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6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요한15,26─16,4ㄱ)
"When the Advocate comes
whom I will send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to me.
so that you may not fall away.
말씀의 초대
바오로 일행은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첫째가는 도시인 필리피에서 여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 가운데 티아티라 출신의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바오로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시기로 약속하신다. 보호자이신 영을 통하여 제자들은 온갖 박해 속에서도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그분을 증언하게 될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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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언젠가는 당신에 대하여 증언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제자들이 증언의 삶을 살게 될 때 두 가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는 진리의 영을 맞이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박해를 겪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의 삶에서 다음과 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언할 때에는 반드시 성령을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제자들을 박해하면서도 그것이 하느님께 봉사하는 일이라며 착각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것은 반드시 고난을 겪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순교자를 뜻하는 영어 ‘martyr’는 본디 ‘증거자’ 또는 ‘증인’의 뜻을 지닌 그리스 말 ‘martys’에서 온 것입니다. 이는 곧 증언의 삶과 순교의 삶은 매우 밀접하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풍요와 안락만을 바라며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면, 그 증언은 아무런 힘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되돌아봅시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제대로 증언하고 있습니까? 증언의 삶을 위하여 성령을 모시고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아들일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까?
영에 이끌려 주님을 증언케
-심흥보 신부-
가끔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예기치 않은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사슴이나 토끼나 새처럼 예쁘고 좋은 동물들이 잡아먹히도록 하셨나요?”라는 질문에서부터 “하느님께서는 왜 모세나 엘리야나 예수님이나 바오로에게는 직접 나타나시면서 우리에게는 직접 나타나 보이지 않으시나요?”라는 질문들이 제기될 땐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혼자서는 이러저러한 의구심과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도 잘 풀리지 않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그런데 같은 문제라도 누군가 질문을 하면 답을 하는 과정에서 그 문제가 술술 풀려나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럴 땐 성령께서 임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신자들을 위해 글을 쓰노라면 컴퓨터의 자판이 느리다고 여겨질 만큼 끊임없이 이어지는 글이 마치 주님께서 제 뇌를 움직여 주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가끔 예전에 쓴 글을 다시 보면서 ‘어떻게 내 머리에서 이런 글이 나왔지!’ 싶어 주님께 감사드리며 감탄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15,26)라고 말씀하십니다. 독서에서는 리디아가 세례를 받고 청합니다.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사도 16,15) 리디아의 청을 우리의 청으로 바쳐봅시다. ‘저를 주님의 제자와 사도로 삼으신 주님, 성령을 보내시어 제가 주님의 진리를 확연히 깨닫게 해주시고, 주님과 함께 머무르며 제 말과 삶과 활동으로 주님을 드러내게 해주소서. 아멘.’
성령과 믿음의 동지들
-허광철 신부-
박해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당신 이름 때문에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할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좀 더 구체적입니다. 제자들은 회당에서 내쫓김을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죽임까지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박해자들은 그들의 박해가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 때도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박해의 강도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박해받는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오직 주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고’ 두 증언자를 약속하십니다. 바로 성령과 ‘너희’로 표현되는 제자들(26-27절)입니다. 보호자 성령께서는 주님을 증언할 힘을 불어넣으시고, 성령에 가득 찬 동료 제자들이 ‘함께’ 증언할 것입니다. 결국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과 믿음의 동지들’, 외적 박해에서뿐 아니라 스스로 넘어지는 내적 박해(죄)에서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동반자일 것입니다.
생명의 원동력인 진리의 영
- 김선류 신부-
어느 날 아침 외출하려고 자동차에 올라 시동을 걸기 위해 열쇠를 꽂고 돌렸습니다. 자동차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밤새 모르고 켜놓은 미등 때문에 배터리가 다 방전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가까이에 온전한 차가 있어 케이블을 연결해서 시동을 걸 수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차를 이용해 죽은 차를 살린 것입니다. 배터리 나간 차는 죽은 차나 마찬가지이듯 우리 삶도 긍정적 희망과 동기가 약해지고 삶이 활력을 잃어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멈추어 버린 죽음과도 같은 순간,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 누군가의 도움일 것입니다.
‘보호자, 진리의 영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성령의 힘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무의미와 허무, 절망에 희망을 주는 단 하나의 근원입니다. 예수님께 머물러 세상에 구원의 메시지를 주던 하느님의 영이, 그분의 죽음과 부활승천으로 이제는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그 영이 바로 우리한테 생명을 주는 근원이자 삶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진정 성령은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 삶에 시동을 걸게 해주고 주저앉아 있던 삶을 힘차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삶이 무의미하고 건조할 때, 때로 좌절과 절망이 엄습해 올 때 언제든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죽은 영은 불꽃처럼 타올라 세상의 모든 죽음의 그림자를 몰아낼 것입니다. 오소서 성령님, 제 마음에 오소서. 아멘.
진리이신 영
-김찬선신부-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에는 없는 진리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다른 복음의 수난기에는 없지만 요한복음의 수난기에는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인가?”하고 묻습니다. 진리란 존재와 사물과 자연의 참다운 이치라고 할 수 있는데, 요한복음은 주님께서 바로 그 진리시라고 얘기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저는 이 말씀이 대단한 이치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길로서 하느님께서 이 길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인간도 이 길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존재와 사물의 근본 이치로서 모든 존재와 사물은 이 진리로부터 존재가 비롯되고 이 진리에 따라 존재가 영위됩니다. 그러므로 이 존재의 이치에 따를 때 존재는 자유롭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또한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이시고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안에 머무시는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를 때 존재가 생명을 지닙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시고 난 뒤 제자들에게 보내주실 성령께서도 진리의 영이시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왜냐면 성령께서도 아버지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진리이신 당신을 증언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진리이심을 성령께서 알게 하실 것이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실 것이고, 우리도 그 진리를 증언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고 합니다. 바오로가 진리이신 주님을 증언하고 있는데 마음을 열어주신 하느님이 바로 진리의 영이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진리를 알아보게 하시고 예수를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 이제는 바오로처럼 우리도 증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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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한 말씀나누기가 되었습니다. 많은 시간을 묵상했는데도, 이렇게 난해하게 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더 잘 이해해서 쉽고 명료하게 말씀을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령 강림
- 최병조 신부-
성령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행복과 기쁨이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민자가 “신부님 ! 저희는 열심히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데 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가족과 이별하는 아픔을, 노동의 고통을 당하고 살아야 합니까 ?” 라고 묻습니다. 저는 그의 아픔을 이해하기에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말했습니다. “사도들을 봅시다 ! 그들은 주님께서 보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어려움을 불사하고 들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까 ? 바로 우리 제자들의 삶의 목적은 이민 생활을 통해 시련과 고통을 체험하고, 그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수긍했고 지금도 주님의 뜻으로 알고 기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체험하고 싶지 않는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그때마다 그분께 기도하면서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꼭 십자가를 통한 영광의 길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을 잘 이겨낼 때 우리는 영광의 월계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주님 ! 모든 이민자를 사랑으로 이끄소서. 아멘.’
어제 인터넷 뉴스 중 “미인을 아내로 얻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미국의 한 대학 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연구 결과로, 미인과 함께 지내면 코티솔(Cortisol)이 대량으로 분비되어 건강을 해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코티솔은 몸의 대사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그 농도가 높아지면 식욕이 증가하고 지방이 축적되어 심장병과 당뇨, 우울증 등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녀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이 코티솔의 농도가 증가한 반면, 보통 여자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정상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연구를 주도한 박사는 이렇게 권유를 합니다.
“행복한 삶은 결코 미남-미녀의 조합이 아니라 평범한 남녀이며, 오래 살고 싶으면 미남-미녀를 남편-아내로 삼지 말아야 한다.”
재미있는 연구 결과이지요? 정말로 그런 것인지는 제가 결혼을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세속적인 기준만을 으뜸으로 생각하는 현대인들을 한 번쯤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이런 외모지상주의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만능주의 역시 이 사회 안에서 큰 문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애는 사라지고, 대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심과 이기심만이 가득한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주님보다는 보이는 물질에 더 큰 믿음을 갖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외적인 것들이 영원할까요? 영원할 것 같아서 그렇게 애지중지하지만 불과 몇 년 만 지나도 잊어버리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잊어버리는 것들을 위해서 우리들은 나의 목숨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주님과 연관된 것만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며, 우리 모두가 마음 속 깊이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해 주님과 연관된 것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도 말씀하셨듯이, 진리의 영께서 주님을 증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랑하라고 강조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나의 이웃들에게 철저히 실천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의 외적인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주님을 증언하며 멋진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월요일 아침을 시작하며 바로 이 모습이 내가 될 수 있는 오늘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포부가 큰 사람은 높고 위험한 계단을 오르며 내려갈 일은 걱정하지 않는다. 오르고자 하는 마음이 추락의 두려움을 삼켜버렸다(토마스 애덤스).
위대한 사랑
-권태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름으로써, 받게 될 위협과 박해, 심지어 죽음까지 말씀하십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실 때, 어떤 마음이셨을까 묵상하게 됩니다. 아마도 다가올 그들의 고통과 어려움, 그리고 여러 유혹들을 보시면서, 안타까움 그 이상의 마음이시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인간 모두를 차별없이 사랑하시고, 구원을 받기 원하시는 간절한 마음, 그래서 우리를 그분 곁에 꼬옥 붙들어두려는 부모님의 사랑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이 침묵은 저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뜻에 의심을 품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승리를 통하여, 저는 이 침묵 안에 하느님과 예수님의, 우리 죄인을 향한 위대한 사랑과 용서가 담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죄 많은 인간 모두를 구원해주시려는, 그래서 당신 품 안에 살게 하시려는 그분의 애타고 가슴 저린 사랑이 숨겨져 있음을 가슴 깊이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 당신의 그 사랑을, 십자가의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성령과 매 한가지로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성령께서 당신에 대해 증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다음 제자들도 당신에 대해 증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떨어져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랍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제자들은 가지들이기에 떨어져나가면 말라버리고 불에 태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주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갈 수 있는 존재가 제자라는 말씀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실제로 떨어져나간 존재가 제자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제자들이란 우리와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갈 수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존재들이 당신을 증언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당신에 대해 증언하실 것임을 얘기한 다음, 제자들도 당신에 대해 증언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나를 증언할 것이다.” 성령이나 제자들이나 동급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한 인간으로서는 누구나 얼마든지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갈 수도 있지만 성령께서 그에게 오시면 진리를 증언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그가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오시어 그 안에 있는 성령께서 증언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도 권고 1번에서 같은 뜻의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성체 안에서 주님을 보지 못하지만 그 사람 안에 있는 성령께서 성체 안의 주님을 보고 믿으며 받아 모시게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성령 강림 축일을 앞 두고 있는 우리들, 남은 기간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길 기도해야겠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크게 낮추고 크게 물러서니>
혹시 지지부진한 신앙생활, 뜨뜨미지근한 신앙생활, 물에 물탄 듯한 신앙생활로 힘겨워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복음 말씀에 ‘바짝’ 귀를 기울여보시면 좋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께서는 떠나가시지만 곧바로 우리의 보호자, 진리의 영, 곧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진리의 영께서 우리 안에 좌정하시고 우리의 일을 보호해주실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분명히 ‘진일보’할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의 보호자이자 진리의 성령께서는 우리와 너무나 ‘먼 당신’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령의 현존 체험, 역시 우리 편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가끔씩 우리가 아무런 노력도 안했는데 산들바람 한줄기가 우리 얼굴 스쳐가듯 그렇게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노력이 필요합니다.
현존 체험을 위한 ‘의식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그분의 현존을 굳게 믿는 노력, 보다 자주 그분의 현존을 자각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첫 번째 자세가 뒤로 크게 한 걸음 물러서는 모습입니다. 우리를 스쳐지나가는 사건들, 사람들과 첨예하고 맞부딪치고, 일일이 따져보고, 하나하나 손익을 계산할 때 성령의 현존 체험을 요원할 뿐입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크게 한 발자국 뒤로 한번 물러서보십시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의외의 좋은 느낌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웬수’같던 그가 측은해보이기 시작합니다. 끔찍하던 하루하루가 축복의 꽃길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두 번째 자세는 크게 자신을 낮추는 모습입니다. 형제들과 산행을 하다가 잠시 쉴 때였습니다. 씩씩하게 걸어 다닐 때는 전혀 보이지 않았었는데, 바닥에 퍼질러 앉아보니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노란 작은 풀꽃 한 무리가 제 눈에 띄었는데, 그렇게 앙증맞고 예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미세했지만 갖출 것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첩첩산중에서도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자세를 낮춰보니 그 바닥에서는 하느님 섭리의 손길, 활발한 생명의 움직임, 엄청난 성령의 활동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활동, 분명히 우리 삶 안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분 자비의 움직임이 우리 인생을 휘감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간 세상살이로 인해 무뎌졌던 우리 영혼의 시력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진리의 영께서 우리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시고 그분 이끄심에 살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매일의 삶을 기적의 연속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이 은총으로, 십자가가 축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슬픔과 울부짖음이 감사의 찬가로 변화될 것입니다.
희망의 산증인이 되도록 노력해 봅시다.
-김기현신부-
살다보면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신자 여러분들도 직장이나 가정 안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TV나 책을 보다보면, 나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심지어 다른 이들에게 희망까지 주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예전에 피아노를 한 학기만 배운 적이 있습니다. 피아노가 어렵다는 생각에 배우기를 그만 뒀습니다. 그런데 학교정기 간행물실에서 잡지를 보다가 심하게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잡지에서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인 희아양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희아양은 손가락이 네 개 밖에 없었고, 다리도 짧아서 피아노를 친다는 것 자체가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아양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서, 열 손가락으로도 치기 어려운 곡들을 연주했습니다. 실제로 우리학교 축제에 왔었는데, 그 연주를 보고 저는 닭살이 돋을 정도로 감동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극장에서 ‘슈퍼맨 닥터리’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주인공이었던 이승복씨는 사지마비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직업은 의사였습니다. 그는 원래 체조 선수였는데, 연습 도중 사고로 목을 다쳐 사지마비장애인이 됩니다. 처음엔 그도 장애에 좌절과 절망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기를 선택합니다. 이에 열심히 재활훈련을 하고,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의대에 들어가 장애인으로서 쉽지 않은 과정을 수석으로 마칩니다. 지금은 존스홉킨스 재활의학과에서 의사로서 생활하면서, 같은 척추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희아양이나 이승복씨처럼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희망의 산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셨던 것처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용서의 산증인이 되어야 하고, 부족한 형편가운데서도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나눔의 산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또 바쁜 가운데서도 기도 시간을 마련하는 기도의 산증인이 되어야 하고, 내 주위의 영적으로나 물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작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의 산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실천은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단순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만들어 나가는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오늘 하루, 예수님에게서 보고 배운 것들을 내 삶의 자리에서 실천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끝낼 때 끝내더라도>
오늘 우리는 기쁨과 단순함의 성인(聖人) 필립보 네리(1515-1595)신부님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꽃으로 유명한 이태리 도시 피렌체에서 태어난 필립보 네리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성삼 형제회"를 설립하였고, 영적독서나 성음악, 자선사업을 위해 오라토리오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천성적으로 워낙 낙천적이던 필립보 네리는 길거리건 시장 바닥이건 가리지 않고 자신이 체험했던 예수님을 전하는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특별히 필립보 네리는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열정적으로 투신하였습니다. 그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늘 하던 말은 돈보스코에 의해 다시 반복되기도 하였습니다.
"친구들아, 뛰고 달리고 너희가 하고 싶은 것은 다해라.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죄만은 짓지 말아라."
또한 필립보 네리는 "회개의 사도"라 불릴 정도로 신자들에게 고백성사 집전하는 것을 다시 없는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필립보 네리는 고백지도 신부로 또 영적 지도자로서 유명하게 되셨지요. 한번은 중년여인이 찾아와서 자신의 악습을 토로하며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안 그럴려고 하지만 입만 열면 남의 흉을 잘 봅니다. 친구의 그저 그런 말을 듣고도 사실인 것처럼 여기저기 퍼뜨리기도 합니다. 가슴아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때 필립보 네리 신부님은 이런 보속을 주셨습니다.
"시장에 가서 닭을 한 마리 사시요. 그리고 닭털을 뽑으며 시장바닥에 버리면서 이리로 오시오."
여인이 그렇게 하자 "이제 시장으로 다시 지나며 닭털을 주워 제 구멍에 도로 꽂으시오"하였습니다.
여인이 불가능한 표정을 지으며 어리둥절해 있을 때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한 말도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답니다. 그러니 이제는 말 한마디마다 조심하십시오."
오늘 필립보 네리 신부님의 축일에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봤습니다.
우리가 진정 영적으로 산다면, 진정 충만하게 산다면 그 결과가 있어야 하겠지요. 그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결과는 기쁨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가끔씩 나이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무기력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얼굴을 보면 바라보는 저 역시 힘이 빠집니다. 얼굴 표정은 "언제 이 지긋지긋한 세상이 끝나나"는 표정들입니다.
끝낼 때 끝내더라도 일단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기쁘게 살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필립보 네리처럼 난감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주님 계시기에 마음 푹 놓고 여유 있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시대가 나를 뒷받침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이웃들을 바라보며, 이웃들이 지닌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성장 가능성, 희망을 볼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옛날, 한 나라의 국왕이 오랜 기다림 끝에 사랑스러운 왕자를 얻었습니다. 왕자가 세례를 받던 날에는 온 국민이 몰려와 축하를 전했고, 하느님도 천사를 축하 사절로 보내 진귀한 선물을 선사했습니다. 천사들은 국왕에게 지혜, 고귀함, 힘, 건강, 재력, 영민함, 지식 등의 선물을 차례로 바쳤습니다. 마지막 천사의 차례가 되었을 때 딱히 내놓을 것이 없었던 천사는 ‘불만’을 선물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국왕은 “내 아들은 이미 천사들이 선사한 선물을 열한 개나 받았으니 살아가는 동안 그 어떤 불만도 품지 않을 것이오.”라며 기분 나쁜 마음을 숨기고 그 선물을 거절했지요.
몇 년이 지난 뒤 무럭무럭 자라난 왕자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그는 영민하고 건강했으며 성정이 온화하고 박학다식했습니다. 게다가 마음속에는 그 어떤 불만도 없었습니다. 왕자는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며 안주했고 나라를 더 부강하게 만들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 국왕을 모시는 대신들 역시 현실에 안주하기는 마찬가지였지요.
결국 그의 나라는 오래지 않아 이웃 나라에게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불만이라는 부정적인 것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긴 부정적인 것 역시도 긍정적인 것으로 쓰시는 주님이 아니십니까? 그래서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심을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려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고 또 행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것이라면 좋은 것 나쁜 것 상관없이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주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고 고통과 시련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을 증언할 수 있는 진리의 영인 것입니다.
이 진리의 영인 성령을 우리는 세례와 견진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미 받은 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합니다. 이는 비누를 예로 들으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손바닥이 무척이나 지저분한 상태입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누를 가지고만 있다고 해서 지저분한 손이 깨끗해질까요? 아닙니다. 내가 수돗가로 가서 물과 비누를 이용해서 손을 씻어야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이들이 이렇게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성령을 받고도 저절로 또 스스로 성령이 활동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제대로 활동하지 않는다고 불평과 불만도 갖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바로 “나”에게 있습니다.
이제 주님으로부터 받은 성령을 이용해서 주님을 증언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지만 주님의 참된 제자라 불릴 수 있습니다.
내게 그러한 용기를 주면 나는 가장 험한 산도 홀로 오를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장애물을 디딤돌로 바꿔놓을 수 있다.(게일 브룩 버켓)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오늘 복음 서두에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 곧 성령의 파견을 암시하십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성령께서는 한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잘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다가 구금당하셨던 존 월시 몬시뇰께서 오랜 기간 옥고를 치르고 나서 자유의 몸이 된 뒤에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는 삶의 반평생을 기다리는 데 소비했다.”
이는 맞는 말씀입니다. 추기경님을 포함하여 많은 죄수들은 오로지 교도소에서 풀려날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늘 언젠가 다가올 그날만 무작정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추기경님은 마음을 바꿔먹고 이렇게 다짐하셨습니다.
“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아보리라.”
그러나 어떻게?
고뇌하던 그 순간 성령께서는 구엔 반 투안 추기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야, 그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란다. 성 바오로 사도가 감옥에 갇혔을 때 했던 것처럼 하여라. 다른 공동체들에 편지를 써서 보내라.”(‘지금 이 순간을 살며’, 바오로 딸 참조)
그는 감금상태에서 매일 작은 쪽지에 혼신의 힘을 다한 간단한 묵상 글을 적기 시작했고, 한 소년이 그 쪽지를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가족들이 모여 추기경님의 글을 필사하여 주변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주변사람들은 또 다시 필사하여 다른 이웃들에게 돌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유명한 ‘희망의 길’이란 책이 발간되었고, 이 책은 전 세계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 정녕 인생의 가장 비참한 순간, 처절한 순간에도 짤막한 편지를 통한 사도직을 행하고 계속한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나에게, 내 삶에 있어 성령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솔하게 매일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 순간을 내 생애 마지막으로 여기고 소중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수적인 모든 것들을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오로지 핵심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추기경님의 당부처럼 나의 말 한 마디, 손짓 한번, 전화 한 통화, 결정 하나 하나가 나의 삶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것, 내게 주어진 단 1초의 순간이라도 낭비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 손우배 신부-
우리는 사람들이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서로가 서로를 폭행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일부 이슬람교도들도, 악의 축을 운운하는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세교회의 모습을 봐도 마녀사냥이나 십자군 전쟁을 통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폭행이 행해졌는가를 생각해봅니다. 그야말로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마태 11,12).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하느님도 예수님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행을 얼마나 가슴 아프게 보고 계실까요! 우리도 종종 교회 내 활동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들을 교회 밖으로 내쫓지는 않는가 생각해봅니다. 때때로 우리는 사람보다 일만을 더 중요시하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행하고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때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세상의 논리와는 반대되더라도, 우리는 사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내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폭행을 가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파라클리토 성령
- 김태훈 신부-
예수님께서는 박해 중에 있는 제자들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보호자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호자’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파라클레토스’인데 이 단어는 우리에게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닙니다. 성령 청원 기도 때 자주 이 단어가 쓰였기 때문인데, 이 용어는 많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도움을 위해 ‘곁에 있도록’, ‘부름 받은 이’라는 기본적인 뜻에서 출발해 법률 용어로 변호자·옹호자·중재자·간청자라는 뜻을 지니며, 안전과 도움과 보호를 제공하는 이로서 도우미·위로자·격려자·의논 상대라는 뜻도 지닙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기에 중앙아프리카에서는 ‘우리 곁에 엎드린 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곧 어떤 사람이 가다가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곁에 같이 엎드려 그의 필요를 살펴 돌보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참으로 성령의 역할을 잘 표현한 단어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이시지만 명령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 수준으로 내려와 우리의 필요를 살피며 나란히 걸어가는 분입니다. 박해와 시련으로 힘겨워 하는 제자들은 그분의 어머니 같은 자상한 도움에 힘입어 내적으로 새 힘을 얻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도움은 어려움을 외적으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변화시켜 제자들의 짐을 편한 멍에가 되게 합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시키고 예수님과 일치해서 어려움을 기쁨으로 변화시키십니다.
하느님은 자신보다 예수님을 내세우시면서, 보조자처럼 겸손하게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활동을 우리의 활동으로 오해할 만큼(마태 10,`20 참조) 우리를 내세우십니다. 이렇게 그분은 ‘곁에 계시는’ 겸손하고 자상한 분이시고 또한 ‘부름 받은’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과 함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좋으신 그분을 늘 내 곁에 모시도록 그분을 간절히 찾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증거자 성령님
-전삼용신부-
미국에서 어떤 신부님께 함께 공부하시던 스님 두 분이 성경을 읽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 신부님은 종교의 편협한 시각을 넘어선 그 스님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성경 두 권을 스님들에게 선물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 뒤 성경을 읽고 계시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스님들은 성경을 몇 장 읽지 못하고 포기하였다고 대답했습니다. 일주일 만에 세상을 만들고, 형제끼리 죽이고, 가족끼리 서로 속이고, 이스라엘 아닌 다른 민족들을 마구 죽이는 하느님을 접하고는 그런 허황되고 불공평하고 자비롭지 못한 하느님을 자신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정말이지 신앙이 없는 사람이 성경을 읽어 내려가면 도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거룩한 말씀이라고 받아들이며 수백 년간 전 세계 베스트셀러 자리를 놓치지 않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은 어쩌면 잔인하고 자신의 백성만 알고 질투심이 강하고 무서운 분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성경도 거룩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 허황된 이야기들이 거룩한 말씀이 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경은 성령님의 영감(靈感)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으로부터 글을 쓰는 이들이 진리를 그 안에 기록하도록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보통 책이 아니라 ‘거룩한 책’이 되었고 ‘하느님의 말씀’이 된 것입니다.
만약 ‘성경’이 성령님의 영감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되었다면,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 즉 ‘성자 예수님’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주보성인인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의 글이 성령님의 중재로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계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교회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계시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사랑’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둘 사이에 있어야 둘이 한 몸이 되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계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 몸은, 육체와 영과 영혼으로 되어있습니다. 육체는 보이지 않는 영혼을 계시합니다. 육체는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줍니다. 영혼이 겁을 먹으면 심장이 빨리 뜁니다. 이는 육체가 놀라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혼이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육체가 영혼을 배신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혼은 그 사람을 싫어하는데 육체는 거짓으로 그 사람을 좋아하는 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점점 더 나아가 영혼은 진실을 알고 있는데 육체는 계속 거짓말만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육체가 영혼을 올바로 계시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육체와 영혼을 연결시켜주는 영이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영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활기를 얻게 되는데 죄를 지으면 성령님께서 그 사람 안의 영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야하는데 결정적으로 성령님이 충만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특별히 첫 제자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도 유다인들이 무서워 그 분을 증거하지 못하고 숨어서 한 집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내려오시고 나서야 제자들은 비로소 밖으로 뛰쳐나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우리들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 분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령님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길거리에 나가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아무리 떠들고 다녀도 사람들은 콧방귀만 뀌게 되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피가 빠져나가면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가 생명을 상징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피 안에 ‘산소’가 있어야합니다. 산소가 빠져나간 피는 죽은피라 생명을 상징하지 못하고 아무 쓸모가 없어 버려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셔야합니다. 성령님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죽음이 무엇인지밖에 보여주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깁시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
-이흥우-
의사로서 그 누구보다도 헌신적 삶을 사는 분이 요즘 수면제를 먹어야만 잠을 잔다고 한다. 독실한 신앙인인 그가 한숨을 푹푹 쉬며 토로한 이야기다. 어떤 종교 재단 병원에서 경영과 기획 전문가를 초빙한다는 광고를 냈다. 이제는 병원도 전문 경영을 해야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다나. 전문 경영이라 함은 특성화 또는 차별화를 하겠다는 것인데, 과연 종교 재단 병원이 내세우는 특성화는 무엇일까? 설마 여타 병원처럼 돈 잘 벌어 나중에 베풀겠다는 명분 아래 돈 잘 버는 쪽으로 기획하겠다는 것은 아닐 테고. 혹시 다른 병원에서는 하지 않는 말기 암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병실을 확충하거나 임종을 앞둔 어느 독지가의 기부금으로 더욱더 내실을 기하려는 것인가? 의료 자체가 선교인 때가 있었다. 개화기 때 인천에는 서구식 의료와 선교와 교육이 함께 들어왔다. 구급약조차 없던 그때, 선교사들이 베풀었던 의료 봉사는 곧 선교였다. 그들이 했던 선교의 또 다른 방법은 교육이었다. 우리는 이 셋을 같은 맥락에서 보았고, 그것이 이 땅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다. 그리고 민주화 시대, 이 땅에서 교회는 나름대로 시대적 소명을 받았고 실천했다. 요즘 교회 병원에는 자판기 커피 대신 고급 커피숍이 생기고, 최신식 주차장만큼이나 새로운 시술이 서민적 의료를 대체하고 있다 한다. 이윤 경영 압박이 본질적 치료를 밀고 들어오는 가운데, 교회 병원마저 다른 병원처럼 떠밀려가서 그 본래의 특성을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시대와 장소가 달라지면 그에 발맞추어 교회 병원도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 변화 발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하느님을 섬기는 일,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자비의 의술을 펴는 그 근본 목적은 변함없이 살려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 내 자리에서 올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어떠한 것인지 자문해 본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인생의 오후를 맞이하면서>
축구시합이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나뉘듯이 우리네 인생도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확연히 구분됩니다.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에 하프타임이 있습니다. 하프타임은 중년기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중년기에 접어든 많은 분들이 소리 없이 찾아온 ‘중년기 증후군’으로 당혹해합니다. 이 시기를 보내는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삶이 근본부터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왠지 헛살았다는 생각이 몸부림칩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이뤄낸 것 없다는 자책감에 시달립니다.
몸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 동안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별 것 아닌 걸로 전락합니다. 그토록 애착을 지녔던 것들인데, 하나같이 허망합니다.
이 시기를 인생의 위기라고도 하는데, 사실 또 다른 측면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위기는 호기이지 않습니까? 인생이 전반전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릅니다. 마음 한 쪽에서는 이제부터라도 방향 설정을 다시 해서 제대로 한번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프타임 때 감독들은 전반전에 부족했던 전술이 무엇이었는지 점검해봅니다. 그리고 경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선수교체도 준비합니다. 히든카드를 커냅니다.
중년(Midlife)은 하느님이 주신 보너스입니다. 이 시기를 은총의 시기로 여겨야 합니다. 축복의 시기로 생각해야 합니다. 새 출발의 시기로 설정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영성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중년기 대학’을 다니셔야 합니다. 이수하셔야 할 과목은 성경입니다. 봉사활동입니다. 영성생활입니다. 성령의 인도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조금도 준비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섭니다. 그러다보니 전반전의 실수를 되풀이합니다. 삶이 피곤합니다. 인생이 제 갈 길을 잃고 휘청거립니다.
학교에 들어간 청소년들은 여러 교과목을 통해서, 그리고 실습을 통해서, 인간관계를 통해서 나름대로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삶을 준비합니다.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년기 대학을 다녀야 합니다. 몇 가지 필수과목을 이수하면서 인생의 후반전을 대비해야 합니다.
전혀 준비되지 않는 상태로 인생의 오후에 발을 내딛는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인생의 후반전을 전반전 프로그램에 따라 살 수는 없습니다.
오전에 대단했던 것들이 오후에는 별 것 아닌 것이 되고, 아침에는 참이었던 것이 저녁에는 거짓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후반전에 가장 중요한 삶의 배경은 영성입니다. 신앙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년기에는 성령 안에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옛 자아(에고)에 죽어야 합니다. 내면 깊은 곳의 새로운 자아, 참 자기의 모습을 발견해 내야합니다.
사랑으로 알고 사랑으로 말하리라
-김찬선신부-
누가 예수님의 정체를 증언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협조자 성령, 그래서 다 합쳐 연결시켜 말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우리에게 보내시는 협조자, 진리의 성령께서 예수님의 정체를 증언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어서 제자들도 주님의 정체를 증언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처음부터 주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도 성령과 마찬가지로 주님을 증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성령과 같은 반열에 제자들을 올려주십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주님과 함께 있었다고 주님의 정체를 제자들이 다 안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인간으로 뛰어나신 분임을 알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권고에서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주님의 정체를 보지 못하기에 믿지도 못하고, 믿지 못하기에 단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시고 그래서 우리 인간은 영의 눈으로 주님을 보고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리적으로 오래 함께 있었다고 모든 것을 잘 아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제가 맡고 있는 형제회는 매달 한 번 남성부 등산을 합니다. 어제 회원들과 등산을 하였습니다. 그 중 한분이 제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아채시고 제가 말을 하려다 끙끙대면 이 얘기하려고 한 것 아니냐고 대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농담 삼아 제 마음 안에 들어와 있다고 얘기하였지만 농담이 아니고 정말 제 마음 안에 들어와 계셨습니다.
사랑을 하면 상대방을 읽고 상대방을 다 압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랑으로 알아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고 사랑으로 알아야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해가 갑니다. 사랑의 성령이 진리의 성령인 이유를.
<독서> :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로 -경규봉 신부 -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마케도니아에 온 바울로 일행은 그 지방의 첫 도시라고 할 수 있는 필립비로 갔다. 필립비는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의 이름에서 따온 도시로서(기원전 360년경),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로마의 식민지로 지정되어 황제에게 직접 속한 도시였다. 따라서 주정부로부터 독립되어 공물과 세금을 면제받았고, 로마 시민들이 누렸던 것과 동일한 권리를 누렸다.
이 도시에는 유대인들의 수효가 적었고 남성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회당이 없었다. 때문에 바울로 일행은 안식일이 되자 유대인들의 기도처가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강가로 갔다. 이러한 기도처는 주로 강가나 바다 근처에 있었는데, 이는 정화 의식에 필요한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로는 강가에 모여 기도하는 여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 가운데 리디아라는 티아디라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가 있었는데,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 바울로의 말씀을 귀담아 듣게 하셨다. 그리하여 리디아는 온 집안 식구와 함께 세례를 받고 바울로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셨다.
바울로가 새로운 도시를 방문하면 도착한 후 첫 안식일에 그 지역의 회당을 방문하여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한 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곤 하였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백성보다 먼저 복음을 들을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안식일이 되자 먼저 유대인을 찾아 나섰다. 비록 유대인들의 수효가 적었지만 바울로는 결코 실망하지도 않았고, 그러한 작은 모임도 경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한다기보다 주님께서 자신 안에서 자신을 통하여 복음을 전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2디모 4,2)라고 디모테오에게 훈계했던 것처럼 그는 기회가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는데 충실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가져야 할 자세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0.20)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크고 화려하며 많은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다다익선이고,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보다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고 적음이나 신분의 고하를 가지고 따지곤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고 많고 적음을 가지고 결정하지 않으심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수효의 많고 적음이나, 신분이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더욱이 복음을 전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 나는 다만 주님의 도구이며,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므로, 주님께서 하심을 굳게 믿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로 사도는 “나는 씨를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중요할 것이 없고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하십니다.”(1고린 3,6-7)라고 말했다.
바울로 일행이 필립비에서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이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실패인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분명히 그들을 인도하시어 필립비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고, 바울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충실히 따랐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로만 판단하지 말고,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판단하자. 하느님의 눈으로 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행동하며 하느님의 입장에서 실천하는 삶을 살자. 성령의 인도하심에 충실히 따르자...................◆
믿음을 잃지 말고 성령께서 이끄는 삶을 삽시다.
-오창일 신부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부활시기를 지내며 성령강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복음 말씀은 혹시라도 믿음을 잃게 될까 걱정하시면서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16,2-3) 이는 곧 당신을 추종함으로써 당하게 될 위험을 미리 알아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감사하게도 우리가 진리의 영을 보내주시고 당신을 증언할 힘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요한 복음서가 쓰여진 당시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와 치열한 대결상태에 있었습니다. 당시에 유다교는 그리스도교를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단자로 간주하고 박해했습니다. 물론 박해의 첫번째 대상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똑같은 죄로 박해받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일이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날도 예수님을 반대하는 세력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진리를 증언하고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행하려면 당연히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때문에 기쁨과 위로를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묵묵히 말씀을 실행에 옮기며 봉사하던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인간적으로는 내세울 것이 없었지만 믿음에 충실한 분이었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은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것을 눈빛으로 증거하며 사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매에게 “이래도 당신이 믿는 주님이 계시냐?”하며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시련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는 믿음으로 버텼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이 시련 뒤에 하느님께서 다시 축복을 주시겠지요.”하며 걱정해주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자매가 “당신이 당하는 고통 속에는 하느님의 분노를 살만한 무슨 죄가 있는 게 아니냐” 하며 심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자매는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런가?’ 하는 유혹과 분심이 스스로 드는 가운데 차츰 교회에 내딛는 발걸음에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기쁨으로 봉사하던 공동체에서 일할 의욕도 점점 줄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주님의 모습처럼 안간힘을 다해 그들 앞에서 죽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래도 사그라지지 않는 그 자매와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고통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십자가는 미사 중에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이 성체를 모시기 위해 영성체 행렬에 끼어있는 자매의 모습을 볼 때였습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있다면 하고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그러면서 한참 고민하며 지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성당에 앉아 성체조배를 하던 중에 강하게 와 부딪치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자 괴로운 마음을 접을 수 있었고 이 말씀에 힘입어 더 열심히 봉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역시 우리 편이시라, 사람들이 그동안 오해를 했다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용서와 화해를 청하였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썰물과 같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각자 다양한 십자가를 지고 힘겨운 인생여정을 걸어갑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며 위로하십니다. 때때로 마음 아파하고 굳게 닫힌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알게 하시는 그분은 바로 우리 신앙의 위로자이신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머리로는 복음을 알지만 입으로 이웃에게 전하고 생활로 증거하기는 어렵습니다. 더욱이 세상은 우리를 그냥 놓아두지 않으려고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같습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내 안에서 일을 하시도록 허용하고 허락해 드려야 합니다. 강렬하게 청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제자들을 남겨두고 떠나셔야 하는 예수님의 애틋한 마음을 헤아려 봅시다.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며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까 걱정하시며 당부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오늘도 성령의 도우심에 감사하며 은혜로운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 저희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성령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박종현 신부 -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십계명 중에 제8계명은 ‘거짓증언을 하지마라’는 것입니다. 거짓은 늘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 어떻게 해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얻고 싶은 마음, 어떻게 해서라도 누군가에게 지지 않으려는 마음. 이런 마음들이 바로 거짓 증언을 만들어내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리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므로 그분이 모든 것의 절대 기준이시며 모든 것에 앞서시는 진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이신 그분으로부터 창조된 우리는 늘 그분의 가르침대로 진실된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합니다. 그것이 진리이신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도록 창조되어진 우리들의 소명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한다는 것은 진리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셨던 예수님께서 결국 죽음마저도 이기는 부활의 승리를 거두셨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진실된 삶의 승리를 우리 삶 안에 드러내야합니다. 그래서 ‘거짓증언을 하지마라’는 제8계명의 가르침대로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이기심을 버리고 늘 올바른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 앞에 그리고 세상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사소한 거짓말에서부터 타인에게 상처와 아픔을 줄 수 있는 중대한 거짓말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진실되지 못한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아야합니다. 또한 세상의 불의와 부패, 온갖 권모술수와 부정 앞에서 결코 침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진실과 정의를 몸소 실천해야합니다.
그것이 곧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길, 우둔하지 않고 깨어있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진리를 위해 목숨마저 바치신 예수님의 찬란한 부활의 승리가 우리 안에서도 빛나게 될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이 새벽 묵상 글의 날짜를 적으면서 문득 ‘나도 참 독하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저는 스스로를 끈기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에 대해서 일찍 포기할 때도 많았지요. 그런데 이 새벽 묵상 글을 벌써 6년째 계속 쓰고 있으니 얼마나 제 자신이 독합니까? 하긴 담배 끊는 사람은 독한 사람이라고 상종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 담배도 벌써 5년째 피우고 있지 않으니 제가 독한 사람이 맞기는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살아오면서 스스로도 잘 몰랐던 제 자신을 자주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깜짝 깜짝 놀라게 됩니다.
아마 이런 저의 체험은 여러분들 각자 각자에게도 똑같이 해당될 것입니다. 스스로 잘 몰랐던 자신의 성격, 또 자신의 능력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을 때가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그러한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뭐 그럴 수도 있지.’하면서 덤덤하게 받아들이나요? 아닐 것입니다. ‘아니 나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네.’하면서 깜짝 놀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스스로 깜짝 놀랄 만큼 자기 자신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내 몸도 아닌 다른 사람을 어떻게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더 모를 수밖에 없는 다른 사람을 왜 이렇게 잘 아는 척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각종 판단과 단죄가 난무하는 곳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들이 많이 쓰는 인터넷이라는 세상 안으로 들어가면 익명성이라는 이유로 더욱 더 많은 판단과 단죄를 발견하게 되지요.
물론 이렇게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과 단죄는 이 현재에만 있는 새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먼 과거에도, 어쩌면 이 세상의 창조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 바로 남에 대한 판단과 단죄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 모습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뜻대로 행동하고 말하지 않는다고 제거할 계획을 세웠고 그들은 실제로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요.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이미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피함으로써 인간들의 어리석은 판단과 단죄의 습관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지요. 바로 근본적인 치유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약속하신 성령입니다. 즉, 남에 대한 판단과 단죄라는 죄로 기울어지려고 할 때, 진리의 영인 성령의 목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물로 성령을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이천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그런 죄로부터 멀어졌을까요? 어쩌면 문명의 이기를 사용해서 더 많은 판단과 단죄를 하고 있고, 그래서 그런 죄에 더욱 더 깊이 물들어가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성령을 다시 가져가셨을까요?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성령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진리의 영을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진리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도 잘 모르는 ‘나’라는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성령도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끊임없이 남을 판단했었던 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함부로 남을 판단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평화를 위한 전쟁
-노성호 신부-
2001년 9월 11일. 이날은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조직에 의해서 항공기 납치를 통한 동시 다발적인 테러 사건이 일어났던 날입니다. 결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이날의 사건은 미국인과 유다인에 대한 성전(聖戰)으로 치러진 테러였기에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께 봉사한다는 생각과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한다는 명목으로 테러를 일으켰던 것이지요. 과거 중세시대에 많은 여성들을 형장의 재로 사라지게 했던 ‘마녀사냥’이나, 교황 우르바노 2세가 동·서 교회를 통합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명목으로 선포했던 1095년의 ‘십자가 원정’도 이와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잘못된 신념과 신앙은 사람을 죽이는 원흉(元兇)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안에는 사악한 이기심과 타인에 대한 미움이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께서 하셔야 할 일들을 마치 자신이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과오를 범하기 쉬우니까요. 예수님이나 그분의 제자들도 다 그런 이들에 의해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기존의 가치관과 신념의 체계를 흔들어 놓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참된 진리의 원천이신 분과 그 진리를 전하는 이들을 무참히 살해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도 예수님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셔서 참된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해봅니다.
진리의 영
-최근자-
◆삶의 계획이나 생각이 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누군가를 따를 때가 있다. 마치 내 일은 내가 해야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이끄는 것같이 느끼며, 나 자신이 잘 안다고 여기면서도 누군지 모르는 그이가 나를 더 잘 알기에 나도 모르게 그이를 믿고 맡기게 된다. 그리하여 내 삶이지만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모든 것이 쉽고 좋게 보일 때는 어렵지 않지만 어려움이 닥칠 때는 이러한 자신의 믿음이 흔들린다. 특히 그분을 따르는 삶의 결과가 세상으로부터 좋은 일보다는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을 청할 사람도 같이하던 친구도 사라지고 혼자인 자신을 발견할 때 정말로 나의 믿음이 흔들리며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까? 필요한 도움은 무엇일까? 암담한 어둠 속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주님께 마음을 돌리고 그의 도움을 청할 때 내 안에 들려오는 소리, 내 마음에 깊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길, 내 마음 깊이 비쳐오는 평화의 빛을 본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주님은 나와 같이하시는 빛이며 길이며 진리이시다. 비록 손으로 만져지는 주님은 계시지 않지만 진리의 말씀이신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내 삶 안에서 역사하신다. 주님은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성령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할 것을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위협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주님께 자신을 맡기며 살아갈 때 진리의 성령은 나의 보호자·협조자가 되어 나의 신앙의 뿌리는 흔들리지 않고 튼튼해지리라.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양승국신부-
<살아볼만한 세상, 견뎌볼만한 세상>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여러 가지 병고가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암, 고혈압, 당뇨병, 중풍... 그리고 죽음, 그런데 우리가 이런 병고를 겪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착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병은 벌의 결과가 아닙니다. 악령의 활동으로 인한 것도 아닙니다. 다양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과로에 이어지는 과음, 지나친 흡연, 그릇된 식생활 습관, 영양결핍...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친구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든 병 앞에서 열렬한 기도와 더불어 정확한 발병의 원인 규명, 적극적인 치료가 요구됩니다. 이러한 노력은 뒷전인 채 오로지 치유기도, 안수기도, 치유를 위한 봉헌...이런 것에만 혈안이 된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성령 기도회가 제대로 자리 잡고 있는 본당이나 교구가 많아져 흐뭇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성령의 다양한 은사, 직접적인 성령체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새 생활과 겸손한 이웃봉사로 이어지니 참으로 보기가 좋습니다.
반대로 지나친 감성적인 접근, 신앙의 개인주의화, 자기도취, 선민의식은 언제나 경계해야할 적입니다.
계속 다가오는 큰 십자가로 얼굴이 늘 고뇌와 불안으로 가득 찼던 한 형제의 얼굴이 어느 순간 편안한 얼굴로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신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변화의 배경이 무엇인가 살펴봤더니, 간절한 기도에 이은, 강렬한 성령 체험, 철저한 하느님 자비에 의탁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영혼의 도우미이자 보호자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내재해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이 온통 육적인 것에 몰두해있기에, 우리의 안테나가 온통 세속을 향해 있기에, 우리의 시선이 전부 나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기에, 그분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여정 안에서 평소보다 훨씬 강렬하게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탄생한 순간, 세례 받던 순간, 견진 때, 서원 때, 서품식 때, 성령쇄신 세미나 때, 고백성사 때, 성체성사 때, 병자성사 때, 혼인성사 때...
그런 순간 우리가 성령의 활동을 보다 가깝게 손에 잡힐 듯 체험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순간은 평소보다 훨씬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첫 마음으로 돌아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느낀 바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는 순간 체험하게 될 은총은 놀라운 것입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하느님의 자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질 것입니다. 죽음과도 같던 현실이 ‘살아볼만한’, ‘견뎌볼만한’ 현실로 변화될 것입니다. 꼴도 보기 싫었던 ‘인간’들이 그저 안쓰러운 인간, 측은한 인간, 감싸주어야 할 인간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기적의 원동력, 우리 신앙을 한 단계 성장시켜줄 활력소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보호자, 아버지에게서 나오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름으로써 위협과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너희를 회당에서 쫓아낼 것이요, 너희를 죽이고서도 그렇게 하는 짓을 오히려 잘하는 짓으로 여기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여길 때가 올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그 말씀을 기억해 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 서로가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만해도, 우리 본성에 맞고 세상 사람들 생리에 잘 부합되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실천하자면 의례히 자기 성미와 부닥치게 되고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탄식도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또 그것은 오늘날 우리만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그래서 희생된 것이고, 그의 제자들로 시작해서, 2,000년의 교회역사에서 볼 때 "제명에 죽지 못하는" 순교라는 피의 죽음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희생될 당시에 세상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어리석다고 했고, 그렇게까지 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느냐고 했고, 집권자들은 마땅히 옳은 일을 하는 줄로 여기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냐 하면서, 죄없는 외인들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이들을 얼마나 괴롭혔으며 심지어는 죽이고 처형해 오고 했습니까?
그 모습은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것은 한 가정에 식구들에게서 받는 조소의 냉대로부터 시작하여 교도소에 투옥당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진리를 증언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자면 십자가가 으례히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박해하는 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은 그들이 "아버지도 모르고, 나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를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른다"는 사실은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것은 죽음을 지나 새로운 삶이 있음을 모른다는 뜻이며 그것은 그의 죽음과 함께 그의 삶도 멸망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육신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육신고 함께 고통을 당할 때, 오히려 기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유는 당신이 영원한 천상영광으로 갚아 주신다고 보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증인(證人)
-강영구신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그대에게
예수님은 나자렛의 목수 출신 떠돌이 랍비입니다. 그분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뱅이이고(마태8,20) 그분의 제자들도 별볼일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은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나병환자들, 버림받은 사람들과 어린들과 어울리기를 즐겨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새 삶을 누립니다. 성령은 이런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3,17)이라고 증언합니다. 성령(聖靈)만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악령(惡靈)들도 예수님의 정체를 폭로합니다.(마르코1,24; 5,7)
이제 예수님을 스승이요 주님이라 고백하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증언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심으로 하늘나라(天國)의 상속자가 된 우리들이 예수님을 세상 한가운데서 증언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스승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제자답게 우리들의 삶이 아름답고 맑고 밝고 향기로워야 합니다. 성당 앞뜰의 느티나무가 싱싱한 푸르름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듯이, 우리들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이 예수님을 증언하게 됩니다.
촛불처럼 자신을 태우는 밝고 환한 당신의 삶이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성령 하느님: 진리이며 협조자 †
-박상대 신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1차 고별사(13-14장) 전체를 주도하는 가르침은 ①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새계명 선포, ② 아들의 자기계시적 정체성과 아버지와의 일치성 공개, ③ 성령의 약속과 오시는 성령의 정체성 공개로 요약되며, 이 주제들은 2차 고별사에서 더욱 심화된다고 했다.
특히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은 2차 고별사의 시작부분에서 단순히 제자들 상호간의 사랑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확충되었다. 이는 지난 부활 제5주간 중반부터 봉독된 복음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와 이 비유의 실제적인 의미를 통하여 입증되었다.(15,1-17) 농부이신 아버지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그 가지들인 제자들은 모두 같은 하나의 사랑으로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유(比喩)는 어디까지나 비유로 머문다. 그것은 비유(比喩)가 어떤 논리적 귀결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 간에 원하시는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에 비유하여 이론적으로 설명하셨고, 그 비유를 '아버지-아들-제자들' 상호간의 사랑의 관계로 정립하셨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문제는 이론(理論)이 아니라 실제(實際)와 현실(現實)이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아주 출중한 이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과 같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현실적으로 스승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가능성은 이론처럼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는 이론에 바탕을 둔다. 그렇지만 실제에는 항상 변수(變數)가 있기 마련이다. 제자들이 우선은 서로 간의 사랑을 통하여 스승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열매를 맺음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름을 방해하는 변수는 바로 세상 그 자체이다. 세상은 열매를 맺으려는 제자들에게 박해와 고통을, 심지어는 죽음까지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세상은 늘 구원을 갈망하면서도 불신(不信)을 내포하는 양면성의 변수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닥쳐올 변수(變數), 즉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예고하는 한편(15,18-25), 변수의 요소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을 마련해 주신다. 그 방책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發)하시는 성령이시다.(26절)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맞이할 고난(苦難)의 시간들에 함께 해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당하게 될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실 '협조자'이시며, 예수님에 관하여 세상에 무엇을 증언하여야 할지를 알려주실 '진리의 성령'이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靈)으로서 아들이 오셨던 바로 그곳으로부터 오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곧 제자들의 믿음(신앙)을 굳건하게 해 주실 분이다. 여기서 '믿음'(fides)이란 그 '내용'(fides quae; contents)과 그 '행위'(fides qua; act)를 함께 뜻한다. 예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을 믿는가' 하는 내용(內容)뿐만 아니라, '어떻게 믿는가' 하는 행위(行爲)도 동시에 포함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다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며, 어려움이 들이닥칠 때 한없이 약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예를 들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장담(요한 13,36-38)과 실제로 스승을 거듭 배반하는 베드로의 모습(요한 18,15-18.25-27)을 보라. 또 베드로의 예수께 대한 메시아고백이 메시아의 수난을 거부하는 장면(마태 16,13-23)을 보라. 제자들이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는 하나(27절) 세상을 향해 '무엇을' 증언(證言)해야 할지를, 지금까지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진리의 성령'께서 일러주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회당에서 쫓겨나고 급기야 죽임을 당하는 일을 겪어야 할 때(2절) '협조자' 성령께서 그들을 도와 끝까지 함께 해 주실 것이다. 이는 비단 제자들이 당하는 박해의 시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이시고 협조자이신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사도들을 기둥으로 삼아 건설된 교회가 현존하는 세상 끝날까지 활동하실 것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우리는 성령의 증인들이다. †
-두올묵상팀-
주님은 부활 제6주일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협조자이신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복음에서 그 성령을 보내주시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안쓰러웠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난 이후 그들이 두려워하고 불안해 할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똑같은 '영이신 성령'을 보내 주심을 확고하게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이 말씀에서 증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증인이란 사실을 확증하는 근거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성령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증인의 자격이 된 제자들은 주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용기를 회복하여 주님깨서 사명을 주신 복음전파를 더욱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보내주시기로 약속한 협조자, 성령은 장차 제자들이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겪게 될 '세상의 미움과 박해'에서 보호를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자자들에게 완전무결의 보호(사랑)을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다시한번 더 묵상합니다. 주님은 떠난 이후에 제자들의 모습을 걱정스러워 했습니다. 그래서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로 부터 나오는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26절). 그리고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당할 고난(苦難)의 시간들에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장차 주님을 대신하여 당하게 될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실 '협조자'이시며, 예수님에 관하여 세상에 무엇을 증언하여야 할지를 알려주실 '진리의 성령'이신 것입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靈)으로서 아들이 오셨던 바로 그곳으로부터 오실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 주실 분이십니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그들은 온 세상을 주님의 복음나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제자들에게 임하게 될 성령은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즉, 제자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제자들과 똑같은 사명감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우리들이라면 반드시 성령께서 임하실 것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당시의 제자들에게 한해서만 임하시는 한정적 특권이 아닙니다. 성령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이 땅을 그리스도 공동체화하는 어느 곳에서든, 우리를 위한 협조자로서 그리스도와 똑같은 역할을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와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또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의 은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따르고, 주님의 계명대로 실천하는 삶만 산다면, 뜨거운 성령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처럼 용기있게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을 체험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일까요? 봉헌금과 교무금을 많이 내는 걸까요? 성전건립기금을 많이 내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는 곳은 우리가 사랑하고 용서하는 시공간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잘아시다시피 사랑과 용서는 그분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계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복음에서는 사랑과 용서의 생활이 성령체험의 전제 조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복음 말씀이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용서라는 매우 평범한 사실에 대한 실천이며 영적 깨우침입니다. 주님은 공생활 기간 중 율법보다는 진정한 사랑 실천에 더 큰 비중을 두셨습니다. 계율을 따르기보다 사랑의 실천을 중히 여기셨습니다. 지키는 신앙에서 베푸는 신앙으로 우리들을 지금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신앙적 변화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신앙적 생활의 변화란 '나눔의 생활'을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깨어짐의 생활' '비움의 생활'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우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습니다. 내 것만 가득 안고 있다면 어찌 하느님의 것이 자리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도 역시 비우는 실천행위입니다. 미움을 비운 결과가 용서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변화가 이루어질 때, 우리 곁에서 맴도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성령이시여, 어서 오소서...라고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하늘을 행해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적 삶의 실상을 보면, 비움의 생활, 나눔의 생활에 너무 인색합니다. 비우지 않으면서 어찌 오시라고 하는지, 버리고 바치면서 오시라 한다면 어찌 아니 오시겠습니까? 다시말하지만 비우는 마음이 성령께 나아가는 첫 걸음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면 지금 끊으십시오. 때가 되면 포기할 것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 있다면 지금 포기하십시오, 언젠가는 용서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잇으면 지금 용서하십시오. 그것이 비우는 행위이며, 그런 당신에게 성령은 봄바람같이 당신의 가슴에 안기며 사랑을 줄 것입니다. 풍요를 주실 것입니다. 복을 풍족히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주님께서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께서는 변화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조용한 변화입니다. 자연의 변화처럼 소리없이 이루어지는 변화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낮이 길어지고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새 꽃이 피고 지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변화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변화는 우리 곁을 감싸면서 많은 것을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목적은 기쁨에 있습니다. 기쁨이 신앙의 본질임을 깨닫게 합니다. 기쁨 없는 신앙은 인생의 멍에가 됩니다. 여차하면 신앙적 삶을 짐으로 고통으로 바꾸게 합니다. 그러기에 냉담하고 돌아서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신앙이 기쁨보다 짐이 되는가요? 그 이유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섬김을 받으려 하기에 그런 것입니다. 신앙이 나를 지키고 내 곁에 보초처럼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언제까지나 기쁨은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기쁨의 신앙을 만나려면 부모님께 효도하듯 하느님을 섬겨야 합니다. 효도하면 자신 안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섬기면 신앙생활이 기쁨으로 바뀝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느님을 섬기는 첫 길은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의 기도생활입니다. 또 아침기도 저녁기도에 행하는 묵주의 기도생활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길은 성체조배, 성사생활이고 특히 영성체는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선행의 실천입니다. 사랑과 용서의 실천입니다. 이러한 생활이 우리의 삶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질적 변화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조용하게 자연스럽게 우리를 그리스도인등로 변화시켜 갈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의 체험을 느끼는 사람은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일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거룩한 성령께서 다시 한번 우리에게 오시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그런 날이 되도록 기도하고, 성사생활을 하고, 영성체를 하고, 그리고 선행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은 바로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바오로의 말씀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최근 며칠 동안 계속해서 들은 복음 말씀의 핵심은 "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계명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 성령의 열매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다? 방언을 하면 성령을 받은 것입니까? 안수를 받을 때 잘 쓰러지면 성령을 받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건 지친 영혼을 잠시 잠 재우는 은사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지쳐서 쉬지 않습니다. 그냥 누워있지 않습니다. 힘이 철철 넘쳐서 복음을 전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러 다닙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사로 용서하면 우리 안에 사랑이신 영, 부활하신 영, 진리의 성령이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힘차게 그리고 기쁘게 사십시오. 그 힘참과 기쁨 안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영으로 살아 계십니다. 이웃에게 선행을 베푸십시오. 그 선행 안에 주님의 영께서 함께 기뻐하십니다. 온유한 마음을 지니십시오. 그 마음 안에 주님 영의 평화가 머물 것입니다. 여러분들 안에 성령께서 맺으시는 열매를 보고 사람들이 주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십시오, 성령의 증인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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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