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안골은빛수필문학회 황 복
숙
이따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이
싫어지고 거추장스럽게 여겨질 때가 있다. 청소하는 것도, 빨래하는 것도, 설거지하는 것도 귀찮아지고 의미가 없어져 딴 곳을 꿈꾸게 된다. 여기
아닌 다른 곳에 머물고 있다면 이렇게 엉거주춤하게 살고 있지는 않을 텐데 하는 막연한 꿈도 꾼다. 벗어나려고 애를 써도 용기가 없어 주저앉아
미루는 삶을 살면서도 마음은 먼 곳을 지향한다. 그럴 때는 모든 것을 미뤄둔 채 하던 일을 멈추고 무작정 집을 나선다. 대문을 나서니 막상 갈
곳이 마땅치가 않다. 적당히 갈 데가 없고 막막하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나섰으니 가 볼 수밖에. 갈 곳이 없다고 해도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집으로 들어가면 마음도 머리도 생활도 엉망이 될 것이다. 복잡한 머리, 답답한 가슴을 가라앉히려고 나섰으니 가던 길을 가려고 한다.
꼭 갈 곳이 없지는 않다. 갈 곳이 없다는 것은 반대로 해석하면 갈 곳이 많다는 말과 같다. 꼭 정해진 곳만 가면서 사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사방천지가 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삶의
터전인 일터를 접으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양보했다. 재산을 떠나보내니 희망도 꿈도 의지도 자신감도 덩달아 떠났다. 돌부리를 차면서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머리를 채우며 간다. 할 수없이 찾는 곳이 변호사사무실이다. 법무사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동안 수없이 들어왔던 말들을 다시
되풀이하여 묻는다.
“다음 변론기일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며칠 전 받은 답변서에 뭐라고 써서 제출해야 하지요?”
때로는 삶이 드라마보다 더 극적일
때가 있다. 잊으려고 노력했던 것들이 잊혀져가는 것들의 삶의 끈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칼로 뚝 잘라버리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오늘도 나는 그 자르는 것을 머뭇거리며 흔들리고 있다. 그래도를 연신 되풀이하면서 못 자른다. 젊었을 때는 부지런히 살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이들 셋을 일찍 학교에 보내고 남편이 출근하면 하루 종일 쇳덩이와 살았다. 전화로 주문을 받아 물품을 자동차에 실어 배달해
주어 건물이 완공되어도 납품 받은 건축업자들은 지금까지 대금을 결재하지 않아 소송을 하고 재판을 하고 있다. 1997년의 일이다. 지인의 소개로
찾아 온 이 업자는 초면임에도 상냥하고 전에도 친분 관계가 있는 것처럼 거리낌 없이 말을 한다. 부인이 전북대학교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한
업자는 물품을 납품해 3년이 되도록 결제해 주지 않아 전화를 해도 안 받는다. 나중에는 전화번호가 없는 번호라고 해 할 수없이 집으로 찾아가게
되었다. 벨을 눌러도 대답이 없어 그냥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현관 입구에 신문지를 깔고 납작 엎드려 우유 넣는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그의 부인이 화장실 문을 안 닫은 채로 볼
일을 보고 있었다. 일어나
현관문을 노크하니 예닐곱 살 난 여자아이가 “엄마 없어요.” 하기에 누구랑 있느냐고 했더니 혼자 있다고 했다. 그러면 문단속 잘하고 있다가 엄마
오시면 철근집 아주머니가 다녀갔다고 하라고 일러주었다. 이러기를 거듭하다 보니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었다. 만나주지 않아 직장으로
찾아갔다. 퇴근시간에 맞추어 갔는데 5시가 되자 어느새 사라졌다. 다음에 가서는 말을 걸었다. 너무 하는 거 아니냐고 그랬더니 앉아서 기다리라고
한다. 5시가 되어 퇴근하면서 택시를 탔다. 따라간 곳이 북전주경찰서였다. 나는 속으로 남편이 사업하는 사람이라 물품대금 결제를 하지 않아
사기죄로 경찰서유치장에 있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다짜고짜 나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하겠다고 했다. 남편의 일을 알지도 못하는데 이혼한 자기에게
직장으로 찾아왔다며 소리치고 난리를 냈다. 기가 막힌 나는 맞고소를 하겠다고 했다. 저 여자 남편이 우리가게에서 건축자재를 납품 받고 3년이
되도록 연락이 없어 찾아 갔다고 했다. 또 남편과 이혼했다고 주장하지만 며칠 전에도 굿마트에서 남편이랑 딸아이를 쇼핑카에 태우고 다정하게 웃으며
쇼핑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더니 수사관은 책상을 치며,
“여보쇼, 아줌마들. 여기가
당신네 안방이요?”
하고 화를 냈다. 남편에게 전화를
하니 북전주경찰서에 근무하는 남편 친구 분이 찾아와 나에게 전후사정을 물었다.
그렇게 그날은 가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외상값 일부만 받고 나머지는 아직도 받지 못했다. 경찰서를 갈 일이 없어 가지 않지만 지금도 북전주경찰서 앞을 지날 때는 그날의 일이
떠오른다. 동산촌에서 이곳 금암동 전북대학교병원 동네로 이사와 살면서 날마다 건지산을 간다. 건지산을 가려면 전북대학교병원을 거쳐서 가는데 갈
적마다 20년 전 그 여자가 떠오른다. 같은 전주 하늘 밑에서 잘 살고 있겠지?
며칠 전 법원에서 서류가 왔다.
답변서이다. 나도 답변서를 써서 제출해야지,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생각하고 쓰고 지우고 생각을 정리했다. 쓰면서 지난 삶들이 가로등처럼 하나둘
눈앞에 환하게 비추었다가 꺼진다. 남의 것 떼어먹은 사람은 다리 펴고 못 자도 자기 것 남에게 떼인 사람은 편히 잔다고 하지만, 지금시대는
그렇지도 않다.
하루 종일 매미가 울고 날씨가
흐리더니 비가 내린다. 쓴 글을 정리한다. 눈이 아파 고개를 들어 마당을 보니 여름꽃들이 만발했다. 언제 저렇게 예쁜 꽃을 피웠을까? 지금까지
나를 괴롭혔던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다짐한다. 남들이 권하는 길이 아니라 내 마음이 권하는 길을 선택해서 가야겠다. 이 길이 나를 만들어 주는
좋은 길이란 생각이 든다. 천재는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에디슨이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부터라도 아깝지 않은 삶을
살이야겠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미루지 말고 배울 것을 찾아야겠다.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더 잃지 않으려면 지금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해야겠다.
나는 역경에 처했을 때 해결방법을
찾으려 하지 않고 좌절부터 했다. 살아오면서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선택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꼭 내가 택한 길이
이상하게도 막다른 막힌 골목길이었다.
늦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기회로
받아들여 신중히 선택해야겠다.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개운하다. 핑계의 길을 가지 말고 선택의 길을 가야겠다.
(2017. 8.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