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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아미타불 원문보기 글쓴이: 반문문자성
●염불하는 사람이 바로 부처이다
참선은 비교적 어려우며 염불은 비교적 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법문은 일체 중생의 근기에 매우 적합하고 적은 노력을 들여 큰 성취를 얻을 수 있는 까닭에 이치에도 근기에도 계합하는 법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정말로 염불의 묘한 점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참된 말을 여러분께 하고자 하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로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입니다. 나는 잘 때에도 '나무 아미타불'을 염하고, 꿈 속에서도 '나무 아미타불'을 염하고, 서 있을 때도 나무 아미타불'을 염합니다. 어느 때든지, 전후좌우 모두가 아미타불이 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미타 부처님은 나와 하나가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나무 아미타불'을 염할 때, 이 일념은 곧 부처이며, 그대의 생각은 부처의 지혜를 갖추게 됩니다.
한 생각 한 생각 헛되이 염불하지 말고, 아무렇게나 흘려보내지 말고, 마음속에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데 명료하게 염하고, 귀로 그대 자성의 소리를 분명히 들어야만 합니다. 이런 것을 곧 '들음을 돌이켜 자성을 듣는다(반문문자성 反聞聞自性)'라 하며, 즉 그대의 염불하는 자성을 듣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또한 '회광반조(廻光返照)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경계에서는 물이 흐르는 것도 염불이고, 바람이 부는 것도 염불이며, 차와 비행기 소리도 염불로 들리고, 만사 만물이 유정이든 무정이든 간에, 소리가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모두가 '나무아미타불'을 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때가 되면 그대는 이미 아미타불과 하나로 되어 있으므로 그대의 이러한 공부가 항상 유지되며, 늘 염불 삼매속에 들어있으며,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바깥에 있지도 안에 있지도 않게 됩니다. 이때의 염불 공부가 바로 일심불란을 얻은 경지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는 하루 고생하고, 이틀 고생하고, 사흘 고생하고, 나흘 고생하고, 닷새 고생하고, 엿새 고생하고, 이레동안을 고생하여야 비로소 일심불란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고생을 견딜 수 없으면, 일심불란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고생할 때에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고생스럽지 않게 됩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듯이, 고생이 지나가면 좋은 일이 도래하기 때문입니다.
고생을 많이 하게 되면, 좋은 일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최소한 감로수를 마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다시 여러분이 믿지 않는 말을 하는데, 여러분들이 정성스런 마음으로 염불을 하면, 입안의 침이 달게 됩니다. 이 단 맛은 꿀보다 더 달아서 감로수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때 그대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관세음보살이 그대의 염불수행에 가피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그대가 매우 고생을 하는 것을 보고서 기운을 내도록 감로수를 마시게 해 주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이러한 경계가 있다면, 바로 관세음보살이 그 사람에게 감로수를 마시게 해 주신 것입니다. 감로수를 마시게 되면 그대 법신의 혜명을 관개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노력은 반드시 헛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하는 것이 도(道)'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망상이 다할 때 부처님이 나타나시니, 만일 부처님께서 현신하여 그대에게 마정수기를 주시기를 원한다면, 우선 망상부터 없애야 합니다. 망상이란 어떤 것인가? 그대가 염불하면서 "아미타부처님 어느때나 뵈올 수 있습니까? 언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려는지요? 언제 저의 이마를 어루만져 주시고, 저에게 옷을 걸쳐 주실 것입니까? 아미타 부처님, 빨리 제게 광명을 비춰 주세요." 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망상입니다.
그대에게 이러한 망상이 있으면, 원래 아미타 부처님께서는 광명을 막 발하시려 하셨는데 그대의 망상 때문에 광명을 발하지 않게 됩니다. 원래 아미타 부처님께서는 그대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시고 그대에게 옷을 걸쳐 주시려고 하였는데 이러한 망상 때문에 잠시 더 기다리시기로 하십니다. 그대가 부처님에게서 가피를 받고자 원하는 마음이 모두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염불삼매'를 얻으려고 하면 일심불란하게 염불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심불란'이란 망상하나 없이 염불하는 것입니다.
지명염불에는 또한 '금강념(金剛念)'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마음속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면서 이 염불하는 마음의 소리를 분명히 듣는 것이며, 입으로도 명료하게 염하고, 귀로 분명히 듣는 이것이 바로 '금강지명염불 (金剛持名廉佛)입니다.
그런데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바로 '조석 십념법(朝夕十念法)" 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용변을 마친 후, 얼굴을 씻고 이빨을 닦은 다음 합장하고 서쪽을 향해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는 것입니다. 한 호흡의 숨이 다할 때까지 칭념하는 것을 일념으로 하며, 첫 번째의 숨에서 칭념할 수 있는 만큼 두 번째 호흡에서도 아미타불을 욉니다. 이렇게 십 회의 호흡까지 염하는 것이 십념법으로, 이것을 조석십념법이라 합니다.
이와 같이 아침에도 십념법으로 수행을 하고, 저녁에도 이 10념법으로 수행을 하여 항상 잊지 않고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면,임종 시에 자연히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염불법문은 매우 쉽고 편리한 법문이며, 적은 노력으로 큰 성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미타 부처님의 세계는 극락이므로 어느 곳에서 성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그곳은 극락의 일부가 됩니다.
●염불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온 마음을 다해 혼신의 힘으로 불보살님을 염하고 부른다는 점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온 힘을 기울여 부처님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심으로 마음을 모아 염하면, 마음이 한결같이 이어져 삼매의 마음이 된다. 그렇게 삼매에 들어 염불한 결과 업장이 소멸되고 부처님을 친견하거나 지혜의 힘으로 자신의 부처임을 보아 깨닫게 된다.
타방세계 아미타 부처님을 친견하는 정토염불 삼매에 대해 <관무량수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염불삼매를 얻은 자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본다. 모든 부처님을 봄으로 염불삼매라 한다.” 또 <능엄경楞嚴經>에서도 염불삼매를 통해 “지금이나 미래에 반드시 부처님의 친견하게 되어 부처님과 거리가 멀지않게 된다”라고 말한다.
염불삼매를 얻으려면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빈틈없이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염불하는 마음 외엔 어떤 생각이나 망상도 비집고 들어와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해서 삼매의 경지에 들어가면 그 자리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거나 내세에 부처님을 친견하고 정토에 왕생하게 된다. 나를 텅 비우고 삼매의 마음이 되어 부처님을 부르니 중생 구제를 위해 대원을 세운 부처님의 본원력이 작용하게 되어 부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접속되는 것이다.
염불선은 똑 같은 삼매의 상태에서 지혜가 발현하여 내 자신 속에 간직된 부처의 성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토염불이 아미타부처님은 저 정토의 세계에 계시며 그 분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염불이라면, 염불선은 나 자신이 부처임을 믿고 염불하여 염불삼매 속에서 터져 나오는 지혜로 내 안의 부처의 성품을 발견하는 것이다.
내 마음 속에 간직된 그 부처의 마음을 자성미타自性彌陀라 한다. 내 자성이, 내 본래 마음이 아미타부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염불을 자성미타염불이라고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나옹懶翁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옷을 입고 밥을 먹거나, 말하고 서로 문답하거나, 어떤 일을 할 때나, 어디서나 항상 아미타불을 간절히 생각하시오. 끊이지 않고 생각하며 쉬지 않고 기억하여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각나는 경지에 이르면 나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벗어나고 또 억울하게 육도에 헤매이는 고통을 면할 수 있을 것이오. 간절히 부탁하오. 게송을 들어보시오.
아미타 부처님 어느 곳에 계신가!
마음 머리에 두고 간절히 잊지 말라.
생각하여 생각이 다한 무념처에 이르면
육문에 항상 자주빛 광명 빛나리라.”
어디서건 무엇을 하거나 아미타부처님을 한결같이 염하면 생각이 다하여 마음작용이 끊어지는 무념처無念處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의 분별작용, 즉 알음알이가 푹 쉬어 생각이 끊어진 부처님 마음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내 마음을 밝혀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염불선에서 중요한 것은 염하는 우리의 마음은 아미타부처님의 실상의 모습, 즉 공하여 텅 빈 그 자리, 무한한 생명과 빛에 집중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 화두 염불(또는 염불 화두선이라 함)이다.
화두 염불이란 “아미타부처님을 염하는 이놈, 이 사람의 누구인가?” 하면서 화두를 들고, 자신을 돌이켜 보는 회광반조를 하는 염불이다. 고려말의 위대한 선사 태고太古 스님은 염불에 익숙한 사람들을 위하여 무자 화두나 기타의 화두를 제시하는 대신, 이렇게 염불하는 나는 누구인가를 화두로 주어 수행에 매진케 했다. 이러한 화두 염불 역시 우리들의 생각의 작용을 염불 화두로 차단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내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본래 부처 자리, 본래 아미타부처 자리로 우리를 이끈다.
한국불교에서 가장 보편적인 수행법은 아마도 염불이며, 그 가운데서 ‘관세음보살’ 칭명염불이 가장 널리 행해지는 수행법이다. 특히 천태종에서는 전 종도가 일상생활 속에서나 주말 철야정진 또는 집중수행을 통해 관음정근을 닦고 있을 정도다.
●불법의 많은 수행방법 중에서 일심칭명(一心稱名)의 염불선 수행법은 만 수행을 모아 회통시키고 안전하면서 쉽고 간편하면서도 효과적인 공부법이다. 염불선은 나무아미타불 염불 일심칭명으로 자신의 소리를 듣고 자성미타를 바로 보는 최상승선이며, 내생의 정토왕생이나 소원성취의 기복적 기도정진을 아우르면서 금생에 깨달음을 얻는 오랜 전통을 이어가는 핵심 마음수행방법이다.
염불이든 화두를 들든 묵조를 하든지 스스로를 다시 되돌려 볼 줄 알아야 이것이 진짜 선(禪)이라고 말한다. 불성을 바라보는 가장 기초적 수행단계이다. 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행자라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돌이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미타염불을 하는 자는 바로 ‘나(참나)’이다. 내 안의 ‘자성미타(自性彌陀)’이다. 염불하는 마음을 돌이켜 놓으니 번뇌망상은 사라지고 ‘나’는 비로소 대광명의 아미타불이 되는 것이다. 즉, 나무아미타불 일심칭명을 하면 나는 아미타불이 되어 내 자신이 염불하는 그 소리의 자성을 바로 관(觀)하고, 그 자리에서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안락한 마음의 해탈(解脫)을 얻으며 아미타불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염불소리를 듣고 마음을 보아 자성미타를 깨닫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력수행이며 간절하고 힘차니 자성의 발현과 아미타불의 가피가 저절로 따르는 양가득성(兩家得成)의 진실한 법문이 되는 셈이다.
내가 아미타불이 되는 아미타불 칭명염불이 염불선이며, 끊임없이 칭명함이 애절하고 정성마저 깃드니 하나의 살아있는 화두가 되어 의정심과 더불어 둘이 아니니 간화선인 것이고, 염불하는 이를 돌이켜 회광반조하니 묵조선이 되는, 그야말로 올바른 정법수행에 수많은 대들보를 얻으니 천군만마가 따라온다는 주장이다.
“일체 모든 만물이 아미타불의 현신이며, 모든 붓다의 화신이 미타이고, 미타진신은 당신들의 자성인 것입니다. 아미타불은 수 대겁(大劫) 전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 자성과 우주의 근본인 것입니다.”
* 염불의 음성은 너무 높아서도 안되고, 너무 낮아서도 안될 것입니다. 만일 음성이 너무 높으면 자기의" 기" 를상하게 되며. 또한. 음성이 너무 낮으면 정신이 혼침해 져서 쉽게 잠이 옵니다.
●[7일 염불법회의 수행에 있어서 . 우리는 앉아 있을 때에는 . 소리를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나 무아미타불"을 염하여 염불하는 생각이 언제나 끊어지지 않고 지속할 수가 있는데.이것을 "금강념"혹은 "실상염불"이라 하며.이것은 단정히 앉아서 "실상"을 염하는것입니다.
●그대가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을 염할 때. 이 일념은 곧"부처"이고.그대의 염두(생각)에는 부처의 지혜를 갖추게 되고.그대가 생각 생각마다 염불하면 생각 생각에모두 부처의 지혜를 갖추게 됩니다. 한 생각. 한 생각. 헛되이 염불하지 말고.
아무렇게나 흘려 보내지 말고. 마음속에 "나무아미타불" 을 염하는데 명료하게 염하고, 귀로 그대 자성의 소리를 분명히 들어야 합니다.
이런것을 곧"들음" 을 돌이켜 자성을 듣는다"라고 하며, 즉 그대의 염불하는 자성을 듣는것을 말하며,
즉'회광반조" 라고도 합니다. 그대가 염불하여, "안으로는 안이 있음을 알지못하고, 밖으로는 "밖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하고 "안으로는 마음이 있는 줄을 모르고, 밖으로는 "몸이 있는 것을 모르며." 멀리로는 사물이 있는 줄을 모른다." 는 경지에 까지 이르면, 이때 , 그대는 아미타불의 대광명장과 합하여 하나가 되어 자신을 서방극락세계에 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을 해도 그럴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에서는 물이 흐르는 것도 염불이고. 바람이 부는 것도 염불이며, 차와 비행기 소리도 염불로 들리고. 만사만물 유정.이든 무정이든. 간에 소리가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모두가 "나무아미타불"을 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것입니다.
이때가 되면 그대는 이미 아미타불과 하나로 되어있으므로 그대의 이러한 공부가 항상 유지되며,
늘 염불살매 속에 들어있으며,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바깥에 있지도 안에 있지도 않게 됩니다.
이때의 염불공부가 바로 "일심불란"을 얻을 경지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는 하루 고생하고 이틀고생하고 사흘 고생하고 나흘 고생하고 닷새 고생하고 엿새 고생하고
이레동안을 고생하여야 비로소"일심불란"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고생을 견딜수 없으면 일심불란을 얻을 수 없습니다.어떤사람은 곧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스님. 당신은 글자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법사가 되었습니까?"경문에는 "혹은 하루 ,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 동안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흐트러지지 않으면.일심불란 이다. "라고 하였는데, 당신을 어째서 약자를 모두 "고"자라고 읽으시나요?" 라고말하는 이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이 "약"자는 "전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설을 나타내는 한 조사로서,
가령 그대가 하루를 가령 그대가 이틀을 내지 가령 그대가 이레를 이라는 식으로 비유를 나타낸 것입니다.
한 편, 이 "고"자는 실제로 이러한 고생을 견디다는 말로서 하루를 고생하고 이틀을 고생하고 내지 이레를 고생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대가 7일간이나 고생을 해서 마음이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면,
반드시 일심불란"을 얻게 될것입니다. 이는 결코 내가 이 글자를 읽지 못해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뜻을 좀 변형시켰을 따름입니다. 다시 한 마디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고생을 하는 것은 고생을 끝내는 것이요. 복을 누리는 것은 복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라고하는데
고생을 할때에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고생스럽지 않게 됩니다.
이것을 결코 자기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니라 고생스러운데, 어째서 고생스럽지 않느냐고 하면"고진감래"라는 말이 있듯이,
고생이 지나가면 좋은 일이 도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루를 고생하였지만,
하루정도 고생해 가지고 는 아직 달콤한 일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생을 많이 하게 되면 좋은 일이 나타나게 될것입니다. 최소한 감로수를 마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다시 여러분이 믿지 않는 말을 하는데, 여러 분들이 정성스런 마음으로 염불을 하면 입안의 침이 달게 됩니다. 이 단맛은 꿀보다 더 달아서 감로수라 부르는것입니다.
이때 그대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관세음보살이 그대의 염불수행에 가피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
그대가 매우 고생을 하는 것을 보고서 기운을 내도록 감로수를 마시게 해 주신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사람에게 이러한 경계가 있다면, 바로 관세음보살이 그 사람에게 감로수를 마시게 해 주신 것입니다. 감로수를 마시게 되면,그대 "법신의 혜명"을 관개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노력은 반드시 헛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어떻게 열심히 공부하는냐에 따라 곧 그러한 이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되는데, 여러분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여러분의 한 시간을 낭비하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7일 염불법회가 단지 염불수행에만 전념해야 하고. 법문을 설하는 것은 적든 많든 별로 도움이 안되기 떄문입니다. 그러므로 "행하는 것이 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진실로 수행을 하면. 서방극락세계에는 비록 10만억10만억 불 국토는 본래로 멀지 않고 전일하게 염불하면 순식간에 연꽃 봉오리 속에 드네
무량광 부처님께서 친히 수기를 주시니 그대 품계가 높으니 갸륵하고 갸륵하다.
나는 장래에 여러분이 상품상생의 가장 놓은 품계를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대한 나의 소원입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신묘장구대다라니에 대한 논쟁은 바로 수행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진언 수행은 그 의미보다는 소리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수행을 할 때 그저 이근원통 수행으로써 소리만 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특정한 관상을 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바로 그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소리를 대상으로 수행하신 분입니다. 감각기관 중 이근을 활용하여 소리를 듣다 보면, 더 이상 의미가 아니라 진동으로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진동을 대상으로 바라보던 주의력이 느끼는 대상으로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바깥인 육경에 빼앗겼던 주의력이 내면의 육근 자체로 되돌아온 것이죠. 이것을 회광반조(廻光返照)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뭣꼬 화두를 들 때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이는 이게 무엇인지 정답을 찾고 싶은 본능 때문이죠. 하지만 이 화두는 생각을 통해 정답을 찾는 수행이 아닙니다. 아무리 멋들어진 생각으로 정답을 찾아봐야 결국은 육경입니다. 여전히 회광반조가 되지 못한 것이죠. 그렇기에 이 화두를 들 때 “화두를 보는 이 놈은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을 바꾸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저 바깥으로 끝 없이 흘러나가는 주의력을 안으로 돌리는 것이죠.
주의력의 빛을 안으로 돌려서 비춰본다고 하여 특별한 정답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회광한 것을 다시 바깥으로 빼앗기지 않으려면 반조함으로써 묶어둘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렇게 주의력을 빛을 빼앗기지 않은채 내면에 소중히 감싸 안고 있을 때 우리의 인식은 변화합니다. 모든 개념들이 주의력이라는 원동력을 잃어버려 사그라들기 시작하고, 이렇듯 탐진치와 망념이 사그라든 청정한 본래 인식이 드러나는 것이죠.
이근원통 수행도 이와 같은 순서를 지나옵니다. 처음에는 육경 중 오직 소리에 주의력을 두는 연습을 합니다. 처음에는 그 소리에 따라 자동으로 올라오는 갖가지 해석과 개념들이 떠오르지만, 이 소리를 관하는 주의력이 더 강렬해지면 더 이상 개념이 아닌 그 진동에 주의력이 가 닿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주의력이 소리, 개념, 진동이라는 바깥이 아니라 내면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광반조입니다. 이렇게 되면 염불수행에서는 이를 실상염불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염불선의 기본이 바로 이런 원리이죠.
●주무시기 삼십분 전에는 집중염불을 하시면 좋습니다.
그렇게 입으로 말하고 - 귀로 듣고- 마음으로 알아차리며 사띠하며 염불하신다면 세 박자가 딱 맞아서 절대로 잡념이 끼지 못해요.
만약 잡념이 끼면 염불을 못하고, 염불을 하면 잡념이 못 낍니다.
내 허락이 있어야 잡념으로 넘어갈 수가 있어요.
이렇게 염불하면 잡념이 너무 하고 싶어서 염불을 못할 지경은 되어도 나도 몰래 잡념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잡념에 빠지지 않고 염불을 할 때, 잡념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염불을 하기 때문에 잡념이 떠오른 것이 보입니다.알아차립니다. 그런데 잡념으로 갈까..이 생각도 꼭 해야되는데..염불을 계속할까? 잡념으로 넘어갈까? 이렇게 갈등하게 됩니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요?
염불을 해야지 당연하게....그러신 분은 염불을 계속 하시면 됩니다. 잡념을 붙들지 않으면 잡념은 곧 사라집니다.
이 생각 꼭 해야돼. 해결을 봐야되거든. 이런 분은 잡념으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잡념을 붙들고 결정이 내려졌으면 다시 염불로 돌아오세요.
잡념에 빠져서 과거 미래를 헤매며 온갖일을 다 벌이지 마시고, 그 잡념을 해결했으면, 다시 염불로 돌아오세요.
염불이 끊어진 것을 알아차리셨으면, 그 즉시로 다시 염불하시면 됩니다.
염불이 끊어진 것을 알아차리셨으면, 그 즉시로 다시 염불하시면 됩니다.
염불이 끊어진 것을 알아차리셨으면, 그 즉시로 다시 염불하시면 됩니다.
염불을 붙들고 죽으나 사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염불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염불을 하면 하루를 염불해도 마음이 상태가 변합니다.
해보시면 압니다.
입으로는 부처님 명호를 말하고
귀로는 부처님 명호를 자신이 말한 것을 들으며
마음으로는 듣는 순간 들었다고 알아차립니다.
이것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실천해보십시요.
쉬지않고 끊임없이 계속 하시면 됩니다.
가능하면 집중염불시간을 하루 한시간정도는 꼭 가지시고 하루의 대부분을 염불하면서 보내시기 바랍니다.
주무시기 삼십분전은 꼭 집중염불하시구요. 바쁘면 5분이라도 집중염불 하시고 주무세요.
그럼 나중엔 꿈 속에서도 염불을 하게 됩니다
가능하면 하루중 많은 시간을 염불을 하십시요. 저의 경우에 하루 16시간도 넘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4-5일이면 반문문청이 되었습니다.
하루에 맑게 깨어서 염불을 하는 시간이 있다면,
그리고 그 시간이 길면 길 수록 이근원통은 금방 됩니다.
믿으세요. 어렵지 않습니다. 많이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실천만 하시면 됩니다.
누구나 됩니다.
나중에는 저절로 귀에서 들려옵니다. 염불소리가 들려옵니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하지도 않은 염불소리가 들려오거든 나는 염불을 하지 않았는데 내 마음속에서 누가 염불하는가? 하고 그것을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끝끝내 그것을 알아보시면 됩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마시고 이것을 끝까지 알아보십시요.
나는 분명 염불을 하지 않았건만 도대체 내 마음속에서 누가 염불을 하고 있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염불을 하지 않았음에도, 마음속에서 역력히 염불하는 "그 놈"을 알아보시면 됩니다.
처음하는 염불은 칭념염불稱念念佛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고성高聲으로 염불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다고 해도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새어나가기만 합니다.
아 강철 같은 신심信心으로 몸도 마음도 뻑뻑하지만 “나무아미타불”염불을 한고비를 반드시 넘기여야 합니다.
인욕忍辱의 갑옷을 입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놓치지 않고 하면은 세월이 흘러가면 허공으로 다 새어 버리는 염불이 허공이 꽉 찰 때가 있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도 세월이 가면 물이 차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더덕더덕 붙어있던 삼독심三毒心이 빠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다음에 하는 염불은 관상염불觀象念佛입니다.
마음이 한결 부드러위지여서 부처님의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형상을 보고 염불합니다.
“아미타불은 천상의 소리(만트라)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넘는 만트라는 없습니다."
그럼, 간화선과 묵조선의 관계는 어 떤가요?
-원래 선 자체는 묵조선입 니다. 간화선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염불선이든 간화선이든 묵조선의방편이에요. 좀더 선수행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만든것이 간화선, 염불선 입니다. 때문에 묵조든 간화든 염불선이든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같은 것입니다. 하나면서 셋입니다. 모든 번뇌 망상을 없애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지, 깨달음에 가기도 전에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는 분별 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묵조선은 '회광반조(回光返照)', 간화선은 일념회광(一念回光)', 염불선은 '적적심광(寂寂心光)'이 핵심입니다. 즉 묵조선은 깨달음을 진여당체로 그대로 돌이켜 비추는 것이고, 간화선은 화두와 일념이 돼 한 생각이 번뜩 진여당체를 비추는 것이며, 염불선은 고요함 속에서 진여당체의 빛을 밝히는 수행법입니다. 결국 깨달음을 비추는 방식이 다를 뿐지요. 그래서 깨달음을 비춘다(光)는 점에서 하나고 비추는 방법이 달라서 셋인 것입니다
수행은 진지하고 착실하게 닦아 나가야하며, 지엽적으로 공부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로는 보살도를 행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남들에게 공연을 보여주는 것처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간에 일거일동, 말한마디 행동하나를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위해서 할 뿐 자신에게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야 할 것이며,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관세음보살을 염한다면 빨리 고쳐야 할 것입니다. 무릇 모든 수행을 남에게 보여 주려는 것은 바로 '근본을 버리고 지말을 추구하는[捨本求末]것입니다. 근본을 잊어버리고 지엽적인 것을 추구하면 좋은 점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은 자신에게 보여 주어야하며, 자기가 (자신의 수행을) 능히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회광반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합니다. 회광반조해야 하며, 이것은 빛을 밖으로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빛을 밖으로 비추면 다른 사람은 나를 수행을 오래한 사람으로 인식하겠지만, 밖으로 비춘 빛은 곧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대의 빛은 아직 다 충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수행이 원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여 빛의 광도가 매우 작으며, 시련을 견디지 못합니다. 빛이 원만하여 흠결이 없어지기를 기다려도 방광(放光)을 해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은 수행하는 단계이므로 빛을 밖으로 내놓아서는 안됩니다.
●회광반조란
마음으로 마음 밖의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 마음자체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셨나요?
사띠도 그 마음을 순간순간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에 회광반조하지 않으면 사띠가 불가능합니다.
위빠사나도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순간순간 쭉--알아차리며,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회광반조하는 것입니다.
이근원통의 마지막 단계는 반문문성(反聞聞性)이다. 듣는 성품 자체를 다시 반문한다는 의미이다. 그 들음을 버리고 듣는 놈을 돌리게 된 다음이라야 지극히 요긴함이 된다.
무릇 들음을 버리고 듣는 놈을 돌리게 되면 부처님의 광명과 보리수와 / "아무 것도 설하는 것이 없는 경지" / 무설시(無說示)와 중향처(衆香處)에 다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期於遺聞反聞然後爲至要 夫至於遺聞返聞則佛光明 菩提樹無說示衆香處皆可入矣)
듣는 것, 즉 소리에 대한 집중도 놓아버리고 무설시(無說示)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반문문성이다.
- 허운화상 참선요지 -
염불은 항상 각자의 심성 원래를 반조(返照)하여
분한 일을 당하여도 염불로써 안정시키고,
탐심이 일어나도 염불로써 안정시키고,
순경(順境)에 끌릴 때에도 염불로써 안정시키고,
역경에 끌릴 때에도 염불로써 안정시킬지니,
염불의 진리를 아는 사람은
염불 일성이 능히 백천 사마를 항복받을 수 있으며,
또는 일념의 대중이 없이 입으로만 하면 별 효과가 없을지나 소리 없는 염불이라도 일념의 대중이 있고 보면 곧 삼매(三昧)를 증득(證得)하리라.
●12가지 지명염불 방법
"아미타불"을 늘 환희로움으로 불러봅시다.
"(아미타불)"염불 수행을 하고자 발원하시는 분들을 위한 "(아미타불)" 관련 경전과 큰스님 분들의 관련 자료및 염불수행에 관한 자료입니다) 지명염불방법 여러 가지 염불법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방법이 지명염불이다. 이것은 법장비구의 48대원 가운데 열 여덟번째 원에 의거한 것으로, 후대 정토교가들은 이것을 '염불왕생원'이라하여 칭명염불을 극락왕생의 수행법으로 가장 중시하였다. 어떻게 이름만 불러서 정토왕생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청화스님은 "부처님 말씀을 안 믿을 수가 없는 동시에, 생각해 본다 하더라도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원래 부처님인지라 또는 부처님의 이름은 사람 이름과 달라서 부처의 공덕을 거기에 간직해 있는 것입니다. 사람 이름도, 그 사람 이름을 자꾸만 부르게 되면 그 사람 영상이 떠오르는데,하물며 부처님 이름은 우리가 본래 부처인 동시에 부처님의 공덕을 거기에 다 간직한 이름인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기에 명호부사의 (名號不思議)라. 이름 자체가 부사의란 말입니다. 우리 같은 김아무개, 누구 아무개 이것은 부사의한 것이 아닙니다. 중생이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이지마는, 부처님 이름은 부처님께서 친히 무량공덕을 거기에 담아(藏) 만든 진리 이름이기 때문에 이름만 불러도 우리의 업장이 녹아져 옵니다. 또 우리가 본래 부처고 말입니다. 따라서 자꾸만 외우면 외울수록 우리 마음에 부처의 종자가 더 심어지고, 업장 종자는 차근차근 감소가 됩니다. 그렇게 되어서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은 더욱 한결 강해지고 드디어는 우리 마음에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만 남으면 그때는 성불하게 되겠지요. 원래 부처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염불만 해도 성불한다는 말씀이 조금도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하였다.(『전통선의 향훈』) 지명염불의 공덕은 의심할 바가 없으나 앞서 보조스님이 말씀 하신대로 자신의 업을 청정히 하지 않고 입으로만 염불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에 대해 휴정스님도 "마음은 바로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끊임이 없고, 입은 부처님의 명호를 분명히 불러 흐트러지지 않게 한다. 이렇듯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면 그 한 생각 한 소리에 능히 80억겁 동안 생사에 헤매는 죄업을 소멸함과 동시에 80억 겁의 수승한 공덕을 성취한다."(청허 휴정스님 청어당집)고 하였다. 지명염불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보자. 염불할 때의 환경이나 심경, 혹은 염불하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그 적절한 염불하는 방법이 갖가지로 다를 수 밖에 없다. 방법마다 모두 나름대로의 작용과 특징이 있으니, 행인이 염불할 때 아래에 열거한 적합한 방법을 스스로 잘 선택하여 실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어떤 방법으로 염불할 때 이것으로는 그 당시의 심경을 진정시킬 수 없다고 생각되면 다른 방법으로 바꾸어도 해로울 것은 없다. 다만 그 상황에서 능히 마음을 안정시키고 망념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이다. 비유하면 병을 치료하는 데는 병을 치료하기에 좋은 것이 곧 양약인 것과 같은 것이니, 중생의 망념이 병이요, 부처님의 명호가 약이요, 염불하는 것이 바로 묘약을 먹는 것이다. 이하 『정법개술』에서 인용한다. 매우 구체적이고 다양한 염불방법들이 제시되고 있으니 초보자들도 쉽게 따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①고성념(高聲念) 염불할 때 큰 소리로 전신의 힘을 다하여 '나무아무타불'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다. 이 방법은 기운을 소모하고 목을 쉬게 하므로 오래 지속할 수는 없다. 다만 혼침과 게으름을 대치하여 계속 일어나는 잡념을 제거하기에 좋은 방법이다. 행자가 염불할 때 혼혼하여 잠이 오려 하거나 생각이 흐리멍텅하면 용맹스럽게 정신을 차려 큰 소리로 또렷또렷하게 염하면 금방 머리가 개운하고 정념이 회복되어 전과 같이 무궁한 활력과 강력한 작용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것이며, 아울러 곁에서 이 소리를 듣는 자로 하여금 염불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 것이다. 옛날 영명 선사가 항주 남병산에서 염불할 때, 산 아래 길 가는 사람이 그 소리가 천락(天樂)이 허공에서 울리 듯 분명하고 크게 들려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하니, 바로 이 염불 방법을 쓴 것이다. ②묵념(默念) 염불할 때 겉으로 보기에는 입술만 움직일 뿐, 소리는 내지 않으나 '나무아무타불'하고 염하는 것은 행자의 심식 중에서 분명하고 또렷또렷하므로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고 정념이 한 덩이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그 효과는 소리를 내는 것에 비하여 부족함이 없다. 이 방법은 누워 있을 때나 목욕할 때나 병이 들었을 때나 변소 갈 때 등에 적합하며, 그 외 소리를 내기에 불편한 상황이나 공공 장소에서 적합하다 하겠다. ③금강념(金剛念) 염불할 때 음성이 크지도 작지도 않고 중간으로 하되, 한편 염하면서 한편 그 소리를 자신의 귀로 듣는다. 넉 자(아미타불)나 여섯 자 (나무아미타불)를 막론하고 한 자 한 자를 분명히 염하고 들으면, 생각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고 자연히 마음이 안정된다. 이 염법은 효력이 매우 크므로 금강에 비유한 것이다. 금은 긴밀함을 비유하였으니, 긴밀하면 외경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요, 강은 견고함을 비유하였으니, 견고하면 잡념이 능히 파괴하지 못하는 것이다. 각종 염불방법 중에서 이것이 가장 널리 쓰이고 있다. ④각조념(覺照念) 염불할 때 한편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한편으로는 자성을 회광반조(回光返照)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나의 마음과 불심, 나의 몸과 불신이 한 덩이가 되어 환하고 또렷또렷히 시방에 꽉차며, 모든 산하대지의 방사나 기구가 일시에 소재(所在)를 잃어버리며, 내지 자기의 사대색신도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되면 보신이 죽기 전에 이미 적광을 증득하며 불호를 처음 부를 때 곧 삼매에 들어가서 범부의 몸으로 부처님의 경계에 참예할 수 있으니, 이보다 빠른 법은 없을 것이다. 애석한 것은 상상근인이 아니면 능히 깨닫고 실행할 수 없으므로 제도할 수 있는 근기가 비교적 좁은 것이 흠이라 할 것이다. ⑤관상념(觀想念) 염불할 때 한편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한편으로 부처님의 존엄한 신상이 분명히 나의 앞에 서 계시면서, 손으로 나의 머리를 어루만지시기도 하고 혹은 옷으로 나의 몸을 덮어주시는 것을 관상하는 방법이다. 또한 관음세지가 부처님 곁에 서 계시며 현성(賢聖)이 나를 위요 (圍繞)함을 관상하며, 혹은 극락국의 금지(金池)와 보지(寶池), 화개(花開), 조명(鳥鳴), 보수(寶樹), 라망(羅網) 등이 빛나고 화려한 것을 관상한다. 만약 관상이 깊어지면 몸이 그대로 극락국토에 노닐 것이요, 설사 깊지 못하더라도 염불의 조연(助緣)이 되어 정업(淨業)을 성취하기에 손쉬울 것이다. 만약 오래오래 관하고 성숙하게 하여 평소에도 심목(心目) 중에 또렷이 있어서 하루 아침에 보체(報體)가 죽더라도 차방 진연(塵緣)에 끌리지 아니하면, 극락국의 승경(勝境)이 일제히 앞에 나타날 것이다. ⑥추정념(追頂念) 염불할 때 위의 금강념과 같은 방법을 쓰되, 다만 글자와 글자 사이와 글구와 글구 사이를 연속하여 지극히 긴밀하게 하여, 한 글자가 한 글자를 뒤쫓으며 한 글구가 한 글구를 이어서 중간에 조그마한 틈도 없이 함으로 추정념이라 말한다. 이렇게 앞을 뒤쫓아 서로 긴밀하게 하여 조그마한 틈도 두지 않기 때문에 잡념이 들어올 틈이 없는 것이다. 이 법으로 염불할 때는 정신이 긴장하고 마음과 입이 항진(亢進)하여 정념으로 하여금 잠깐 사이에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 염법은 효력이 지대하므로 정업행인이 흔히 이 방법을 채용한다. ⑦예배념(禮拜念) 염불할 때 한편으로 염불하면서 한편으로 절을 하는 방법이다. 다만 일구를 염하고 한 번 절하거나, 자구는 상관하지 않고 염하면서 절하고, 절하면서 염하여 염과 절을 병행하여 몸과 입을 합하게 하며, 게다가 마음 속에 부처님을 생각하면 삼업이 집중하고 육근이 모두 섭수하게 된다. 이 방법은 우리 몸에서 능히 작용을 발생하는 기관을 모두 염불하는데 쏟아넣어 염불 이 외의 일이나 염불 이 외의 생각은 조금도 용납치 않는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방법은 특별한 정진이므로 효력도 특별히 크다. 다만 절을 오래하면 몸도 피로하고 숨도 차므로 다른 방법과 겸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요, 이 방법만을 전용하는 것은 무리일 듯하다. ⑧기십념(記十念) 염불할 때 염주로써 수를 헤아리되, 열 번 불호를 염하고 한 알의 염주를 넘기는 방법이다. 이와 같이 마음속으로 염불을 하면서 수를 기억해야 하므로 전념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전념해 지는 것이요, 만약 전념하지 않을 때는 수목(數目)이 착란해 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방법은 억지로 전념하게 하는 방편이므로 잡념을 퇴치하는 데에 지극한 공효(功效)가 있다. ⑨십구기념(十口氣念) 염불할 때 다만 추정법을 써서 염하되, 한 번 숨을 들이마셔서 내뿜을 때까지 계속 염불을 하는 것을 일구념이라 하고, 이와 같이 열 번 하는 것을 십구기라 한다. 이 방법은 염불할 여가가 없이 매우 바쁜 사람을 위하여 특별히 시설한 방편법으로, 십구기를 마칠 때까지는 대략 5분 남짓 소요된다. 이렇게 매일 한 번씩만 십구기를 하여도 능히 극락국에 왕생할 수 있으니, 비록 매우 바쁜 사람일지라도 능히 이렇게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미타 제18원에 '시방 중생이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면서 십념만 하고서도 만약 왕생치 못하면 정각을 이루지 않겠나이다' 한 원문(願文)을 근거하여 시설한 것이다. 고인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소위 십념이란 곧 십구기를 두고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부처님의 원력이 매우 광대하며 정토법이 또한 매우 진실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니, 그러므로 비록 십념만 하더라도 임종에 부처님이 와서 반드시 영접하는 것이다. ⑩정과념(定課念) 염불하는 데 있어서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처음은 부지런히 시작했다가 나중에 가서는 나태하여 항심(恒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고금의 행인이 염불할 때에 하루에 일정한 양을 정해놓고 어김없이 실행함으로 해서 도심이 물러가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불호의 양에는 구애됨이 없이 고인들은 매일 십만념 혹은 칠만, 오만 등을 정해놓고 항상 이를 실천하였으니, 그 정진력을 알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이 방법은 환경과 자신의 역량을 참작하여 일정한 양을 정하되, 한 번 정한 후에는 어떤 바쁜일을 막론하고 기필코 정한 수를 채워야 할 것이요, 부득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다음날 반드시 부족한 양을 채워서 염불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만약 처음 시작할 때는 용기 백배하여 너무 많은 양을 정했다가 뒤에 가서는 감당치 못하면 이것도 좋지 않으며, 처음부터 너무 적게 정하면 나태하기 쉬우므로 이것도 옳지 않다. 그러므로 양을 결정할 때는 자세히 요량해야 할 것이다. ⑪사위의중개념(四威儀中皆念) 행자가 정종(淨種)이 순숙해지면 염불이 저절로 정진이 되어 양을 정하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양을 정한 외에 낮이나 밤이나 상관없이 잠들기 전에는 거의 염하지 않을 때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사위의중개념으로서, 이렇게 오래하여 습관이 되면 일구의 미타가 영원히 입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예는 고인의 왕생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어떤 대장장이는 쇠를 두들기면서 염불을 끊이지 않았으며, 어떤 두부장수는 콩을 갈면서 염불을 잃지 않더니, 최후 염불소리가 끊어지면서 그대로 서서 죽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 우리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과연 이런 정도에까지 이를 수 있다면 양을 정하든 정하지 않든 그런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⑫염불념개념(念佛念皆念) 위에서 말한 사위의중개념은 구념을 가리킨 것이나, 여기서 말하는 염불념개념의 개념의 염자는 심념(心念)을 지적한 것이다. 곧 입으로 염하거나 입으로 염하지 않거나 관계없이 심중에서 늘 염불하고 있으며, 입으로 염불하지 않을 때에도 심중에서 염불하는 것이니, 곧 지명 외에 관상이나 관조할 때에도 바로 지명 중에 있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단지 구념할 때만 관상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행자가 만약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으면, 어느 때 어느 경우와, 입으로 염하든 입으로 염하지 않든 관계없이 심중에서 늘 부처님을 생각하여, 정념이 견고하기가 철벽과 같아서 바람이 불어도 들어올 틈이 없고, 차 넘어뜨리려 하여도 파괴되지 않아서 조그만한 세념 (細念)이나 잡념도 없을 것이다. 이때는 염불삼매가 이루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져서 저 국토에 태어나는 것은 마치 보증서를 받아 둔 듯하리라. 고인이 말하기를 '염하되 염하지 않으며, 염하지 않으면서 염한다' 한 것이 바로 이러한 경계이다. 만약 염불한 지가 오래되고 공행이 순숙하지 않으면 절대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초학자가 능히 행할 수 있는 법은 아니다.
●이근원통 수행은
1. 소리에 집중[觀]하는 단계
2. ‘듣는 놈을 돌리는[反聞聞性]’ 단계
처음 과정이 끝나야만 반문문성(反聞聞性)의 과정으로 진입함은 물론이다.
먼저 소리에 집중하는 법을 알아보자.
내면의 소리 : 內耳聲!
이는 자기의 체내에서 내는 소리 즉, 염불, 염주, 독경소리 등을 듣는 것. 염(念)의 방법에는
1. 큰 소리로 염하는 것,
2. 작은 소리로 염하는 것[金剛念],
3. 마음의 소리로 염하는 것[瑜伽念]
염할 때에는 귀로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처음에는 염불 혹은 염주하는 소리에 마음이 집중되었다가 안 되는 경우가 많지만 점차 일념(一念), 일성(一聲)에 마음이 집중되어 마음이 고요해진다.
1단계: 일단 큰 소리로 염불이나 염주를 하는 것. 고성염불(高聲念佛)
2단계: 작은 소리로 염한다는 것은 입 속에서 웅얼웅얼하는 것. 계속해서 지속하다 보면 굳이 입으로 웅얼웅얼하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마음속으로 염하는 상태에 도달. 염불이나 주력 혹은 독경을 오랫동안 지속함으로써 수행의 힘을 얻는 경우는 이러한 경우이다.
바깥의 소리 : 外耳聲!
어떤 소리든지 물체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물이 흐르는 소리나 폭포소리 또는 바람이 불어서 풍경이 울리는 소리나 범패소리를 듣는 것이다. 처음으로 마음이 소리에 완전히 집중되었을 때 능히 졸지 않고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않으면 자연히 이런 경지를 계속 지켜나갈 수 있다. 바깥의 소리에 집중한다고 할 때 가장 보편적인 소리는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이다. 이는 가장 쉽게 정(定)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선사들 가운데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돈오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백장선사(百丈禪師) 문하에서 어떤 승려가 종소리를 듣고 깨우쳤는데, 백장은 “뛰어나도다. 이것은 관세음보살의 입도하는 방법이다(俊哉, 此乃觀音入道之門也)”라고 말하였다.
향엄(香嚴)은 대나무가 부딪히는 소리에 견성했고, 원오(圓悟)는 닭이 날개 치는 소리를 듣고 오도 하였다.
관세음보살! 칭념 염불 속 이근원통(耳根圓通).
소리를 봄(觀, 觀照, 회광반조) 즉 관통함.
관통하라!
깨우쳐 의혹을 끊은 채 이와 같이 염불하는 이를 성인聖人이라 부른다.
●『업보차별경業報差別經』에 말하였다.
고성高聲으로 염불하고 송경誦經하는 데 열 가지 공덕이 있다. 첫째, 졸음을 쫓을 수 있다. 둘째, 파순마왕(天魔)<주2>이 놀라고 두려워한다. 셋째, 소리가 사방에 두루 퍼진다. 넷째, 삼악도三惡道의 괴로움이 없어진다. 다섯째, 바깥의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여섯째, 마음을 흐트러지지 않게 한다. 일곱째, 용맹정진하게 한다. 여덟째, 모든 부처님이 매우 기뻐한다. 아홉째, 삼매三昧가 눈앞에 나타난다. 열째, 정토에 왕생한다.
『대집십장경大集十藏經』에 ‘작은 염불로는 작은 부처를 볼 것이요 큰 염불로는 큰 부처를 볼 것이다.’ 라고 하며, 풀이하기를 ‘큰 염불은 큰 소리로 염불하는 것이고 작은 염불은 작은 소리로 염불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이는 세상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염불하면 삼매를 쉽게 이루고 작은 소리로 염불하면 결국 여러 갈래로 산만해진다는 것을 권계한 것이다. 이는 지혜로운 자라야 알 수 있고, 보통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출전은 귀원직지歸元直指이다.
불보살의 명호를 수지하는 법에는 일정한 원칙이 없다.
큰 소리로 염하거나(高聲念) 낮은 소리로 염하며(低聲念), 물이 흐르듯이 염하거나(流水念) 정례頂禮<주3>하면서 염하며(頂禮念), 수를 세면서 염하거나(記數念) 세지 않고 염하며(不記數念), 걸어가면서 염하거나(行步念) 똑바로 선 채 염하며(住立念), 조용히 앉아서 염하거나(靜坐念) 옆으로 누워서 염하며(側臥念), 소리내지 않고 염하거나(黙念) 눈을 뜬 채 염하며(明念), 입술과 혀를 조금 움직이면서 염하거나(微動脣舌念). 숨 한 번 쉬는 동안 여러 번 소리를 내어 염하며(一氣隨聲念), 병들고 두려울 때 숨을 따라 호흡하면서 염하며(病怯隨氣呼吸念), 자기 혼자서 염하거나(獨自念) 여러 사람과 함께 염하는(與衆同念) 방법들이 있다. 이 방법들은 모두 마음을 산란하지 않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예불을 할 때에는 ‘내 몸은 연꽃에서 경건하게 예배하고, 부처님은 연꽃에서 나의 예배를 받아 주신다’는 생각을 관觀하라.
염불을 할 때에는 ‘내 몸이 연꽃에서 결가부좌하고 부처님은 연꽃에서 나를 접인接引하신다’는 생각을 한 후에 일심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수지受持하라.
옛날에 두 스님이 연꽃이 피었다 지는 생각을 일으켜 마침내 왕생하였다. 하물며 여기에 부처님의 명호를 수지한다면 어찌 왕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념할 때 관상하는 법(禮念時觀想法)
재계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마음을 맑혀 생각을 고요하게 하라. 서쪽을 향해 말없이 앉아 눈을 감고 관상觀想하되, ‘순금으로 빛나는 아미타불이 칠보 연못의 연꽃 위에 앉아 계신다. 키는 1장丈 6척尺이고, 눈썹 사이에 위로 향하여 난 백호白毫 한 가닥이 있다. 팔각의 백호는 가운데가 비었으며, 오른쪽으로 다섯 번 꼬여 투명하게 빛나 부처님 얼굴을 비춘다’는 생각을 관하라. 백호에 생각을 집중하여 조금의 잡념도 없어야 하며, 눈을 뜨나 감으나 언제나 그 광경을 떠올리도록 하라. 이렇게 오래도록 하여 염하는 마음(念心)이 무르익으면 저절로 감응하여 부처님의 전신全身을 볼 것이니, 이것이 염불의 여러 방법 중 최상의 방법이다.
‘마음으로 부처님을 떠올리면 이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말했으니, 관상하는 염불은 또한 입으로 하는 염불보다 나은 것이다. 관상 염불하는 사람은 후에 반드시 구품연화대의 상품上品에 왕생하리라. 당나라의 계방啓芳과 원과圓果 두 사람이 관상법觀想法을 하였는데 단지 다섯 달 만에 자신들의 몸이 정토에 가서 부처님을 뵈옵고 법문을 듣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부처님의 백호를 관하는 법(觀佛白毫法)
앉아 있을 때 먼저 내 몸이 원광圓光 가운데 있음을 관상하고, 코끝을 조용히 바라보면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 쉬는 것(出入息)을 관상하라. 한 번 숨을 쉴 때마다 아미타불 한마디를 속으로 염불하고,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게 적당히 숨을 고르면 마음과 호흡이 같아진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을 따라 걷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간에 이를 행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중단해서는 안 된다. 항상 스스로 밀지<주5>하고 점점 나아가 선정禪定에 깊이 들어가면 호흡과 생각을 다 잊을 것이다. 이에 오래도록 익숙해지면 마음의 눈(心眼)이 시원히 열리고 삼매가 현전現前하리니, 이것이 곧 유심정토有心淨土이다
호흡을 새며 염불하는 법(數息念佛法)
무릇 염불하는 사람이 참선하여 견성見性하고자 한다면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 인연으로 얽매인 것(緣累)을 쓸어 없애고 정의 번뇌(情塵)를 끊어 버리도록 하라. 밖으로는 경계(境)에 집착하지 말고 안으로는 정定에 머무르지 말라. 지혜의 빛을 돌려 한 번 비추어(回光一照) 안과 밖이 다 고요해진 후에 밀밀密密히 나무아미타불을 열다섯 번 염불하고, 지혜의 빛을 돌려 스스로 보고(看) 말하라. “견성見性하면 성불하리니, 결국 무엇인가? 나의 본성 아미타불이로다.” 다시 또 스스로 보는 것을 비추어 보되(覰觀), 지금 들어서 염하고 있는 이 일념은 어디서부터 일어나는가를 보고, 이 일념이 사라지는 것을 보라. 다시 또 이 일념이 사라지는 것을 보되, 보고 있는 이 사람이 누구인가를 한참 동안 참구하라. 또 아미타불을 염불하고 반복해서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참구하되, 급하고 간절하게 하여 끊어지게 하지 말고 성성불매惺惺不昧하기를 마치 닭이 알을 품듯이 하라.
가고 머무르며 앉고 눕는 사이에 이와 같이 염불하고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참구하면, 홀연히 가고 머무르며 앉고 눕는 곳에서 소리를 듣고 사물을 바라볼 때에 시원하고 통쾌하게 깨우쳐 본성인 미타를 직접 보고 안팎의 마음과 몸이 동시에 투탈透脫<주8>하리니, 이것이 바로 곧장 나아가는 수행의 바른 길이다.
⎮불법을 참구함(參究佛法)
홍무(洪武, 1368~1398년)와 영락(永樂, 1403~1424년) 연간에 공곡空谷, 천기天奇, 독봉毒峯대사가 모두 염불에 대하여 거론하였다. 천기와 독봉은 다 염불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간看하도록 가르쳤는데, 오직 공곡은 “다만 염念만 하라. 그래도 깨닫는 날이 올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두 견해는 각기 근기에 따라 편의적으로 한 것이므로 모두 옳다. 그러나 공곡은 다만 염念만 해도 좋다고 하였을 뿐이지 참구參究가 그르다고 하지는 않았다. 어떤 이는 의심하기를 참구는 견성見性을 위주로 하므로 오로지 부처님 명호를 수지守持해야만 절대적으로 왕생할 것이라고 하여 참구하는 것을 폐지하고 수지하는 것만 일삼으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경전에는 다만 ‘명호를 집지하라’고만 설하였지 참구하라는 설은 없다고 말한다. 이 논리는 매우 일리가 있어 이에 따라 수행한다면 반드시 왕생하겠지만, 이것은 두고 저것은 폐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대개 염불하는 사람이 견성하면 이는 바로 상품상생上品上生의 일이니, 오히려 왕생하지 못함을 근심하겠는가. 그러므로 옛 사람이 두 가지를 그대로 두고 근기에 따라 선택하였던 것이니 의심하지 말기를 바란다.
참구와 염불을 변증함(辯參究念佛)
문) 정토에 왕생하는데 일념一念이 옳습니까. 십념十念이 옳습니까?
답) 오로지 일념으로 왕생하여 물러나지 않는 지위(不退轉)에 머문다면 일념이 옳은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부처를 비방하고 경을 훼손하여 오역사중죄五逆四重罪를 범하는 것은 모두 일념의 악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이들이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화살처럼 빠를 것이다. 이제 염불하여 정토에 나는 것 또한 일념의 선업으로 이룬 것이니, 곧 극락왕생이 팔을 폈다 오므렸다 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전前 일념에 오음五陰이 사라지고 후後 일념에 오음이 생기니, 마치 밀초 도장으로 도장을 찍으면 도장은 없어지되 무늬는 남는 것과 같다. 전후의 두 염念도 필요가 없는데 어찌 반드시 십념까지 가겠는가. 또 경에서 밀락(酪)을 좋아하던 사미가 일념의 탐애심을 내어 후에 밀락 속의 벌레로 태어났다고 말한 것을 보면, 이는 모두 일념이지 십념이 아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말하는 십념은 대개 병들고 야윈 사람, 힘이 약하고 마음이 여린 사람을 위한 것으로 아미타불을 열 번 불러 그 염念을 도와 준 것이다. 만약 마음이 건강하고 어둡지 않은 사람이라면 일념으로 왕생한다. 이는 마치 머리카락 같은 가는 묘목이 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로 자라는 것과 같다.
일념으로 왕생하는 것을 변증함(辯一念往生)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리한 근기를 가진 사람들은 염불을 경시하여 어리석은 사람들(愚夫愚婦)이나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다만 우부愚夫가 입으로는 부처님 명호를 외우나 마음은 천리밖에 노니는 것만 볼 뿐이며, 이것은 독불讀佛이지 염불이 아니라는 것은 모른다.
염念은 마음을 따르는 것이니, 마음에 생각하고 기억하여 잊지 않기 때문에 ‘염’이라 한다. 이를 유학자에 비유해보자. 유학자가 끊임없이 공자를 마음에 담아두면 공자에 거의 가깝게 되지 않겠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생각마다 오욕五慾을 떠올리면서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염불을 그르다 여긴다. 아, 이처럼 일생을 헛되이 보내니 어찌 그리 말 그대로 ‘어리석은 사람들(愚夫愚婦)’이 아니겠는가. 애석하도다. 염불은 지혜로운 이가 할 수 있는 것이요, 어리석은 이는 할 수 없는 것이로다.
염불을 멸시하는 것을 변증함(辨蔑視念佛)
문) 요즘 사람들을 보니 염불하는 이는 많으나 서방에 나서 성불하는 이는 적으니 왜 그러한가?
답)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입으로는 염불하나 마음이 착하지 못하여 왕생하지 못 하는 것이다. 둘은 입으로는 염불하나 마음에 잡되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여 왕생하지 못하는 것이다. 셋은 입으로는 염불하나 마음으로는 다만 부귀 얻을 생각만 하여 왕생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당부하노라. 염불하는 사람은 확고한 신념으로 서방에 나기를 구해야 하며, 혹시 왕생치 못할 까 의심하지 말라. 선현들은 모두 이와 같이 하였으며 보통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가 어찌 서방에 나지 않는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있겠느냐. 문득 광대한 마음을 내고 견고한 뜻을 세워 서원하기를 ‘왕생하여 부처님 뵈옵고 법문을 들어 무상과無上果를 얻은 후 중생을 널리 구제하겠다’라고 다짐하라. 이와 같이 해야 비로소 진정한 염불인이 되어 반드시 성불할 것이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좋은 글입니다. 인쇄하여서 보시면 좋을듯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참으로 감사합니다 . 나무아미타불 _()_
인쇄하여서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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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