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벽(詩癖)〉 (이규보)
스스로 점점 고질화된 줄은 알았지만 그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시를 지어 자탄한 것이다.
年已涉從心(연이 섭종심)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으며
位亦登台司(위역 등대사) sī
지위 또한 삼공에 올랐으니
始可放雕篆(시가 방조전)
이제는 문장을 버릴 만도 하건만
胡爲不能辭(호위 불능사) cí
어찌하여 아직도 그만두지 못하는가
朝吟類蜻蛚(조음 류청렬)
아침에는 귀뚜라미처럼 노래하고
暮嘯如鳶鴟(모소 여연치) chī
밤에는 솔개처럼 읊노라
無奈有魔者(무내 유마자)
떼어버릴 수 없는 시마(詩魔)가 있어
夙夜潛相隨(숙야 잠상수) suí
아침 저녁으로 남몰래 따르고는
一着不暫捨(일착 불잠사)
한번 몸에 붙자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使我至於斯(사아 지어사) sī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네
日日剝心肝(일일 박심간)
나날이 심간을 깎아서
汁出幾篇詩(즙출 기편시) shī
몇 편의 시를 짜내니
滋膏與脂液(자고 여지액)
기름기와 진액이
不復留膚肌(불복 유부기) jī
다시는 몸에 남아있지 않네.
骨立苦吟哦(골립 고음아)
앙상한 뼈에 괴롭게 읊조리는
此狀良可嗤(차상 양가치) chī
내 이 모습 참으로 우습구나
亦無驚人語(역무 경인어)
남을 놀라게 할 문장으로
足爲千載貽(족위 천재이) yí
천년 뒤에 물려 줄 만한 시 못 지었으니
撫掌自大笑(무장 자대소)
스스로 손뼉치며 크게 웃다가
笑罷復吟之(소파 부음지) zhī
문득 웃음을 멈추고는 다시 읊는다
生死必由是(생사 필유시)
살거나 죽거나 오직 시를 짓는
此病醫難醫(차병 의난의) yī
내 이 병 의원도 고치기 어려우리
-동국이상국후집
*각운: 상평성 지支운.
*시벽(詩癖): 음벽(吟癖). 시 짓기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습관. 《양나라의 역사·간문제 본기梁書·簡文帝紀》: 황제(성명은 소강蕭綱)는 평소에 시를 짓기를 좋아하여 그가 쓴 시의 서문에 이르기를 “일곱 살부터 시를 몹시 좋아하는 습관이 있어, 장성하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帝雅好題詩, 其序云: 七嵗有丨丨, 長而不倦“
*종심從心: 일흔 살 원문의 ‘종심(從心)’은 나이 70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논어》 〈위정(爲政)〉에 “내 나이 일흔 살이 되어서는 마음대로 하여도 법규에 어긋나지 않는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공자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태사台司: 별자리와 같이 높은 벼슬. 《남조의 역사南史》:“왕승건이 문하시중 자리로 옮겨가자 형의 아들 검에게 이르기를 ‘너가 조정에서 중책을 맡았는데, 내가 또 이러한 고위직을 맡게 된다면, 한 가문에 두 자리의 높은 관직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니 정말 두려운 일이라’ 하고는 고사하였다王僧䖍, 遷侍中謂兄子儉曰: ‘汝任重於朝, 我若復此授, 一門有二丨丨, 實所畏懼’ 乃固辭”
*조전(雕篆): 하찮은 재주. 조충전각(雕蟲篆刻)의 준말로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조각하듯이, 미사여구(美辭麗句)로 문장을 꾸미는 조그마한 기교.
*청렬蜻蛚: 진晉나라 장재張載의 〈칠애시七哀詩〉: “쳐다보고 들으니 기러기 옮겨가는 소리 들리고, 내려다보고 들으니 뀌뚜라미 우는 소리 들리네仰聴離鴻鳴, 俯聞蜻蛚吟”
*연치鳶鴟: 《시경·대아·한록旱麓》의 “솔개는 하늘 위를 날고鳶飛戾天” 라는 말의 주석: “연은 연치의 류다鳶鴟之類”
*심간心肝: 글을 잘 짖는 재주. 당나라 이백(李白)의 〈겨울날 용문에서 종제 영문이 회남으로 근친하러감에 송별하면서(冬日于龍門送從弟令問之淮南覲省序)〉에 “영문(令問)이 술 취하여 나에게 묻기를 ‘형은 심장과 간장(肝腸) 및 오장(五臟)이 모두 금수로 되어 있소?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입을 열면 글을 이루고 붓을 휘두르면 안개가 흩어지듯 글이 쓰여지시오?’ 하였다.” 한 데서 온 말로, 글을 잘 짓는 재주를 뜻하는 말이다-고전db각주정보
[보충설명]
위의 시는 길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인 이규보 선생이 만년에 이르기까지 시를 짓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자랑하는 투로 쓴 글인데, 흐름이 자연스럽고 별로 어려운 비유나 전고도 없어 번역문만 읽어보더라도 이 시의 내용은 손쉽게 파악될 것으로 생각한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옛날 지식인들은 한문으로 시를 잘 지어야 과거 시험에 붙을 수도 있고, 남과 교유하는데도 품위 있게 할 수 있으며, 외교활동까지도 수월하게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철학적인 저술이나, 역사적인 기록을 할 때까지도 더러 시적인 표현을 구사하여 그런 글의 운취를 더 높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옛날 지식들에게 있어 시라는 것은 가장 중요한 출세의 도구의 하나이자, 사람의 수준을 가늠하는 한 가지 중요한 척도가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어릴 때부터 《천자문》같이 각운을 배려하여 만든 책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며, 《추구推句》 같이 좋은 시구를 뽑아놓은 책을 배우기도 한다. 《소학》 같은 책에도 뒷부분에는 좋은 시구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또 본격적으로 시를 짓기 이전이라도 장난삼아 대구對句를 맞추어 글을 지어 보는 연습을 많이 하였다고도 한다.
그래서 시 짓는 일에 몰두하다가 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흥미를 느끼게 되며, 심지어 잠자는 시간에 꿈속에서까지 시를 짓게 된다는 일화를 가끔 보게도 된다.
이 백운 선생의 시를 이해하기 위하여 잠시 다른 어떤 시인의 비슷한 내용을 담은 짧은 시 1수 살펴보도록 하자.
지봉 이수광 선생의 〈있는 일 그대로 적는다卽事〉
수마와 시벽은 둘이 서로 잘 어울리니 / 睡魔吟癖兩相宜
심사가 한가한지라 늘 늦게 일어난다오 / 心事無營起每遲
사립문 굳게 닫은 채 소은이 되었나니 / 鎖斷松關成小隱
문 밖에 갈림길이 많은 줄 모르겠어라 / 不知門外路多岐
-이수광 지봉집 제20권 / 별록(別錄)
*즉사(卽事) : 시제(詩題)의 하나로, 눈앞의 일을 소재로 삼아 읊는 것을 뜻한다.
*수마(睡魔)와 …… 어울리니 : ‘수마’는 잠을 오게 하는 마귀(魔鬼)로 뜻이 좀 바뀌어 잠을 이르고, 원문의 ‘음벽(吟癖)’은 시벽(詩癖)과 같은 말로 시 짓기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성벽을 뜻한다. 여기서는 지봉이 잠을 많이 자거나 시 짓는 것으로 날을 보내고 있음을 뜻한다.
참고로 원(元)나라 허유임(許有壬)의 시 〈아우 가행(有孚)의 있는 일을 그대로 적는다는 시의 각운자에 맞추어 짓는다次可行卽事韻〉에 “술은 시벽까지 더해져 과중해지고, 차는 수마와 싸워 항복시키네.[酒添詩癖重, 茶戰睡魔降.]”라고 하였다. -《圭塘款乃集, 卷上, 次可行卽事韻》
*사립문 …… 되었나니 : 원문의 ‘송관(松關)’은 사립문이다. 당(唐)나라 맹교(孟郊)의 시 〈퇴거(退居)〉에 “해 저물녁 고요히 돌아갈 제, 그윽한 사립문을 두드린다오.[日暮靜歸時, 幽幽扣松關.]”라고 하였다. -《全唐詩 卷373 退居》
‘소은(小隱)’은 산림에 은거하는 은자(隱者)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晉)나라 왕강거(王康琚)의 〈반초은시(反招隱詩)〉에 “소은은 산 속에 숨고, 대은은 시조에 숨는다.[小隱隱陵藪, 大隱隱市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김광태 (역) | 2011
(일부는 수정 인용함)
조선 중기의 대학자 지봉 이수광 선생의 이 시를 읽어 보면, 사람이 한번 유혹에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으로는 시와 더불어 잠 같은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각주에서 인용한 원나라 시인 허유임의 시에서는 그런 것과 더불어 또 술과 차와 같은 것도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술과, 차, 낮잠을 즐기는 것, 시짓기에 빠지는 것 등등이 한시에서는 자주 등장한다.
이 밖에 또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아마 돈, 여색 같은 것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틀림없이 중요한 몫을 하기는 하겠지만, 이러한 것은 선비들이 되도록 멀리 하여야만 좋은 것으로 치부하여 시나 문장에서는 되도록 회피하는 게 보통이다. 특히 돈에 대하여서는 특히 그러하다.
이규보 선생이 평생 지은 시는 7, 8천여 수는 된다고 한다. 그 중에는 〈동명왕편東明王篇〉과 같은 장편 영사시도 전하고 있다. 위에 적은 시도 24구나 되는 비교적 긴 시인데, 매 2행 끝에 각운자를 달아서 12번이나 각운자를 달고 있는데, 이 각운자 12자가 모두 상평성 4, 지支 자 운으로 통일되어 있다. 이런 것을 전문용어로 일운도저一韻到底라고 한다.
[이 시의 각운에 대한 보충 설명]
모든 말의 소리를 분석하여 보면 보통 초두 자음initial, 중간모음medial, 주모음vowel, 받침ending과 성조tone로 나눌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소리는 자음이나, 중간모음, 또는 받침이 없는 소리도 있다고 하지만, 한어 성운학에서는 자음 같은 소리의 앞부분 요소를 성聲, 모음과 받침과 성조를 합한 소리의 뒷부분을 운韻이라고 하는데, 시에 “운을 맞춘다”, “각운자를 통일한다”, “남이 쓴 시의 각운자를 빌려 시를 짓는다[次韻]”라고 말할 때, 이 “운韻”이라는 말의 의미는 곧 소리의 뒷부분이 비슷한 요소를 반복적으로 되풀이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여야 듣기가 아름답고, 외우기도 쉽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에 사용된 각운자 12자의 발음을 우리나라 한자 발음과 현대중국표준발음(북경어 발음)으로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年已涉從心(연이 섭종심) 位亦登台司(위역 등대사) sī 始可放雕篆(시가 방조전) 胡爲不能辭(호위 불능사) cí
朝吟類蜻蛚(조음 류청렬) 暮嘯如鳶鴟(모소 여연치) chī
無奈有魔者(무내 유마자) 夙夜潛相隨(숙야 잠상수) suí
一着不暫捨(일착 불잠사) 使我至於斯(사아 지어사) sī
日日剝心肝(일일 박심간) 汁出幾篇詩(즙출 기편시) shī
滋膏與脂液(자고 여지액) 不復留膚肌(불복 유부기) jī
骨立苦吟哦(골립 고음아) 此狀良可嗤(차상 양가치) chī
亦無驚人語(역무 경인어) 足爲千載貽(족위 천재이) yí
撫掌自大笑(무장 자대소) 笑罷復吟之(소파 부음지) zhī
生死必由是(생사 필유시) 此病醫難醫(차병 의난의) yī
이 시에서 사용한 각운자의 발음을 현대 한국한자발음으로 적어 보면 모음이, a[아], I[이], u[우] 같이 다르게 발음이 되어 여기에 무슨 공통점이 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다음에 적어둔 현대북경 발음으로 보면 모든 글자가 i[이, 또는 으, 성조는 1성, 아니면 2성인데, 음평, 양평이라고 나누어지지만, 모두 옛날 기준으로는 평성임]라는 발음으로 끝이 나니 오히려 이 시의 각운자를 설명할 때는 현대 중국어 발음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 더 편하다.
그러나 이 시의 각운자로 쓴 “지支” 자 계통의 발음만 그렇지 다른 운자를 보면 오히려 한국한자 발음을 가지고 각운이 맞는지 안 맞는지 따지는 것이 현대북경어 발음 가지고 따지기 보다가도 더 용이한 경우가 더 많다. 왜냐하면 이런 시의 각운체계는 중국의 수나라 당나라 때의 중국 장안 지방의 발음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 전하여진 한자발음 체계가 지금 북경 사람들이 사용하는 발음 체계보다는 중국 옛날 발음 요소를 더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 “支”자 계열의 발음만은 좀 예외이기는 하지만…그래서 각운을 맞추어 가면서 한시를 짓는다고 할 때는 일반적으로 지금의 북경사람들 보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쉽게 각운체계를 이해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어떻든 간에 이 한시 각운체계는 이미 1,000 여 년 전에 중국에서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에, 지금 한국 사람이든, 중국 사람이든, 일본 사람이든 간에 한시를 지으려고 할 때는 그 1,0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각운자 배열을 표준으로 제시하여 둔 것을 보고서 만든 책, 이를테면 《시운집성詩韻集成》, 《규장전운奎章全韻》, 《시운함영詩韻含英》 같을 책을 보고서 한시를 짓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