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기 힘든 영화인데 위의 유트브로 명작 한 편을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 영화, 내가 마지막 본 파리 ]
이 영화는 <위대한 개츠비>로 유명한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 <다시 찾은 바빌론>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문학적 감각이 뛰어난 리차드 브룩스 감독의 초기 작품이다.
브룩스 감독은 이 영화가 성공을 거두면서 연출력을 인정받았고 이후 <폭력교실>, <뜨거운 양철 지붕의 고양이>, <엘머 컨트리> 등의 걸작을 내놓으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기술적 세련미와 상업적 감각이 빼어난 감독이라는 평을 받았던 감독이었다.(세느 강변에서 찰스와 헬렌)
1954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세기의 미녀’라는 닉네임이 붙어있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미모가 절정을 이루고 있을 때 찍은 필름이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미모뿐만 아니라 연기도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상대역은 벤 존슨이었다.
이 영화는 찰스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미국에서 소설가로 성공을 거둔 찰스가 딸을 찾기 위해 파리로 찾아왔고 아름다운 아내의 모습이 담긴 벽화가 그려진 카페에 앉아 오래전 과거의 추억으로 돌아간다.
<내가 마지막 본 파리>는 6.25 전쟁 직후인 1955년 수도 극장(스카라 극장의 전신)에서 상영되면서 흥행이 성공했고 이후 10년 뒤 재수입되어 서울 대한극장, 부산 문화극장에서 상영되면서 또 다시 관객몰이에 성공했다.이 영화의 주제가는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았는데 뛰어난 멜로디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간략한 줄거리
2차 대전이 끝난 파리의 샹젤리제의 거리. 종군 기자로 복무했던 찰스 윌스는 갑자기 아름다운 아가씨 헬렌으로부터 환영의 키스를 받는다. 찰스는 그 후 종전 축하파티에서 헬렌을 다시 만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어느덧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결국 현지에서 제대한 그는 헬렌과 결혼하여 낮에는 통신사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소설을 쓴다.
그러나 자유분방하고 향락적인 기질의 헬렌은 이러한 남편의 노력을 도울 생각은 않고 파티에 묻혀 살아간다. 두 사람 사이에 딸 위키가 태어난 뒤에도 그녀의 이러한 사치스런 생활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둘 사이는 서로 사랑하면서도 위기를 맞게 되고, 결국은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한다. 출판사로부터 원고가 무시되자 찰스는 이날도 만취되어 집으로 돌아오고, 그날 밤 찰스는 헬렌이 돌아온 줄도 모르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헬렌은 이것을 남편이 자기를 내쫓은 것이라고 오해하고, 비를 맞으면서 언니 집을 찾아가지만, 그녀는 다음날 아침 죽고 만다. 찰스는 회한의 눈물을 씹으며 미국으로 돌아간다.
[ 세기의 미녀, 엘리자베스 테일러 ]
백이면 백, 보는 사람들을 홀딱 반하게 만드는 맑고 푸른 눈과 완벽한 이목구비를 가진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숱한 영화 속에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나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녀는 실제 생활에서도 수많은 로맨스를 남겼다.
1932년 2월 27일 그녀는 런던 햄스테드에서 미술중개상인 미국인 아버지와 역시 미국인인 연극배우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는 오빠 하워드가 있다. 10살 아역시절부터 영화계에 진출한 그녀는 미모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번(레인트리 카운티,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이나 수상한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배우였다.
엘리자베스에 대해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밥 먹듯 해치운 결혼과 이혼이다. 1950년 18세에 힐튼 호텔의 후계자 콘래드 힐튼 주니어와의 결혼을 시작으로 자그마치 8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듭했다. 그녀는 첫 남편과 결혼한 지 1년 만에 이혼하고 이듬해에 그녀보다 20살 많은 영국 배우 마이클 와일딩과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 5년 만에 각자의 길을 갔다. 1957년에 세 번째 남편인 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 마이크 토드와 결혼한다. 슬프게도 이듬해에 토드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그녀의 네 번째 결혼에 대해서 할리우드에서는 시끌벅적했다. 그녀는 죽은 전 남편 마이클 토드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여배우 데비 레이놀즈의 남편인 가수 에디 피셔를 결혼상대로 찍은 것이다.(사진, 자이언트에서 제임스 딘과)
레이놀즈로서는 대낮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테일러와 레이놀즈와의 관계를 빗대어 세간에서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말 많고 탈도 많았던 피셔와의 결혼생활도 5년 만에 끝장이 났다.
그녀의 5번째 결혼은 폭풍처럼 할리우드를 강타했다. 테일러는 영화 <클레오파트라> 촬영장에서 배우 리처드 버튼과 불같은 사랑에 빠지면서 부부가 되었다.
이렇게 뜨겁게 달아올랐던 두 사람도 결국 10년간의 결혼 생활을 지속하고 끝냈다. 그러나 1년 4개월 후에 이 두 사람은 다시 재결합했다. 그때 테일러는 이후로는 다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것이며 버튼을 미치도록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두 번째 결혼은 1년도 채 지속되지 않았다. 버튼의 고질적인 폭음이 다시 심각해졌기 때문이었다.
두 번씩이나 헤어지기를 반복했지만 테일러는 생전에 "내가 죽으면 리차드 버튼의 고향에 뿌려지길 원한다."고 말할 정도로 버튼을 사랑했다. 또한 "리처드가 일곱 번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노미네이트 됐지만 단 한 차례도 트로피를 타지 못한 게 가슴이 쓰리다."고 그의 여러 번 거듭된 아카데미상 탈락에 대해 안타까운 감정도 가지고 있었다.(사진, 리처드 버튼과)
테일러의 여섯 번째 배우자는 정치인 존 워너 상원의원이었다. 6년 만에 이혼했다. 그녀의 마지막 결혼 대상은 놀랍게도 그녀보다 20살 어린 노가다판의 노동자 래리 포텐스키였다. 그러나 테일러와 달리 포텐스키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어색해 했고 결국 1996년에 헤어졌다. 그래도 테일러는 남은 생애 동안 워너와 포텐스키와 연락을 유지했다.
잦은 결혼과 이혼으로 복잡한 결혼생활을 했던 엘리자베스의 노년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 시위에 앞장서는가 하면 에이즈 예방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이런 봉사 활동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배우 쥴리 앤드류스와 함께 ‘사령관 여기사(Dame Commander)’라는 작위를 받았다.
그녀는 2011년 79세의 나이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나의 인생은 사랑을 하고,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고, 친구가 될 운명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녀가 삶을 살았던 방식이었다. 전 세계 팬들은 그녀가 "아름다운 외모에 걸 맞는 삶을 살고 갔다."며 고인의 넋을 위로했다.
대표작으로 <작은 아씨들>·<자이언트>·<젊은이의 양지>·<아이반호>·<내가 마지막 본 파리>·<뜨거운 양철지붕의 고양이>·<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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