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판과 편액의 차이와 현판의 뜻
현판과 편액이란 말은 차이가 있을까요?
예.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편액은 건물의 이름을 써서 문위에 거는 것을 말하고
현판은 편액과 주련을 합쳐서 부르는 말입니다
여기서 주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한자풀이 그대로 기둥주, 이을련이니 글귀를 이어 기둥에 건다는 의미의 주련입니다. 즉, 좋은 글귀를 써서 편액이 걸린 건물의 각 기둥에 써서 붙이는 것을 주련이라고 합니다
현판= 편액 + 주련 이 되겠습니다
여기 우리나라에 현재 전해지고 있는 현판들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 '현판기행- 김봉규님' 이란 책이 있어 현판에 대한 서두를 가져왔습니다. 아울러 책속에 소개된 여러 현판 사진들도 일부 첨부합니다
현판기행 -고개를 들면 역사가 보인다
글. 사진 김봉규
담앤북스출판사
우리의 옛 건물에는 건물의 이름이나 그 성격, 위상 등을 담은 현판이 걸려 있다. 궁궐은 물론 서원이나 누각, 사찰 건물에는 거의 예외 없이 다양한 현판을 걸어 놓고 있다. 사대부 집안의 고택도 마찬가지다.
건물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현판의 글씨는 역대 왕을 비롯해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이나 명필 등이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이다. 따라서 현판은 그 시대의 정신과 가치관은 물론, 예술의 정수가 담겨 있는 문화 예술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그 중에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연이 스며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화재와는 달리 제대로 평가를 받지도 못하고 있다. 한문을 잘 모르거나 서예에 대한 식견이 부족한 사람이 많아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이다. 소중한 문화유산인 옛 현판들이 이처럼 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현판의 의미와 역사
현판의 의미에 대해 사전에는 글자나 그림을 새겨 문 위에 거는 편액扁額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편액과 주련을 통칭해 일컫는다. 간단히 말해 편액은 건물의 명칭을 나타내는 표지이고, 주련柱聯은 건물의 기둥에 좋은 글귀를 써서 붙이거나 새겨 거는 것을 말한다. 주련은 글귀를 이어 기둥에 건다는 의미(기둥주, 이을련)에서 그렇게 불리었다
편액의 역사는 중국 진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진나라 때 문자를 통일하면서 글자체나 용도에 따라 여덟 가지 서체로 정리했는데, 그 중 여섯번째인 '서서'가 제서, 방서 등에 쓰인 서체였다. 즉 건물의 명칭 등을 쓰는데 사용했던 편액 글씨였던 것이다.
한나라 고조6년에 소하가 창룡, 백호라는 서서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의 서체는 전서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진나라 이후에는 해서가 주로 사용되면서 편액은 대해大楷로 썼다.
삼국 중 위나라의 위탄이 능운대의 제액을 쓴 기록이나, 동진의 왕헌지가 태극전의 액자의로를 받았으나 거절했다는 고사 등도 보인다. 한편 불교 사원이 건립되면 제왕이 편액을 하사하는 관습까지 생겨나고, 당대에는 이것이 성행했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문선' 등 각종 문헌에 편액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사찰 건물은 물론 도성의 문루, 궁궐의 전각, 지방 관아와 향교, 서원, 주택등에까지 편액이 걸렸다.
현판은 주로 나무판을 사용하고, 건물의 규모나 성격에 맞게 색채와 장식을 더하기도 했다. 글자에는 금니, 은니, 먹 , 호분 등을 쓰며 바탕색은 글자의 색을 고려해 칠을 하거나 그냥 두기도 했다. 특히 편액은 다양한 틀을 만들어 거기에 문양을 새기거나 색채를 가하기도 한다.
편액은 대부분 건물의 명칭을 담은 건물의 얼굴이므로, 건물의 정중앙 처마 아래에 부착한다.
다양한 서체의 현판 글씨
편액에 쓰이는 한자는 액체라고도 하는데, 굵은 필획으로 써서 뚜렷하고 분명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짜임새가 긴밀하고 방정하면서도 강건한 글씨여야 하기에 주로 해서를 많이 썼다.
편액 글씨체로 원나라 승려 설암 이부광의 글씨가 고려 말에 수용된 이래, 공민왕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설암 서법을 따랐고 편액에도 애용했다. 설암은 안진경과 유공권의 글씨를 배워 특유의 해서 서법을 이루었다. 특히 그의 대자는 조맹부의 송설체와 더불어 편액 글씨로 널리 사용되었다.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학자 도종의가 지은 '서사회요'에 는 설암 이부광에 대해 '글씨와 그림은 신품의 경지에 올랐다. 그의 서법 학문은 안진경과 유공권에서 나왔으며, 해서, 행서, 초서를 잘 썼다. 큰 글씨는 더욱 잘 썼다. 조정의 편액은 다 그의 글씨다'고 적고 있다.
설암체는 편액 글씨체로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도 계속 유행했다. 궁궐은 물론 전국 곳곳에 전하는 사찰, 서원 등 편액에서 설암체의 서법을 만나볼 수 있다.
설암의 대자 글씨는 그의 '병위삼첩' '춘종첩' 등에 전하고 있으며, '세종실록'에는 '새로 간행한 '설암법첩'을 종친, 의정부, 육조, 집현전 등의 관원들에게 나누어 주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조선 초기부터 설암의 대자글씨가 널리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잇다.
조선 초기 암헌신장(1382~1433)이 특히 편액 글씨에 뛰어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 신장은 대자를 잘 썼다. 세종께서 예전에 설암이 쓴 위응물의 [병위삼화극연침응청향]이란 서첩을 얻었는데 '병위삼' 세 글자가 떨어져 나간 것을 신장에게 명하겨 보충하게 하였다.' 는 기록이 잇다. 그의 편액 글씨로 '임씨가묘'가 남아 있다. 공민왕, 이황, 한석봉, 송시열 등 많은 이들이 설암체 편액 글씨를 남기고 있다.
물론 현판 글씨로 해서 외에도 전서와 예서, 행서, 초서 등 다양한 글씨체가 사용되었다. 현판 글씨는 왕이나 당대의 대표적 명필과 문인, 고승의 것이 대부분이나, 옛 선현의 글씨에서 골라 사용하기도 했다.
홀대받는 현판 문화유산
이렇게 역대 제왕이나 당대의 명필, 문인의 필적이 담긴 편액은 건물의 품격을 높이는 , 화룡점정의 작품들이다. 현판은 당대 예술의 정수는 물론 그 시대의 정신과 가치관, 역사, 아름다운 일화 등이 담겨 있어 더없이 소중한 문화유산 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판은 건축물이나 그림, 도자기 등과는 달리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그 가치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며 방치되고 있다.
편액 중 가장 오래된 글씨로, 신라의 명필 김생(711~791)이 쓴 것으로 전하는 공주 마곡사의 '대웅보전'이 있다. 물론 현재의 편액 자체는 당초의 원본은 아니고 여러 번 복각을 거친 것일 수도 있겟지만, 소중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그의 글씨를 집자했다는 '만덕산 백련사'편액도 강진 백련사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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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글씨로 전하는 부석사 '무량수전'과 안동 '영호루' 편액도 더없이 귀중한 유산이다. 이러한 어필 편액을 비롯해 추사 김정희, 원교이광사, 창암 이삼만 등 당대 최고 명필의 편액 작품도 전국 사찰 곳곳에 걸려 잇다.
누각과 서원, 정자, 명문가 고택 등에도 흥미로운 사연이 담긴 현판 문화재가 즐비하다. 영남루(밀앙) 죽서루(삼척)등 누각은 특히 현판의 경연장이라 할 정도로, 눅대에 걸쳐 수많은 명필과 시인묵객의 오래된 필적이 전해 오고 있다.새대별로 현판의 모양이나 장식 등도 차이가 있어 그 시대의 특징을 잘 전해 주고 있다
이렇게 귀중한 문화재 현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현판이 국보나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는 하나도 없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추사 글씨인 봉은사 '판전-서울시유형문화제 제 84호' 현판과 명종 글씨인 영우 '수수서원-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 330호'현판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옛 현판은 목재여서 오래 보존되기가 어려운 문화재이나 다행히 역대 왕과 명필 등의 소중한 필적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선조들은 그 귀중한 가치 때문에 해당 건물이 화재나 풍수해 등으로 소실되거나 파괴될 때 우선적으로 현판만이라도 구하고 보전하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덕분에 당시의 건물은 없어져도 현판만은 지금까지 보전해 올 수 잇었던 사례가 적지 않다.
현판 글씨, 특히 편액 글씨는 금석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자 글씨의 특별한 서체와 서풍을 다양하게 살필 수 있어 더욱 소중한 문화재다, 그런데도 이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와 분석이 되지 않아 그 가치가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