龜州 大捷의 英雄 姜邯贊 將軍
仁憲公 姜邯贊은 (948-1031 歲首 84세 卒 ) 落星垈에서 태어났다 이곳에 낙성대 遺墟碑가 세워져 있으며 落星垈란 별이 떨어졌다 하여 붙여진 地名이다 이 유래를 世人들이 아는지 ?
인헌공 강감찬은 대평 7년 임오에 갑과에 장원 급제하고 현종 통화 27년 기유년 에 翰林學士 가 되었다.
이해 11월에 거란의 성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침략해 왔다. 임금은 금성으로 피난하고 하공진으로 하여금 그들을 돌아가도록 강화하게 하였다. 성종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는데 이 모든 책략이 강감찬으로 부터 나온 것이었다. 임금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그를 위로하고 치하 하였다.
경술년에 오랑캐의 소란이 있어, 병기가 깊숙이 한 강가에까지 이르렀도다. 그 때에 강감찬의 策略을 쓰지 않았더라면, 나라 사람이 모두 야만인의 옷을 입을 뻔 하였도다."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소배압은 40만 대군을 일으켜 침략 강동 6주를 반환 할 것을 요구 하였으나 강감찬은 龜州에서 이들을 격파하였다 이를 우리는 龜州大捷이라 한다
(참고로 高句麗 薩水大捷은 영양왕 23년 ( 서기 612년 ) 乙支文德 將軍 이 청천강에서 隨軍을 全滅시킨 戰爭 .. 을지문덕 將軍이 隨나라 將帥 于仲文을 약 올리는 詩가 있다 이를 紹介하자면
(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
오늘날 강감찬 출생에 대하여 세상에 전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즉, 한 사신이 밤에 시흥군으로 들어서는데 큰 별이 인가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 落星垈 ) 사신은 관리를 보내어 그 집을 잘 살펴보도록 하였다. 그 집에서는 마침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 사신은 이 일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아이를 데려다가 기르게 되었으니, 그 아이가 곧 강감찬 이며 후일에 政丞의 地位에까지 올랐다.
송나라 사신 가운데 學識이 깊은 사람이 있었다. 그가 강감찬을 보러 와서는,
文曲星이 사라진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 별이 어디 있는지를 알 수가 없더니 오늘 공을 뵈오니 공께서 바로 文曲星 이시군요." 하고 말하면서 곧 階段 아래로 내려가서 禮를 베풀었다.
( 이 이야기는 실로 荒唐하기는 하지만 고금의 벼슬아치들에 의해서 전해 왔다 )
강감찬 설화
고려 전기의 명신 강감찬에 관한 설화. 문헌설화는 ≪고려사≫ 열전을 비롯하여 (세종실록) (지리지) ·(용재총화)·(신증동국여지승람)·(海東異蹟)· (記聞叢話) 등에 전한다. 口傳說話는 전국 각지에서 널리 전승되었다
그의 출생에 관한 단편적 일화, 즉 어느 날 밤 한 사신이 길을 가다가 큰 별이 어느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집을 찾아갔더니,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아기를 낳았으므로 그 아기를 데리고 와 길렀는데 그가 곧 강감찬이다.
뒤에 송나라 사신이 와서 그를 만나 보고는 文曲星의 화신임을 확인했다는 이야기가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고, 부적으로써 호랑이를 물리친 일화는 ≪용재총화≫·≪신증동국여지승람≫·≪기문총화≫에 실려 있으며, ≪해동이적≫에는 출생담과 함께 호랑이퇴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구전설화는 문헌설화에서 나타나는 강감찬의 그와 같은 異人的 면모를 더 확대해서 여러 가지 일화를 통해 다양하게 보여 주고 있는데, 그 내용은 크게 출생담 .성장 시 일화 벼슬한 이후 일화로 분류할 수 있다. 출생담에 관하여 문헌설화에서는 강감찬이 문곡성의 화신이라고만 기록한 반면에, 대부분의 구전설화에서는 강감찬이 여우 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구전 설화에 의하면, 강감찬의 아버지가 훌륭한 胎夢을 꾸었고, 또는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본부인에게로 돌아오던 길에 여우 여인과 만나서 관계를 맺어 낳게 된 아이가 강감찬 이라는 것이다. 그의 출생담은 흔히 始祖나 위인 등에서 나타나는 출생설화와 일치한다. 성장시 일화에 관하여는 대표적인 것이 강감찬이 곰보가 된 일과 귀신을 퇴치한 일이다. 강감찬은 스스로 얼굴이 너무 잘생겼기 때문에 큰일을 할 수 없다 하여, 마마신 을 불러 얼굴을 얽게 하여 醜男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친구 딸의 婚禮式에 가면서 강감찬은 얼굴이 못생겼다고 데리고 가지 않았는데, 강감찬은 몰래 혼인식에 참석하여, 사람으로 둔갑해서 신랑 행세를 하는 짐승 (귀신) 을 퇴치함으로써 그의 비범함을 보였다는 것이다.
벼슬한 이후의 일화는 더욱 다양하다. 강감찬이 소년원님으로 부임하였을 때 그는 자신을 너무 어리다고 얕보는 관속들에게 뜰에 세워 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넣어 보라고 하였다. 그들이 불가능하다고 하자 그는 “겨우 일 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원님을 아전이 소매 속에 집어넣으려 하느냐!”라고 호통을 쳐서 기를 꺾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밖에 사람에게 害를 끼치는 동물을 퇴치한 이야기들도 많이 전해진다. 그가 어느 고을에 부임하여 업무를 보는데, 여름날 개구리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관속에게 부적을 써 주고 못에 던지게 했더니, 그곳의 개구리가 ( 蛙 ) 다시는 울지 않았다
한편, 호랑이를 쫓은 설화는 그가 한성판윤 (현 서울시장 ) 으로 부임했을 때, 남산(또는 삼각산)에 사는 수백 년 된 호랑이가 중으로 변신하고 길을 지나는 사람을 수없이 해친다는 民怨을 듣고, 편지로 호랑이를 불러와 크게 꾸짖어 앞으로 새끼도 평생에 한 번만 낳고, 몇몇 산에만 살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 밖에 모기를 없앴다는 이야기, 개미퇴치이야기,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을 손으로 꺾었다는 이야기 등은 모두 그의 異人的인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다.
강감찬 설화에는 正史에 나타나는 명장으로서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으나, 이 설화들은 기록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 도가적 인물의 맥락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조선 말기 활자본으로 인쇄된 작자 미상의 〈강시力 傳 〉은 그에 관한 일화를 집대성하여 작품화한 古典小說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世宗實錄地理志, 新增東國輿地勝覽, 弁齋叢話, 記聞叢話, 강시力젼, 朝鮮民族說話의 硏究
姜邯贊 禁蛙喧 전설
고려 때의 名將 姜邯贊이 경주 도호사로 있을 때, 경주성 내의 개구리가 너무 소란스럽게 울어 강감찬이 돌에다 命令書를 써 개구리 왕 (蛙王) 에게 보냈더니, 그 이후부터는 경주성 내의 개구리가 울지 않았다는 傳說이다.
강감찬 將軍 일대기를 읽고 난 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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