 가면 다시 괜찮한 작업로와 만나서 무사히 통과
매봉 ▼
노인봉 무인초소 앞 금줄을 지나 매봉까지 의 구간을 무사히 통과 하였습니다.
무슨 군대놀이 하는것같은 "도피 및 탈출" 재미있었습니다.
가장먼저 도피 및 탈출 에 성공한 첨병 청학(좌)님 과 해송(우)님
앞머리 무전병 칼산 ▼
우리에게 전망은 사치다▼
동해를 조망하는 동해 전망대는 지나는 대간꾼은 뼉따구만 보고 전망은 뿌연 안개에 양보하고 지났습니다.
곤신봉 ▼
축산초지 의 작업로 옆 에 초라하게 세찬 비바람 맞으며 대간꾼들의 포토존이 되어주는 곤신봉 표지석 에서...
이곳은 꼭 지역의 힘좀쓰는 사람들 한테 목장 작업로 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봉우리 복원하라 전하리라 마음 먹었다.
축축함 차가움 그리고 안개 ▼
목초지 구간은 방풍의 할 나무 한그루 없기에 20m ~ 40m 로 불어대는 바람에 섞여서 날아오는 빗 방울은 볼테기를 뚫어 버릴듯이 따갑게 싸대기를 쳐댔습니다.
마시면 취하는 바람▼
목장 잡업로 따라서 똑바로 걸어 가려는데 길 이쪽 저쪽으로 휘청 거리게 되는것은 대관령의 바람은 마시면 술같이 취하는가 했습니다.
♪ 저푸른 초원위에~~♬
♬ 구름같은 집을짖고~~♪
남진의 노랫말 처럼 이렇게 멋 진 선자령 구간을 걸었으며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것은 2014년 가을 촬영한 사진 입니다.)
선자령▼
대관령 부터 선자령 까지 겨울 주말이면 등로에 눈 쌓일쌔 없이 개미같이 줄지어 오르게끔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선자령에 도착 합니다.
선자령의 목초지 의 대간길은 물 도랑이 되었습니다. ▼
목초지 벌판같은 길 걷다가 가지 앙상하지만 그래도 숲 길이 좋네요...! ▼
(구)대관령 휴계소 에 도착 이번부터 는 컵라면 지급...
포트에 물담아 버스 전기에 꽂으니 1분도 안되어 전기가 끊어져서 통로에 앉아 행동식 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먹걸리 한병을 마시고 일어섰습니다.▼
추워서 영동고속도로 준공 기념탑(거북탑)으로 계단을 뛰어서 올랐습니다. ▼
준공탑이 세워지고 처음에는 탑 아랫부분에 검은 조약돌(오석)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들른 사람들이 까맣게 반짝이는 오석 조약돌을 하나씩 두개씩 주머니에 넣고 내려가서 몇년동안 보충을 하다가 분실량이 많아져서 없애 버린 오래전 일 기억을 합니다.
중학교때 횡계 에서 대관령 이곳까지 런닝을 와서 계단을 많이 뛰었습니다.
가끔은 작고 이쁜돌 한개씩 츄리닝에 넣고 뛰어내려 갔으니 저도 오석이 없어지게 한 그중에 한 명 이였습니다.
차량에서 행동식 으로 중식을 대신하고 거북탑 에서 능경봉 으로 향할때는 4명이 되어서 출발을 합니다.
여전히 비바람은 거세고 몸은 추우니 발걸음은 추위를 견디려 빠르게 옮겨 집니다. ▼
제가 중학교때 영동 고속도로 가 개통이 되었습니다.
개통식 행사를 준공기념비 가 있는 이곳에서 했었습니다.
계단 양 옆으로 전나무 나중에 심은 것이고 전부 잔디밭으로 되어 있었으며 지금같이 않고 개방감이 무척 시원 했습니다.
내려다 보며 좌측으로 2층은 외국같이 휴계 모텔이 있고 아래층은 휴계소 로 당시 무척이나 큰 휴계소 건물이 들어서 있었고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때 일가족 4명이 몰살당한 이승복 가족 유해가 운두령 아래서 대관령 횡계 도암중학교(현 대관령 중학교) 뒷 동산에 옮겨져 잠들어 있다가 영동 고속도로 개통당시 휴계소 건물 그 언덕위로 이승복 기념관이 그곳에 만들어져 있다가 지금은 운두령 아래 이승복 모교 옆으로 갔습니다.
이곳은 과거 영동고속도로 초창기에 명물(소)같은 곳으로 많은 사람들과 차량으로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관문으로 누구나 이곳에 기념같이 들러가던 곳 이기도 하였는데 그 시절의 영화가 사라진 휴계소 터에는 흉물같은 바람개비 만 덩그러니 삭막합니다.
영동고속도로 준공식 하는 날 저는 저기 아래 계단 어디쯤에서 검정 교복에 단추 잘 잠그고 단정하게 하고 나누어준 태극기를 양손에 들고 줄맞추어 서 있었습니다.
중학생, 그리고 지역 주민들로 계단 양 옆으로 나란히 태극기를 들고 도열해 있었습니다.
태극기 흔드는것도 연습하고 또 하고 그리고 한참을 기다리고 기다려서 있다가 검은 승용차 들이 줄줄이 계단 앞으로 척척 들어와 서고 환영객을 지휘하던 어떤 아저씨가 대통령 각하 도착 하셨습니다.
라는 큰 소리와 함께 두 손에 태극기를 대통령 일행 계단을 모두 오르 내릴때 까지 팔 아프게 흔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중학교 3한년때 꿀같은 휴일날 운동부를 동원하여 교장 선생님 지휘아래 상사 나무를 산에서 캐서 리어커에 싣고 흙먼지 날리는 신작로 길로 밀고 끌고 하며 이승복 기념관 앞에 기념 식수를 했었고요.
휴계소가 없어지고 이승복 기념관이 이사를 갔다고 하여 내가 심어놓은 상사나무 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보았더니 건물의 자리도 흔적없이 지워진것 같이 상사나무 도 흔적없이 사라져 있더군요.
이렇게 내고향 대관령의 기억들이 새록 떠 오르는 12회차 대간길을 걷고 있습니다. ▼
내 어린날의 회상(回想)
지금쯤이면 종을 이네 집 감자밭 기다란 둑길을 지나고 김 씨네 조상들 묘 앞을 지났어야할 시간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가서 진규 네 집 물레방앗간 앞개울의 돌다리 징검다리를 건넜어야할 시간인 것 같은데 나는 아직 우리 집 나무 울타리 주변만 서성거리며 몇 바퀴째 돌고 있다.
이러다 학교 늦을 것 같아 걱정이 되지만 아침 등굣길에 고집을 부리며 한참을 늦어지고 있는 것이다.
학교 늦어지는 불안함 마저 내 고집 보따리 속에 넣어서 투정을 부리며 나무 울타리만 서성서성 돌아가며 돈 줘……. 돈 안주면 학교 안 갈 거야…….
학교 안 갈 거야 는 엄마에게로 향하는 다분히 공갈 성 엄포가 들어있다.
또 무슨 빚쟁이 마냥……. 돈 줘…….
삐걱 부엌 나무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머님 고무신 벗어져라 달려 나오시며 한손에 부지깽이로 퍽~ 퍽~ 퍽~
억~ 소리 지를 틈 없이 연타로 엉덩이를 강타 당했다.
너무 억울하다.
엉~ 엉……. 목청 높여 울어댔다……. 아픔과 함께 맞은 분함을 목청껏 울어대는 수 뿐 없다.
“학교가지 말아라!
“가방 벗어 놓아라!
이제 학교가기 싫으니 학교 다니지 말고 매일 집에서 일이나 해라…….
이렇게 말씀 하시는 어머님 목소리가 아주 나직하게 깔려있다.
어머님 그 낮은 톤의 말씀에 더 이상 소리 높여 악쓰며 울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는지 그저 훌쩍이며 있었다.
어머니 는 이어서…….
양섭이 형이 학교가기 싫어하는 것 봤냐?
엄마에게 떼쓰는 것 한번 봤냐?……. 공부를 못하더냐?…….?
동생들 안 챙겨 주더냐?
그런 형한테 너는 같이 학교 다니면서 뭘 배웠냐?
쉼 없이 빠르게 말씀 하시고 한숨을 쉬시는 어머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금세 눈물이 되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머리에 매고 계시던 수건을 풀어 눈물을 훔치시며 어깨를 들썩이며 매우 슬퍼하시면서 부엌으로 돌아 들어가시면서 또 한마디 하신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냐 이놈아…….
난 모른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그것이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이놈아…….
우리 어머님이 나에게 이놈아……. 라고 했다는 것에 또 당황했다.
그러곤 돌아서 가시는 어머님 뒷모습에서 슬픔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어린 내 눈에 보였다.
(2011년 대난지도 일출)
어제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전과(참고서) 책장사가 왔다.
그 책장사 이야기를 들으니 그 전과만 가지고 있으면 저절로 공부가 잘되는 요술이고 보물 같은 책 같았다.
꼭 사야지 생각했다.
책 설명을 끝낸 책장사가 살 사람 손들어 보세요?…….
많은 반 친구들이 손을 들었다.
물론 나도 번쩍 들었다.
당시 초등학생 스스로 가 구매 결정을 할 수가 절대 없었을 시절 이었는데도 책장사의 책 설명에 모두가 사겠다는 의지를 굳게 심어주었으며 부모에게 졸라서라도 사야만 된다고 까지 설명에 들었었던 기억이 나네요!
가격이 지금은 생각나지 않지만 몇 백 원 잘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어린 제 생각에도 아휴 비싸네!…….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님께 이야기 하여 살수가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어머님은 제가 요구하는 것은 거의 다 들어 주신 것 같습니다.
학교와 관련된 것 은 전부였던 것 같고요.
해서 좋은 요술책 같은 전과(참고서)를 사서 공부를 잘하게 된다면 바로 사라고 하시면서 돈을 주실 것 같기에 아침 먹고 학교가방 메고 나오면서 문 열고 나와 뜨럭에서 마당으로 내려 서기전에 엄마나 돈 줘..... 했습니다.
아마 어머님이 이유를 물으셨겠지요!…….
그리고 저는 대충 어설프게 전과 책 이야기를 했을 테고요…….
중요한 돈... 책 가격이 나왔을 테고…….
갑작스레…….
노트나 연필도 아니고 전과책…….
안사면 안 되겠나…….?
꼭 사야 된다.
지금은 엄마가 돈이 없구나 그러니 낼 사거라...
아니 오늘 안사면 낼은 없어서 못 사요……. 하니 지금 당장 돈 주세요…….
낼 사도 될 거다 엄마가 돈 지금 없으니 낼 아침에 줄 테니 낼 사고 오늘은 그냥가거라.…….
안돼요……. 오늘 꼭 사야 돼요…….
이렇게 아침 등굣길에 어머니와 실랑이가 붙었습니다.
뜨럭에서 타협이 되지 않고 어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가시고 나는 나무 울타리 주변으로 빙글 빙글 돌면서 징징 거리며 돈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2014년 월출산)
뛰었습니다.
학교까지 오리가 넘는 논두렁 밭두렁 길을 한달음에 달렸습니다.
달리면서 어머님 오늘 아침에 왜…….?
왜…….?
왜…….? 그러실까…….?
온통 머릿속에 물음표를 가득 채우면서 달렸습니다.
오늘은 지각이라도 하면 왠지 큰일날것 같았습니다.
내 어린 시절의 어느 날 아침 빠른 시간에 뒤죽박죽 혼란스러웠던 일이 머리가 희끗희끗해 진 오늘까지도 늘 문득 문득 생각나곤 합니다.
어머님은 10명의 자식을 낳으셨습니다.
6.25 전 3남매가 있었는데 전 얼굴도 뵌 적이 없는 큰 형님들 두 분은 6.25 사변 통에 피난길에 먹이지도 또 병들어서 어떻게 손써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보냈다고 합니다.
당시 막내였던 누님이 지금 큰 누님이 되시어 생존하시고요.
자신이 낳은 자식 10명 중 5명을 자신보다 먼저 떠나보낸 우리 어머님 가슴이 오죽 하겠습니까?
옛날에 우리나라 못 살적에 영아사망을 이야기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영아라고 하기에는 억울한 기어 다닐 때 떠나보낸 자식이 없고 다 제 발로 걸어 다니다가 떠나 보내셨으니 더 정 들어서 인지 가슴이 아프셔하며 에미가 무지해서 라고 가끔 독백같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 지금도 가슴이 시립니다.
어머님은 그렇게 다섯 명의 자식을 거적에 싸서 봉분의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애총으로 보낸 한을 가슴 져며 놓으시고 한평생을 사셨습니다.
(2014년 강릉 심곡항 일출)
초등학교 2학년 봄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하교하는 시간에 5학년 이던 형(어머님이 말씀하신 양섭이 형)하고 같이 학교에서 터덜거리며 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봄 아지랑이가 아른아른 피어나던 때 인데 튼튼하고 싸움도 무지 잘하여서 또 어머니 말씀처럼 지금 생각해봐도 동생들을 얼마나 잘 챙겼던지 형덕을 톡톡히 보고 학교에서 왕자처럼 다녔습니다.
그런 나의 든든한 빽 이었던 형이 그 날 하굣길에 내 가방도 안 들어 주고 힘없어 하며 걷는 것도 힘들어 합니다.
집에 오는 길 반 정도 왔는데……. 자꾸 길가에 주저앉습니다.
어지럽다 하며 토하려고도 하고요…….
그런 형을 나는 자꾸 손을 잡고 당겼습니다.
빨리 가자고요…….
그러고 형의 가방을 제가 받아서 들었습니다.
형은 비 온다고 눈 온다고 길 미끄럽다고 제 가방 참 많이 들어주었는데요!
저는 그때 형이 아프다 하여 처음으로 형의 가방을 들어주었습니다.
한참을 걷다 집에 거의 다 와서 굵은 소나무 베어낸 자리 나무 그루터기에 주저앉은 형이 쪼그리고 앉아 무릎 사이로 머리를 묻다시피 하여 요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형 빨리 가자…….!
집에 다 왔단 말이야…….
저기 집이 내려다보이잖아…….
힘없어 못 가겠어…….
그럼 나 혼자 갈 거야....
그런데…….
형이…….
그래 먼저가……. 라고 합니다.
먼저가……. ?
그냥 무서웠습니다.
그때 제겐 먼저 가라는 형의 힘없는 말이 참 무서웠습니다.
튼튼하고 씩씩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천하무적 형이.…….
나무 자른 그루터기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머리를 깊숙이 처박고 힘 하나 없어 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먼저가…….!
라고 하는 형의 갑작스레 형답지 않은 달라진 형의 모습과 힘없는 말투에 덜컥 겁이 났습니다.
형 가방과 내 가방을 양손에 들고 집까지 달렸습니다.
엄마…….엄마…….
양섭이 형이……. 형이……. 저기……. 저 산 소나무 베어낸 자리에 앉아서 힘들어 못 온대....
정지 밖에서 일하시던 어머님이 놀래셨습니다.
하얀 고무신 벗겨져라 헐레벌떡 달려 가셨습니다.
자식들이 아프다면 어머님 경끼를 하십니다.
하도 많이 자식을 가슴에 차곡차곡 묻으셨으니 그랬을 겁니다.
형은 그날 어머니 등에 축 쳐진 채 업혀서 집으로 왔습니다.
(2012년 삼척 장호)
집 주변의 논들이 물속에 파릇파릇 하게 모내기 가 거의 끝날 무렵 였던것 같습니다.
따스한 오후의 어느 날…….
저와 학교도 다니지 않는 동생을 작은 도장방에 가 있으라. 합니다.
그리고 문도열지 말고 공부하고 있으라고 합니다.
절대 문을 열면 안 되고 문 열면 혼낼 거라 합니다.
무슨 일……. 궁금하지만……. 이불 깔아 놓고 동생이랑 낄낄낄 장난질 치며 놀았습니다.
좀 심하게 장난을 쳐도 그리고 한참을 지났는데도…….
누구도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문득 집이 적막하다 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왜…….?
문을 열지 말라고 했지…….?
다시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안에 아무 기척이 나지 않아서 약간 무섭기 까지 하였습니다.
도장방 문을 살짝 열고... 뒷방으로 나와 안방 문을 살짝 열어 빼꼼 보아도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 아버지 윗방을 살짝 들여다보아도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궁금함 과 그보다 도 집에 동생과 나 뿐 아무도 없다는 무서움이 더했습니다.
문 열지 말라고 했는데……. 혼난다고 했기에 덜커덩 문 열지 못하고 배꼼 열어보았습니다.
우리 집 마당을 지나 앞 텃밭을 지나면 실개천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쭉 이어진 꽤 넓은 논둑길로 아버지는 지게에다 뭔가를 지고 앞장서 가시고 어머님과 누님과 형이 뒤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저 앞산 밭에 가는 걸까.?
우리 밭과 산이 논둑길 건너 있는 산에 나무와 좀 평평한 곳은 밭이고 하였습니다.
밭에 가는데…….
다른 때처럼 일하러 가는 것 같아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술 취한 사람처럼 몇 발자국 휘청거리시다 논둑에 주저앉으면 형과 누나가 부축하여 다시 일어서고 그럴 때 아버님은 지게를 지신 채 가끔 우두커니 서 계시다가 발걸음을 떼시곤 했습니다.
(2011년 대난지도)
친구들이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여러분의 친구 인섭이 가 26일 동안 아파서 학교를 못 나왔다가 아픈 병마와 싸워 이기고 건강하게 여러분과 이제 함께 공부하고 뛰놀 수 있으니 축하해 주고 더욱 친하게 지내라 하시면서 친구들에게 박수를 치게 하셨고 또 쳐 주셨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논두렁 밭두렁 산길로 이어지던 학교 다니는 길에 아침이면 마을 아이들이 자연스레 모여져 한 줄이 되어 다닙니다.
이슬이 내린 아침 길옆에 들풀이 젖어 등굣길 아이들의 바짓가랑이도 운동화도 적시고 고무신 젖어 미끄러워 찔쩍찔쩍 미끄러져 벗겨지고 합니다.
뒤에서 가면 덜 젖어 드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맨 앞장에 서게 되어 이슬을 온통 내 바짓가랑이로 털어내며 가게 됩니다.
(아마 이 경험이 훗 날 이된 우리 18차 대간팀에 이슬제거를 담당하게 된건지 모릅니다...ㅎㅎ)
어느 날 너 형 양섭이 죽었지…….
고학년 형 누군가 말했습니다.
뭐…….
아니……. 우리 양섭이 형 미국에 갔어.…….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매일아침 이슬을 털어내며 앞장서 걸어가고 있지만 우리 양섭이 형 미국에서 돌아오면 나는 다 일러줄 테고 너희들은 혼쭐이 날거다.
그리고 나는 맨 뒷줄에서 어슬렁거리며 다닐 거다.
이런 생각에 지금은 곁에 없는 학교 권력자 형의 귀환을 막연히 기대하고 이슬받이 앞장섬의 고역을 와신상담 하며 걸었습니다.
그 무렵 가끔 동네 아이들 고학년 형들이 모여 있으면 쑤군대다 내가가면 아무 일 없단 듯이 뚝 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그 쑤군거림을 들었습니다.
양섭이가 죽었대!…….
저기 앞산 중동골 어디에다 묻었다고 하더라.…….
중동골 연못에 이제 방개 잡으러도 못 가겠다……. 무서워서…….
이런 쑤군거림을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아니 다고 반론도 대들지도 못하고 슬그머니 그 무리를 외면했습니다.
그러면서 양섭이 형이 죽었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양섭이 형이 미국으로 병 치료를 갔고 또 거기서 완치하고 공부도 미국에서 할 것이라 했는데…….
당시 미국은 동경의 나라이고 다 되는 나라인줄 알던 시절이다.
(2012년 영목항 좌대)
동네 분위기와 어른들의 이야기와 아이들의 입방아에 누구 집에 누가 죽었고 누구 집에 누가 .... 그리고 우리집에는 나의 형 양섭이가 죽었다…….
흉흉하고 가슴 아픈 소문이 아닌 사실이 조심스레 그리고 빠르게 퍼졌고 우리 집은 나와 동생에게 양섭이형 죽은 사실을 미국의 시나리오로 은폐했다.
아마 충격을 덜하게 그리고 자연스레 알아지게 하려는 의도였었는지는 모른다.
그렇게 하굣길 가방 한번 들어주고 그루터기에 앉아서 아파서 힘없어 하며 먼저가…….
라고 하던 형이 나하고 학교생활의 마지막 날 이였고 인간 세상에서 형제로서 짧은 인연을 하고 몇 해 살아 보지도 못하고 형은 세상을 떠났다.
집밖으로 내다보지 말고 문도 열면 안 된다고 하던 그날…….
빼꼼하게 문 열고 내다본 그 광경 논둑길로 아버지 지게를 지시고 어머니 휘청 거리시며 뒤 따르던 그날이…….
형의 주검을 아버지 지게에 지시고 그렇게 가다가 서다가 하셨다는 것을 짐작하여 알았다.
(2014년 일본 자오 스키장)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문득문득 학교를 가지 않고 나무 울타리를 빙글빙글 돌며 돈 달라고 조르던 그 일이 생각나곤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어머니께 호되게 맞았던 기억과 한없이 슬픈 어머님의 뒷모습의 그날이 또렷하게 메모리 되었다.
그리고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냐 이놈아 ” 라고 하신 그때 말씀이
훗날 그날이 무슨 날 이였었던지 알아냈습니다.
퍼즐 끼워 맞추기라면 어른이 된 지금은 너무 쉽지만…….
그때는 어려웠고 알 생각도 않았었는데……. 점차 커가며 알아채고 말았습니다.
그날이…….
어머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냐 이놈아” 라고 화내시며 하셨던 그날이…….
양섭이 형 죽은 날 아버지 지게에 지고 어머님 뒤 따라 가시고 그리고 어머님 가슴에 영원히 형을 묻어두신 날 이란걸 알았습니다.
내 어른이 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어느 좋은날 어머님한테 이제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그 슬픔도 옛 이야기로 할 수 있을 적에 내 어머님께 그 옛날에 “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냐 이놈아” 했던 이야기를 하며 그 날이 무슨 날 였는 줄 알아냈다고 말씀 드리고 꼭 죄송하다는 죄송했다는 말씀을 드릴 거라 생각했었지요!…….
어머님과 같이 살지를 않아 가끔 뵈러 갈 때면 그저 반가워하시기에 그 옛날 40여 년 전 어머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추면 잠깐 자식과 손자들과 즐거워야 할 시간이 헝클어 질까봐 나 혼자 어머님 아주 기분 좋은 날 단 둘이서 일 때에 수십 년 지난 잘못을 사과 드려야지 했는데...
어머님은 다시 가슴 아플 제 이야기를 듣기 싫으셨었나 봅니다.
몇해 전 이맘때 갑자기 훌쩍 떠나셨습니다.
“어머님 그때 정말 죄송했습니다!
라고 사과를 드리고 싶었는데……. 이제 다시 다음 세상의 훗날을 기약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어머님 그때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럴수만 있다면 저 세상에서 다시한번 꼭 어머님 아들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능경봉 에 오른 우리를 기념합니다. ▼
횡계치(샘처) 방향으로 가다가 강릉 왕산골 방면의 멋 진 연기같이 피어 오르는 구름의 향연을 나무가지 사이로 만났습니다. ▼
고루포기 산 전에 만나게 되는 전망대 ▼
이곳에 처음 올라 보지만 전망대에 서 보이는것은 하늘인지 땅인지를 구분할수 초차 없는 안개만 가득입니다.
아마 날 이좋으면 멀리는 발왕산 그 아래 용평 가까이는 도암호 내가 태어난 곳 마을 의 앞 높은산 "칼산" 도 보여질텐데... 아쉬웠습니다.
고루포기 산 ▼
고루포기 정상 남쪽으로 고루포기 와 건너편은 안반덕 은 씨감자 와 고냉지 배추 재배단지 입니다.
그래도 이곳은 태백 그리고 삼척 하장면 같이 백두대간 을 파헤쳐서 농토로 바꾸지는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거칠게 바람에 실려 날라오던 빗줄기가 가늘져 오르막에 더워 우의를 풀어 헤치고 나 고루포기 에 왔노라... ▼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안개가 스며들어 스산한 겨울이 오는 길목의 대간길 이 을쓰년 스럽습니다. ▼
오늘의 모델은 단 두 명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서 좋았습니다. ▼
왕산 제 1쉼터 ▼
중식에 떡 몇조각 은 이곳까지 오니 허기가 느껴집니다.
마침 나무 의자가 있어 주저앉아 남은 떡 몇 점씩 입에넣고 우물 거리고는 다시 닭목령 으로 떠났습니다.
농로 포장길 도 만나고 흙길도 만나며 오늘의 대간길이 끝나고 있음이 느껴집니다. ▼
닭목령 도착 ▼
앞장서 부지런히 걸어주신 해송님 닭목령 도착 인증.
어릴적 이야기가 가득한 내고향 대관령 구간 을 마치게 되어 시원하고 아쉽고 그런 날 이였습니다.
1960년대 말 우리나라 영동 지역에 장티푸스가 창궐했었다.
수인성 전염병 이다.
우리 동네 보다 심한 곳은 여름까지 학교를 휴교하고 환자들 임시수용을 하며 전염 확산을 막고자 애썼던 아픈 일들이 있다.
지금 같으면 장티푸스 는 병도 아닐 것이다.
영양제 주사만 맞아도 거뜬히 일어날 좋은 시절에 산다.
링거를 놓아줄 인력도 약품도 없어……. 나도 아픈 날에 그 역겨운 링거 수액을 종지에 따라 마셨던 기억이 있다.
이 얼마나 슬픈 우리의 지난날들인가 ……. 생각된다.
첫댓글 열심히 기다리던 영화 한편을 보는듯 했어요
생기 넘치는 글솜씨가 궁금해 기다리고,
낯선이가 공감을 하게 하는 친근한 이웃으로
다가오고, 마음이 짠~해지는 감동의 눈물까지...
멋지십니다
이번 구간은 시작부터 골인까지 참 기억과 인연이 많은 곳이기에 여러 생각을 하며 걸었습니다.
좋게 봐주시어 감사하구요.
이번 구간에 마지막 불같은 투혼에 감명 받았습니다.
1구간에서 힘빼고 바로 식사만 하고가다
이기령까지 무지힘든 산행을 했던 아픈기억이었어요
숨고르기하고 식사 든든히 먹고 출발해서 작전이 통했지요 ㅎㅎ
앗! 정신차려보니 단편소설 아니고... 산행기였네요 ㅎ.
그래서 가을은 남자... 아니 칼산의 계절이라 하는군요~^^
너무 길게 늘어져서 보는 분들이 식상한 산행 스케치가 된 것 같습니다...ㅎㅎ
늘 18차에 많은 도움에 감사하구요...
긴 장문의 산행기가
저는 더~ 마음에 와 닿아요
참 좋습니다~~ ㅎㅎ
수고하셨습니다
대단하시네요
멋찌시네요
홧팅
다들 무언가 조금씩 이루어 진다는데 힘을내게 되는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도 절반을 훨씬 넘겨서 더 힘내볼겁니다.
관심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매일 행복한날 이어가세요...^*^
고향이 대관령이라 아련한 옛추억이 많이 생각 나셨나 봅니다.
이무리 좋은 명산이라도 태어나고 자란 고향집 뒷산보다 좋을리는 없겠죠
대관령 소똥 지킴이들의 단속 카메라 재미나게 뚫고 지나시니 어릴적
소꼽놀이 하던 때도 생각나고....장문의 글 잘보고 갑니다.
방장님 의 이번구간 돌파 상세 내용을 몇 번이고 읽고 파악을 하였습니다.
역시 알고 예감하고 간다는것은 행복인것 같습니다.
다만 선답 하신분들의 노력과 경험이 뒤 따르는 초보들 에게는 절대 정보의 힘을 절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릴적의 추억이 가득한 길 비 바람속에 우리 18차의 또 한구간 걸음 행복했습니다.
선두에 걷게되면 어린시절 얘기를 들려주신다고 하셔서, 또 요번엔 선두에 끼고 싶어
선두줄에 끼이는가 싶었는데...
첫 감시카메라 지나고
급경사 내림길에 줄 잘선 덕인지 아닌지
선두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만 보았지요.
불빛마저 이내 사라지니
따라갈 엄두를 못내는,
따라붙기엔 아직 모자란 체력이지만
형편따라 걸음하면 되는 것이라...
상황이 이러면 이런대로 저러면 져런대로
안산, 즐산이 궁극 목표라 괜찮았고~
칼산대장님 후기글로 알게되니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시가 떠오르고...
저의 아침이 시와 함께 시작이네용... ㅎ
애쓰신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다영님.... 몇 시간전에 장시간 운전하여 삽당령 구간을 땜방 하시고 다시 진고개에서 합류하여 내달리시는 그런것은 쉽게 엄두내질 못할것 같은...
정말 그런것을 하시면서 체력을 걸음을 운운 하시면 부끄러워 집니다.
집념같은 투지같은 걸음에 늘 감탄하고 있답니다.
멀리 다니시는 다영님과 우리 18차 울산팀에 안전운전 과 무탈산행을 기도합니다.
우리 갑장 다영님 오늘도 행복 하세요...^*^
전 땜빵 안 했습니다.
어신님이랑 수림이님이 땜빵 하시고
전 수림이님 차를 끌고 임계로 가서 24시 편의점 앞에 주차하고 대기하다가
하산에 맞춰 삽당령으로 갔습니다.
삽당령에서 기다리기엔
넘 무서버서 환한 편의점 앞에서 시간 보냈답니다...ㅎ
오랜만에 함께한 걸음 좋았습니다
비우니 채워진다는것 조금은 느껴본 하루였네요 한가지 아쉬운거라곤 천하일미 만두국집 맛을....언젠가 꼭 데려가 주세요 ㅎ
전화가 안되어서 아주 아쉽게 된 만두국 였습니다...ㅎㅎ
오랫만에 함께하여 아주 좋았고요...
해서 제 걸음도 다시 빨라진거 같네요....
건강한 걸음 다음차도 기대합니다.
아주 오래된 기억을 되살려 과거로 돌아갔다 온 느낌입니다.
아픈 기억, 잊고픈 기억은 오래오래 남아있더군요.
어릴적 형의 주검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있는 것은 아마도 충격이 컸기 때문이겠지요.
고생하셨습니다.
제 어릴적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여서 아마 제가 이 세상에 있는한 잊을수 없는 각인된 기억이고 추억입니다.
어머님 과 도 많은 연개되어 추억되니 되돌리면 늘 가슴한켠 서늘하고 서운한 추억이고요...
어릴적 추억이 가득한 구간 비바람을 속에 잘 걸었습니다.
늘 관심과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즐거운 날 되시기를 원합니다.
지난해 가을..저도 어릴적 뛰놀던 곳을 무작정 다녀온적이 있습니다.
그린벨트지역이라 서울이여도 과수원과 논과 밭이 있던 곳이였는데 지금은 개발되어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서버린 곳으로 변한곳. 그래도 그시절의 향수가 뭉클하게 심장을 울렸습니다.
이번구간, 대관령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누리지는 못했지만 휘청거림의 강풍도...고향의 기억도...잊지못할 길이였을듯 합니다
게으르심을 극복하고 (ㅋ)빨리 올려주신 산행기 잘 읽었습니당~~^^
인간은 자신은 변하면서 우리의 기억속에 모든것은 좋은대로 그래도 이기를 바라는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변함에 서운해 하기도 하고요....
바람 솔솔불고 하늘 푸르고 높고 구름 조금 두둥실 하고 동해의 푸른 바다가 내려 보이는 길 이였으면 좋으련만....
대관령의 두 얼굴 비바람 의 매서움만 보여줘서 내 고향길 이 미안합니다.
다음차에는 맑고밝은 행복한 날 걸음 되기를 바랍니다.
가장 쉬운 구간일 수 있는 구간에서
강풍에 차디찬 비라는 복병을 만난 대간길ㅠ
산행중 양말은 갈아 싣은 적은 있지만
젖은 옷이 추워서 갈아 입은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쉬운길일 수 있는 구간인데
중간팀에서 감시 카메라가 작동되나 접근햇다 카메라 정상작동!
황병산 하산부터 빠르게 진행하다
여즉 12구간중 가장 많은 대원들이
가장 많이 알바를 하면서 중간이 후미로
후미가 중간으로 뒤죽박죽 술래잡기하는
상황도 연출이 됐지요
어릴적 추억은 아픔이던 즐거움이던
누구의 기억속이던 아련히 기억속에
자리잡고 있는듯 싶네요.
어릴적 회상이 현실이 아닌
하나의 소설이었으면
하는 생가기 들정도로 양섭이형이 아픔으로ㅡ뭉클합니다
아주 강하고 날리게 하는 대관령의 진 면목을 보여주는 하루였던 것 같습니다.
겨울이면 눈보라 로 앞을 분간하지 못하는 날도 많은데...
맑은날이 그리많지 않은것 같습니다.
이번에 그룹별로 알바를 다 하는것은 처음인듯 합니다.
센서감지 로 분간 안되는 낙옆길 빠른 속도가 그렇게 만들었나 봅니다.
어릴적 가장 충격적인 추억 이기에 영원히 기억될 나름 가슴아픈 추억을 해 보았습니다.
18차 팀은 정말 비랑 너무 친하네요~~
고생들 하셨구요~~
멋진글 잘 읽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부족 하지만 우리 18차 이제는 오합 지졸의 느낌에서 제법 깡다구 있는 팀으로 변모하여 온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등력이 되는 고수로 팀 되어 달리지는 못했지만 평민을 군인으로 만드는 사관학교 같은 18차 인듯합니다.
관심에 감사 드립니다.
행복한 날 오늘 되세요.....^*^
수고 하셨습니다.
우중 산행 춥고..
춥고 떨리고 해서 빠르게 안추우려 열심히 발걸음 했습니다.
대관령 의 칼바람이 어떤 것인지 많은 동료들이 또 하나의 경험이 되었던것 같습니다.
감합니다.
어릴적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네요.
고향을 지나면 문득 어릴적 생각이 많이 나는것 같아요.
부모남의 사랑 끝이 없지만 살아 계실때 잘 해드려야 한다고 하지만
늘상 후회하는것 같아요.
우중의 고향길 수고 많았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내가 보모되고 늙어지면서 더 짖게 깊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부모님 한 세상에 계시질 않으니 후회는 산같이 높아지는것 같습니다.
내 고향 대관령 길 훗 날 이길을 다시 복기하며 걸어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맹그세요.....^*^
고향의 산길을 어른이 되어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걸으셨을~~~~
그걸음이 왠지 편안하게 느껴지지가 안네요...
저도 후기를 읽으며 어린시절을
회상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다시 진고개에 내리면서 뭉클하게 다가오는...
그리고 선자령을 지나고 대관령 옛 휴계소 위 영동고속도로 준공탑 에 오르니 어렸을적 기억들이 계단마다 매달려 있다는것을 알았습니다.
기억되는 옛 추억에 취해서 걸었던 길 였습니다.
늘 관심에 좋고요...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시간들로 매일 매일 되세요.....^*^
대관령 바람을 믿지 않았던 분들은
개고생 하셨겠는데요??
출발전 에 대관령 비 바람 주위를 하였지만 설마~~!
하신 분들이 이번에는 태풍같이 몸을 가누기 힘들게 하는 바람과 그 바람에 실려 모래알 같이 아프게 때려치는 빗 방울과 싸늘한 공기에 떨어지는 체온에 아주 당혹한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것도 좋은 경험이 된 것 같습니다.
네 맞아요~~
더큰 산꾼이되기 위한 좋은 경험이었으리라 봅니다
비바람 속에 대간길 수고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선두에서 함께 걸은 해송님이 있어
덜 적적했을듯 합니다.
고향길 걸으시면서 많은 상념에 빠지셨나 봅니다.
그러한 회상이 때론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요....
다음 구간에서는 함께 걸어봅시다.
해송, 청학님과 셋이서 알바없이 앞에서 진행하였습니다.
비 바람에 추위를 느꼈지만 대신 부지런히 걸었던것 같습니다.
잠깐의 차이지만 앞 과 뒤 는 날씨의 차이도 많이 느껴지는 날 내고향 대관령의 겨울로 가는 가을앓이를 보는듯 했구요.
추억이 가득한 길 많은 생각이 났었습니다.
대간팀 어느분들이나 노인봉에서 매봉구간은 어렵게 지나지만 또 다른 추억으로 기억될거 같습니다
정성들여 작성하신 장문의 산행기 즐감하고 갑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 18차는 비바람과 동행하여 구간이 더욱 기억남을 것 같습니다.
귀한 경험도 했으니 남은구간 열심히 걷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