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언어생활
(야고보서 3:1~12)
신앙생활의 성숙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나타납니다. 신앙의 성숙은 기도 생활이나 예배 생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숙은 언어생활에도 나타납니다. 성도가 언어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신앙이 진보할 수 있고 쇠퇴할 수 있습니다. 옛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 3장은 특별히 말에 대해서 그리고 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야고보는 말의 영향력을 깨달으라고 권면합니다. 야고보서 3:3~5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혀가 작은 지체이면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정말 말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은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어서 부정적인 경우는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에 대한 비유를 세 가지로 하고 있습니다.
첫째, 비유는 타는 말입니다. 말의 훈련을 타는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타는 말은 재갈 물려서 컨트롤합니다. 혀가 얼마나 크게 움직이는가? 재갈을 물려서 타는 말의 해를 제어합니다. 그것은 좋은 방향으로 길들여져야 합니다.
둘째, 비유는 큰 배입니다. 배를 움직이는 방향키는 작습니다. 큰 배지만 작은 키가 움직입니다. 사람의 언어생활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람의 말이 큰 공동체를 움직입니다. 공동체에 있어서 사람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비유는 큰 산불입니다. 모든 큰 불은 매우 작은 불에서 시작합니다. 혀가 작지만 말 한마디가 우리 인생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습니다. 말 한마디가 우리 인생을 바꿉니다. 말의 영향력을 깨달아야 신앙은 성숙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잠언서 16:23에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의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두 번째, 야고보는 말의 위험성을 깨달으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야고보서 3:6~8에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말에 대한 두 가지 비유를 언급합니다. 이 구절은 말이 영향력이 클 뿐 아니라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비유는 불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불조심에 대한 표어가 있었습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혹은 자나 깨나 불조심’ 같은 것들입니다. 이러한 표어들은 불의 위험성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불이 왜 위험합니까?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불이 위험하듯 말이 잘못 나가면 사람들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면서 공동체를 파괴시킵니다. 이렇게 말은 맹렬한 불같은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 비유는 짐승을 길들이는 것입니다. 혀의 위험성은 혀를 길들이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야생동물은 길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혀는 길들이지 못합니다. 우리 입술이 길들여지지 않으면 제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말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말 때문에 공동체가 깨집니다. 말에는 파괴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에 신중해야 되고 조심해야 합니다.
세 번째 야고보는 말의 변덕성을 깨달으라고 권면합니다. 야고보서 3:9~12에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말의 변덕성과 이중성을 언급합니다. 사람들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고 합니다.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한 사람을 저주한다고 합니다. 똑같은 입속에 찬양과 저주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보면 이쪽에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저쪽에는 저렇게 이야기합니다. 한입에서 단물과 쓴 물이 동시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혀는 이렇게 이중적으로 변덕을 부립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의 영향력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야고보서 3:1~2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결론은 너희가 다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선생은 말을 많이 합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를 합니다. 실수를 하면 책임을 집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정말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말의 실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입술의 성숙이며 말이 성숙입니다.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혀가 누구에게 컨트롤 당하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입술이 우리의 생각대로 제어된다면 위험합니다.
우리의 욕심으로 컨트롤 된다면 우리의 입을 누가 컨트롤 하는가? 시편 141:3에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이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소서 내 입을 성령이 주고나해 주시옵소서라고 탄식하며 기도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성숙한 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말의 실수가 다 있습니다. 우리는 ‘내 입술의 파수꾼을 세워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한 결단과 신중함이 있어야 합니다. 성숙한 말은 감사의 말이며 축복의 말입니다.
말에는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말을 통해 격려도 받고 위로도 받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말을 통해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성도들의 말이 성령으로 거듭나야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의 마술사란 소리를 듣기보다 언어를 잘 사용한다는 말을 듣도록 슬기로운 언어생활을 해야 합니다. 잠언서 15:4에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보면 온순한 말은 사람에게 생명력을 준다고 합니다.
인문학 중에 의미론이라는 학문분야가 있습니다. 이 학문은 사람이 쓰는 언어를 분석하는 학문입니다. 사람의 됨됨이나 값어치는 그 사람의 언어를 분석하면 알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말속에 우리의 인격과 품위가 배어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본문에서 만일 말에 실수나 허물이 없는 자라면 그는 성숙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말의 신앙입니다. 말보다도 말씀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도 기독교를 말씀의 신앙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이 신앙의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역시 말로 우리 자신의 인격과 값어치를 증명해야 합니다. 정 병태라는 분이 그의 책 ‘언어의 품격’에서 나무를 쉽게 죽이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무를 죽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나무를 붙잡고 계속 나쁜 말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나무에게 나쁜 말을 하다보면 나무가 곧 지쳐서 죽어버립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조선 시대에 유행했던 인형을 저주하는 풍습이 재연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병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유행은 없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사람들에게 항상 좋은 말만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력으로는 안 되고 혀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에 길들어진 말을 할 때 가능합니다. 아무쪼록 성령 충만하여 성숙한 언어생활을 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