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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호 라우렌시오 신부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루카 12,1-7
예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행한 일들이 큰 파장을 일으켰나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어 서로 밀치고 난리 났습니다.
하기사 그렇게 기득권에 대해서 당당하게 독설을 퍼부을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이미 세례자 요한이 보여주었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곧 풀이해주시는 바대로 위선입니다.
내가 실제로 행하는 일과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일이 서로 다른 모습은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주의 깊게 감추려 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속지 않는 분이십니다.
만약 그분께서 속는 것처럼 보이거든 그것은 그분께서 자비로이 기다려주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심판의 때가 되었을 때
주 하느님 앞에서 그 행한 일을 심판 받을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을 믿는 우리도 속지 말고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박해를 당할 당신의 제자들을 향해 진실할 것을 당부하시며, 하느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앞에서 강한 어조로 그들에게 반박하셨습니다.
그분의 당당함을 제자들도 이어받아 죽음을 당하게 되는 현실이 다가오더라도 결코 두려움으로
그들에게 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승리의 그리스도이시듯, 믿는 이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박해자들은 지금의 육신을 해칠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삶은 지금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한한 현재의 삶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무한한 삶이 기다리는데 그 무한함에서 예수를 믿는 이들은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지금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님을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것은 멸망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결과 앞에서 누구를 선택할지는 명확한 것입니다.
지금 내가 어려움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다고 해서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잊은 듯이 보이겠지만, 그분은 우리의 머리카락 수를 세어두신 분이십니다.
시장에서 가장 싸게 파는 참새마저도 잊지 않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면,
당신께서 사랑하시고 당신을 사랑한 이들을 잊으실 리 없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 더 귀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 내 사랑(나의 벗-4절)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나는 내 머리카락을 귀찮아서라도 세지 않지만,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세어두십니다.
너무 사랑하기에 '뭐 그런 것까지'라는 것도 당신 안에 담아두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박해는 없다 하더라도 살아가는 데 있어 여러 어려움들이 짓누르기도 합니다.
그 무엇인가가, 그 누군가가, 그 어떤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때론 하느님께서 계시는가? 라고 물음을 던지며 공허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모든 것을 아시며 나의 믿음의 삶, 사랑의 삶을 세어두신 분이십니다.
힘든 이들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이것을 끝까지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아멘.
서울대교구 조성호 라우렌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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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환 히폴리토 신부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루카 12,1-7
제가 사는 양산은 지금 한창 성당 신축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지난 여름 신앙학교를 준비하면서 아이들이 성당에 자주 왔었는데
마침 그 때가 포크 레인부터 해서 적지 않은 장비들이 성당에 와서 작업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만일 아이들과 포크 레인이 누가 누가 머리가 더 쎈가 하고 서로 부딪힌다면 피나는 쪽은 당연히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모래 쌓아놓은 곳, 곳곳에 사고의 위험이 있는 곳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그만해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평소 제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는지 뛰어노는 아이들의 행동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버럭합니다. 목소리의 톤이 높아져서야 이제 자기들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먹었나 봅니다.
그제서야 쭈삣 쭈삣 위험한 곳에서의 놀이를 멈추는 아이들. 그러면서 저는 속으로
‘꼭 이렇게 큰소리를 내야만 말을 드는 것일까?’ 라는 회의 섞인 생각을 합니다.
분명히 그것은 아이들에게 심리적 공포를 조장해서 따낸 결과입니다.
따라서 참사랑도 참교육도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철없는 아이들이라 제가 화를 낸 것도 별 생각 없이 잊어버릴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그렇게 하고 나서 또 후회하는 저의 마음과 어떻게 하면 부드럽게 이야기를 해도 아이들이 알아먹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 끝에 그들이 느낀 두려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공포 또는 무서움이라는 단어와 흔히 연관시킵니다.
그래서 저는 중학교 때 성령칠은 중에 있는 두려움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우습지만 그 당시 성령강림 대축일에 은사 뽑기를 하다가 속으로
‘신부님이 성령은 하느님이라고 했는데 하느님이 공포심을 은사라고 내려주시다니’ 라는 생각을 했었던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성령강림 대축일이 되면 이것이 머릿속에 떠올라 속으로 웃곤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두려움이 사랑의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께서 일러주시는 하느님께 가지는 두려움이라는 것도
제가 아이들에게 화를 내서 조장한 두려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둘은 바라만 보아도 너무나 좋은 사이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즐겁게 해서 점수를 딸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상대방이 알면 상처받을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이 몰랐으면 하지만 막상 그 사람을 만나도 속으로 너무나 미안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하기 싫은 그 마음, 사랑하는 사람이 알면 싫어할 그것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 사랑의 두려움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감정으로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대상 곧 나를 해할 수 있는 자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에
가치를 두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그보다는 원초적인 사랑의 관계에 있는 하느님과의 사랑을 더 키우기 위해
그것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랑의 두려움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께서 하지 마라는 행동을 스스로 멀리할 것입니다.
보다 남을 배려하려 할 것이고, 보다 참아 받는 사람이 될 것이며, 이웃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머리카락의 개수까지 다 세어 두셨다고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알고 싶어 하고 또 함께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깊은 사랑에 빠진 사이가 아닙니까?
하느님은 그렇게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나도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와의 사랑이 더 크게 영글어 지시길 바라는 것처럼
나도 하느님과 나의 사랑이 깨어질세라 더 아끼고 키워나갈 것입니다.
오늘 하루 매일 같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 무언가 하나를 선물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부산교구 김인환 히폴리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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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루카 12,1-7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진실은 언제나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비록 진실을 감추고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 진실은 밝혀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룩처럼 번져 가는 위선의 허울이 벗겨지고 진실을 밝혀낸다고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때로 모르는 편이 더 나은 경우도 있고, 감추는 것이 모두에게 평화로운 일도 있습니다.
숨겨진 자식의 비밀, 내 과거의 치부, 밝히고 싶지 않은 죄의 실체들을 내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면,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실망하며, 분노에 이르는 좌절을 맛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경계하라고 하신 것은, 사람들 앞에서 나의 죄스러운 실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애써 감추려는 위선의 행위들이 결국 자신의 양심을 무디게 하거나,
죄를 합리화하는 유혹에 쉽게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나를 무시하고 외면할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신” 하느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성령의 인장’을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성령의 인장’이란 내가 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지만,
가슴을 치며 주님께 자비를 청하는 겸손한 죄인의 모습으로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는 은총의 표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예수님의 위로는, 바리사이처럼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는 한
하느님께서 나약한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받아 주신다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