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14일 (월)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말씀 묵상 (신명 10,12-22) (이근상 신부)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신명 10,19)
이방인이란 표현은 교정되어야 한다. 그건 더 이상 오늘 우리에게 의미를 전하지 못하는 단어다. 그가 이방인이란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방인이란 너무 모호하다. 바이든도 이방인이고, 시진핑도 이방인이며, 푸틴도 이방인이고, 탄쉐(미얀마의 권력자)도 이방인이다. 그리고 수 많은 이름을 거명할 수도 없는 이주 노동자들도 이방인이다. 그러니 이방인이란 말은 더 이상 누군가를 떠올릴 수 없는 말, 그냥 인간이란 말과 다름이 없다. 너도 나도 다 이방인이란 말은 피차 여권이 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이방인과 너무나도 거리가 먼 말이다. 성경의 이방인(게르)은 영주할 권리가 없는 이를 뜻하는 말이다. '게르'의 뿌리말인 구르는 '잠시 머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방인이란 말의 본 뜻은 오래 머물 권리가 없는 이, 잠시 머무는 이란 뜻이다.
몇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우리와 남을 구분하는 가장 적나라한 권리는 머물 수 있는 권리다. 비자!! 그건 몇 천 년 된 벽. 인간이 인간을 밀쳐내는 가장 완고한, 가장 오래된 수단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잠시 머무는 이'다. 한 나라의 안온한 국적이 있을 수도 있다. 한국처럼 비자파워가 강한 나라라면 은근히 뻐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린 결국 잠시 머무는 존재다. 나라 몇 개 더 가보면 뭐하겠는가. 다 곧 떠나야 하는 존재다.
우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그건 그들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이방인이기에 그러하다. 그들이나 우리나 갈 곳이 없다. 그리고 갈 곳이 없는 이방인이 우리의 정체성이란 건 사실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그게 우리의 신앙고백이기에 그러하다. 갈 곳이 없을 때 바로 그 막다른 곳에서, 그러니까 죽음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비로서 온전하게 고백한다. 이방인이 되어야 그 나라의 주인이 되는 신비.
그걸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이라 부른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simonksyi/posts/pfbid0eg4RK62DSvKha3nKKVCWxgqhnBqQtcHaB55TPTEfzp1F5p6gktS3DWKW9PyJ8XJ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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