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감사 김시중(平安監司 金時仲)은
풍류(風流)를 몹시 즐기는 사람으로 그 당시에는 참으로 유명한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풍류감사(風流監司)라고 불렀다.
그만치 그는
그 당시에 감사라고 하는 높은 벼슬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독보적(獨步的)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이채(異彩)로운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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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사람들은
쥐꼬리만큼한 벼슬만 하나 차지하기만 하면
자기의 벼슬을 자랑하는 것이 먹고 하는 일이었고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권위를 최대한도로 이용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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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시중은 자기의 벼슬을
한번도 뽐내어 본 일이 없었다.
그는 되지 못한 벼슬아치들이
그 쥐꼬리만큼한 벼슬을 자랑하고 뽐내고 하는 것을 보면
코웃음을 치며
오히려 그들을 경멸하고 멸시하였다.
그는 딱딱한 관리도(官吏道)보다도
그윽한 인생의 향기(香氣)를 좋아하였다.
그는 시간만 있으면
필묵(筆墨)과 종이를 준비하였다가 좋은 시를 지어서
이것을 혼자 소리내어 읊는 것을 유일의 낙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가
조정(朝廷)과 국사(國事)에 대하여서 그 맡은 일을
게을리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자기의 취미는 취미대로 살리면서
또한 그가 맡은 일에 대하여서는 지극히 충실하였다.
윗사람을 섬기되 결코 아첨하는 일이 없었고
백성을 다스리되 결코 무리하는 일이 없었고
백성을 다스리되 오히려 공생부사(共生父師)하는 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누구 하나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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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김시중이
성천(成川)땅으로 행차하게 되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도지사(道知事)나 내무장관(內務長官)의
초도순시(初度巡視)의 길을 떠나는 거나 마찬가지다.
성천고을 원님 조경인(趙敬仁)을 선두로 온 고을 사람들은
감사를 환영하기 위하여 성문 밖까지 나와서 서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를 환영하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시골서는 감사라는 말만 들었지 감사의 얼굴을 실제로 구경한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 먼 시골까지
소문에 높은 풍류감사 김시중의 얼굴을
어디 한번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라도 하여보자
하는 생각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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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수천 군중의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아가며
감사 김시중은 성천 고을에 도착하였다.
이날 밤 이 고을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이 고을이 생긴 이래 처음 보는 큰 잔치가 이 풍류감사 김시중을 위하여서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는
이 고을에서 제법 내노라고 하는 일류기생들이
총동원하여 모여들었다.
여니 때 같으면 내가 제일 잘났노라고 뽐내고
빼고 건방지게 굴던 기생들도 이 자리에서만은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다 제각기 있는 재주를 다하여서
혹은 노랫가락으로, 혹은 춤으로 혹은, 담소(談笑)로써
이 풍류감사의 흥을 돋구어 주려고
모두들 지극 정성을 다 하였다.
기생들이 이렇게 극성을 다 하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 기생들의 출세는 벼슬 높은 사람의 소실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다투어 가면서
벼슬아치를 골라잡아서 그의 총애를 받기 위하여
심혈을 다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