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마음을 품고 공부해 하버드 로스쿨에 들어간 주인공은 '멍청한 금발(dumb blonde)'이라고 놀렸던 남자친구에게 보란 듯이 '법률가로도 훌륭한 금발(legally blonde)'임을 증명한다는 내용이다. 뮤지컬의 커플을 연상시키는 변호사 부부가 공연장 인근 건물 '아셈타워'에 있다. 성(姓)도 같고 출신 대학도 같고 나이도 같고 사시(司試)도 같은 해 합격했고 같은 회사에 같은 해 입사해 13년째를 맞은 그들의 사연은 무엇일까. ◆1995년 3월 14일 "받아~", "안 받아!", "받아~"…. 이날 밤 9시쯤 서울 서초동 사법연수원(현 서울중앙지법 별관) 건물 앞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꽃다발과 사탕꾸러미를 두손으로 건네는 남자는 '농촌 총각'처럼 보였고 자칭 '연변처녀' 여성은 손사래를 쳤다. 밀고 당기는 과정이 30분쯤 지났다. 남자가 타협안을 내놓았다. "어릴 때 할머니가 주셨던 사탕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할머니 사탕도 안 받아줄 거야?" 여성은 조건을 달았다. "대신 절대 부담주지 않기야!" 서른 살을 앞둔 동갑내기 연수원생 신영수(申永洙·44), 신영재(申鈴才)의 교제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둘은 연세대 법학과 선후배 사이다. 재수를 한 신영수가 부인 신영재보다 한 학번 아래다. 학창시절에는 얼굴만 알고 지냈다. 신영재는 "촌스런 남자 후배 중 하나였을 뿐"이라고 했다. 사법시험 2차 합격자 발표를 앞둔 1994년 9월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던 같은 과 선후배들이 신촌의 한 호프집에 모였다. 신영수와 신영재도 그중 일부였다. 같은 테이블에서 처음으로 사적인 대화를 건넨 신영수는 당시 굉장한 떨림이 왔다고 했다. "한없이 여려보였어요. 평생 보호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필(feel)'이 완전히 꽂힌 거죠." 신영재는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 사람이 거기 있었다는 건 기억나는데 무슨 얘기 했는지도 기억 안 나요. 완전히 관심 밖이었죠." 이들은 보름 후 합격자 명단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같은 과 출신 사시 합격자들로 모임이 꾸려졌다. 늦가을 산행을 계룡산 동학사와 갑사로 가기로 한 날 아침 신영수만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다. 그는 신영재에게 "동갑이니 누나나 선배로 부르지 않겠다"며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신영재는 "'신영수라면 양복 입고 산에 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말 놓겠다는 걸 보며 '날 좋아하나보다'하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형제? 남매? 1996년 1월 둘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고비도 있었다. 둘은 같은 뿌리의 자손이라는 집안 어른들 반대 때문이었다. 신영수는 신숭겸으로 대표되는 평산 신씨이고 신영재는 신숙주가 조상인 고령 신씨다. 두 집안은 원래 한 뿌리에서 갈려 나왔다고 한다. 일부 가족들의 반대를 케이스 스터디로 극복했다. 족보에서 평산 신씨와 고령 신씨가 결혼한 사례를 찾아낸 것이다. 같은 해 10월 첫 딸이 태어났다. 검사가 되려던 신영수와 판사가 되고 싶었던 신영재 중 한 사람은 계획을 바꿔야 할 상황이 됐다. 신영재가 육아를 위해 로펌에 가겠다고 나섰다. 신영수는 로펌 면접을 보러 간 아내를 따라나섰다. 그는 면접 현장에서 덜컥 입사 제의를 받았다. "윤호일 대표변호사께서 함께하자고 해 고민하다 아내와 같은 배를 타기로 했죠." 이름이 비슷해 벌어지는 해프닝은 결혼 14년째인 올해에도 여전하다. 신영수와 신영재는 연수원 시절에 남매 사이로 알려지기도 했다. 가나다순으로 자리가 배치되는 전체 수업 때엔 늘 앞뒤로 앉아 수업을 들었다. 신영재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연수원 선후배들이 늘자 신영수는 사귀기 전인데도 "신영수, 신영재는 결혼을 약속했다"는 소문을 은밀히 퍼뜨렸다고 한다. 이들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은 신영수와 신영재를 형제로 생각한다. 신영수는 "우리 회사 직원들조차 이름을 혼동해 아내 우편물이나 메일을 내게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대부분은 영수를 여자 이름, 영재를 남자 이름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수원 동기이자 입사 동기인 신영수·신영재 커플의 영향 때문인지 이들이 몸담고 있는 법무법인 화우(和友)에는 사내 부부가 두 커플이나 생겼다. 모두 신영수, 신영재와 같은 금융팀이다. ◆"M&A 변호사는 피도 눈물도 없다고요?" 신영수와 신영재는 기업 인수합병(M&A) 전문 변호사다. 뮤지컬 '금발이 너무해'에서 "즐겨봐 황홀한 피냄새~그 향기를 즐겨라"고 노래했던 전쟁터 같은 로스쿨보다도 더 냉혹한 분야다. M&A를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 부부의 가정은 어떨까. 물고 뜯는 M&A의 세계처럼 집안 분위기도 싸늘할까. 신영재는 "입사 후 10년 정도까지는 M&A 관련 딜을 할 때 부부싸움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다 이기려 했다"고 말했다. 협상 과정에서도 하나도 양보하지 않고 다 얻어내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험이 쌓일수록 모든 것을 다 갖는 것이 참 승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부부생활에서도 많이 배웠어요. 강요하지 않고 늘 먼저 양보하는 남편을 보면서 진정한 협상을 생각해보게 됐죠." 2002년 부부에게 해외유학 기회가 왔다. 시부모를 모시고 있던 신영재가 남고 남편 신영수가 1년 먼저 떠나기로 했다. 이듬해 두 딸을 데리고 합류한 신영재가 그곳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간이 2년이었다. 1년 후 남편은 서울로 돌아갔다. 2004년 가을 시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 유학기간을 1년쯤 남긴 신영재도 곧바로 귀국했다. 신영수는 "아내가 시아버지를 위해 돌아오는 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며 "아내에게 배운 배려를 M&A 협상에서도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상이 두렵지 않은 이유 신영수는 3녀 1남의 외아들에 장손이다. 그의 고향은 전남 완도 인근의 신지도라는 작은 섬이다. 신영수는 이곳에서 배출한 최초의 사법시험 합격생이다. 그는 신혼여행 때 고향 신지도를 찾았다. 마을에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신영재는 "시댁 문 앞에 피워 놓은 불을 뛰어넘은 뒤 바닥의 박을 깨뜨리라는 요청에 처음엔 놀라기도 했다"고 말했다. 신영재는 3남 1녀 중 외동딸이다. 둘은 서로를 왕자와 공주처럼 살아왔다고 했다. 자기만 알고 최고인 양 살아왔기에 결혼 초 다툰 적도 많았다. 하지만 직장 동료로 서로 머리를 싸매고 집에서는 가족으로 부대끼면서 사랑과 배려가 몸에 익기 시작했다. "남편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가능했죠. 업무에 있어서도 큰 그림을 그려내는 남편이 세밀한 것에 집착하는 제게 큰 도움이 됐고, 친교에 약한 제게 남편이 디딤돌 역할도 해줬죠." "시부모 모시며 애들 키우는 아내에게 미안한 점이 많아요. 그런데도 평소에 표현을 거의 못했어요. 태어나서 아내를 만난 것이 세상을 다 가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부의 꿈은 이웃을 돕는 삶을 사는 것이다. 신영재는 이미 로스쿨 재학생들을 위한 실무안내 등의 무료 법률교육을 시작했다. 법률자문을 받지 못하는 중소기업들에 서비스를 제공해 국제 경쟁력을 키워주는 게 꿈이다. 신영수는 사회 구석구석의 불합리함을 들춰내 살기 좋은 세상으로 바꾸고 싶다고 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가장 무서울 때가 아내가 화났을 때에요. 그것 말고는 두려운 것이 전혀 없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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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내 무서워 하는분이 한 사람 늘었군요... 아뭏든 지역적인 차원에서 많은 활동 기대해 봅니다...
진정 소설과 같은 아름다운 사랑이네요 .... 그런 마음 고이고이 잘 간직 하이 고향 발전에도 한목 하기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