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공자(國家有功者)는 대한민국의 제도상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으로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등에서 그 적용 대상자로서 규정한 자를 말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유공자를 상이군경, 전몰군경과는 별개로 열거하고 있으나, 현행법은 후자가 전자에 포함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2023년 4월 30일 기준 78만8천여 명이 국가유공자 본인 및 유족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중장기복무제대군인은 10만8천여 명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국가유공자는 《독립유공자 : 순국선열, 애국지사,
군인이나 경찰·소방 공무원 : 전몰군경, 전상군경(이상, 소방공무원 제외), 순직군경, 공상군경
수훈자 : 무공수훈자, 보국수훈자
6·25전쟁 및 월남전 관련 : 재일학도의용군인, 참전유공자
4·19혁명 관련 : 4·19혁명사망자, 4·19혁명부상자, 4·19혁명공로자
공무원 : 순직공무원, 공상공무원
국가사회발전 : 특별공로순직자, 특별공로상이자, 특별공로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무슨 민주화유공자 얘기를 꺼내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 황당합니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면 여러 규정도 변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 국민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어야 할 일인데 더민당 의원을 비롯한 좌파에서 자신들에 대한 공적 수훈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래에 정말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기사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선진화의 길을 질주하고 있다.
개발도상국들의 롤모델이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허나 1960~1970년대 산업화 설계자들의 공로는 덜 평가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민주화 공로 평가와 대비된다.
더불어민주당은 민주화보상법과는 별개로 민주화운동 관련자 중 사망·행불·부상자 829명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법률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부산 동의대·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등의 반국가·반사회적 행위자까지 유공자에 포함해 민심의 회초리를 맞았지만 ‘운동권 셀프 특혜법’ 집착은 멈출 줄을 모른다. 국민의 운동권 피로감은 임계점을 넘었다.
국가발전 공로에 대한 편파적 평가와 예우는 산업화 설계자들의 발자취를 재조명해야 할 당위성을 높인다. ‘한강의 기적’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같은 국책연구소들을 설립해 기술자립도를 높이면서 수출주도·중화학공업 정책을 수립하고 기업들이 적극 참여하도록 한 덕에 가능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재무부·상공부 장관, 청와대 비서실장과 경제수석, KIST 연구원들의 고군분투는 하나같이 각본 없는 드라마다.
KIST 초대 소장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재미 한국과학자들에게 “나라를 먹여 살릴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호소하며 인재 유치에 힘을 쏟았다. 연봉이 4분의 1로 줄었지만 상당수가 귀국길에 올랐다.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애국심이다.
철강, 조선, 자동차산업을 기획·추진한 건 상공부 중공업 차관보를 지낸 김재관 박사다. 포스코,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1962년 독일을 방문한 박 대통령이 유학생들과의 만남에서 경제발전 조언을 구하자 그는 ‘한국의 철강공업 육성 방안’ 보고서를 전달한다. 박 대통령이 얼마나 감동했을까. 1964년 해외 유치 1호 과학자로 그를 초빙한 연유다.
‘수입대체냐, 수출주도냐’, ‘경공업이냐, 중화학공업이냐’. 한국 산업화 여정에는 큰 선택의 순간이 두 번 있었다. 1964년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1964∼1967년)이 수출주도 전략의 시동을 건다. 부존자원이 부족한 나라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가 천거한 박충훈 상공부 장관과 김정렴 차관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전략 변경은 주효해 박 장관은 그해 11월 수출 1억 달러 달성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청와대 비서실장(1969∼1978년)이 된 김정렴은 “박 대통령이 일본의 경제발전 과정을 잘 알았기에 산업화 전략의 전환이 가능했다”고 회고했다.
만일 수입대체 전략을 고수했다면? 지금도 한국은 후진국 대열의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국가들의 저성장이 단적인 예다. 문제는 경공업 제품만으로는 수출 증대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돌파구가 필요했고 1973년 중화학공업화 정책으로 전환한다. 중화학공업의 불씨를 지핀 김학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1969~1972년)의 역할이 컸다. ‘내 과외선생’으로 불릴 만큼 박 대통령의 신임이 컸던 그다.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1974∼1978년)은 ‘한강의 기적’의 일등공신이다. 1,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던 시절에도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10%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또 철저한 수출 위주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통해 1977년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는 데 앞장선다.
1968년 조선·철강·화학·기계·전자분야 중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한국 조선업의 아버지’로 불린 신동식 초대 청와대 경제수석(1968∼1969년), 박 대통령이 “국보”라고 극찬한 오원철 청와대 경제수석(1971~1979년)의 공로도 기억돼야 한다.
오 수석은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의 발전계획을 추진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는데 국산무기 개발 사업은 K방산의 밑돌이 됐다.
세계 최빈국을 산업화의 궤도에 올려놓으려 이들이 흘린 피와 땀, 눈물은 순교자들의 그것에 비견된다. 선진국의 풍요를 누리는 우리 국민은 산업화 설계자들의 헌신을 잊어선 안 된다.
한국은 국민소득 4만·5만 달러 시대를 속히 열어야 한다. 정책 당국자들이 산업화 역사를 되새겨 미래를 열어갈 성장전략과 노하우, 지혜를 얻길 바란다.>세계일보. 김환기 논설실장
출처 : 세계일보 : [김환기칼럼] 산업화 설계자들 공로 잊지 말아야
정말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은 자신의 공적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애국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무척 많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면 자신들이 드러나지 않아도 언젠가 그 공이 스스로 드러날 것입니다. 하지만 순금이 아닌 금속에 금칠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금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국민소득이 200달러도 되지 않던 가난한 나라를 1,000달러, 10,000달러로 짧은 시간에 바꿔 놓은 사람들은 납을 황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사보다 더 노력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단지 몇몇 사람의 노력으로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밤잠 안자며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 국민들이 합심을 했고 그 결과가 오늘날로 이어진 것입니다.
자신들의 한 일을 나라를 위해 일했다며 국민의 세금으로 우대해달라는 사람들은 말로 황금을 만드는 가짜 연금술사들입니다.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서 고육지책을 쓴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무슨 애국자로 둔갑을 시키겠다니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판에는 가짜 연금술사가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