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58
3월8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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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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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1d5rUxjvbJg (김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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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의 기도와 함께 좋으신 주님의 손길에 우리 인생 전체를 온전히 맡깁시다!>
예수님 시대 당시 이스라엘에 인접했던 근동 지방 이민족들이 바치던 기도는 엄청나게 요란스럽고 장황했습니다. 복잡하고 떠들썩했습니다. 수십, 수백 가지의 신들의 이름을 줄줄이 외치며 그들을 ‘기도의 현장’으로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그들에게 떼를 쓰기 시작합니다. 몇 시간이고 반복해서 신들을 압박하고 졸라대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는 신들이 귀찮아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청을 들어준다는 억지스런 기도 방법이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이방인들의 기도 스타일이 은연중에 유다 백성들 사이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접한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황당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협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시험해보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조롱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이 땅에 육화하신 하느님의 분신인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복잡한 것을 싫어하십니다. 아주 단순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복잡하고 수많은 율법 조항들을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란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예수님의 단순성은 기도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오 복음 6장 7~8절)
우리가 잘 되기만을 간절히 염원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 우리가 매일 지고 가고 있는 고통과 십자가를 환희 들여다보고 계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좋은 길, 결국 구원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시고자 애를 쓰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이 계시는데 줄줄이 잡신의 이름을 불러낼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하느님이 계시는 데 수백 가지 걱정에 시달릴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좋으신 주님의 손길에 우리 인생 전체를 온전히 맡기는 일, 그분 사랑과 자비의 손길에 우리 삶 전체를 봉헌하는 일이야말로 참된 기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가장 기쁘게 받으실 기도는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만드셔서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바치게 되는 주님의 기도를 올리는 순간마다, 우리의 삶, 우리의 의지, 우리의 사랑을 그분께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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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iopf5EQvA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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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바칠 때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이유>
오늘 복음은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며 ‘하느님을 바꾸려고 기도하지 말고 자신이 바뀌려고 기도해야 함’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기도의 목적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내가 바라고 청할 때 나는 나에게서 벗어나 하느님 자녀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가 하는 주님의 기도는 건성일 때가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묵상하지 않고 그냥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변할 수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뜻대로 변하고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변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주님의 기도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클립으로 만든 ‘무게만 25kg이 넘는 갑옷을 입고 사는 아주머니’ 사연이 나옵니다. 아주머니는 집 안에서 자신을 해치려는 누군가가 흘려보내는 전자파 때문에 온 집안 집기들을 비닐로 싸놓고 자신은 클립으로 갑옷을 만들어 입고 살아갑니다. 예전 치마를 입을 때 정전기가 날 때 클립을 꽂아두었더니 정전기가 줄어든 것에서 이런 아이디어를 낸 것입니다. 그런데 조사를 해 보니 집 안에 전자파는 다른 집보다 적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왜 이런 피해의식을 지니고 사는 것일까요? 전문가는 아주머니가 집 자체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전에 한 번 만나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는 한 남자가 스토커처럼 아주머니를 괴롭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시간이 두려움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집 안에서 안 좋은 전자기파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전문가는 만약 힘들 때 누군가가 함께 있어 주었다면 이렇게까지 자신을 혼자 방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어렸을 때도 혼자 방치되었던 기억이 있으리라 추측합니다.
동영상을 보니 아주머니는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십자고상도 나오고 성모상도 나옵니다. 성당에서 미사보를 쓰고 찍은 사진도 보이고 피아노 치는 모습, 그리고 책도 읽고 기도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할까요? 어쩌면 분명 주님의 기도만 제대로 바쳤어도 이런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죽음에 대해 덜 무서워해도 되었습니다. 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며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만 생각하여 자기 죽음에 대해 걱정할 시간을 줄여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며 육체의 생존보다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청하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며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일어나게 하신 것임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며, 클립으로 된 무거운 갑옷이 아닌 영적인 힘을 청하게 되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며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며, 다시는 아버지를 두고 내 생존 문제로 두려워하지 않기를 결심하고, 그렇게 결국 “악에서 구하소서”라며 자아의 압제에서 해방됩니다. 이렇듯 주님의 기도만 의미를 되새기며 바쳐도 하루하루 분명히 달라집니다.
추측건대 이분은 자신이 변화되기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주로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에는 관심을 둘 에너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생떼를 쓰는 궁극적 이유는 그것을 가지고 싶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이 부모의 자녀임을 더 굳게 믿고 싶어서 부모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부모에게서 나왔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부모가 자신들의 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채우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자녀는 자기 욕구에만 집중하여 부모의 뜻에 귀를 막습니다. 그렇게 자기만 아는 아이로 자랍니다.
아이가 이제 자신이 부모의 자녀임을 더욱 믿게 만들기 위해서는 동생의 육아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오은영쌤 육아지침서’에 ‘질투 폭발, 동생 스트레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누나는 남동생이 태어나자 질투 폭발입니다. 엄마는 딸을 더 사랑한다고 말해주지만, 딸은 모두의 관심이 동생에게 간 것만 같아서 서럽습니다. 그래서 생떼를 부립니다.
이때 오은영 박사의 꿀조언은 ‘동생 육아에 누나도 참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인형을 사줘서 조금씩 동생을 안고 다독이는 연습을 하게 하고 조금씩 엄마가 보여주는 쉬운 일부터 돕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나는 그렇게 동생의 육아에 동참하며 자신도 가족의 한 일원임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만약 친딸이 아니면 동생을 잘못 건드려 다치게 될까 봐 동생에게는 손도 못 대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사랑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육아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도 부모의 자녀임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웃을 사랑하게 하시는 큰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한 형제로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임을 더 굳세게 믿게 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다 알려주시고 마지막에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4)라고 되풀이하십니다. 이웃은 나의 형제들입니다.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느님 육아에 동참함으로써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임을 더욱 굳게 믿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오는 평화 때문에 이제 나의 욕구로 생떼를 부리기보다는 감사하여 주님의 뜻에 관심을 둡니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묵상하며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청하며 진정 그리스도처럼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합시다. 기도가 이웃 사랑으로 향하지 않으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흐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목적으로 기도할 때야만 내가 하느님 자녀라는 확신이 더 커지고, 그러면 오직 주님의 기도 말 안에 자녀가 청해야 할 모든 내용이 다 들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주님의 기도에서 청하는 것들을 주님께 청하면 그 주님의 뜻이 나의 것이 되어 그분의 본성대로 변화합니다.
기도를 바칠 때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내 뜻을 청하기 때문입니다. 내 뜻만 청하는 이유는 내가 하느님 자녀인지 아닌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의 믿음은 내가 이웃을 사랑할 때 더욱 확실해집니다. 따라서 자신 안에 갇혀 외로운 사람의 기도는 주님께 절대 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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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6,7-15 :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7절) 말을 많이 할수록 하느님께로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더 잘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도를 길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신다.이런 기도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기복적인 기도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기도를 바치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더 잘 아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우리가 무엇을 청할지 아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내려주실 마음이 드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가르쳐 드려야 할 분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얻어야 할 분이시다.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긴 기도가 아니라, 참된 마음이다. 참으로 우리가 그분께 항상 감사를 드리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항상 제때에 내려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9절)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아들을 믿는 이들의 특권이며, 믿음의 어머니인 교회에서 우리가 받고 그분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며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우리에게 든든한 확신을 주실 수 있도록 아버지라 불리기를 원하신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9절) 이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로 더욱 거룩해지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우리 안에서 나날이 거룩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도록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흠 없이 열심히 살아 우리의 삶으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10절)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먼저 우리들 안에 서고 하느님께서 그 나라에서 다스리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시민들은 이미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안에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삶의 모습에 따라 나와 함께 있을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10절)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하며, 당신의 뜻이라는 힘과 그 뜻을 실행하는 능력을 주십사 청하는 것이다. 그분의 뜻은 그분께서 자녀로 삼으신 이들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11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청한다. 이것은 구원의 양식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죄로써 그리스도와 떨어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양식으로 주님의 신성에 참여한다. 이 양식은 딱 하루에 충분한 만큼 주어진다. 이 양식은 ‘내일을 위한’, ‘영원을 위한’ 양식을 뜻하며 물질로 바뀌지 않는 양식을 말한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12절) 우리는 매일 죄를 지으며 산다. 그러기에 죄의 용서를 청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조건은 다른 사람을 먼저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이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를 받기 바라기 때문이다.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용서받았으므로, 용서에는 하느님과의 확고한 계약이 담겨있다. 그것은 소홀히 할 경우 앞에서 한 청원이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계약이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13절) 또한 우리는 이미 저지른 죄의 용서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십사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탄에게 이끌려 가도록 두지 마십사고 청하는 것이다.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13절) 이 기도는 앞의 모든 청원과 기도를 간결하게 요약하는 기도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신다면, 우리는 모든 어려움에서 확실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 이 기도를 하고나면 더 이상 청할 것이 없다. 악에 대해 하느님께 보호를 청하고 그것을 받게 되면 세상에서 하느님을 보호자로 둔 셈이니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주님의 기도를 잘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 중에서 용서에 관한 것을 특별히 강조하신다. 주님께서는 이 기도로 우리가 자비로워지기를 바라신다. 사실 이 용서는 주님과 계약을 맺는 듯한 말로 청하고 있다.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계약을 지키지 않는다면, 청원 전체가 헛일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14-15절) 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나에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하면서 하느님과의 이 계약을 성실히 지키도록 하는 사순시기가 되도록 도우심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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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올바른 기도, 주님의 기도>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7-8)
여기서 ‘다른 민족 사람들’이라는 말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상 숭배자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기도는 듣지 못하는 우상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에 ‘빈말’이고, 올바른 신앙 없이 말만 많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빈말’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제물을 많이 바치기만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종교 행위를, ‘신을 상대로 거래를 하는 일’로 생각하는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그들을 닮지 마라.”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는 가르침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상대로 흥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상대로 거래를 하는 일이 아닙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인간에게 무슨 대가를 요구하시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알고 계신다.”는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주신다.”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해서 합니다. 신앙생활은 왜 하는가? 우리는 은총을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이미 받았으니까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미 받은 은총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은총 속에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9-15)
‘빈말’의 반대는 ‘참말’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참말’의 모범으로 가르쳐 주신 기도문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보이는 기도문의 형식이나 표현이나 순서보다 기도문 안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더 중요합니다. 1) 기도는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사랑하는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입니다. 하느님은 ‘무서운 분’이 아니라 ‘사랑이신 분’입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시는”(마태 18,14), 그런 사랑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에 첫 번째로 할 일은 하느님께서 나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묵상하는 일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내가 잘되기만을 바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소망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후반부의 기도와 따로 떨어져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사실상 같은 기도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는 굶주리는 사람이 없고, 죄를 짓게 만드는 유혹도 없고, ‘악’도 없습니다.
3)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바치면, ‘주님의 기도’도 ‘빈말’이 됩니다. ‘주님의 기도’는 행동으로 실천해야 할 ‘신앙생활 지침’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일용할 양식을 서로 나누고, 이웃을 용서하고, 악에 맞서 싸워서 그것을 물리치는 일을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당연히 실천해야 할 일들입니다. 그리고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의 기도’의 기도문 순서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인간의 바람’보다 ‘하느님의 뜻’이 우선이다, 또는 ‘하느님의 뜻’의 실현이 먹고사는 일보다 먼저다, 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행복’을 따로 구분해서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기도문의 순서는 중요도의 순서가 아니고, 어떤 일을 먼저 하느냐의 순서도 아닙니다. 다 똑같이 중요하고, 전부 다 동시에 실천해야 할 일들입니다. 만일에 중요도에 따른 순서라면, 먹고사는 일이 용서보다 더 중요한 일인가? 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의 기도문의 순서는, 하느님께 기도를 바칠 때에 ‘하느님 찬미’를 먼저 하는 전통적인 순서를 따른 것일 뿐이고, 순서 자체에 큰 의미는 없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용서’를 강조하시는데, 이 말씀은 앞의 5장에 있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에 연결됩니다.(마태 5,44-48) 우리가 모두 ‘원수 같은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완전한 사랑’을 실천한다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개인의 일로 좁혀서 말하면, “그렇게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모두가 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곳에는 ‘원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을 그런 세상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5)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라는 뜻이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호소’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망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뜻’에 따라 사람들이 모두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사람들이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살면서, 서로 사랑을 실천하고, 서로 용서함으로써,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는 주님의 간절한 바람을 나타내신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바람은 곧 모든 신앙인의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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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를 하면서 가까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블루투스 이어폰입니다. 2년 정도 사용하고 보니 오른쪽 이어폰이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어폰을 청소해 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냥 흘려듣다가 이어폰을 꺼내서 내부를 보았습니다. 오른쪽 이어폰에는 작은 이물질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물질을 꺼내고 깨끗하게 닦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오른쪽에도 선명하게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어폰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가끔씩 이어폰을 청소해 주지 않았던 저의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2번이나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시편 137장은 유배를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를 떠나야 했던 이유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강한 나라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유배를 떠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회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유배의 원인은 자신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방인의 신을 섬겼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불로 금을 단련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단련시키신다고 생각했고, 유배지에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70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그리운 고향 땅으로 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교포사목 성당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인사이동에 따라서 임기를 마치고 신부님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후임 신부님이 오셔야 하는데 비자 문제로 3개월 정도 공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공백을 메워줄 신부님을 구하는 과정에서 혼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되어서 신부님은 떠났고, 당장 주일 미사를 집전해 줄 사제를 구하지 못해서 봉사자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갈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미 다른 성당의 주일미사를 도와 드리고 있어서 어려웠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미사를 도와드릴 신부님을 구했습니다. 박사학위 준비로 바쁜 신부님께서 기꺼이 시간을 내 주셨습니다. 걱정과 근심을 가득 안고 왔다가 환한 웃음을 머금고 돌아가는 분들을 보니 저도 기뻤습니다. 폭풍우가 없는 바다는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도 없습니다.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들은 분명 있습니다. 본당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본당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본당을 분가하는 과정에서 의견의 대립과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도 위기는 외부에서 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공동체가 단합할 수 있다면, 공동체가 기도할 수 있다면 위기는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원인을 밖에서 찾기 보다는 먼저 내 안에서 찾아보면 좋습니다. 어둔 방에서 잃어버린 동전을 환한 바깥에서 찾으면 결코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워하지 마라.’입니다. 풍랑에 배가 흔들릴 때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함께 계셨음에도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실 때입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을 따라서 물 위를 걷다가 두려움에 물에 빠지는 베드로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렇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볼 수 없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꽃도 입히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다 채워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오늘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두려움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에게 위기는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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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주님의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용무가 있어야 만나는 사람들은 그리 친한 사람들이 아니겠지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에는 할 말이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저 만나서 함께 있는 것이 좋아서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약속을 하고 날짜를 정해도, 그날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조차도 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난 뒤에도, 중요한 것은 그 사람과의 관계이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어떤 성과를 얻게 되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만나지 않았을 때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평범한 만남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깊어지고 서로 마음이 통하게 됩니다.
기도에 관한 가르침에서 예수님께서는, 빈말이나 많은 말을 하지 말라고 강조하십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내용 가운데, 우리가 청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미처 생각하지 못하시거나 이루시지 못하실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시기에, 우리가 기도하지 않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이름을 거룩하게 드러내시고 당신 나라가 오게 하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 잘못을 용서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기도로 아버지이신 하느님 곁에 머물면서,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것을 우리도 바라게 되고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여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의 핵심은, 주님의 뜻과 말씀이 우리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성취되도록 기원하는 것이며, 우리도 하느님의 의지와 뜻에 순종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 곁에 머물면서, 아버지를 닮아 거룩하게 되기를 청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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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정욱 안셀모 신부님]
진정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도록 내 열정을 다하였습니까? 오늘 하루도 나에게는 어떤 삶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새로운 날이기에 감사하며 각자가 최선을 다하려고 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갈 때 후회와 아쉬움보다는 성취감과 기쁨이 주어질 것이고 당장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최선의 삶을 살아갈 때 먼 훗날 새로워진 나의 모습을 그릴 수 있고 또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런 희망이 있기에 현실의 어려운 삶 안에서도 우리는 꿋꿋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선의 삶을 다 하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 각자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다듬어 나가지만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고, 투영해 보며 지쳤는데 힘을 낼 수 있는 방법 즉, 기도가 있기에 다른 이들 보다 활기찬 삶을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고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기도의 방법도 많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신앙인이 바치는 올바른 기도 방법과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기도를 할 때 다른 민족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많은 말을 해야만 기도의 효력이 생긴다는 어리석은 기도의 방식에 대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올바른 기도의 방법에 대하여 들려주십니다. 마음에 없는 입으로 흘러내리는 소리가 아니라 기도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며 또한 행동이 함께 이루어질 때 기도의 진정한 효과(?)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언행이 일치하는 기도의 모습을 예수님은 바라십니다.
“주님” “주님” 수없이 외친다하더라도 자신의 마음과 행동에는 주님을 그리워하기보다 자신의 이익과 욕심에 집착한다면, 다른 이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의 모습이라면 그 기도는 허공에 대고 소리치는 의미 없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에서 우러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기도를 바라십니다. 이러한 형식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하고 간절한 마음을 보시고 함께 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직접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항상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먼저 자녀로서 찬양과 그분의 뜻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바치도록 하시며 후반부에서는 감사와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하는지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전에 먼저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 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냥 그렇게 바치라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라고 즉,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뜻에 맞게 자녀로서 삶을 살라고 우리에게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 말씀을 생각해보면 우리 각자의 기도 가치는 형제를 얼마나 용서해 주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결론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내가 하느님의 사랑은 받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용서의 차원을 넘어 하느님의 사랑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내 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는 삶 즉,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살아갈 때 하느님의 사랑이 나에게 넘치도록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우리는 다시 생각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나를 도구로 쓰시면서 나에게는 축복과 사랑을, 그리고 세상에는 화해와 평화가 넘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아실 것 입니다.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빈말로 되풀이하는 기도의 모습이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신앙인답게 하느님께 원하시는 기도의 방법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제물 바치는 것도 먼저 우리의 삶의 모습이 담겨 있을 때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고 함께 해주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나에게 사랑과 용서는 베풀어 주시는데 그 분의 끊임없는 사랑과 용서를 내 안에서 충만히 이루어지기 위하여 내가 먼저 그 분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간혹 우리는 살아가면서 바쁘다는 이유로 내 형편이 안 된다는 이유로 성실하지 못한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지쳤고 싫다고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용서의 삶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뱉어내는 질투와 거짓의 말들에 대하여 책임을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말로서 수없이 괴롭히면서 뉘우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다 주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나 때문에 피를 흘리셨으며, 나에게 새로운 희망과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주저하고 게으른 삶을 찾고 노력하지 않습니까? 왜 그 자리에 머물면서 기도가 힘들다고 용서와 삶이 어렵다고 불평(?)하십니까? 진정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도록 내 열정을 다하였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날을 주시는 의미를 잊지 말도록 합시다. 빈말을 되풀이 하는 의미 없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진정 용서를 통하여 새로운 기쁨과 축복을 전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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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가장 완벽하고 모범적인 주님의 기도>
사순시기에 수행해야할 가장 필요한 덕목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라고 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에 담겨 있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기도는 하느님의 이름을 두고 은총과 축복을 비는 일이다.
기도는 소리를 내는 대화형의 염경기도와 소리 없이 마음속으로 드리는 묵도형의 침묵기도로 대별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대로 기도는 어떤 모양으로든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에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기도하기를 꺼려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영혼이) 숨쉬기를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도에 특별한 장소와 시간이 있어야 할 것 같고, 기도가 왠지 어렵게 느껴지며, 기도에 대단한 문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는 오로지 기도로서만 학습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도가 하느님께 대한 감사, 찬미, 참회, 청원을 그 내용으로 함은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러나 기도는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도, 특별한 장소나 시간을 필요로 하지도, 장황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기도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을 청하려고 하기 때문에 내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는 무엇을 이루어내는 힘이 아니다. 만약 기도를 통하여 무엇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다짐하면 그 기도는 주술이나 주문이 돼 버린다.
기도는 '힘'이 아니라 '자세'이다. 기도는 어떤 조건이나 상태를 말한다. 즉, 기도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준비하는 '조건'이며 '상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무엇을 청원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신다.(8절) 그렇다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기도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전지(全知)하신 하느님께서 자녀들의 필요함을 다 알고 계심은 당연한 일이다. 하느님께서 이미 알고 계신 것과 우리가 청하는 기도는 엄연히 구별된다. 알고 계신다고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께서 이미 알고 계신 그것을 행하실 수 있도록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시는 '주님의 기도'(9-13절)이다. 루카도 비교적 짧은 형태의 이 기도(11,2-5)를 전해준다.
기도의 본질적인 내용은 구약성서적이며, 동시에 유대교적 전통기도의 내용과 흡사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예수님의 일회적이고 혁신적인 새로움이 가미되어 있다.
이는 가장 완벽하고 모범적인 기도로서 모든 기도의 심화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주님의 기도'는 우선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일곱 가지 청원을 담고 있다. 전반부의 세 가지 청원은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관한 것으로서 하느님에 대한 청원이다.
후반부의 네 가지 청원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 '우리 잘못의 용서', '우리의 유혹', '우리의 악'에 관한 것으로서 인간과 삶에 대한 청원이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의 청원에 의해 이 땅에 하느님의 영광(이름)과 통치(나라)와 섭리(뜻)가 계시되었음을 선포하는 감사와 찬양기도이며, 이 땅위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육체적 구원(양식)과 영혼의 구원(용서)을 도모하여, 모든 인간을 온갖 유혹과 악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종말론적 구원을 주시려는 예수님의 다짐기도인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당신의 기도를 우리에게 물려주신다. 그럼으로써 '주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기도를 바치신 예수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는 인간이 하느님께 청함에 있어서 어떻게 청해야 하는 기술과 질서뿐 아니라 무엇을 청해야 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나아가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삶이 하느님 앞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태도를 가져야하는 지를 보여준다.
처음 3가지 청원(이름, 나라, 뜻)은 이 땅위에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말한다.(묵시 11,17) 이어지는 두 번째 청원(일용할 양식, 용서, 유혹과 악으로부터의 구원)은 오늘뿐 아니라 내일과 미래를 지향한다.
양식은 육체와 영혼의 합일체인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며, 이 인간은 타인을 용서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는 자로서 마지막 심판에서 최종적 구원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참으로 목말라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빌어야하는 악의 유혹으로부터의 보호를 비는 청원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어느 누구도 악의 세력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기다리는 그분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여정을 동반할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된 인간의 기도'인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바쳐야 한다.
"내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만일 나의 관심과 취미가 세상 것들에만 있다면, 나는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나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어려움에 대한 여유를 갖고 있지 않다면 나는 '우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매일의 삶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관계를 증명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모든 일에서 하느님께 대한 존경과 영광과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나의 마음 안에, 우리 집에, 우리 학교에, 우리 성당에, 우리나라에, 그리고 전 세계에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마지못해 한다면, 나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나의 삶에서 아버지의 뜻을 마지못해 따르거나 화를 내며 한다면, 나는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나 자신을 내어놓을 진정한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나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매일의 양식을 얻기 위한 정직한 노력을 하지 않은 채, 가족과 친구, 이웃의 분명한 요구를 무시한 채, 나는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계속해서 원한을 품거나 비방한다면, 나는 '저희에게 잘못한 일을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유혹 받을 상황에 고의적으로 남아 있다면, 나는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라는 무기를 가지고 영적 세계에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나는 '악에서 구하소서'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의 영광을 먼저 찾는다면, 나는 '영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여기 내 삶 안에 계신 하느님보다 매일 발생하는 일들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면, 나는 '영원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정직하게 '어떠한 값도 치르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기도입니다' 하고 말하지 않는 한, 나는 '아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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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우리는 <재의 수요일>에,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통해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숨어계신 아버지 하느님 앞에 의로움을 드러내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사순절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말씀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곧 기도를 통한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마태 6,7)고 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무엇보다도, “아빠, 아버지” 면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빠, 아버지”를 향하는 벌어지는 일입니다. “아빠, 아버지” 라 부르는 자녀로서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곧 인간인 저희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지위에 들어 올리십니다. 아버지의 아들인 당신의 반열에 들게 하십니다. 곧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2)라는 시편작가의 노래를 실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특전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이 엄청난 영예를 선사받음으로써, 동시에 자녀로서의 삶이 소명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아들로서의 삶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됩니다. 그 일은 다름 아닌, 아버지께서 생명의 빵으로 선사하신 당신 아드님 그리스도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것아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일이신 “용서”하는 일을 저희도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시련이나 “유혹”이나 “악”에서도 자신이 스스로 구원자가 되려 하지 않고, 아버지께 의탁하여,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벗어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아버지께 신뢰를 두며, 그것을 제거해 달라거나 없애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아버지를 향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오로지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들의 길을 가는 일입니다.
주님! 길이신 주님을 찬미하며, 아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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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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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도하며 우리가 다짐하나이다>
마태오 6,7-15 (올바른 기도, 주님의 기도)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기도하며 우리가 다짐하나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땅에 있는 우리가 기도하며
다짐하나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기를
기도하며 우리가
거룩한 아버지의 이름이 되자고
다짐하나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기를
기도하며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를 일구자고
다짐하나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기를
기도하며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자고
다짐하나이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기도하며 우리가
오늘 서로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어주자고
다짐하나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기를
기도하며 우리가
아버지께서 저희 잘못을 용서하셨듯이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여주자고
다짐하나이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기를
기도하며 우리가
서로를 유혹하지 말자고
다짐하나이다
저희를 악에서 구하시기를
기도하며 우리가
서로에게 악이 되지 말자고
다짐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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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하면 할수록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기도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누군가가 기도해 준다고 하면 마음의 위로를 받습니다. 본인은 기도에 소홀히 하면서도 남에게는 기도해 준다고 말하고 또 기도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왕 기도할 바에야 효과 있는 기도, 올바른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6,7-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청하기도 전에 알고 계신다니 청하는 바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하겠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더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잘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잘 통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이 묵주기도, 9일 기도, 15기도, 33일 봉헌기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 등등 성인 성녀들이 즐겨 봉헌하였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따르는 삶의 쇄신과 실천 없이 목표한 바를 채우기에 급급해하면서 꼭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서 무엇을 그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할수록 하느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께 나를 맡기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은총을 받고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루이 에블린은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열성을 다해 공덕을 쌓고, 많은 것을 청하지만 실제로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구원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기를 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먼저, 더 많이, 더 깊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한상봉) 그러므로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꿰뚫어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이사야서 말씀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들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4)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1,6-7)
나보다 나를 더 환이 아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 않고 더 좋은 것을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때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심을 믿습니다.
우리 기도의 중심은 내 생각, 내 뜻에 있지 않고 하느님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갈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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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 6장은 세 가지 종교적 신심 행위, 곧 자선(6,2-4 참조)과 기도(6,5-15 참조)와 단식(6,16-18 참조)을 소개합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자선과 단식에 대한 가르침은 짧은 반면에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상대적으로 분량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 속하는데,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습니다. 첫 번째, 이방인의 예를 들면서 말 많은 기도를 경고합니다.(6,7-8 참조) 두 번째, 주님의 기도를 소개합니다.(6,9-13 참조) 세 번째, 용서를 권고합니다.(6,14-15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빈말을 되풀이하면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본보기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먼저 하느님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명확합니다. 제자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하여, 그분께 기도해야 합니다.(6,9ㄴ 참조) 이어서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 나라의 도래, 하느님 아버지 뜻의 성취에 대한 희망을 표현합니다.(6,9ㄷ-10 참조) 이어지는 후반부에서 표현되는 청원들도 종말론적 기대를 전제합니다. 다가오는 날을 위한 양식(6,11 참조), 죄의 용서(6,12 참조), 그리고 마지막 날 시험에서 하느님의 보호(6,13 참조)를 청합니다.
모두 여섯 개의 짧은 청원들로 구성된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나라가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필요를 표현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먼저 하느님의 영광, 나라, 뜻과 관련한 청원이 자리하고, 이어서 인간의 필요에서 비롯한 청원이 나오는 순서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인간의 바람보다 하느님의 뜻이 우선함을 전제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는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개인이 혼자, 또는 공동체와 함께 매우 자주 바칩니다. 그런데 너무나 친숙한 나머지 습관적으로 바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기도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바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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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마태6,7)
<사랑의 기억과 실천인 기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빈말을 되풀이 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이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가장 완전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일곱 개의 청원기도'가 담겨 있는데, 그 본질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마태6,7-15)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은 당신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하게 드러났고, 그 완전한 사랑이 바로 '예수님의 육화와 땀과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지금 매우 은혜로운 때요 구원의 날인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치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더 기억하고, 이 큰 사랑을 더 실천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거룩한 재계의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6,14-1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기도'는 빈말의 되풀이가 아닙니다. '기도의 본질'은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지금 여기에서 기억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미사의 본질'이고, '말씀 묵상의 본질'입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완전한 사랑을, 지금 여기에서 잘 기억하고, 잘 실천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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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학생이 미국에 유학 갔습니다. 큰 꿈을 품고서 유학하러 왔지만,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힘들 수밖에 없었지요. 너무 힘들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 타고 가던 배가 뒤집혀서 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이 학생을 도움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마침 저 멀리에 지나가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그는 힘들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Would you mind…. helping me?”(혹시 괜찮으시다면…. 저를 살려주시겠어요?)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도 예의를 차려 정중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이 말을 듣고서 과연 지나가는 사람이 자신의 걸음을 멈추고 도움을 줬을까요? 말을 들었으면 도움을 주기 위해 왔겠지만, 급해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는 관심을 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 같이 빠진 다른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Help me!!!!”(살려주세요!!!) 그제야 지나가는 사람은 이 목소리에 반응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위급할 때는 정중한 말보다 간단하고 간절함이 표현되는 말이 필요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주님 앞에 최대의 예의를 갖추고 기도해야 할까요? 때로는 간절한 마음은 정중함을 뛰어넘습니다. 이런 간절함이 먼저 필요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바로 우리가 가장 많이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이름을 다시 알리고 그 이름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점은 하느님의 이름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였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은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감히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 그들은 ‘야훼’, ‘아도나이’ 등의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면서 근엄하게 통치하는 임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이루어짐으로 하느님과의 통교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만큼 가까워졌음을 ‘아버지’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기도는 바뀌어야 했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 계신다며 형식적인 ‘빈말’을 되풀이했던 기도의 모습에서,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형식적인 기도가 아닌, 간절한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워졌기에, 우리 역시 하느님처럼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나의 기도는 어떠한가요? 간절한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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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이 잣대다>
- 최후심판 -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제 졸저의 책명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관상, 사랑의 수행, 사랑의 찬미, 사랑의 신비, 사람의 기적, 모든 말마디에 사랑이 붙습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도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요 사랑공부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공부에는 영원한 초보자라 합니다.
오늘 말씀 주제도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최후심판의 잣대는 바로 곤경중에 있는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임을 보여 줍니다.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 앞에서 곤경중에 있는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주님은 곤경중에 있는 이들과 자신을 일치시킵니다. 의인들에 대한 축복선언을 통해, 또 저주받은 이들에 대한 저주선언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너희는
1.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2.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3.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4.또 내가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5.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6.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추상적이며 애매모호한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의 사랑입니다. 새삼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닌 실천동사임을 깨닫습니다. '언제 저희가 주님께 이런 사랑을 실천했느냐?'는 의인들이 질문에 주님은 명쾌하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곤궁중에 있는 작은 이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형제들이란 말씀이 참 신선하고 놀랍습니다. 가까이 있는 형제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형제들이자 주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언제 저희가 주님께 이런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느냐?’의 질문에 대한 저주 받은 이들에 대한 주님의 선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그대로 오늘 최후심판 이야기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찬미와 감사, 기도와 회개, 사랑의 실천이지 죽어 최후심판정에 섰을 때는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살아서 사랑하라, 기뻐하라, 찬미하라, 감사하라 주어진 하루하루의 날들임을 깨닫습니다. 찬미와 감사, 기도와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세상인데 미움과 불평불만으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함은 참으로 어리석고 허무한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기도도 공부도 전례도 좋지만 이웃사랑의 실천이 빠졌다면 참 공허할 것입니다. 바로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이 최후심판의 잣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레위기도 구체적 이웃사랑이 금령들로 표현됩니다. 금령들의 항목을 헤아려보니 무려 18개 항목입니다. 악마는 디테일 안에 숨어있다는데 이렇듯 디테일에 철저한 금령들이니 악마도 도저히 숨어 있을 수 없겠다 생각됩니다. 첫 말씀과 마지막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닮아 우리 모두 거룩해야 한다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어떻게 거룩한 사람이 되는가? 바로 이어지는 이웃에게 해서는 안되는 금령들을 하지 않는 이웃사랑의 실천을 통해서입니다. 맨 마지막 말씀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주님은 단락이 끝날 때 마다 못박듯이, 도장 찍듯이 “나는 주님이다” 말씀하심으로 말씀의 엄중함을 강조합니다. 거룩함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납니다. 사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느님, 자비하신 하느님이라 고백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은 자비로운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최후심판의 잣대는 종교도 인종도 국적도 기도도 공부도 전례도 아닌 곤궁중에 있는 이웃 형제들에 대한 구체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놀랍게도 곤궁중에 있는 이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형제들이자 주님 자신이라는 주님의 선언입니다. 참으로 이웃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것이 건강하고 건전한 신비주의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제 읽은 교황님의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진정한 혁명은 날마다 묵묵히 일하는 이들을 통해 작고 가난한 이들이 더 이상 무시되지 않고 버려지지 않고, 포기되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들의 존엄성에 따라 일어나 살아 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룩된다. 진정한 혁명은!”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곤궁한 이웃들에 대한 구체적 사랑 실천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의 거룩한 사랑의 성체를 모신 형제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형제들’이자 ‘주님 자신’임을 깨닫게 해주는 미사은총이 참 고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구원의 축복받은 이들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25,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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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 기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는 기도를 잘 못합니다.
별로 드릴 말씀도 없구요.
저를 위해서는 아쉬운 것이 거의 없으니
청할 것이 없어요.
다만 내가 사랑하는 지인이
힘들어하고 아파할 땐
맘이 짠해요.
내가 어찌 해 줄 수가 없으니
주님께서 도와 주시라고
간청할 수밖에요.
오, 나의 주님!
무지막지한 정치-자본권력으로 인해
착하고 소박한 서민들이 겪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보면
정말 화가 나요.
내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주님께서 심판해 주시라고
간청할 수밖에요.
오, 나의 하느님!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길
진정으로 바라게 하소서.
내 먹고 살만한 양식이 있다면
만족하고 욕심부리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잘못한 사람
미워하기보다는 용서하게 하소서.
그래야 내가 잘못한 사람이
저를 용서할 테니까요.
그리고 주님,
세상 유혹과 악이
나를 자꾸만 끌어당겨도
끌려가지 않도록
저를 좀 꼭 붙들어주소서.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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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caWg7UftX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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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 9)
우리는
기도의
자녀들이다.
주님의 기도로
마침내
기도에 눈 뜨는
우리들 삶이다.
주님의 기도로
하느님 사랑이
열린다.
오늘을
이끌어 가는
주님의
기도이다.
기도는
일회성이
아니다.
기도는
생활이다.
생활과 기도는
분리될 수 없다.
기도로
자라나는
우리들 삶이다.
삶의 출발은
기도이다.
기도로
이루어 나가시는
주님이시다.
기도로
주님을
닮아간다.
늘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기도로
용서를
배운다.
우리의 인생이
주님의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가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주님의 기도로
인생 여정을
걸어간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마음과
삶을 주님께
드린다.
기도 안에
주님과
우리가
함께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악에서
구하소서'라며
정성들여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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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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