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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홍경삼에게서 귀한 선물을 받았다. 그날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 했더니 “서울인데 오늘 11시 올림픽공원에 나와.
내가 줄게 있어, 사상계 창간호를 집 정리하다 찾았는데 줄려고 해.”
글방에서 글과 그림은 자주 봐 낯설지 않은데 목소리는 몇 십년만인데도,
이상한 것은 금방 알겠더라고,
그도 첨 안 일이다. 책을 받고, 마침 일을 하던 중이라 점심도 함께 못하고
내가 친구들과 함께 모였던 장소에서 빠져나왔다.
돌아와 바쁜 일 대충마치고 그가 준 책을 몇 장 펴보았다.
오래 전 글이지만 재미있었다. 그 중하나. 金光洲선생의 소설
‘不孝之書’, - 어떤 남편이 쓴- 이라고 부제가 달려있었다.
^옛날 감방에서 情俠志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과연, 그냥 그 자리에서 읽히었다. 금방 이 소설을 펼친 것은,
얼마 전 출판과 미술평론을 하는 후배 손철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어서다.
작가 金薰이 우리 선조가 쓴 端宗復位와 死六臣覆爵을 청하는 上疏文을,
그 논리를 어떻게 구성하고 전개했는지 보고 싶어 하니
찾아달라는 청을 받고 김훈의 얘기를 들었다.
김훈은 김광주의 아들이다.
김훈의 소년시절.
엄마가 하루는 나를 불러, 아버지가 시방 어느 술집에 계시니
가서 “집에도 좀 와 보시라고 해라” 해서 거길 갔더니,
좌우의 가인들과 함께 주흥이 도도하여 도저히 틈을 엿볼 수 없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서, “아버지 집에도 좀 와보소!”라고 했더니,
아버지가 “야 이눔아 광야를 달리는 말이 마구간을 돌아보란 말이냐”고
일갈해서 대책 없이 돌아오고 말았는데,
그 뒤 자기도 돈이 좀 생겨 아버지처럼 마셔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더란다. 소설부제에 ‘어떤 남편이 쓴’이라고 달아놓았으니
안 볼 도리가 없었다.
김승웅글방은 워낙 박람강기의 문사들이 모이는 곳이라
잠간 몇 자 내가 아는 한 고치면, 사상계의 전신 ‘思想’은 1952년
피난수도 부산에서 당시 문교부장관이던 白樂濬선생이
문교부에 ‘국민사상지도원’이란 기구를 두고 기획과장에 광복군중위
김구 임정주석비서로 환국한 장준하선생을 앉혔는데,
장 선생은 ‘국민사상연구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잡지 ‘思想’을 창간했다.
제4호를 내고 폐간된 것을 장 선생이 ‘思想界’라고 吳基錫선생이 쓴 서체에 ‘界’자를 붙여서
부산에서 1953년 4월 창간호를 냈다.
그 뒤 서울의 지가를 올린 일은 아는 바. 1975년 8-9합병호에
당시 신민당기관지 민주전선에 실렸던 김지하의 ‘五賊’을 전재하여 폐간되었다.
홍경삼 글에 언급된 나 김도현은 초중교 졸업식에는 못 갔지만 졸업은 했다
. 2011년 대학에 재입학했는데, 물어보니 1학점미달이라 해서
체육을 신청하려 했더니 체육은 워낙 인기가 있고
나는 자판 찍는 손가락이 느려 안 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전공과목을 신청하고 첫 강의에 출석해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더니 수업 뒤 교수가 “김 선배 다시 오지마세요”해서
안 나갔다.
하루는 조교가 전화로 “왜 출석 안하나요?”해서 다시 갔더니,
교수가 “김 선배 오지 말라 했잖아요” 했다. 얼마 뒤 조교가 전화로
1주일 이내에 논문제목을 제출하고 1개월 뒤 논문을 내란다.
우리 다닐 때는 정치학과에 졸업논문제도가 없었다.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사회주의논문을 내면 통과시킬 수도 않을 수도
없어서라고 했다. 친구들 말이 “네 논문은 읽을지도 몰라”라고 겁을 주어서
끙끙거리며 꽤 긴 논문을 써서 냈다.
며칠 뒤 조교에 전화로 “몇 글자 고치면 안 될까요” 라고 했더니,
“뭐 읽지도 않으니 그만 두세요”란 대답이었다.
졸업식에는 이번에도 안 갔는데 학사학위장이 왔다. 짓궂은 친구가
신문에 제보를 해서 ‘50년만의 졸업’이란 기사가 났다.
50년도 더 전에 홍병길(경삼) 네 삼선교집에 밤늦게 친구가 없어도
문 두드리고 들어가 자고 아침밥까지 먹었다.
부실한 내 과거 탓에 앞길에 할 일이 쌓였는데 늦가을 해가 지고 있다.
가는 가을이 제발 우정만은 함께 데려가지 말았으면 한다.
늘 고마웠던 경삼에게 무슨 선물을 줄 수 있을까.
<디지털 사상계 대표/소비자생활협동조합중앙회 회장, 문공부 차관, 강서구청장 역임/
서울사대부고~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졸/안동 産>
첫댓글 대학시절 당시 사상계를 읽고 그 내용을 소화한다는 것은 매우 버거운 일이었다. 이후 사회로 나가 다시 모아 둔 옛사상계의 글들을 보면 누가 글을 썼느냐가 먼저 눈에 띄고
다음은 대부분의 내용이 민족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글들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긴 개인이나 사회나 간에 발전의 양상이 대부분 그러하건데 우리라고 특별한 것이 있었겠느냐마는..
그래도 사상계는 당시 최고 지성들의 요람 중 하나였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안녕하시죠? 네 맞아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사회, 정치, 경제계를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부분을 알게 되었지요.
하여 정부의 눈의 가시었는지도 모름니다. 사상계가 매년 수여하는 동인 문학상은 문학계의 큰 대들보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