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예는 태강(太康) 원년(280) 정월에 강릉(江陵)에 군진을 펴고 참군 번현(樊顯), 윤림(尹林), 등규(鄧圭), 양양태수 주기(周奇) 등을 보내 무리를 이끌고 강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도록 하였다. 명령을 내린후 10여 일만에 누차 성읍을 공격해 이기니 모두 두예의 계책 같이 되었다. 또한 아문 관정(管定), 주지(周旨), 오소(伍巢) 등을 보내 기병(奇兵) 800명을 이끌고 밤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악향(樂鄉)을 습격하는데 깃발을 많이 꽂고 파산에 불을 지르며 요해지에서 나와 활동함으로써 적의 군심을 빼앗도록 하였다. 오나라의 도독 손흠(孫歆)이 공황에 빠져 오연(伍延)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길
「북쪽에서 온 군대들이 마침내 날아서 강을 건넜소.」
오나라의 남녀로 항복한 사람이 만여 명이고 주지, 오소 등은 악향성 바깥에 군대를 매복시켰다. 손흠은 군대를 보내 왕준(王濬)을 막도록 했는데 대패하고 돌아왔다. 주지 등은 복병을 발하여 손흠의 군대를 따라 성으로 들어왔는데도 손흠은 깨닫지 못했는데 바로 군막에 이르러 손흠을 사로잡고 돌아왔다. 그러므로 군중에서 다음과 같은 요언이 돌았는데
「계책으로 전투를 대신하니 한 명으로 만 명을 당한다.」
이에 강릉(江陵)에 가까이 갔다. 오나라 독장 오연은 가짜로 항복을 청하고 군대를 진열하고 성가퀴에 올랐지만 두예는 그를 공격하여 이겼다. 상류를 평정하자 이에 원강(沅)과 상수(湘) 이남에서 교주(交), 광주(廣)에 이르기까지 오나라의 주군들이 모두 기세를 보고 항복하며 인수를 받쳐 보냈는데 두예는 부절을 들고 황제의 명을 칭하여 그들을 위무하였다. 무릇 죽이고 생포한 오나라의 도독과 감군이 14명이고 아문, 군수는 120여명이었다. 또한 군대의 위세를 빌려 장사와 둔수의 가문을 이주시켜 강북을 채우고 남군의 옛 땅에 각기 장리를 세우니 형토(荊土)가 숙연하고 오나라 백성들이 투항하여 귀순하는 것이 마치 집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왕준은 먼저 위에 손흠(孫歆)의 머리를 얻었다고 보고했는데 두예가 이후에 살아있는 손흠을 보내자 낙양의 사람들은 이를 큰 웃음거리로 여겼다. 당시에 여러 장군들이 모여 회의를 할 때 혹자가 말하길
「백년의 적은 (한꺼번에) 전부 공격해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 여름이 오고 있어 비가 많이 오고 역병이 번질 것이니 응당 오는 겨울을 기다려 다시 대규모의 거병을 해야 합니다.」
두예가 말하길
「옛날 악의는 제수의 서쪽에 의지해 한번 전쟁을 치러 강대한 제나라를 병합했는데 지금 군대의 위무가 이미 떨쳐졌고 대나무를 쪼개는 것에 비유하자면 몇 마디 뒤에는 모두 칼이 닿자마자 쪼개져 다시는 손을 댈 곳이 없는 것과 같소.」
마침내 여러 장수에게 명령을 내려 곧바로 말릉을 향하도록 하였다. 지나가는 성읍마다 저항 없이 (항복하였다.) 의논하던 사람들은 마침내 편지를 보내 사죄하였다.
손호(孫皓)가 평정되자 군려를 떨쳐 개선하였는데 공로로 작위를 올려 당양현후(當陽縣侯)로 하고 식읍을 증가하여 전의 것과 더불어 9600호였다. 아들인 두탐(杜耽)을 정후에 봉하고 식읍을 1000호로 하며 비단 8000필을 내렸다.
당초에 강릉을 공격할 때 오나라 사람들이 두예가 혹으로 병을 앓는 것을 알아 그의 지모를 두려워하여 표주박을 개의 목에 달아 보이기도 하고 커다란 나무에 혹처럼 생긴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잘라서 (나무 속살의) 흰색이 보이게 했는데 제목을 붙이길 「두예경(杜預頸: 두예의 목)」라 하였다. 성을 평정하는데 이르서 (이런 사람을) 모두 잡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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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예는 말을 타지 않았고 화살을 쏠 때 갑옷을 뚫지 않았지만 매번 큰일을 담당함에 있어 항상 장군의 열에 거하였다. 다른 사람과 교우할 때 공손하면서도 예법을 지켰고 물어보면 숨기는 것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고 일은 민첩하게 하고자 했으면서 말하는 것은 삼갔다. 공로를 세운 다음에 종용히 하는 일 없이 경적에 침닉하여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를 지었다. 또한 여러 가문의 족보를 참고하여 《석례(釋例)》를 지었다. 또한 《맹회도(盟會圖)》,《춘추장력(春秋長曆)》을 지었는데 일가의 학문을 이루었고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 또한 《여기찬(女記贊)》을 지었다.
진서 열전 두예
군 장성 출신 운운 하는 것들 보면서 생각 나서 한번 가져와 봤습니다.
강감찬, 윤관, 권율, 장만: 우리다 문과 출신이야~~~
첫댓글 문민통제 였죠. 문무를 겸비하는 문관한테 맡겼고요.
“왜 국방장관 시킬때 전역을 시킬까”를 생각안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제갈무후
제갈무후는 이제 너무 유명하다보니 좀 식상(?)하다고 느껴져서 ㅎㅎ
원숭환
그쳐 원숭환도 있었죠 ㅎㅎ
십삼경주소 중, 춘추좌씨전의 경우, 두예의 주와 공영달의 소를 택했습니다. 좌씨전을 읽을 때 두예의 주석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