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 베드로 크리솔로고(7.30)
베드로 크리솔로고(7.30)
성인명 베드로 크리솔로고 (Peter Chrysologus)
축일 7월 3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대주교, 교회학자
활동지역 라벤나(Ravenna)
활동연도 +450년경
같은이름 그리솔로고, 베드루스, 크리솔로구스,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에르, 피에트로, 피터
성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Petrus Chrysologus, 또는 베드로 크리솔로고)는 380년경 이탈리아 북부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 지방 볼로냐(Bologna)와 라벤나 사이에 있는 이몰라(Imola)의 포룸 코르넬리(Forum Cornelii)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몰라의 주교인 코르넬리우스(Cornelius)에게 세례를 받았고, 그의 도움으로 라벤나와 볼로냐에서 문학과 법률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부제품을 받은 후 코르넬리우스 주교를 보좌하였다. 그는 라벤나의 요한(Joannes) 주교가 선종한 후 교황 성 첼레스티노 1세(Coelestinus I, +432년, 7월 27일)에 의해 431년경에 또는 교황 성 식스토 3세(Sixtus III, +440년, 8월 19일)에 의해 433년경에 라벤나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교황 성 식스토 3세는 환시 중에 사도 성 베드로(Petrus, 6월 29일)와 라벤나의 초대 주교인 성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7월 20일)를 보았는데, 그들이 라벤나의 차기 주교가 될 젊은 베드로를 보여주었고, 이몰라 출신의 성 베드로를 포함한 라벤나 일행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를 알아보고 주교로 축성했다고 한다.
당시 라벤나는 서로마 제국의 수도로 동방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무역항이자 농업의 중심지였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425~455년 재위)와 그의 어머니인 갈라 플라키디아(Galla Placidia) 황후도 라벤나 황궁에 머물고 있었다. 성 베드로는 어린 황제와 황후의 존경과 신뢰를 얻었고, 황후는 그의 설교에 감명받아 그를 친구이자 조언자로 생각하며 여러 방면으로 도와주었다. 성 베드로는 뛰어난 강론 덕분에 후대에 ‘크리솔로구스’(Chrysologus, 황금의 말씀)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9세기에 라벤나 주교들의 일대기와 교회 역사를 다룬 라벤나의 사제 안드레아스 아그넬루스(Andreas Agnellus)의 “라벤나 교회의 주교록”(Liber pontificalis Ecclesiae Ravennatis)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그에게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은 라벤나에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주교가 있어서 혼동을 피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황금처럼 귀한 말씀을 한다는 의미에서 ‘크리소스토무스’(Chrisostomus, 금구[金口])라는 별명을 얻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Joannes Chrisostomus, 9월 13일)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 서로마 제국의 수도인 라벤나에도 있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대주교는 교황 성 식스토 3세와 교황 성 대 레오 1세(Leo I Magnus, 11월 10일)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교구장으로서 이교 사상의 잔재를 근절하고 규율이 극도로 이완된 교구를 일신하며 신자들을 열정적으로 돌보았다. 또한 당대에 만연한 수많은 이단과도 맞서 싸우며 로마 가톨릭교회의 정통교리와 교황의 수위권을 옹호하였다. 그리스도 단성설(monophysitismus)을 주창하며 콘스탄티노플의 성 플라비아노(Flavianus, 2월 17일) 총대주교와 대립한 에우티케스(Eutyches) 대수도원장이 448년 11월 콘스탄티노플 지역 주교 회의에서 이단으로 단죄받고 사제직을 박탈당한 일이 있었다. 에우티케스는 이러한 결정에 불복해 교황 성 대 레오 1세에게 상소했지만 거절당하자 449년에 라벤나의 대주교인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에게 이 문제에 개입해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는 에우티케스에게 교황 성 대 레오 1세의 결정에 순종할 것을 권고하면서, “복된 사도 베드로께서 당신 교좌(敎座)에서 살아 계시고 다스리시며, 신앙의 진리를 찾는 이들을 선도하신다.”라고 답하였다. 그는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동의 없이 신앙에 관한 어떤 문제도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의 저서로는 “에우티케스에게 보낸 편지” 외에도 183편의 강론이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176개의 강론은 라벤나의 펠릭스(Felix) 대주교(709~725년 재위)가 엮은 “펠릭스 도서 목록”(Catalogus Felicianus)에 수록되어있다. 그의 강론들은 수사학적으로 뛰어날 뿐만 아니라 궁중 생활은 물론 군인들과 해운업자들과 농부들의 생활까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5세기경 라벤나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큰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그의 강론은 전례에서 봉독된 복음과 바오로 서간들과 시편들을 주석한 것이 대부분인데, 그는 성경을 주석하면서 그 시대에 논란이 되고 있던 신학 논쟁들에 대해 권위 있는 해답을 제시하였다. 특히 그리스도의 육화(강생)에 관한 강론들에서 그는 아리우스 이단, 네스토리우스 이단, 에우티케스의 그리스도 단성설을 논박하였다. 그의 강론들은 가톨릭교회의 정통 신학과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고, 전례적인 측면에서도 라벤나 교회의 전례에 대한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448년에 프랑스 오세르(Auxerre)의 주교인 성 제르마노(Germanus, 7월 31일)가 교구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황제를 만나러 라벤나에 왔을 때,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는 그를 극진히 영접하였다. 하지만 협상 도중인 그해 7월 31일 성 제르마노가 라벤나에서 선종하자 그는 성 제르마노의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낀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는 고향인 이몰라로 가서 450년경 12월 2일 또는 3일 선종하여 이몰라 대성당에 안치되어 공경을 받았다. 그는 1729년 교황 베네딕토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교회 학자(박사)로 선포되었고, 로마 보편 전례력에 추가되면서 12월 4일에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그의 선종 일자는 고대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옛 “로마 순교록”도 12월 2일 목록에서 이몰라에서 학식과 성덕으로 널리 알려진 라벤나의 주교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가 선종했는데, 그의 축일은 12월 4일에 지낸다고 했다. 그리고 12월 4일 목록에서 주교이자 증거자이며 교회 박사인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를 기념한다고 전해주었다.
하지만 9세기에 기록된 “라벤나 교회의 주교록”에 대한 현대의 연구 결과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가 선종한 날은 7월 31일로 밝혀져 정정되었다.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 그의 축일은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 사제 기념일과의 중복을 피하고자 하루 전인 7월 30일로 옮겨 로마 보편 전례력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31일 목록에서 에밀리아로마냐 지방 이몰라에서 라벤나의 주교인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기념일은 7월 30일로 정해졌다고 했다. 그리고 7월 30일 목록에서 크리솔로고라는 별칭을 지닌 성 베드로는 라벤나의 주교이자 교회의 박사로서 복된 사도의 이름을 이어받아 탁월한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을 천상 교리로 이끌고, 감미롭고 거룩한 강론으로 그들을 만족시키며 사목을 수행하다가 7월 31일 에밀리아로마냐 지방 이몰라에서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