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느 순간 기도를 해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기도하기를 주저하거나 게을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 중 사소한 것은 잘 들어주시는 반면 심각한 상황, 예를 들어 암을 포함해 불치병을 고쳐달라는 기도는 잘 들어주지 않는다. 혹시 하나님도 그런 기도는 들어주기 어려워서 난감해 하시거나, 혹은 못 들어 주시는 것은 아닐까? 간혹 그런 기도 응답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 또는 타종교인들에게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던가.
기도한다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항상 응답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기도하지 않는다고 회복될 사람이 회복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도한다. 왜 기도하는 것일까? 물론 어떤 이는 기도에 대한 거절(No), 또는 지연(Wait)도 기도 응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결국 기도가 복불복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다시 돌아가서, 그런데도 우리는 왜 기도하는 것일까?
결국 기도는 고통 당하는 사람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engagement)이다. 아픈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곧 어머니의 아픔에 참여하는 것이다. 교인의 어머니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면서 어머니의 아픔에 힘겨워 하는 교인의 마음을 공감(empathy)하게 된다.
‘공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대표적으로 sympathy와 empathy가 있다. 한겨레 뉴스레터 10월 20일 자에는 이 두 단어의 차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타인의 감정과 상태에 공감하며 마음이 동기화되는 ‘심퍼시’(sympathy)와 달리 엠퍼시는 내가 상대라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는 이성적 작업이자 지적 상상력이라고, 미카코는 말합니다. 본성에 달려 있는 심퍼시와 달리, 엠퍼시는 ‘타인의 신발 신어보기’라는 ‘교육’으로 길러질 수 있다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저는 작은 희망을 느꼈더랬습니다.”
브래디 미카코는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sympathy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선천적으로 타고난 정서인 반면, empathy는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노력, 즉 교육으로 형성되는 후천적 정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기도는 sympathy가 아니라 empathy라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지 않을지라도, 기도 행위를 통해 고통 받는 사람의 아픔에 참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저자브래디 미카코출판은행나무발매2022.03.18.
절박한 상황에서 기도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때는 100% 확신을 가지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 그 순간에는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나아가 그의 능력과 존재 자체를 의심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도 기도하고 있다. 지금도 그 분을 향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기억력이 나빠서일까? 여전히 미련이 남아서일까?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도가 이루어질지 알 수 없고,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99%라 할지라도, 기도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고통 당하는 자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engagement)하고자 함이며, 따라서 나는 오늘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