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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주보 제1900호 연중 제16주일(2020.7.19) 지팡이 마당 내 소리 들어줄 낯선 이 누구실까? 바오로딸 서원에는 다양한 분들이 찾아오십니다. 영성 서적이나 교리서, 지인에게 줄 성물을 사러 오는 분도 계시지만, 저희 수녀들에게 기도를 청하러 오는 분들도 계십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해묵은 상처를 펼쳐놓으며, 단지 들어줄 누군가가 그리웠다는 분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 깊은 속내를 처음 만난 수녀에게 훌훌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은 다시 꼭 만나리라는 기약도 없는 우리 인연의 가벼움 때문이 아닐까 헤아려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오래 사귄 지인보다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내밀한 사연을 더 편안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데, 이를 심리학 용어로 ‘기차에서 만난 이방인 현상(Stranger on a train phenomenon)’이라고 합니다. 나의 힘들고 어려운 이야기를 부담스러워할까 봐, 혹은 나의 위신이 떨어질까 봐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도 비밀이 새어 나갈 염려가 없는 낯선 이에게는 오히려 쉽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문제의 해결책을 얻을 수는 없지만, 자기 고백과도 같은 낯선 이와의 대화가 주는 심리적 효과는 매우 탁월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숨김없이 풀어내고 누군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체험을 통해 정서적 안정과 자기 가치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실 심리적 건강은 관계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변 사람들과 맺는 좋은 관계는 면역체계를 활성화하고 신체적·정신적으로 질병에 걸릴 확률을 낮추어 준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회심리학자들은 친밀하고 지속적인 관계 못지않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다지 친밀하지 않은 관계도 우리 삶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따금 마주치는 점원이나 이웃들은 내 삶과 무관한 것 같고, 그래서 때로 의도치 않은 무심함이나 불친절함으로 함부로 대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릎이 꺾이도록 삶의 무게가 나를 덮쳐올 때, 도저히 풀 수 없는 의문이 내 마음속을 헤집을 때,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에게 나타나 그를 인도해준 필리포스처럼, 그분들이 나를 생명의 말씀으로 인도할 손길이 되어줄지도 모릅니다(사도 8,26-40 참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던 우화 속 임금님의 이발사처럼, 차마 실명으로 밝히기 어려운 고민이나 사연으로 ‘대나무숲’이라는 온라인 익명게시판을 찾는 대학생들처럼, 내 묻어둔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신가요? 무심히 지나쳤던 주변의 이웃들을 돌아보세요. 그래도 찾기 어려우시다면? 바오로딸 서원을 찾아오세요. 저희 수녀들이 귀 기울여 들어드릴게요. 글 | 배기선 영덕막달레나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심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