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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하늘 몇 평☆]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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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몇 평]
조재형 시집 / 도서출판 한티재(2016.11.21)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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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몇 평
조재형
부지런한 농부들은
가을걷이가 끝나기 무섭게
내년 봄 농사를 계획한다는데
늦가을 들판에 서서 시린 하늘 쳐다보니
저렇게 맑은 땅을 얼마쯤 사두었다가
서러운 날 눈물이라도 뿌려 가꾸고 싶어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서 있는 마을 쪽으로
하늘 스무 평 남짓 장만했다
저녁이 올 때는
노을 지는 강가 갈대숲으로 가서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을 더 사들이겠다.
작은 집을 한 채 짓고 정원도 가꾸게 된다면
한 쉰 평쯤이면 충분하겠지
남들처럼 부지런하지도 못하니
쓸데없는 욕심이 될지 모르겠으나
빈 하늘 몇 평 장만하는 것이
투기를 부추기는 일은 아닐 테니까
탑리 오층석탑
조재형
의성 탑리 마을에 가면
자태 고운 신라 여인 한 분이
오랫동안 살림 한 번 옮기지 않고
아직도 살고 있는데요
탑리성당 지붕의
뾰족탑 위에 십자가도 지그시
그녀의 고운 자태를
부러운 듯 내려다보고 있는데요
나는 이웃한 여학교의 선생이 되어
어여쁜 아이들한테 수업시간마다
저 창밖에 선 여인만큼만 진득하게 자라 달라고
자꾸만 얘기하구 싶어지지요
애들이 잘 알아들을지는 모르지만요
징게미*
조재형
제 몸 하나 제대로 건사 못하고 병원 신세나 지고 있는 자식 허리 굽은 어머니는 병수발을 내 손으로 하겠노라고 밤낮을 홀로 지켰다 별실 보조 침대에서 삭정이같이 마르고 굽은 몸으로 쪽잠을 자며 찔레꽃이 한창일 때 하필 내 생일이 끼어 있던 달포간 나를 온몸으로 기억하며 심장은 무거웠을 것이다 수술한 내 허리뼈에는 그때 스며든 꽃향기가 무슨 마취약 냄새 같이 배어 있고 지금도 가끔 통증이 찾아오면 버릇처럼 모로 누워 자꾸만 몸을 웅크리고
*민물새우 징거미의 사투리
수화
조재형
황성공원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청각장애 지닌 부부 노점장사 꾸려가고 있다
손님 뜸할 때면 두 사람
쉬지 않고 수화手話로 대화 나눈다
손으로 그려내는 암호 같은 이야기
가끔 지나며 짐작하건대
계절 따라 메뉴를 바꾸면 수입이 좀 나아질까 혹은
늦게 낳아 키우는 아이 걱정
그들 삶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부부의 대화 하루도 빠짐없이 들었을 느티나무
가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수천 가지에 매달린 수만 장 잎사귀 중에
가장 어여삐 물든 단풍잎 한 장
두 사람 무릎 사이로 뚝 떨어뜨려 주신다
수화樹話
그 사랑의 울림이 짙고 깊다
겨울 내소사
조재형
때늦은 폭설 소식을 듣고
내소사 가는 길
함께 떠난 계절은
한나절 먼저 도착해
대웅보전 꽃살문 아래서
적벽강 칼바람에 떨다가
투명한 눈꽃으로 피어나고
종루 아래로 덩그러니
시린 고요만 남아 있었지
아직 뭍에 오르지 못한
격포항 찬바람을 퍼 올려
변산이 온통 소금기에 절었을 때
채석강에 켜로 쌓인 아픔은
붉은 눈물을 쏟고 있었지
찬물
조재형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 람로 깐차 씨
몇 헤 전 겨울 낯선 땅 처음 밟던 날
공항을 통과해
지방의 한 기차역에 도착해 화장실에 들렸는데
따뜻한 수돗물이 나오더란다
깜짝 놀라서
이 나라는 참 따뜻하겠구나!
생각했단다
그런데 깐차 씨
작년부터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한 채
조립식 패널로 지은 방에서 전기장판에 의지해
찬물로 겨울을 났다고 한다
타국 생활은 예정보다 훨씬 길어지고
같이 온 동료들의 한숨도 깊어지고
자작나무
조재형
무리 지은 흰 비늘 은어떼가
수직의 물줄기를 타고
줄지어 허공을 헤엄쳐 오른다
미지의 계절에서
숨어 사는 향기 같은
살 내음이 물큰 풍겨왔다
첫날밤
조재형
시가 안 써지는 밤엔
공책 펴고 남의 시집이나 베끼다가
그도 신통찮으면
베껴 적던 종이 위에
읽던 시집 살짝 포개 놓아본다
말하자면
시집과 공책을
입맞춤 시킨 셈인데
혹시 아는가
내가 잠든 사이
서로 은밀한 얘기 주고받다가
격정의 밤 보내고 내일 아침이 오면
시 한 편 잉태할는지
오!
첫날밤같이
숲에서 울다
조재형
숯에서 후티새가 울었다
후웃, 후웃, 후우웃
소나무 위로 쓰러져 누운 다른 나무가
살을 부비며 울었다
뚜두둑, 뚜둑, 뚝
하도 울울창창하여
나도 울었다
각자의 마음에
태풍이 지나간 뒤였다
빈집
조재형
오래도록
비어 있던 집이다
가만 살펴보니
두 자 키의 개명초는
그새 여남은 평을 넓히고
담 넘어 온 나팔꽃은
정원까지 가꿔놨다
세 들어 눈치 보던
박새 명새 따위도
제각각 식구 늘려 이사하고
집주인만 바뀌었지
여전히
마을 안에 가장 분주한 집이다
집 내놓고 세 한 번 받지 못한
먼 주인만 허전한 빈집이다
악어사냥
조재형
악!
악어는 절대 씹지 않는다 다만
단숨에 삼킬 뿐이다
백화점 지하주차장은 마치
악어 아가리처럼 차들을 집어 삼킨다
초원의 누우떼처럼 완창 빨려 들어간 일행은
악어 쇼를 구경하기로 했다
귀빈석도 아닌데 관람료는
억!
소리 나게 비싸구나
친절한 악어피부전문관리사들은
매혹적인 표장과 향기로운 정글에서 묻어온
악어 비린내와 공포를 감추지 못한다
입구부터 천장 곳곳에
촘촘하게 박아 놓은 악어 눈깔은
사육장의 먹잇감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한쪽에선 박제된 악어들이 비명을 질려댄다
얼마나 악으로 깡으로 버티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아느냐고
쳐다보기만 말고 제발
어서 나를 사냥해줘, 아니면
사랑해줘
자장가
조재형
자장
자장
자장
자장
하늘은 산천초목을 품어 재우고
숲은 절집을 안아 채우고
자장암*은 어리숙한 나를 깨워 세우고
자장―, 자장―
울 엄마 목소리는 저만치 먼데
문설주에 스치는 풍경 소리마저 삷게
초록에 기대어 봄잠 들었다
* 영축산 통도사에 속해 있는 암자
감꽃
조재형
오월의 따스한 햇살은
맑은 상아색
내가 처음으로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면
그건 감꽃이 필 때였을 것이다
분교장 낮은 담장을 끼고
학교가 파하면
하나뿐인 구멍가게 좁은 마당 귀퉁이에
조잘대듯 감꽃이 피면
조무래기들 모여 앉아 작은 꿈을
실에 꿰어 모으고
익어가는 먼 보리밭 길로
졸리운 봄이 눈 비비며 마저 지나가고
네가 옆에 보이는데도
하도 맑고 연해서
차라리 그립다는 말을 자꾸만
내뱉고 싶었을 때도
아마 감꽃이 필 때였을 것이다
박수근
조재형
착박한 땅도
우직한 주인 만나면 기름진 땅이 되듯
어렵게 장만한 터에
돌 골라내고 정성 들여 푹 삭힌 거름치고
해마다 때 놓치지 않고
갈아엎고 갈아엎기를 여러 해
부드러운 붓끝이
마침내 길 잘 들인 쟁기가 되어
기름진 땅을 일군 농부
비탈진 땅에
홑청 치잠저고리 입고 수건 두룬 여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품앗이 밭을 매고 있다
밭둑길 멀리 젖먹이 막내 등에 업고
물 주전자 들고 오는
어린 누이도 보인다
득음
조재형
장곡사*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저녁 예불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어둠이 내리는 산길을 걸어 내려오는데
내 몸에서 종소리가 울려왔다
오래 지녀도 좋을 만한 소리를 얻어 모셨다
* 충남 청양 칠갑산에 있는 절
노숙
조재형
야행성 동물인 노루 한 마리가
새벽잠 청하러 내려와
아스팔트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다
몸 위로 구급차가 급히 지나가고
노루는 바싹 엎드렸으나
귀만은 쫑긋 세워두고 있는 듯했다
날이 밝고 거리에 경적 소리 시끄러워도
노루는 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바닥에 완전히 몸을 맡겨버렸다
을씨년스럽게 찬비 쏟아져
붉은 점액이 빗물과 섞여 떠내려간 뒤
강가에 서면 노루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까치
조재형
새 아프트가 들어선 자투리땅에 까치집이 이층으로 올라앉은 미루나무가 서 있다 아직 새 둥지를 분양받지 못한 까지 두 마리가 이사를 미루고 있는데, 가끔 마주치는 그들이 부부인지 형제인지 그저 절친한 사이인지 알 수가 없다 어제는 한 녀석이 지렁이를 몰고 와 쪼아대며 먹이를 나누는 걸 보고 멀어진 인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직 팔려 나가지 않은 아파트에 까치들을 모아 가격을 할인해서 분양을 한다면 제법 괜찮은 이웃이 늘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나 발소리 때문에 이웃 간에 불화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아침부터 까악 깍, 까악 깍 울어대는 울음소리 때문에 반대 의견도 만만치는 않을 것 같다
암각의 습성
조재형
태초부터 물과 바람이
부드러움을 새겨 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비밀이다
바람이 물결을 깁어 올려 비가 내리면
강을 타고 오르는 물비늘
그 파문의 질감이 암각의 시초가 되었다
물이 살다 떠난 자리에 무수히 고래 발자국
소금기 배인 언덕의 반대편을 서성대던
일곱 가지 색깔의 암호는
태양의 어깨에 견고하게 새겨졌다
평화의 대지에서 뛰놀던
꽃사슴과 순한 양떼들도
낯선 침입자의 화살을 피해
거대한 암벽에 선각으로 박혔다
지금도 구름에 인화된 새의 화석과
세월의 휘호 촘촘히 새겨 넣은 판각 하나씩
문패처럼 걸어 놓고 사람들 이곳을 지난다
강바람 결에 주술로 새기는 부싯돌 마찰음 소리
반구대에 와서 오랜 암각의 습성
무딘 손끝으로 일구는 옛 설화를 읽는다
산에 들다
조재형
산 아래에서는
수많은 계곡과 능선을 따라 올라간
발자국들이 품은 사연을 알지 못했다
그렇다, 산 밖에서는
절대 숲이 보이지 않는다
그 안에서 얇은 바람에도 잠을 설치는
산재들의 둥지가 파리하게 떨고 있다는 것을
쫓기듯 숨어서 산을 지키는
작은 짐승들도 가끔 길을 잃는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산에 들어서면
그 경계가 점차 흐려져
새의 깃털 속에 숨겨진 따스한 온기와
큰 바위도 이끼 속에서 숨을 쉰다는 것을
침묵으로 알게 되었다
그날부터 산은
가장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나도 산이 되고 싶어졌다
부석사浮石寺
조재형
사과꽃 같이 고운 선묘낭자 때문일까
봄을 잃고 난 과수원도
민박집도 살짝 들떠 있구나
아랫마을에 귀농한 안순홍 씨
첫 마늘농사도 너무 들뜬 마음에
기대가 커서 망쳤다
무량수전을 지은 목수들은
얼마나 마음이 들떠 있었으면 기둥을
배흘림으로 깎았겠는가
부석사 가시거든
들떴던 기분일랑 안양루 주춧돌 아래 내려놓고
가파른 돌계단 단단히 부여잡고 내려오시라
시인하라
조재형
1.
독일 정부는 서남아프리카 나미비아를 통치하면서 1904년부터 현재 헤레로족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십만여명을 살해하거나 수용소에서 숨지도록 한 참극을 저절렀다고 백년이 지난 뒤에야 집단학살의 만행을 시인했다 일본은 1993년 고노담화를 통해 일본군 위안불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했으나, 아베 총리는 2016년 참의원 회의에서 이제까지 강제성을 띠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며 강제연행을 거듭 부인했다 소녀상이 이전되지 않아도 대한민국이 설립하는 재단에 출연하겠냐는 질문에는 서로 신뢰하며 달성해야 할 약속의 이행이 중요하다며 소녀상을 이전해야 돈을 내겠다는 속내를 시인是認했다
2.
불편한 사실을 뒤늦게 시인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인 일조차 시인하지 못하며 시를 쓴다고 생각하면 시인詩人의 어깨는 참으로 무겁다 등단이라는 올가미에 매여 시인과 시인 아님을 구분하는 제도가 불편하다 그러나 시인이여 시집을 앞에 놓기 전에 그간의 허물을 먼저 시인하라! 불친절한 이들보다 우위를 점령하가 변명을 늘어놓는 부끄러움에서 그만 벗어나자 이득을 따지지 말고 가난한 곳을 바라보며 함께 노래하고 울어주자 낮은 곳에서도 당당하게 품위를 지키자 책임을 고삐 움켜쥐듯 하고 붓끝의 날이 자신을 향하도록 하자 우리의 꿈은 올라서는 것이 아니고 공감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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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나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
시가 된다고 여겼으나
내가 놓아주지 못한 것들이 모여
부스러기가 되었다
눈동자가 맑아지는 계절,
부스러기를 잘 추스르고
다시 저 높고 환한 창공으로
시를 뿌리려 길을 나선다
2016년 10월
감꽃 피는 집에서
조재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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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詩集 [※하늘 몇 평※]
[ 발문 ] -
관찰과 응시의 서정으로 빚은 진흙과자
김수상 시인
잊을 만하면 시인은 정갈하게 쓴 손편지와 함께 찰보리빵과 참기름을 보내왔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사정을 아는지 막내 놈에게도 다정한 편지를 동봉했다. 시인과 나는 수변공원에서 두 번 만났는데 그가 참 정갈하고 섬세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어여쁜 아이들한데 수업시간마다/저 창밖에 선 여인만큼만 진득하게 자라 달라고”(「탑리 오층석탑」)얘기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종이로 집을 짓는 변종 새떼가 있다
점점 가벼워지고 헐거워지는
제 몸에 맞는 안락한 둥지를 짓기 위해
종이를 물어 나르는
날개 꺾이고 눈마저 침침한 새떼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심의 골목마다 출몰한다
종이로 짓는 집은 헐하고 가뿐해
옮기기에도 편하고
흙에 같이 묻힐 수 있어 처리가 쉽다면서
비장한 유언처럼
거친 사막 길을 힘겹게 무단횡단하고 있다
이전에 없던 종
아직 학계에도 보고된 적이 없는
굽은 허리를 간신히 가눈 채 저공비행하는 새떼들이
황사가 몰려와도 쉬지 않고
화사한 꽃소식에도 아랑곳없이
어두운 골목의 후미진 둥지로 자꾸만
종이를 물어 나른다
-「새떼」전문
미술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그는 시를 쓴다. 그림보다 “종이로 짓는 집은 헐하고 가뿐해/옮기기에도 현”해서 그는 “어두운 골목의 후미진 둥지로 자꾸만/종이를 물어 나”르는 것이다. 사실 시를 쓰는 일은 다른 장르의 예술보다 밑천이 적게 든다. 하지만 사유를 재료로 하기 때문에 오래 생각하고 오래 들여다보아야 한다. 시인은 세상을 “저공비행”하며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키는 존재다. 시인은 사막 같은 종이를 횡단하고 있는 존재다. 다른 예술가도 그렇겠지만 시인은 고통을 사유의 밑천으로 삼아야 한다.
동쪽 바다 한가운데
죽도록 사랑해도 좋은 곳이 있다
해풍으로 벼랑을 일구어 농사짓는 남자와
죽어도 살 수 없을 것 같다던 섬에 둥지를 튼 여자
죽도에는 딱 두 사람만 산다
죽어도 좋은 것이 사랑이라 말하지만
하필 뭍을 향한 그리움이 소금보다 짠 섬에서
남자는 죽도록 사랑하기 좋은 곳이라 하고
여자는 죽기도 쉽지 않은 곳이라 한다
누구 말이 맞느냐고
바다의 눈동자를 보고 물어봐도
하필 이곳으로 찾아든 내력을 대답하지 않는다
사랑은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아니고
바다와 세찬 풍랑을 온전히 모시는 것이라고 출렁일 뿐
해도 달도 뭍으로 오르기 전 죽도 바다에서
둥글게 차 올랐다 붉게 떠나가듯이
죽도록 사랑하면 이들처럼 만나리라
죽도록 사랑하면 죽도에서 만나리라
-「죽도」전문
‘죽도’는 울릉도 북동쪽에 위치한 섬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남녀가 ‘죽도’록 사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가시적’인 땅과 ‘비가시적’인 마음이 시에서 조우한다. “남자는 죽도록 사랑하기 좋은 곳이라 하고/여자는 죽기도 쉽지 않은 곳이라 한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의 영토를 대하는 방식이 이렇게 다르다. 남자는 ‘사랑’에 방점을 찍지만 여자는 ‘죽음’에 방점을 찍는다. 시인은 ‘죽도’를 통해 사랑을 대하는 태도를 이야기한다. “사랑은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아니고/바다와 세찬 풍랑을 온전히 모시는 것”이라며 삶의 우여곡절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말맛에 의존하면서 사랑의 문법으로 시의 영토를 개척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재형의 시편들에는 더러 끼워 맞춘 듯한 ‘말장난’들이 보인다. 이들이 성공할 경우는 언어와 세계가 합일이 가능하지만 ‘미끄러지는 ’ 경우에는 세계가 엉덩방아를 찧는다. 말장난이 시적 사유를 확장시켜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너무 의존하면 시가 경박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시도들이 ‘관찰’이라는 도구를 통해 건져 올린 사유를 돋보이게 하고 시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불가피한 모험이 된다면 그의 시는 더욱 풍성해질 것으로 믿는다.
조재형의 시는 저공비행을 하며 세계를 관찰한다. 낮게 나는 새는 눈이 맑고 귀가 밝아서 세상의 부조리를 받아쓴다. 위안부 할머니를 노래한 「곶감집 막내딸」, 가자지구의 소년병을 보며 자신을 성찰한「가자폭격」, 아이티 지진의 참상을 묘사한「진흙과자」등을 통해 시인은 세상을 떠도는 부박浮薄한 존재들의 아픔을 어루만진다.
중년의 사내가
골목 헌 옷 수거함에서 연신
아이들에게 입힐 만한 옷을 뒤져내고 있다
시린 발 밑으로 민달팽이 홀로
알몸 누이려는지
점액질 흘리며 마른 풀숲으로 느린 걸음 옮기고
예나 지금이나
된서리 내린 찬 새벽길을 걷는 가난한
맨발이 많기도 많다
-「상강 무렵」전문
시인은 비유를 통해 본질에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가가되 “점액질 흘리며” 세상의 아픈 존재들을 향해 “느린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사랑의 액체는 그래서 민달팽이처럼 끈끈하다. ‘관찰’은 조재형의 시들을 읽어내는 키워드다. 더러는 ‘관찰’이 ‘성찰’이 되기도 하고 ‘묘사’에 그치기도 하지만, 시인의 시들은 ‘관찰’을 통해 존재를 감각적으로 되살려내고 있다.
저녁이 올 때는
노을 지는 강가 갈대숲으로 가서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을 더 사들이겠다
작은 집을 한 채 짓고 정원도 가꾸게 된다면
한 쉰 평쯤이면 충분하겠지
남들처럼 부지런하지도 못하니
쓸데없는 욕심이 될지 모르겠으나
빈 하늘 몇 평 장만하는 일이
투기를 부추기는 일은 아닐 테니까
-「하늘 땅」부분
조재형의 맑은 시적 세계관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는 이렇듯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을 더 사들이”기도 하고 “빈 하늘 몇 평 장만하는” 세속을 벗어난 ‘투기’를 서슴지 않는다. 자기가 오래 들여다본 것들이 불러주는 이야기를 받아쓰기도 하고, 세계가 스스로 말을 하도록 자기의 몸을 세계에 송두리째 내어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처음에는 아궁이 가득 불을 쑤셔 넣다가 밥물이 끓어오르면 불을 조금씩 낮추어서 마지막 뜸 들일 때 다시 불을 살짝 올려주는데, 이게 끝이 아니라 솥바닥에 누룽지를 노릇노릇 고소하게 익힐 때와 거뭇거뭇 구수하게 태울 때가 불의 양이 또 다르듯이 가마에 불 때는 방법 또한 조금도 다르지 않더라나요
-「불맛」부분
시인은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요리를 시도하기도 한다. 불의 양을 조절하며 밥에 뜸을 들이듯이 언어를 불처럼 조절하며 세계를 요리하는 것이다. 언어는 불과 같아서 잘 사용하면 맛있는 요리를 해내는 수단이 되지만, 잘못하면 화마火魔를 입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니 우리도 너무 뜸을 들이다가 밥을 망친 적이 꽤 있지 않았던가.
시인을 따라서 이제 ‘물의 나라’로 가보자.
모내기 앞두고
성근 머리칼 빗질하듯 써레질 하고 나니
말갛게 가라앉은 무논의 눈빛이
그렁그렁하다
기다렸다는 듯
산그림자가 들어와 앉아 운다
-「치매 요양원」부분
세상을 응시하는 시인의 눈은 “말갛게 가라앉은 무논의 눈빛”이 아닐까. 그 무논의 물에 세계의 그림자가 비친다. 시인의 몸으로 세계가 육박해 들어오면 시인은 세계가 불러주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쓴다. 이것이 “무논”의 문법이다.
오월의 따스한 햇살은
맑은 상아색
내가 처음으로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면
그건 감꽃이 필 때였을 것이다
분교장 낮은 담장을 끼고
학교가 파하면
하나뿐인 구멍가게 좁은 마당 귀퉁이에
조잘대듯 감꽃이 피면
조무래기들이 모여 앉아 작은 꿈을
실에 꿰어 모으고
익어가는 먼 보리밭 길로
졸리운 봄이 눈 비비며 마저 지나가고
네가 옆에 보이는데도
하도 맑고 연해서
차라리 그립다는 말을 자꾸만
내뱉고 싶었을 때도
아마 감꽃이 필 때였을 것이다
-「감꽃」전문
조재형의 오랜 ‘관찰觀察’과 사물에 대한 따뜻한 ‘응시凝視’가 돋보이는 시편이다. “오월의 따스한 햇살”이 “맑은 상아색”이었다는 것을 알기까지 시인은 얼마나 감나무 근처를 서성이며 감꽃을 응시했을까. 사물에 대한 애정은 ‘관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감꽃」을 통하여 시인은 증명하고 있다.
척박한 땅도
우직한 주인 만나면 기름진 땅이 되듯
어렵게 장만한 터에
돌 골라내고 정성 들여 푹 삭힌 거름 치고
해마다 때 놓치지 않고
갈아엎고 갈아엎기를 여러 해
부드러운 붓끝이
마침내 길 잘들인 쟁기가 되어
기름진 땅을 일군 농부
비탈진 땅에
홑청 치마저고리 입고 수건 두른 여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품앗이 밭을 매고 있다
밭둑길 멀리 젖먹이 막내 등에 업고
물 주전자 들고 오는
어린 누이도 보인다
-「박수근」전문
조재형은 미적 감성으로 주변을 대하며 포용하고 있다. 그는 나에게 전시회 도록을 보내오기도 했는데, 흙으로 빚은 조형물들이 인정이 있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박수근의 그림이 시를 통해 만져지는 듯하다. 이렇듯 언어도 주인을 잘 만나면 아름다운 시로 빚어지고 주인을 잘못 만나면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시인은 “심장을 꺼내어/발아래 묻어두”(「꿈」)고 시를 쓴다. 또 “부드럽고 낮게 엎드린” 자세로 “바람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고 “간밤에 별이 떠서 지나간 길을/허공에 손끝으로 그려보”는 사람이다.「꿈」은 조재형의 섬세한 서정이 빛나는 지점이다.
그는 바라보는 자세를 잘 익히고 있다. “꽃이 피고 지는 것도/당신이 다가왔다 멀어지는 것도/나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것이어서/꽃잎 날리는 허공의 파문을 보며/삼라만상의 숨결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낙화」)고 했다. 맞는 말이다. 꽃이 피고 지는 일은 나의 일이 아니고 꽃의 일이다.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삼라만상의 숨결에 귀를 기울여 보”는 일밖에 또 무엇이 있을까. 좋은 시인은 ‘바라보는 자세’를 제대로 익힌 사람이다. 그는 “태양의 어깨에 견고하게 새겨”진 “일곱 가지 색깔의 암호”를 해독하며 “구름에 인화된 새의 화석”(「암각의 습성」)을 발견하고 있다.
시인詩人의 어깨는 참으로 무겁다 등단이라는 올가미에 매여 시인과 시인 아님을 구분하는 제도가 불편하다 그러나 시인이여 시집을 앞에 놓기 전에 그간의 허물을 먼저 시인하라! 불친절한 이들보다 우위를 점령하가 변명을 늘어놓는 부끄러움에서 그만 벗어나자 이득을 따지지 말고 가난한 곳을 바라보며 함께 노래하고 울어주자 낮은 곳에서도 당당하게 품위를 지키자 책임을 고삐 움켜쥐듯 하고 붓끝의 날이 자신을 향하도록 하자 우리의 꿈은 올라서는 것이 아니고 공감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므로
-「시인하라」부분
이 땅에서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조재형은 이른바 세상에서 말하는 등단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시를 써 왔다고 했다. 나는 그동안의 인연으로 시인에게 말했다. “시집을 내면 그게 최선이지요. 어차피 시는 자기를 위한 공부가 아닐까요. 내가 얼마만큼 공부가 되어있는지 시집을 내어 보면 알 거예요. 그 자리를 부표처럼 스스로에게 확인시켜 놓고 또 공부의 길로 나서면 어떨까요.”
시인은 나의 말에 공감했고 첫 시집을 이제 세상에 내놓았다. 나는 그가 시에서 말한 것처럼 “이득을 따지지 말고 가난한 곳을 바라보며 함께 노래하고 울어주”(「시인하라」)면 고맙겠다. 조재형은 하늘에 언어의 집을 짓고 천변만화하는 구름의 일들을 읽어내는 사람이다. 태어나면 사라지고야마는 구름처럼 덧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지만, 나는 시인의 이 첫 시집이 그가 장만한 “하늘 몇 평”에 오래도록 살아남아주었으면 좋겠다. 하늘은 영원에 조금 더 가깝다. 그의 시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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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데도 많은 기억을 남기는 사람, 조재형 시인의 시는 인생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여간 부드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웅숭깊고 때로는 날카롭기까지 하다. 적어도 그는 사물의 표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과 배면까지를 볼 줄 아는 지혜를 지녔다. 무늬로 본다면 이방연속무늬요, 색깔로 친다면 이중색, 삼중색이다. 무엇이든지 복선으로 관찰하는 그의 정서와 언어 표현은 능청스러우면서 역사나 현실에 대해서도 눈 감지 않는 성실성 또한 지니고 있다.
시인의 시작은 자기 위로와 축복에 있지만 타인을 위한 감동과 구원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이것이 시의 진정한 효용이요 사명이다. 이런 면에서 그가 외롭지만 꿋꿋이 자기의 길을 가주기를 청한다. 청년시인 시절 박목월 선생의 시가 그러했듯이 서럽고도 아름다운 세계를 가득 안아 보름달 같은 시세계를 이룩해주기를 바란다. 개인적 견해로는 충분히 그러한 소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 보여주는「하늘 땅」「탑리 오층석탑」「수화」같은 작품들이 건강한 시정신과 짱짱한 언어 표현으로 그러한 성과와 가능성을 보장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 나태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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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재형 시인∥
∙ 충남 홍성 금마에서 나고 자라 홍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 충북대학교와 대학원에서 미술교육을 공부하였다.
∙ 한뫼한글백일장 장원, 문장21 신인상 등 각종 문예공모전을 통해 글쓰기를 시작했고,
∙ 교원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시 보급을 위해 힘쓰고 있으며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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