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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시인
얼마 전 한센인협회에서 거센 항의 전화를 받았다. 몇 주 전 금요 철야 기도회 때 나환자가 고침받는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를 TV 방송을 통해서 본 한센인들이 문제를 삼은 것이다. "한센병이나 피부 질환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지 왜 나병이라는 표현을 적나라하게 사용했느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당황했다. 설교 시에 당시 성경이 기록되었던 배경과 문화를 실감 나게 표현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그분들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었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극적으로 고침받은 놀라운 기적을 강조해서 설교했을 뿐이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설교를 모니터링해 보았다. 그분들을 폄훼하는 내용은 없었다. 그러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목사가 강단에서 성경 이야기도 자유롭게 못한단 말인가." 그런 억울한 마음이 계속되었지만 연말인지라 하루 종일 외부 활동을 하다가 저녁 늦게 교회로 돌아왔다. 그때 교회 밖에는 성탄 트리가 어두운 밤을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 순간 성탄 트리 불빛이 지쳐 있던 내 가슴에 새롭게 다가왔다. "그래, 예수님은 천상의 보좌(寶座)를 버리고 낮고 천한 말구유에 탄생하지 않으셨던가. 아니 인류를 구원하고 그 어떤 죄도 용납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지 않은가."
다음 날 나는 한센인협회 사무실로 가서 몸과 마음을 낮추며 사과하기로 했다. 따귀라도 맞을 각오를 하고 사무실에 들어서자 이게 웬일인가? 항의했던 분들이 오히려 고마워하며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그분들도 설교를 자세히 들어보니까 고의적인 내용은 없었다고 했다. 다만 설교를 처음 들을 때 어쩐지 상처가 되고 섭섭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주니 정말 고맙다면서 진심으로 환대해 주었다.
그런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눈가에 눈물이 고이도록 가슴 뜨거운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나병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한센병이나 피부 질환이라는 용어를 쓰겠다고 약속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한센병은 전염되는 것도 유전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그들은 수많은 세월을 왜곡된 편견과 오해로 고통받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그들의 자존감과 인권 존중을 위해 섬기면서 멍들어왔던 가슴을 위로하며 살리라고 다짐했다. 사무실을 나올 때는 그들과 포옹하며 인사를 나눌 정도로 마음을 열고 진심 어린 소통을 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무거웠던 마음이 눈 녹듯 흘러내리고 넉넉한 여유와 기쁨이 넘쳤다. "내가 그날 밤하늘에 성탄 트리를 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대로 편견과 오해를 가지고 그저 변명거리만 찾고 있었겠지…. 그렇다. 화해와 평화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서로 마음의 빗장을 닫고 긴장하고 자기 입장만 고수하면 절대로 화해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내가 먼저 낮추고 내려놓아야 화해의 길이 열린다. 아, 먼저 낮추고 찾아가기를 얼마나 잘했던가. 이렇게 마음이 행복한 것을…." 갑자기 나에게 항의했던 그분들이 고맙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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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이 어떤가. 서로 공격하고 방어하고, 까발리고 덮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공격적 독선과 위선적 편견에 싸여 서로 물고 뜯는 음모론이 판을 치면서 사회적 대립과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지고 불신과 증오의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하늘과 땅의 '평화의 중재자'가 되시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의 밀알'이 되신 아기 예수의 사랑과 화해의 정신이 필요하다.
며칠 후 나는 다시 한센인협회 사무실을 찾아가서 작은 사랑을 전하고 왔다. 그리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시각장애인들도 추운 겨울을 나도록 작게나마 섬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평안과 행복이 아니라 어쩐지 부끄러움과 송구함이 느껴졌다. 아직도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지 못했기 때문일까?
올해도 반짝이는 성탄 트리와 함께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군고구마를 즐겁게 먹을 수 있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모처럼 스키도 타고 하얀 세상을 함께 걷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가득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과 사회에 아기 예수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의 정신을 살리는 것이다. 이번 성탄절은 작지만 함께 나누고 화해하며 섬기는 날로 맞이할 수 없을까?
성탄절이 내일로 다가왔다. 창문 밖에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고 있는데 벌거벗은 영혼을 안아주기 위하여 맨살의 아기 예수는 또 어느 누추한 곳으로 오시려 할까. 사랑과 화해의 정신이 온누리에 가득하도록 우리 자신이 스스로 낮추고 내려놓지 않는 이상 맨살의 아기 예수는 어디선가 울고 또 울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목사인 나부터도 편견의 노예가 되어 마음이 불편하고 무겁지 않았던가. 우리는 더 버리고 더 낮은 곳으로 가서 더 뜨겁게 섬겨야 한다. 아, 얼마나 낮아져야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얼마나 가슴이 저려야 말구유에 아기 예수로 오신 당신의 사랑을 알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