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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마음을 전달하는 꽃들, 카네이션과 푸크시아
5월이면 우리는 특별히 성모님을 기리고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또한 부모님이며 스승님처럼 고마운 이들에게, 자녀처럼 사랑하는 이들에게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도 표현한다. 그런 표현을 할 때 처음으로 준비하는 것은 대개는 꽃일 터이다. 그러한 꽃으로 카네이션과 푸크시아를 생각해 본다.
카네이션, 사랑의 꽃
꽃잎의 끄트머리 가장자리가 핑킹가위로 자른 것처럼 뾰족뾰족하고, 그러한 꽃잎들이 다발로 모였으되 어딘가 헝클어져 보이며, 거기에서 정향(클로브)처럼 자극적이면서도 상쾌하고 달콤한 향기가 풍겨 나오는 꽃, 1월의 탄생화이자 결혼 1주년을 기념하는 꽃, 장미・튤립・국화와 더불어 가장 친숙하고 대중적인 꽃, 스페인・모나코・슬로베니아의 국화(國花)이자 미국 오하이오 주의 주화(州花)인 꽃, 바로 카네이션(carnation)이다. 남부 유럽과 서아시아가 원산지인 이 꽃을 인류는 이미 2천여 년 전부터 재배해 왔다.
카네이션의 학명은 디안투스 카리오필루스(Dianthus Caryophyllus)다. 디안투스라는 이름은 디아나 여신의 신화에서 유래한다고 어떤 이들은 말한다. 어느 날, 사냥의 여신 디아나가 사냥하러 갔다가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피리를 부는 목동을 만났다. 화가 나 있던 디아나는 그날 사냥을 망친 것이 목동의 연주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고는 난폭하게 목동을 공격하여 눈알을 뽑았다. 그런데 목동의 눈알이 떨어진 곳에서는 목동의 억울한 피 흘림을 비난이라도 하는 듯이 빨간색 카네이션이 솟아났다. 그런 곡절로 해서 디아나 여신의 이름 또는 그리스어로 ‘신’을 뜻하는 디오스(dios)와 ‘꽃’을 뜻하는 안토스(anthos)가 합쳐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꽃은 ‘천상의 꽃’, ‘신들의 꽃’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이 꽃이 카네이션이라고 불리게 된 데에도 몇 가지 설이 있다. 어떤 이들은 라틴어로 ‘왕관’을 뜻하는 코로나(corona) 또는 ‘대관식’을 뜻하는 코로나티오(coronatio)에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에서 의식용 왕관을 이 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라틴어로 ‘살’[肉]을 뜻하는 카르니스(carnis) 또는 그리스도의 강생(육화)을 뜻하는 인카르나티오(incarnatio)에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꽃의 품종이 다양해지기 전에는 그 색이 본래 분홍색조(살의 색)를 띠었기 때문이다.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의 풍습에 따르면, 결혼식 날 신부는 카네이션의 일종인 핑크 꽃을 손에 들었고, 신부를 찾아 나선 신랑은 손에 들려 있는 핑크 꽃을 보고 자기 신부를 알아보았다고 한다. 이 풍습에서 유래하여 핑크는 결혼의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이러한 관습이 오늘날에도 이어져서, 갓 결혼한 신혼부부들은 손에 분홍색 카네이션을 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카네이션은 순수한 사랑과 헌신을 상징하며 ‘사랑의 꽃’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나아가 그 색깔에 따라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 상징성과 의미를 지닌 꽃으로 사랑받게 되었다.
- 카네이션을 드신 성모님.
빨간색 카네이션: 지순한 사랑, 경탄, 정열, 우정.
분홍색 카네이션: 결혼, 보호, 힘, 치유, 어머니의 영원한 사랑, 감사, 감사하는 마음, 기억(추억).
흰색 카네이션: 정결, 덕행, 순수함, 행운. 장례 때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해 평화와 안식을 비는 뜻으로 흰색 카네이션 꽃다발이나 꽃상자를 바치기도 했다.
노란색 카네이션: 실망, 거절, 무시.
보라색 카네이션: 변덕스러움, 이기적인 성품. 프랑스에서는 장례 때 전통적으로 이 꽃을 사용했다고 한다.
줄무늬 카네이션: 거절.
녹색 카네이션: 녹색 물을 들인 것을 말하는데, 아일랜드에서는 나라의 수호성인인 성 파트리치오 축일을 축하할 때 흰색 카네이션과 한데 묶은 다발을 사용한다.
한편, 그리스도교에는 예수님의 탄생하셨을 때 카네이션이 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힘겹고 고통스럽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성모님이 눈물을 흘리셨는데, 이때 성모님의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서 카네이션이 솟아나오더니 분홍색 꽃이 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이이야기들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76년에 그린 ‘카네이션을 드신 성모님’이란 그림을 그렸다. 그리스도교에서 빨간색 카네이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형과 은총을 상징하고, 분홍색 카네이션은 성모님의 사랑을 상징한다.
푸크시아, 성모님의 귀고리
원산지는 남아메리카이지만 중앙아메리카에서 타히티, 뉴질랜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분포하는 도금양목 바늘꽃과의 소관목인 푸크시아는 그 품종이 무려 3천 가지나 된다. 푸크시아에는 곧추 서서 자라며 덤불을 이루는 직립형과 덩굴 줄기를 길게 뻗으며 그 끝에서 꽃을 피우는 덩굴형이 있는가 하면, 늘 푸른 것도 있고 낙엽이 지는 것도 있다. 잎의 모양새도 품종에 따라 전혀 다르다.
푸크시아를 발견한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 꽃에 대해 처음으로 기록한 이는 18세기 프랑스의 선교사이자 식물학자인 샤를 플루미에(Charles Plumier) 신부다. 플루미에는 이 식물을 발견하고는 자신이 존경하는 동료 식물학자 레온하르트 푸크스(Leonhart Fuchs)의 이름을 따서 푸크시아 트리필라(fuchsia triphylla)라고 명명했다. 플루미에가 푸크시아 트리필라의 씨앗을 영국으로 보낸 뒤로 많은 품종들이 발견되었고 또한 교배종들도 만들어졌다.
영국에서 빅토리아 왕조 시대에는 푸크시아가 매우 인기 있었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때 시들해졌다가 1950년대부터 ‘신뢰할 수 있는 사랑’을 상징하는 꽃으로 다시금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푸크시아를 선물함으로써 그런 마음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늘어져서 대롱거리는 푸크시아의 꽃은 단아한 펜던트형 귀고리처럼 생겼다. 이 모양과 관련해서 교회에서는 이 꽃을 ‘성모님의 귀고리’라고 부른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소년 예수님이 소꿉놀이를 하시다가 이 꽃을 발견하고는 그 꽃송이들을 따다가 어머니 마리아의 귀에 걸어 드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효심 이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꽃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핏방울 또는 성모님의 눈물방울을 연상했다.
[전례, 그 능동적 참여] 성모님에 대한 신심 행위 - 성모성월
많은 이들이 5월이 왜 성모성월이 되었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원한다. 하지만 그 답을 명백히 제시하는 가르침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성모성월에 대한 역사적, 전례적, 신학적 근거의 부재로 5월을 성모성월로 지내는 관습과 관련하여 이를 폐지하자는 제안이 적지 않다고 교황청은 언급한 바 있다.
5월의 푸르름과 싱그러움을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에 적용시키는 것은 대중신심의 자연적 발상이라고 생각된다. 적도 아래인 남반부의 경우 계절이 반대이기에 11월을 성모성월로 지내는 교회도 많다. 사실 사막지역이나 남반부 지역은 5월 성모성월에 불리는 성가를 부르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기후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모성월인 5월은 단순히 북반구 지역 교회에서 봄의 싱그러움을 성모님께 봉헌하는 계절 축제로서의 성격에서 기인한 것일까? 이러한 성모성월에 대한 감성적이며 신학적 근거 없는 계절축제로서의 성격은 당연히 여러 문제점을 내포한다. 경신성성이 반포한 ‘대중신심과 전례에 관한 지도서’는 위와 같은 문제의 해결책으로 191항에서 성모성월의 내용을 전례주년의 해당시기와 일치시키는 데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5월은 대략 50일의 부활시기와 겹치므로 이 시기에 하는 신심 행위는 성모님의 파스카 신비 참여와(요한 19,25-27 참조) 교회가 시작된 성령 강림 사건을 (사도 1,14 참조) 강조한다. 성모님께서는 성령의 기도 아래 부활의 새로움에 동참하는 교회와 함께 걷고 계신다. 부활시기 50일은 또한 그리스도교 입교 성사 거행과 신비 교육을 위한 시기이기도 하다. 5월과 관련된 신심 행위들은 영광스러운 천상 모후께서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거행을 통하여 지금 여기 지상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쉽게 강조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위의 내용을 분석하여 간단히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초대 교회의 탄생에서 성모님의 역할은 지대해
5월이 성모성월이 되는 전례적이며 성서적인 근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성모님의 파스카 신비 참여이다.
성모님의 파스카 신비의 참여는 십자가의 예수그리스도 아래 어머니로서의 모습이며,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숨을 거두시기 전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선언하신다. 이것은 단순히 육친의 어머니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한 언급이 아니라 온 인류를 당신의 어머니의 자녀로 삼으시는 선언이었고, 초대교회는 이러한 선언을 잘 이해하고 마리아를 사도들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로 호칭하였고, 이를 위한 공경을 하였으며 자연스럽게 대중신심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5-27)
둘째는 교회가 시작된 성령강림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직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까운 지역의 어느 위층 방에서 모여 함께 기도하였는데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성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자기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3-14)
신약성경의 원문인 희랍어 원문을 분석해 보면 확실히 “예수님의 어머니”이란 단어는 희랍어 문장의 구조와 단어 사용에 있어서 강조됨을 엿볼 수 있다.
제자들 이외에 성령 강림 전 기도모임에 참여한 구성원을 지칭하면서 세 그룹이 나타나는데 첫째는 여러 여자, 둘째는 예수님의 어머니, 그리고 셋째는 그분의 형제들이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제외하고 모두 일반명사인 여자들, 형제들로 표현하였다. 여러 여자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의 어머니는 독립적인 단수명사이며 고유명사화 하기 위해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구체적으로 진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성경원문의 분석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초대 교회의 탄생에서 성모님의 역할에 대한 교회사적 증거는 차고 넘친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성자의 잉태 시에도 천사로부터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라고 인사를 받으셨다. 성령 강림 전 골방에 모인 제자들! 두려움과 목자 잃은 양처럼 예수님을 이젠 볼 수 없다는 상실감에 힘들어 하던 제자들을 하나로 모으시고, 그 중심에서 기도하신 사도들의 모후이신 어머니는 당신의 신적모성을 발휘하고 계시는 것이다.
성경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천사의 아룀서부터의 사건을 곰곰이 생각하고 그것을 마음에 새겼다고 전한다. 분명 마리아는 성령 강림 전 기도모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 강림에 대해 제자들에게 언급하였을 것이고, 믿음의 여인이자 성령의 짝이신 당신께서 믿음으로 함께 하셨던 것이다.
성모성월은 파스카 신비와 성령 강림에 나타난 마리아의 구원사업 기억해
이제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분이셨던 것처럼 마리아는 우리와 함께 기도하시는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이러한 당시의 다락방의 모습을 “한마음으로”라고 표현한 것이다.
교회의 탄생인 성령 강림의 장소에는 사도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과 형제들과 사도들이 함께 했던 것이다. 즉 평신도들이 함께 했다. 마리아는 신앙에 있어 또 다른 여신이 아니라 구원역사의 현장에서 모범적인 위치에 있었던 신앙의 모델로서의 평신도였다.
오늘날 성모성월의 구원사적이며 전례적 근거를 재조명하는 위와 같은 교회 가르침은 널리 전파되어야 한다.
따라서 성모성월은 푸르는 오월의 싱그러운 자연경관에 따른 미학적 심성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파스카의 신비와 성령 강림에서 나타난 마리아의 구원협력 사건을 기억하는 전례주년에 근거한 두 사건을 기념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전례 영성 - 파스카 신비] 성체성사, 파스카 신비의 원천이자 정점
제대와 감실의 싸움(?)
「제대와 감실의 싸움」. 고 김인영 유스티노 신부가 분도출판사에서 전례에 관해 낸 소책자의 제목이다. 감실에 모셔진 성체께 지극한 존경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상대적으로 성찬례의 중심인 제대와 말씀 전례의 중심인 독서대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지나치다 할 정도로 적은 것이 문제”라는 말을 그는 하고 싶었던 것이다.
성체성사가 우리 신앙의 중심이라고 말하면서도, 공동체의 성찬례 거행보다는 성체 조배에서 예수님과 하나되고자 더욱 애쓰는 신앙인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말씀을 실천하기보다 는 성체 조배를 더 좋아하고, 행동하는 신앙보다는 미사 참석의 의무를 더 강조할 것 같다.
성체 신심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중세 시대라면, ‘죄인인 내가 어찌 성체를 모시겠나?’라며 영성체는 일 년에 겨우 한 번 주님 부활 대축일에 할 것이다. 또 일 년 열두 달 성체 공경으로 만족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왜곡된 신심을 가지고 미사와 성체조배에 열심일 것 같다.
성체성사의 본뜻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은 감실의 위치가 성당의 중심인 제대와 떨어져 “성당의 한 부분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참으로 고상하고 잘 드러나고 잘 보이면서도 아름답게 꾸민 곳에, 또한 기도하기에 알맞은 곳에 마련해야 한다.”(314항)고 감실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강조하는 표현도 잊지 않는다. 사실 지극한 성체 신심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체성사의 의미를 오직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의 현존에서만 찾는 것이 문제다.
성체성사의 핵심은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성변화(聖變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체와 성혈로 드러나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 즉 파스카 신비에 있다”(「제대와 감실의 싸움」, 187쪽).
우리는 제대에서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실 때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거룩한 제물로 바치고자 결심한다. 성찬례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몸을 받아 모실 때마다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동참시키는 것, 여기에 성체성사의 본뜻이 있다.
파스카 잔치
1세기 이래 성찬례를 가리켜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라고 불렀다. 감사행위란 뜻의 이 단어는 성체성사가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는 만찬임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사실 신약 성경에서 성체성사를 가리키는 가장 오래된 표현도 식사와 관련된 ‘빵의 쪼갬’ 또는 ‘주님의 만찬’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성체성사의 기원이 희생 제사이기 이전에 일차적으로는 ‘전례적인 식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일반적인 식사가 아니었다. 구세사에 “단 한 번”(히브 10,10) 일어났던 사건에 ‘지금 여기서’ 참여하려는 데 필요한 식사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없애시려고 당신의 몸을 “단 한 번” 희생 제물로 바치신 파스카 사건을 기억하며, 그분의 몸을 통하여, 그분의 몸과 함께, 그분의 몸 안에서, 그분의 몸을 먹고 그분의 몸과 하나 되는 아주 신비로운 식사 전례였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먹고 마심
성찬례에서 주님의 몸을 모시는 영성체는 “현재 거행되는 희생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85항)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와 동시에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시는 영성체에 참여”함으로써 “모든 이가 한 몸을 이룬다는(1코린 10,17 참조) 사실을 드러낸다”(83항).
파스카 잔치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고 사랑의 교회를 이루게 된다.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2003년 회칙 제목)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로마 미사 경본」의 감사 기도 제2양식에서 사제는 성찬 제정문을 반복하고 “신앙의 신비여!” 하고 외친 다음 성찬례 거행의 목적을 이렇게 요약하여 기도한다
“아버지, 저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봉헌하나이다. 또한 저희가 아버지 앞에 나아와 봉사하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성령으로 모두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
이 기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찬례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여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봉헌하는 ‘파스카 잔치’라는 것이다. 둘째, 사제 혼자서 봉헌하는 게 아니라 “저희가 아버지 앞에 나아와 봉사하게 하시니 감사”하는, 곧 공동체의 감사 행위라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실 때 성령께서 영성체에 참여한 이들을 모두 한 몸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성체성사 거행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참된 몸인 교회를 자라나게 한다.
생명의 잔치 밥
‘성찬례에서 축성된 빵도 분명히 그리스도의 참된 몸이고, 거룩한 성찬의 희생 제사에서 실제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다.’(전례 헌장, 2항 참조)라는 말은 맞다. 하지만 공동체와 함께 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만찬이 아니라면, 그것은 요즘말로 나 홀로 먹는 ‘혼밥’과 같다. 주님의 몸을 남들 모실 때 함께 모시지 않고 오랫동안 조배한 뒤 따로 혼자서 모시면, 그 밥은 ‘찬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성찬례를 거행하는 ‘지금’ 나누어 먹으면, 우리가 모시는 성체는 천상의 양식이 아니라 ‘여기’ 지상에서 가난한 이들이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먹는 ‘더운밥’이 되고, 함께 먹는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잔치 밥’이 된다.
참여하는 만큼 보인다, 파스카 신비!
성찬례는 신자들의 “의식적이고 능동적이고 완전한 참여”(전례 헌장, 14항)를 요구한다. 형제들과 모여 서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며 평화를 빌어 주는 참여 속에서만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 신비의 현재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능동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에 성체성사는 파스카 신비의 원천이자 정점이요, 나아가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교회 헌장, 11항)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동안, “십자가에서 바치셨던 희생 제사를 지금 사제들의 집전으로 봉헌하고 계시는 바로 그분께서 집전자의 인격 안에 현존하시고, 또한 특히 성체의 형상들 아래 현존하시기”(전례 헌장, 7항) 때문이다.
[전례 톡톡] 개신교 신자들은 정말 성사를 인정하지 않나요?
개신교회들이 거부하는 성사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죠? 가톨릭 신자들이 볼 때 그 성사들은 전부 은총과 인간의 성화에 효과적인 표지들인데 말이죠. 게다가 가톨릭 신앙이 참된 종교라면 성사가 없는 교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나요? - 카탄자로에서 살바토레
이 물음은 아주 한참 늦게 도착한 편지, 아니 기한이 지나서 받은 편지와 같아요. 우체국의 고질적인 비효율성 때문이 아니라 변명의 여지 없는 발송인의 실수지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으로 교회들 간의 관계에 새로운 지평이 열렸지요. 그런데 이분은 이를 알지 못하셨네요. 여기 문헌을 보면 개신교회에 어떻게 다가갈지, 그들의 신앙 교의를 어떻게 봐야할 지에 대해 정확한 지시가 나와 있는데 말이죠.
교회들 간의 더 많은 대화
우선 방법을 보죠. 공의회의 출발점은 우리 독자께서 보시듯 개신교회의 분열 요소나 부족한 점들이 아니라, 우리를 일치시키는 점, 아니 그 교회들 또는 거기서 개혁하며 나온 교회 공동체들의 현실이에요. 이러한 구분은 개신교 때문인데 그 안에 하위적으로 또 쪼개져 있기 때문이지요. 이들에게도 구원의 도구들은 있어요. 그래서 공의회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3항은 “이 갈라진 교회들과 공동체들이 비록 결함은 있겠지만 구원의 신비 안에서 결코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그 교회들과 공동체들을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죠. 여기서 하위 공동체들을 가리킨 ‘구원의 수단’이라는 구절에 주목하세요. 이는 분명 그 공동체들을 존경과 신뢰로 높이 평가한다는 초대인 거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자세가 아니라 형제적 친교라는 큰 그림 위에서 그렇게 하는 거죠. 비록 “그 수단의 힘이 가톨릭 교회에 맡겨진 충만한 은총과 진리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라고 믿기는 하지만 말이죠.
신앙의 내용에 관해서 공의회는 “대화를 더욱 수월하게 시작할 수 있도록, 이 대화의 토대와 격려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할”(일치 교령 19항) 몇 가지 요점을 제시하지요. 나열하면 세 개예요. 첫째, 교회적 친교의 중심이자 원천인 그리스도께 대한(또한 삼위일체께 대한) 공통의 신앙 고백이고, 둘째, 복음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라는, ‘성경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사랑과 존경’이며, 끝으로, 성사 생활인데, 일치 교령 22항이 바로 이 성사 생활을 다루며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강조하고 있어요. 즉 세례성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이해는 공통이고 완전하다는 점, 그리고 성체성사 또는 ‘거룩한 만찬’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이 만찬이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는 삶을 상징한다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에요. 그리고 사제의 성찬례 집전에 필요한 성품성사의 결여를 지적하고는, “그러므로 주님의 만찬, 다른 성사들, 예배, 교회의 직무에 관한 교리를 대화의 주제로 삼아야 한다.” 하고 끝을 맺어요.
루터가 거부한 것
성사란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은총의 효과적인 표지라는 생각은 중세 시대 때(12-13세기) 생겼어요. 이 기준으로 성사 예식이 일곱 개로 고정됐지요.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은 세례와 성찬을 제외하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고 확실히 증명할 수 없는 성사 예식들에 대해서는 성사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이런 성사의 개념을 거부했어요. 성사를 객관적이자 거의 기계적인 하나의 실재로 보는 걸 거부했던 거죠. 그 대신에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에서 일차적으로 본질적인 어떤 것을 보았어요. 말씀은 약속에 따라 성취되고 믿음을 통하여 받아들여지지만, 표지는 믿음을 가리키거나 알려주는 가치를 지닌, 오직 부차적인 것이라 본 거죠.
개혁 교회 공동체들 사이에 분열들이 좀 있긴 해도, 이들은 우리의 성사 예식들을 거의 다 갖고 있어요. 비록 가치와 해석의 수준이 우리와 똑같지는 않아도 말이죠. 그래서 성령의 선물도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견진성사와 연결시키지만, 개신교 신자들은 세례 때 받는다고 보아요. 세례란 옛 교회 전통에 따르면 물과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거니까 맞죠. 죄의 용서도 존재해요. 이는 참회 그리고 주님께서 하신 용서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이루어지죠. 혼인에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약의 가치를 상기시켜요. 성품성사는 인정되지 않지만 말씀의 직무, 전례의 직무, 그리고 사목 직무는 알고 있어요. 이 직무는 목사가 실행하며, 목사는 공동체가 지명하고 교회 예식을 통해 세워져요.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성사의 의미와 숫자를 본다면, 지금 우리는 가톨릭 시각에서 분명히 멀리 떨어져 있어요. 그러나 저 교회들에도 성사 생활이란 게 있음을 부정할 순 없어요. 다른 한편, 가톨릭 교회에서도 공의회를 통해 성사 개념의 확장이 있었지요. ‘은총의 효과적인 표지’라는 외견상 너무 좁은 정의를 극복한 거죠. 공의회 문헌들은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교회 헌장 1항)이며 ‘위대하고 놀라운 성사’라고 말해요. 바로 그리스도가 원성사(原聖事)다. 이렇게 보는 거죠. 이어서 성사들은 믿음의 표지들로 제시됐고 소위 ‘말씀의 전례’ 부분을 거행하는 가운데 풍성해졌어요. 또한 성사의 내용도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파스카에 집중됐으며 더 이상 그저 은총이라 하지 않았고, 성사의 교회적 차원도 정당한 평가를 받았어요. 마침내 오늘날엔 성사를 구원과 은총의 도구로 마치 영원한 구원을 위한 안정통행증으로 보지 않아요. 그보다는 오히려 구원에 참여하여 성장하는 의미를 지닌 상징적 행위로 보아요. 즉,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인도하고 완성에 이르기까지 걸어갈 은총을 주는 것, 여기에 성사의 뜻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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