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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barnabak
예수님께 인정받은 백부장의 큰 믿음
누가복음7:1-10
지난 화요일에 청주성서신학원에서 퍼디 선교사(한국명 부레선)의 90주년 추모예배가 있었습니다.
퍼디 선교사는 26살에 조선 땅에 들어와 충북 영동의 조동리 지역에 선교활동을 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순직하신 분입니다.
장티푸스에 걸려 죽어 나간 지 3일밖에 되지 않는 방에 머물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었던 것입니다.
그의 나이 29살이었습니다.
당시 동네사람들은 제일 좋은 방을 주기 위해 그 방으로 인도하였다고 하고 퍼디 선교사는 위험한 줄 알면서 그 방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조선 땅에 들어온 지 3년밖에 되지 않았던 29살의 젊은 나이에 아내와 두 자녀를 남겨두고 먼저 이 세상을 떠난 퍼디 선교사는 누가 뭐래도 주님께 인정받은 큰 믿음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조선에 왔고 조선 사람들을 위해 젊은 청춘을 바친 실제적인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을 고쳐주신 말씀입니다.
이 백부장은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 고급 장교로서 아마도 가버나움 지역을 책임 맡은 지역 사령관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백부장이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부탁을 합니다.
자기가 직접 오지 않고 유대인의 장로들을 보내어 어떤 부탁을 했다는 것을 교만한 모습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주께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는 말을 보면, 교만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겸손하였기 때문에 유대인의 장로들을 보내어 부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장로들 몇 사람을 보내 예수님께 부탁한 내용은 놀랍게도 자신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요, 하나는 병들어 죽게 된 자가 종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종은 사실 사람 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던 하찮은 사람입니다.
말하는 도구라고 불릴 만큼 주인이 마음대로 부리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던 종을 위해 이렇게 부탁했다고 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병들어죽게 되었을 때 부탁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에 가까운 중병에 걸린 자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에 이런 부탁을 했다고 할 때 백부장의 믿음이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 장로의 부탁을 받고 예수님이 그 집을 찾아갑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백부장은 사람을 보내 간곡하게 예수님의 방문을 거절합니다.
‘주께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 않으셔도 얼마든지 말씀으로 고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기까지 오시지 마시고 말씀만 하사 내 종을 고쳐주옵소서.’
이 말을 들으신 주님이 따르는 무리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 누구보다도 이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상당히 기분이 상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무시했던 이방인을 추겨 세우고 자기들보다 믿음이 더 좋다고 이야기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기분이 나빠하기 보다는 이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살피는 것이 더 중요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칭찬받는 일이 있다면 우리가 기분 나빠하기보다 내 믿음이 어떤 지를 살펴보는 것이 올바른 자세인 줄 믿습니다.
오래 동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믿음은 어떤지? 우리의 믿음은 큰 믿음인지 아니면 작은 믿음인지. 아니면 칭찬받는 믿음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바르고 칭찬받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백부장의 믿음을 이스라엘 중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큰 믿음으로 칭찬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는, 타인의 필요를 따라 예수님께 나아왔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에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했습니다.
이 백부장이 사람들을 보내 부탁하신 이유는 자신의 이기적인 필요가 아니라 자신의 종을 위한 이타적인 필요 때문이었습니다.
이타적인 사랑으로 주님께 나온 백부장이기에 주님은 그 믿음을 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미 말씀드린 대로 병들어 죽게 된 자는 자기 자식이 아니고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고 가족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백부장의 종, 노예입니다.
이방인인 백부장의 입장에서는 자기 집에 있는 종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종이 죽으면 또 다른 사람을 구하면 되고 쓸 만한 사람은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종을 위해 유대인 장로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간구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 백부장이 늘 타인의 필요에 민감하였던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백부장이 이타적인 사람인 증거가 몇 가지 더 나옵니다.
유대인 장로들이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하면서
그 이유는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이 백부장은 비록 이방인이었고 지배계급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늘 이타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볼 줄 알았고 그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기의 필요를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자신의 필요를 따라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믿음이 큰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이 백부장의 큰 믿음은 타인의 필요를 갖고 주님 앞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 근본바탕에 자신이 아닌 타인의 필요를 갖고 예수님께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백부장이 자기의 필요를 갖고서 예수님께 간구했다면 아무리 ‘말씀만 하소서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해도 예수님께 큰 믿음으로 칭찬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칭찬받을 큰 믿음은 타인의 필요를 따라 움직이고 이타적인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정말 보잘것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각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나만의 필요를 따라 움직이는 자가 아니라 타인의 필요를 인식하고 그 필요를 따라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서도 큰 믿음으로 칭찬을 하게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 대한 큰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병들어 죽게 된 종을 고쳐달라는 간구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꿔 얘기하면 예수님을 그 만큼 능력 있는 분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간구를 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거지 바디매오는 주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구하였습니다.(눅18장)
거듭되는 간구에 주님이 그를 데려오라고 명하시고 자기 앞에 서 있는 바디매오에게 묻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때 바디매오는 주저하지 않고 ‘주님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대답합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날 때부터 소경된 내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대로 눈이 뜨이게 된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도 바디매오처럼 아니면 이 백부장처럼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과 역사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우리도 큰 간구를 드려야 합니다.
그 분에게는 어떠한 간구도 문제될 것이 없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또 하나의 믿음은 ‘말씀만 하시면 내 하인이 낫게 될 것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간구를 전해 들으시고 백부장의 집을 향하여 가십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들은 백부장은 벗들을 보내어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며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지 말도록 부탁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이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치료될 수 있다고 하는 공간을 뛰어넘는 믿음이었습니다.
오셔서 환자의 머리나 손을 붙들고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 있든지 그곳에서 말씀만 하셔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은 정말 보통 믿음이 아닌 큰 믿음이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입원하셔서 방문하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기도하려고 하는데 목사님이 상처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안수하고 상처에 손을 얹고 기도하기를 원하고 그래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자기 집에 오시려는 예수님을 만류하며 이곳까지 오실 필요 없이 그곳에서 기도하시면 낫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 대한 큰 믿음을 갖고 기도하고 간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에게는 불가능한 것도 없고 능치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분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갖고 기도하고 간구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큰 믿음을 갖고 기도할 때 ‘믿음대로 될지어다.’ 응답받게 될 것이고 인간의 생각에 사로잡혀 기도하지 못할 때 응답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바디매오와 같이, 백부장과 같이 큰 믿음으로 간구하여 응답받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실제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해 달라.’는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 백부장은 자기의 명령하나에 모두가 그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다 될 것이라는, 그대로 다 움직일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백부장이 갖고 있었던 실제적인 믿음이요 이 믿음으로 주님께 칭찬을 받았던 것입니다.
최근에는 매달 하는 민방위훈련이 뜸합니다만 예전에는 매달 민방위 훈련을 하였습니다.
15일에 훈련을 하였는데 대부분이 형식적이었습니다.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면 차량이 한 옆으로 세워지고 사람들이 건물 한 쪽에 서서 훈련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훈련이 끝나면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한번은 공습사이렌이 울리면서 ‘국민 여러분, 이것은 훈련 상황이 아닙니다. 실제상황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훈련 상황이 아니고 실제상황입니다.’ 방송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의 전투기 한 대가 귀순하면서 내렸던 실제 멘트였습니다.
이 방송을 듣고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당황했는지 어떤 사람들은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집으로 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식료품을 사기 위해 마트로 뛰어갔고 어떤 사람들은 짐을 싸기도 하였습니다.
훈련 상황에는 형식적으로 움직이지만 실제상황에서는 실제로 대피하고 준비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실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고백해도 그것을 실제 상황이라고 믿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게 실제 상황이라고 믿어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권세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을 실제상황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오실 필요가 없이 그곳에서 말씀만 하시라고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신앙고백 하는 모든 것을 실제 상황이라고 믿는 것이 큰 믿음이요 주님이 인정하시는 참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입으로는 큰 믿음으로 고백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믿지를 않는다는 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고백하는 것하고 행동하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몇 년 전에 친일인명사전이 편찬되었는데 그 명단에는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나중에 친일파가 된 사람도 적지 않게 실렸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들이 왜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친일파가 되었을까요?
일제가 승승장구하니까 대한민국의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친일파 중 어떤 사람이라도 일제가 곧 망한다고 생각했으면 친일파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믿기 보다는 일본의 힘이 역사를 지배한다고 믿었고 결국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입으로는 하나님의 역사 주관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세상이 지배한다고 믿지는 않는지요?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의하여 역사가 움직인다고 생각하여 세상의 방법과 세상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악한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하면서 나에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유혹을 물리치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귀는 지금도 모든 것은 세상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면서 세상을 따라 살아가라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성도들이 세상의 방법을 따라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뇌물로 해결하는 관습이 있으면 우리도 뇌물로 해결하려고 하고 세상에서 분식회계를 하면 우리도 분식회계를 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법칙에 따라 역사가 움직인다고 믿기 때문에 세상의 법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천지의 창조주이시고 온 세상의 주권자라고 고백해도 실제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믿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실제라고 믿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실제라고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실제라고 믿지 않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따르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가버나움 백부장은 예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중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큰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 백부장이 보여주었던 믿음을 가지고 주님이 인정하시고 주님이 칭찬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백부장처럼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에 의해 움직이는 자가 아니라 타인의 필요에 따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나아오는 이타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실제적인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백부장이 이런 큰 믿음을 보여주었을 때 주님은 백부장의 종을 당연히 고쳐주시고 전능하신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큰 믿음을 통하여 주님께 응답받고 주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