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은혜로운 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기드온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 요한1서 3:23 찬송:511장
말씀: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중생한 하늘나라의 백성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랑에 감사하며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미움을 경계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미움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영혼의 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움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 늘 기도해야 합니다.
타락한 본성이 미움입니다. 아담이 미움을 갖게 되자 책임을 하와에게 돌렸습니다. 타락하여 미움을 가진 하와는 책임을 뱀에게 돌렸습니다. 누구든지 미움을 갖게 되면 모든 잘못의 원인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저주합니다.
미움은 파멸을 일으킵니다. 가인은 미움을 갖고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 이었습니다.이때로부터 인류는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전쟁하기 위해 평화를 원했습니다.
평화를 위한 평화는 인류에게 없었습니다. 인류역사는 피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얼마나 서로 미워하고 헐뜯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움은 파괴와 살인의 근본입니다.
누구든지 미움을 갖게 되면 파괴적이 되고 분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미움은 우리에게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빼앗아 갑니다. 이 때문에 미움을 가진 사람은 부정적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미움이 없는 곳에서 살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 가나 미움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미움의 불길이 활활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미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반드시 시험에 들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미움에서 저를 건져주옵소서』라고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사랑은 이해 받으려고 하지 않고 이해합니다. 사랑은 받으려고 하지 않고 베풉니다. 사랑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사랑은 폐쇄가 아니라 개방입니다. 사랑은 사망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께 기도하여 능력을 얻으면 그 능력으로 미움을 극복하고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서 건져주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려는 미움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할 때 우리는 미움의 유혹을 이기고 강건한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요한1서 3장15절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최고의 은사인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셔서 사랑을 실천하셔서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해 지시고 이웃과 사회를 맑고 밝게 만드는 사랑의 사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가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이해의 공감대 베드로전서 4:8 찬송:197장
말씀:사랑은 빛이며 온기이며 생명과 기쁨입니다. 크리스천은 이 사랑을 갖고 가정과 사회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이해를 동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율법으로 정죄하지 않고 이해하시며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죄의 현장이 용서의 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정죄의 비극이 이해의 행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놀라운 변화는 단지 2천년 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이 역사하는 곳에는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인간을 가치 있게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이해가 소멸되고 율법만 남는 가정과 사회는 파멸합니다. 인간은 완전할 수없습니다. 누구에게나 허물이 있고 약점이 있습니다. 이 허물과 약점을 정죄와 심판과 저주로만 해결하려고 하면 큰 불행이 야기됩니다.
우리는 타인의 허물과 약점을 사랑으로 이해하고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삶이 정말 행복하고 창조적인 삶입니다.『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마태복음 9장2절에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저희를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며 살아가면서 많은 잘못을 저지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정죄받고 심판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이 율법주의자가 되어 타인을 매도한다는 것은 지극히 모순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관을 갖고 있습니까. 율법으로 타인을 봅니까. 그렇다면 불행한 일이요, 비극입니다.
성도는 타인을 이해와 사랑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증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면 이웃을 사랑할 힘과 용기가 생깁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을 생각할 때 『주님, 나 같은 죄인을 율법으로 처단하지 아니하시고 사랑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사랑,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해야 합니까. 주님의 계명과 사랑을 이웃에 실천하며 살겠습니다』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지 않고 무조건 율법을 준행하라고 하셨다면 인간은 절망감과 함께 반발을 느껴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죽으시기까지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사랑이 변화의 위대한 힘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정죄가 아니라 이해와 사랑입니다 .이해와 사랑이 역사할 때 개인이,가정이, 이웃이, 사회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배워서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위대한 보혈의 능력 히브리서 9:22 찬송:202장
말씀: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4백여년 동안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양을 잡고 그 양의 피를 대문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그리고 이 양의 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날 밤 갑자기 심판을 내리는 하나님의 천사가 애굽 온 땅을 운행하실 때 문설주에 피를 바르지 않은 집집마다 들어가 바로 왕으로부터 맷돌가는 여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장자는 모두 죽였습니다.
그러나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해방 받아 가나안 복지로 향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요단강에 있는 요한에게 나아가실 때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을 받아들일 때, 그리고 그 피를 우리 양심의 좌우 문설주에 바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구원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들에게 죄 속함과 사하심을 베풀어 주십니다.
성경 로마서 3장23절에 분명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히브리서 9장22절에는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로운 자격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구주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의롭게 살아야 될 것을 알면서도 힘이 없어 의롭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죄 없는 자로서 우리 죄와 불의와 추악과 절망과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를 힘입어야 합니다. 주의 피에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찬송가 202장의 가사처럼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이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 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주님의 귀중한 피는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을 주시고, 눈보다 더 희게 맑히는 것이며, 정결한 마음을 얻게 되고, 부정한 모든 것 맑히시 날마다 우리에게 찬송을 주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귀중한 보혈의 피의 능력이 임하므로 능력 얻고 권능 받아 찬송과 감사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가시에 찔려 괴로울때 고후12:10 찬509장
말씀 :우리들은 간혹 이러한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체험도하고 구원의 확신을 얻었는데 왜 나의 생활에서 가시가 떠나지 않을까』
그러나 이와같은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중의 사도인 바울 선생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나라에도 다녀 온 위대한 사도였지만 그의 약한 것들과 능욕과 핍박과 곤란과 궁핍 당한 것이 그에게 가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선생은 이와같은 가시가 너무 괴롭히므로 하나님께 가시를 옮겨달라고 세번이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세번째 기도할 때 주님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말씀은 가시가 오면 하나님의 은혜도 다가 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여러가지 가시들이 우리와 우리가정에 우리가 사는 사회에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가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성도는 인생의 가시를 통해 하나님만 자랑하고 의지함으로 신앙의 유익을 얻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담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마귀의 꾀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고 나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시와 엉겅퀴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등지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이생의 자랑을 따라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가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예루살렘을 떠나서 여리고를 향해 내려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난 것처럼 성도가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면 주님께서 우리들의 생활과 육체에 사탄의 사자 즉 약한 것들, 능욕, 궁핍, 핍박, 곤란과 같은 가시를 보내어서 우리를 찌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와같이 가시에 찔려 괴로울 때 우리는 바울 사도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시를 보내십니다. 육체의 가시는 우리를 멸하려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가시에 찔려 고통당하는 분이 있습니까? 분명 우리에게 여러 가지 가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고 그 가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발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보혈은 희망의 보증 눅 22:20 찬송 : 210장
말씀:오늘날 우리의 환경은 너무나 부정적인 것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부정적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과 느낌은 우리로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에게 신념을 가지고 살아갈 힘을 줍니다. 왜냐하면 보혈은 피의 언약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부터 피로 맺은 언약은 대단히 중요한 관계 계약의 조건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통해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이 잔은 내 피로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피의 언약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로 맺은 언약관계에 있는 사람은 결코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이 계약을 맺은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지명도가 높은 사람과 형제의 계약을 맺어도 기쁘거늘 하물며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과 부자(부자)의 계약을 맺는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보혈의 언약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담대함이 생깁니다.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있어 예수님의 보혈은 희망의 보증이요, 원천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는 희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마귀에게는 우리의 희망을 죽이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열등의식이요, 좌절감이요, 죄책감입니다.
이런 요소는 우리의 희망을 죽이며 우리를 처절하게 억압당하고 고통에 처하는 존재로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그 언약의 보혈을 심령 속에 받아들이면 이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요소가 다 물러나고 심령 속에서 희망의 빛이 찬란하게 비취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보혈은 부활의 새 생명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에게 열등의식 대신 용기를 주며, 좌절감 대신 생명력을 주고, 죄책감 대신 의의 의식을 줍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위대한 인격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과연 저를 사랑하실까요? 저는 소외된 감정을 가지고 불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탄식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보혈을 심령 깊이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피 흘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주의 보혈을 의지하여 항상 성결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한 가족으로 부르심 빌립보서 2:13 찬송:204장
말씀: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태양과 달, 이름도 알 수 없는 별 너머에 계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기록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계셔서 우리 안에서 행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 생활하는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한 가족이 되어 산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과 함께 대화하며 살기위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했습니다.
이런 정황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한 가족으로 불러 들이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반역한 인류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믿는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고 당신과 한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여 믿음의 고백을 하는 인생이 참으로 복된 존재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이런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그러나 혼자 살겠다고 하며 하나님 곁을 떠나는 인생은 스스로가 홀로 서야 합니다.
마치 탕자처럼 아버지의 곁을 떠나 허랑 방탕한 생활을 하며 홀로 서기를 했지만 물질도 건강도 다 잃고 너무 배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 했지만 그것도 주는 사람이 없어 못 먹고 비참하게 살았던 것을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없는 인생의 비극은 말로 다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인간으로 당하는 비극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고고한 울음으로 태어난 인간은 인생의 짐을 홀로 지고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아무리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고 친구가 있어도 그들과 인생의 짐을 나눌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은 홀로 죽음을 맞는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안에 있으면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20절을 통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의 인생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돌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홀로 져야 할 짐을 져주시며 죽은 다음에도 영생의 길, 천국의 길로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원하십니까? 지금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내어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큰 상급과 영광이 예비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