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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에 하는 일 단오절행사 단오절
단오행사 단오절 단오의 의미 단오의 유래 단오 음식 단오에 하는 일 단오에 먹는 음식 단오 날짜 수리취떡 창포 중국 단오
명절의 하나. 음력 5월 5일로, 양력 6월 20일
수릿날[戍衣日·水瀨日]·중오절(重午節)·천중절(天中節)·단양(端陽)이라고도 한다.
단오의 <단(端)>은 처음 곧 첫 번째를 뜻하고,
<오(午)>는 오(五) 곧 다섯의 뜻으로 통하므로 단오는 초닷새의 뜻이 된다.
일년 중 가장 양기(陽氣)가 왕성한 날이라 해서 큰 명절로 여겨왔고
여러 가지 행사가 전국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단오행사는 북쪽으로 갈수록 번성하고 남쪽으로 갈수록 약해지며,
남쪽에서는 대신 추석행사가 다채롭다.
단오는 조선 중종 때 설날·추석과 함께 <삼대명절>로 정해진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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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
중국 초나라 회왕(懷王) 때부터이다.
굴원(屈原)이라는 신하가 간신의 모함에 자신의 지조를 보이기 위하여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졌는데 그것이 5월 5일이었다.
그 뒤 해마다 굴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한국에 전해져 단오가 되었다.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에는 <수릿날>의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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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식
산에서 자라는 수리취나물로 떡을 한다.
쑥으로도 떡을 하는 데 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와 같아서 수리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수리란 수레[車]의 뜻으로 높다[高]·위[上]
또는 <높은날> <신을 모시는 날>의 뜻도 지니고 있다.
풍속·행사
민간의 궁중에서 행하는 풍속이 서로 달랐다.
민간에서는 이 날 음식을 장만하여
창포가 무성한 물가에서 물맞이를 하거나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았다.
또한 단오장(端午粧)이라 하여 창포뿌리를 잘라 단오비녀를 머리에 꽂았다.
가장 양기가 왕성한 시각인 오시(午時)에는
익모초와 쑥을 뜯어 여름철 몸을 보호하는 데 썼다.
기풍으로는 나뭇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놓아
열매가 많이 열리기를 기원하는 <나무시집보내기> 등의 가수(嫁樹)가 있다.
민속놀이로는 그네뛰기와 씨름이 있는데,
경상북도에서는 널뛰기·윷놀이·농악·화초놀이 등의 놀이도 하였다.
궁중에서는 단옷날이 되면 일종의 청량제 구실을 하는
제호탕(醍酬湯)과 구급약으로 사용하는 옥추단(玉樞丹),
벽사에서 기인한 애호(艾虎;쑥호랑이)를 신하들에게 하사하였다.
관상감에서는 <천중부적(天中符籍)>을 만들어 대궐안 문설주에 붙였다.
재액을 막아준다는 이 부적은 경사대부(卿士大夫)의 집에서도 붙였다.
또한 공영(工營)에서는 전주(全州)·남원(南原)의 부채를 진상하게 하여
단오날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였는데 이것이 단오부채[端午扇]이다.
집단적인 민속행사는 마을 수호신에게 제사지내는 단오제(端午祭)가 있다.
전국 각지에 단오제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최근까지 전해오는 단오굿으로는 대관령 국사성황을
강릉시내 여성황당에 모시는 <강릉단오굿>과,
문호장(文戶長)이라는 신령한 인물에게 올리는 경상남도 영산(靈山)의
<문호장굿>, 한때 소멸되었다가 복원된 경상북도 자인(慈仁)의
<한장군(韓將軍)놀이>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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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놀이에서는 <여원무(女圓舞)>라는 춤을 춘다.
이처럼 단오의 여러 행사는 벽사 및 더위를 막는 신앙적인 관습이 많고,
더운 여름에 신체를 단련하는 씨름과 그네뛰기 등의 민속놀이가 있다.
또한 <강릉단오굿>과 같은 집단적 단오제로 공동체의식을 이루는 축제를 벌였다.단오행사 단오절 단오의 의미 단오의 유래 단오 음식 단오에 하는 일 단오에 먹는 음식 단오 날짜 수리취떡 창포 중국 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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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헌에 나타난 단오풍습은 다음과 같다.
① 쑥호랑이[艾虎]:단옷날 임금은 신하들에게 쑥호랑이를 하사한다.
쑥호랑이는 잔 짚을 사용하여 호랑이 모양을 만들고
비단조각으로 꽃을 묶어 쑥잎을 붙여서 머리에 꽂도록 한 것이다.
세시잡기에 "단옷날 쑥을 가지고 호랑이 형상을 만들고,
또는 비단을 잘라서 작은 호랑이를 만들며,
쑥잎을 붙여 머리에 꽂는다"고 했는데
우리나라 제도도 이것을 본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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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단오부채[端午扇]:공조(工曹)에서 단오부채를 만들어 진상하면
임금은 그것을 각궁의 신하들과 시종들에게 나누어준다.
부채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살이 흰 대나무 화살 같은 것이 40~50개나 된다.
이것을 백첩(白貼)이라 하며, 칠을 한 것을 칠첩(漆貼)이라 한다.
이것을 받은 사람은 대개가 여기에 금강산 1만 2,000봉을 그린다.
또는 근대의 풍속으로 기생이나 무당 등이 가진 것에는
버들개지·복사꽃·연꽃·나비·흰붕어·해오라기 등의 그림이 있다.
③ 천중부적(天中符籍):관상감에서는
천중절에 붉은 부적을 박아 대궐 안으로 올린다.
안에서는 그것을 문설주에 붙여 상서롭지 못한 것을 막는다.
경사대부의 집에서도 부적을 붙인다.
④ 제호탕(醍?湯):내의원(內醫院)에서는 제호탕과
금박(金箔)을 입힌 옥추단을 만들어 바친다.
옥추단은 오색실에다 꿰어서 차고 재액을 제거하는 데 쓰며,
임금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준다
.
⑤ 창포:남녀 어린이들이 창포탕을 만들어 세수를 하고
홍색과 녹색의 새옷을 입는다.
창포의 뿌리로 만든 비녀에 수(壽)·복(福)의 글자를 새기고,
끝에 붉은 연지를 발라 머리에 꽂아 재액을 물리치는데
이것을 단오장(端午粧)이라 한다.
**** 단오절 의미****
단오절은 치우천왕 탄신일)
매년 음력 5월 5일은
동양에서 1년 중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날이라 하여
- 중양重陽.
- 단양端陽,
- 천중절天中節,
- 단오절端午節이라 불렀으며,
고유의 우리말은 태양을 상징하는 "수리"에서 온 "수릿날"이라 불렀다.
과거에
단오절은 매우 비중있는 큰 명절이었으며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여러 민속놀이와 기념행사가 펼쳐졌고
수릿떡 등의 시절음식을 해 먹었다.
중국에서는
단오절의 기원과 의미가 왜곡되어
초나라의 충신 굴원을 기리는 날로 알려졌으며
조선시대의
“세시기”에도 이 설을 그대로 수용하여 기록되어 있다.
고대 우리의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과 연결시켜 볼 때
음력 5월 5일은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의 탄생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주몽 이전부터 단오절은 존재했기 때문에
그 기원은 이 보다 앞서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날이
고대 배달국의 치우천왕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은
단오절에 행하는 씨름 등의 여러 행사 내용들이
치우와 연관되어 있는 행사라는 것이다.
씨름을 비롯하여
치우를 상징하는 “적령부”라는 부적의 사용 및
단오일을 태양을 상징하는 “수릿날”이라 불렀다는 사실등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근거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치우를 상징하는 색이
붉은색이기 때문에
중국의 문헌 기록에는 염제(炎帝)와 동일시한 내용도 있다.
지금도 중국에서
붉은색은 행운의 색으로 통용되고 있다.
즉
오년午年, 오월午月(5월)로
가장 뜨거운 붉은색의 간지 오午가 두 번 겹쳐 중복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결코
이유없는 우연으로 돌리기 보다는
우리가 함께 좀 더 깊이와 체계를 갖춘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부문이다.
****단오절 풍속 ****
요즈음 세간에는 채식과 더불어 사찰음식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 아니 열풍이 불고 잇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찰음식의 무엇이 이토록 현대인들을 매료 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사찰음식이 갖고 잇는 건강함 과 소박함이ㅣ 꾸밈 없이 강력한 원시성(原始性)때문일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 되는 일상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근원적인 것,혹은 고향,혹은 맑게 개인 파란하늘을 눈부시게 쳐다보는 애틋함을 짐짓 뒤로 한채 물질문명의 편리성만 마냥 쫓아가다 문득 그허허(虛虛)로움에 어떤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 걸까.
예전에는 우리네 어머니들은 아프다고 칭얼 대는 우는 자식을 "엄마손은 약손이단다." 하시며 배를 살살 문질려 주면 우리는 신통하게 금방 나앗고 그기다 스르르 잠이라도 들양이면 그얼마나 달콤햇던가.각설하고 이제 산중음식 으로 들어가 보자.일반세간에서는 생소한 고수겉절이가 절집안에서는 "고소'로 별칭 아닌 애칭으로 불릴만큼 산중의 스님네들이 다들 좋아한다.
그러나 처음 에는 그독특한 냄새 때문에 다들 접근을 꺼려하기 마련이다.
이럴때 예전의 우리 어머님 들이 그러하셨듯이 노스님들 께서는"이 고소 곁절이를 잘먹어야 탈없이 중노릇 잘하여 부처가 될수 있단다."고 곧잘 말씀하시곤 하였다.
참으로 자비롭고 지혜로운 가르침이 아닐수 없다.왜냐하면 고수는 냉한 식품으로 몸에 열을 내려 주기 때문이다.나이 어린 학인 스님 시기 에는 아직도 잡다한 번뇌 망상을 이겨 내지 못해 열이 위로 치솟는,이른바 수행자들 특유의 상기병(上氣病)에 종종 시달린다.
그러나 노스님의 자애스런 이한마디 말씀은 나이 어린 학인 들로 하여금 섭취하는 음식을 통해 심신의 수행에서 오는 잔병들을 자연스럽게 치유케 하였으니 그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이제 또 다른 각도에서 사찰음식을 들여다 보자.
다름 아닌 제호탕이다.
조선 정조,순조 시대때 학자 홍석모 선생이 저술한 동국 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이렇게 나와있다.
제호탕은 '더위를 피하게 하고 갈증을 그치게 하며,위를 튼튼하게 하고 장의 기능을 조절하여 설사를 그치게 하는 효능이 있다.단오 부터 여름에 마시면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하여 궁중 내의원에서 제조하여 임금께 올리고 임금은 일흔이 넘은 정이품 이상의 신하들에게 제호탕을 하사 하였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이전의 제호는 그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어던 재료로 어떻게 만들까.
"열반경의 성행품(聖行品)에는 제호란 우유를 발효 가공시켜 얻을수 있는 다섯가지맛 중에서 가장 뛰어난 맛을 가리키며 佛性의 뜻을 깨닫는 최상의 지극한 正法을 일컽는다."하엿고 고려광종시대
(960년)체관스님이 저술한 천태사교의 집해(天台四敎儀潗解)에 따르면 제호의 제조법은 우유로 타락을 만들고,타락으로 수를 만들며 수로 제호를 만드는데 빛깔은 황백색이며 떡을 빛어서먹는데 맛은 달다고 하였다.대게 좋은 수한섬을 고아서 3~4되의 제호를 얻는데,호로병에 저장하면 한여름에도 녹지를 않으며,한 겨울에도 굳지를 않는다고 하였다.
제호탕을 통해서 사찰음식이 시대를 달리 하였을때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단적 으로 살펴 보았다.
조선시대 궁중 내의원 에서사찰음식인 제호를 사용하였음을 알수 있다.
어디 제호탕 뿐이겠는가.
신선로 등 기타 수많은 사찰음식은 어떻게 어던 모습으로 변하였을까......
몇일 있으면 설날,추석과 더불어 삼대 명절인 단오가 찿아온다.
산중에서는 단오라고 하여 세간의 들썩거림에 같이 흥청 거릴수는 없되.예컨대 가장 양기(陽氣)가 치솟는 음력 5월5일은 곧 바로 여름을 예고 하고 있다.
그래서 그더위를 식히기 위해서 승소(僧笑)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산중스님네 들이 좋아하는 들깨칼국수,버섯잡채,사찰만두로 별식을 준비한다.
또한 승속간을 막론하고 더위를 식히는데 가장 요긴 하게 쓰여던 부채를 만들어 불심깊은 불자들에게 선물하곤 햇는데 5죽이니 7죽이니 해서 대나무 마디 수를 가리고 부채 이름을 짓는다.
거기에다 큰스님의 필력이 넘치는 불경 한두 구절이 쓰여져 있고 고졸한 낙관 까지 찍혀 있다면 선물을 받은 불자 입장에서는 금상첨화가 따로 없을 것이다.
신라시대 에는 정월대보름으 찰밥에 기름과 꿀을 더하여 약밥을 만들었고 밀가루와 쌀가루를 꿀에 반죽하여 기름에 튀기는 유밀 과의 발달을 보았다.뿐만 아니라 부처님 전에 올리는 육공양은 더욱 발전 보게 된다.
고려시대 에는 상추쌈,약밥,약과등이 지나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수입해 갈정도로 국제적인 명성을 누렷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현재도 크게는 조계종으로 통합된 전국의 크고 작은 사찰에서 불교의 전통음식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화려하고 세련된 각양각색의 요리홍수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그러나 사찰음식은 1600여년의 유구한 영속성 만큼이나 그나름의 정체성(identity)을 길이 보존,전승해 나가야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