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카른 모로(Chocarne-Moreau), 〈빵집 소년과 굴뚝 청소부〉, 19세기말, 38.5×48cm, 디종미술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7-28). 하나님은 땅을 정복하고, 땅을 통치하라고 인간을 창조하셨다. 동산에서 사람 아담의 노동은 땅에 대한 통치 행위였다. 그것은 사람 아담이 마치 하나님인양,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맡은 역할이었다. 에덴에서의 노동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에게만 허락된 신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에덴의 동쪽’ 현실 세계에서 노동은 땅에 대한 통치 행위가 아니라,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싸워야 하는 노역으로 변질된다(창 3:18). 노동은 노예의 노역으로, 지겨운 밥벌이로 전락했다.
‘에덴의 동쪽’에서는 열심히 일해도, 충분히 먹을 수 없었고 벌지 못했다. 어린이도 땅을 일구고 돈을 벌기 위해 노역에 동원되었지만, 가난했고 배고팠다. 유럽에서도 20세기 전반까지 아동 노동이 흔했다. 산업 혁명 시기에 어른의 손이 닿지 않는 방직 기계 틈새에 들어가 기름칠을 하거나, 어른이 들어가기엔 너무 좁은 갱도에서 어린이들이 일했다. 좁은 굴뚝을 청소하는 일 역시 아직 신체가 완전히 발육되지 않은 소년들의 몫이었다.
풍속화가 쇼카른 모로(Chocarne-Moreau, 1855-1931)의 그림 속에는 아동 노동자 둘이 웃는다. 작업복을 입은 새까만 아이가 시계탑과 마차가 다니는 번화가를 등지고 앉아서 웃는다. 헐렁한 조리복 소매를 여러 겹 접어 입은 아이가 김이 나는 빨간 냄비를 들고 웃는다. 어린 요리사 친구가 어린이 굴뚝 청소부를 위해 차린 밥상엔 식탁보도 접시도 포크도 없지만, 둘의 웃음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굴뚝 청소부는 김이 나는 냄비에서 집어 든 갑각류를 껍질째 손으로 먹는다. 순간 광고 카피가 떠오른다. “니들이 새우 맛을 알아?” 굴뚝 노동이 끝나고 껍질째 먹는 새우 맛을 아느냐고 웃지 싶다.
아동 노동자가 2억 명이 넘는다. 인도 유리 공장, 베트남 커피 농장, 콜럼비아 탄광에서는 여전히 많은 어린이가 노역한다. 토마스 기차와 바비 인형이 중국의 중고생들 손으로 제작된다. 나이키 축구공의 실밥도 어린이들이 꿰맨다. 공장과 탄광의 어느 한쪽에도 쇼카른 모로가 관심 둘만한 웃음의 시간이 있을까.
어린 굴뚝 청소부와 요리사는 서로를 위해 노동한다. “작은 자”가 “작은 자”의 노동 현장을 청소해 주고, “작은 자”가 “작은 자”를 먹인다(마 25:40). 아동 노동을 요구하는 땅은 분명 저주받은 것임에 틀림없는데, 저주받은 땅에서도 서로에게 복을 끼치는 아동 노동자 둘이 정겹다.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다(마 19:14). 어린 웃음은 마차 다니고 시계탑 서 있는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첫댓글 교회가 작은자의 벗이 되어 주길...
어린 웃음이 이땅에 충만하게 자리 잡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