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서만 죽음을 앞두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가리지도 않고 나이 별로 줄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누군가에게 찾아옵니다. 늙었다고 다 된 듯이 손 놓고 기다릴 필요도 없거니와 젊다고 남 얘기 듣듯이 흘려버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늘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기를 권하는지도 모릅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하루를 살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우리와 상관없이 살고들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들 죽자 사자 악을 쓰며 잡아먹을 듯이 발버둥 치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그러겠습니까? 뭔가 생각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서로 치고받고 악따구리 쓰며 살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때로는 저렇게 인생 종치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버킷리스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목록으로 작성하여 실행해보는 겁니다. 보통 죽음을 앞두고 시간적 여유가 얼마 없는 사람들이 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기야 그것조차 그림의 떡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병세가 위중하든지, 그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든지 등 이런저런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자신의 한계 안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몇 가지라도 작성을 해볼 수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행해보는 겁니다. 꼭 대단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만약 갓 20대를 넘긴 젊은 청년이라면 아마도 돈 많이 드는 일을 꿈꾸지는 않겠지요.
여기 갓 스물을 넘겼을까 싶은 처녀가 그런 경우입니다. 암 선고를 받고 치료를 받으며 암 환자들을 위한 서포터 그룹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어느 날 또래의 남자를 만납니다. ‘스카이’와 ‘캘빈’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캘빈은 스스로 암 환자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환자가 아닌 환자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적어보라는 상담사의 지시를 받았으나 무엇을 써야 할지 머리만 굴리고 있을 때 스카이가 껴듭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교제(?)가 시작됩니다. 아마도 나이 든 사람들이 대부분인 모임에서 또래가 있다는 사실에 반가움과 장난기가 동시 작동한 듯합니다. 그런데 사실 스카이의 언행 모두가 그렇게 엉뚱하고 저돌적입니다. 다소 새침했던 캘빈이 끌려 다니게 됩니다. 두 사람이 얽히게 된 소재가 바로 스카이의 버킷리스트입니다. 그야말로 엉뚱한 사건들을 일으키지요.
가까운 사람이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이지요. 사실 즐거울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떠나는 사람에게는 매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혼자서 맞는 죽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도 순간적인 죽음이라면 모르되 시간을 기다리며 맞이해야 하는 죽음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임종을 지킨다는 의미를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바라보는 사람 마음도 서서히 죽어갈지 모릅니다. 그래도 살아남으니 다시 희망을 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떠나는 사람은 그냥 떠나야 합니다.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그래서 더 두려울 수 있습니다.
캘빈은 왜 스스로 암환자라는 착각을 만들어 살아왔을까 하는 의문을 풀어줍니다. 쌍둥이 동생이 교통사고로 사망합니다. 그 때 엄마가 운전했습니다. 그 사고 후에 엄마는 폐인이 된 셈입니다. 그 후 캘빈은 생일잔치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그 때 나도 죽었어야 하는데, 얼마나 일방적인 생각입니까? 그러나 엄마의 상황은 어린 캘빈의 생각을 그렇게 몰고 갈 수 있습니다. 엄마의 마음은 그야말로 새까맣게 타버렸을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치유가 되기 어려웠으리라 짐작합니다. 문제는 그 아픔을 남편이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야 했다는 말이지요. 게다가 남은 아들 캘빈마저 비슷한 증상을 보이고 있으니 아빠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엄마 하나로 충분하다, 캘빈이 깨닫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데 발랄한 스카이가 분명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장해감에 있어서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사람들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것을 봅니다.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나아가 사회를 따뜻하고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보다 부정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어렵게 만들고 사회를 힘들게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만 꼽는다면 ‘내가 먼저여야 한다,’는 욕심 또는 그런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이해, 양보, 합의 등 뭔가 함께 하고자 하는 의도보다는 일단 내가 먼저 되고 보자는 욕심과 의식이 앞선다면 그렇게 됩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선고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그런 욕심으로 살지 모르겠습니다. 글쎄, 그 때는 ‘내’가 아니라 ‘내 자식’이 될까요? 거 참! 영화 ‘디어 마이 프랜드’를 보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첫댓글 좋은영화평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복된 주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