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대국밥을 먹으며
정일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낙향을 결심한 후배와 함게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를 맞
으며 경남은행 옆 순대골목으로 가 조금은 이른 저녁을
먹는다 붉은 고춧가루를 듬뿍 뿌려 순대국밥을 먹는다
한 그릇의 순대국밥을 놓고 후배의 식욕은 쓸쓸하다 드
는 둥 마는 둥 꺾어진 젊은 시절의 퍼런 절망이 쓸쓸하
다
나는 안다 돌아갈 그의 고향 주소와 농투사니로 살고
있는 빈농인 그의 부모를 기부금이 없어 돌아온 그의
이력서와 중등학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나는 안다 마
지막 남은 전답을 팔아 농협빚으로 마친 지방 국립대학
4년을 이제 돌아가도 볍씨 한 톨마저 뿌릴 땅이 남아
있지 않음을 안다 아니다 아니다 나는 모른다 가슴 속
깊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그의 슬픔의 눈물을 험산처
럼 서 있는 절망의 날카로운 분노를 흰 손이 부끄러운
나는 정말 모른다 아무 말도 못한 채 나는
열심히 순대국밥을 먹는다 하루의 지친 노동에서 거
친 일터에서 우리의 건강한 이웃들이 낮고 어두운 이곳
으로 찾아와 배부른 사람들이야 거들떠보지도 않을 기
름이 둥둥 뜨는 순대국밥을 찾는다 비로소 순대국밥집
에 30촉 백열전구가 켜지고 이웃들의 터진 손등과 주름
진 이마가 따뜻하게 살아난다 희망으로 꿈틀거리는 청
동빛 근육들이 살아난다 어느새 후배는 열심히 순대국
밥을 먹는다 그들과 더불어 좌절된 꿈을 다시 우겨우겨
씹는다 그래 믿어야지 믿고 살아야지 고난의 날이 가면
새날이 찾아오리니*
* 푸쉬킨의 시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