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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카타리나 폰 보라
주도홍
극적인 수녀원 탈출
16세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가장 많이 세상에 알려진 여인은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1499-1550)일 것이다. 이유는 그녀가 단순히 루터의 아내로서뿐 아니라, 종교개혁자 루터를 향한 그녀의 만만치 않은 야무진 역할이 더욱 그녀를 소문나게 하였을 것이다. 과연 그녀는 16세기 당시 교회의 한 여인으로서, 게다가 그 유명한 종교개혁자의 아내로서 과연 어떠한 역사적 생애를 이룩하였을까?
1499년 1월 태어난 그녀는 10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재혼과 함께 독일 님브센(Nimbschen)에 위치한 수녀원에 들어갔고, 16살이 되었을 때는 비로소 공식적인 서원을 하여 수녀로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을 위시하여 전 유럽에 열화와 같이 번져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개혁의 새로운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그녀 역시 루터의 저술을 수녀원에서 읽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녀의 마음은 과연 진정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9명의 님브센 수녀들이 자신들의 가는 길에 의혹을 가지게 되었고, 함께 루터의 상담을 받게 되었다. 이에 루터는 말할 것도 없이 수녀원을 벗어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조언하면서, 이를 위해 루터 역시 나름대로 도울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당시 루터가 있는 독일의 작센(Sachsen) 지역은 신앙적으로 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공작 게오르그(Georg)가 통치하는 지역은 여전히 카톨릭을 지지하며, 다른 한쪽은 루터의 친구이면서 또한 생명의 은인으로 역사 가운데 소문이 나있는 현공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통치하는 개신교 지역이었다. 그런데 카타리나 폰 보라가 소속되어있는 님브센 수녀원은 다름아닌 게오르그가 다스리는 카톨릭 영토 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게오르그는 매우 강경하여 수녀원에서 탈출하는 수녀를 도왔다는 이유로 한 남자를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 가운데서도 루터는 매우 신뢰할 수 있는 한 상인 토르가우(Torgau) 출신 레온하르트 코페(Leonhard Koppe)와 함께 특별한 수송작전으로 원하는 수녀들을 수녀원에서 탈출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구운 청어를 담은 비린내나는 큰 통에 수녀들을 함께 넣어서 위장하여 수녀원을 탈출을 시키는 그러한 꾀를 발휘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조금 더 언급하면, 탈출하고자 하는 수녀들은 예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부활절 그날 저녁에 수송작전에 참여하여 부활절이 끝난 다음 화요일에 루터가 사는 비텐베르그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 학생은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흥미로운 편지를 보냈다. “며칠 전 여기에 도착한 한 마차 사건보다 더 흥미 진지한 이야기는 없다. 그 마차는 처녀들을 가득가득 짐으로 싫어왔다. ... 만약 하나님께서 그녀들의 신랑들을 책임지실 것이라면, 이 살벌한 기간에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루터 역시 이들의 장래에 대해 나름대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곧 이들이 다른 그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는 것이었다. 한 수녀는 교사가 되었으며, 둘은 어느 가정에 집안 일을 돌보게 되었으며, 다른 여인들은 결혼을 하였다. 그 중에서 카타리나 폰 보라는 2년 동안 비텐베르그의 한 가정에서 가사를 도우면서 훌륭하게 가사를 몸에 익혔다.
매력적인 여인
사실 카타리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그 중 제일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당시 덴마크의 왕이 피신하여 이 곳 비텐베르그에 거하였는데, 그는 그녀에게 금반지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또한 뉘른베르그 출신 히에로니무스 바움개르트너(Hieronymus Baumgärtner)는 25세의 귀족 가문의 청년으로서 당시 24세의 카타리나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여 결혼하기를 원하였다. 가능한 한 빨리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기를 원했으나, 그의 집안의 반대로 결혼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대하여 루터가 편지를 썼다. “여보게 빨리 일을 진행시키게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잃게 될 것이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총각 히에로니무스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고 말았다. 이러한 총각의 태도를 루터는 나무라지 않았는데, 자식은 부모에게 마땅히 순종함이 옳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루터는 카타리나를 글라츠(Glatz) 박사에게 중매하였으나, 그녀는 루터의 그러한 호의를 박절하게 사양할 수 없어 암스돌프(Amsdorf) 박사를 통하여 거절하였다.
루터에게 향하는 카타리나
사실 카타리나의 마음에 드는 신랑감으로는 다름 아닌 자신에게 그토록 호의를 베푸는 루터와 암스돌프가 바로 그러한 남자들이었다. 카타리나는 루터나 암스돌프를 가까이 하면서 여러 면에서 그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 두 남자들은 아직 독신들이었으나, 자신들과 카타리나 사이에 존재하는 엄연한 연령차로 인하여 결혼은 아예 생각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루터와 카타리나 사이의 나이 차는 루터가 16세나 연상이었다. 루터가 이러한 그녀의 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결혼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다. 과연 결혼을 할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독신생활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를 숙고한 끝에, 루터는 혼자 살아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루터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다주게 된 것은 외적인 원인 때문이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는 7년 후에는 결혼을 하여 아버지가 될 것이다’고 말했더라면, 아마도 그는 큰 너털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1520년 루터가 프리드리히 현공의 도움으로 농부로 변장하고 바르트부르그(Wartburg) 성에 칩거하고 있을 때, 들려오는 소문은 비텐베르그에서 몇몇 수도사들이 결혼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때 루터는 “오 하나님! 우리 비텐베르그 사람들이 제발 나에게는 결혼을 강요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사한 사건이 1524년에도 있었는데, 아르굴라 폰 그룸바흐(Argula von Grumbach)가 루터에게 결혼을 통하여 복음의 확신을 제시하기를 강요하였을 때도 루터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이 때 루터는 그녀에게 “나는 결혼을 아직 생각하지 않았소”라고 말하면서, “내가 나무와 쇠로 만들어져서도 아니며, 나의 육체와 정욕이 그러한 것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 결혼을 나는 아직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가 이단이라도 된 것처럼 무서운 죽음의 위험이 시시때때로 나를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타리나를 루터 부모에게
그런데 42세의 루터가 다른 생각을 하게되면서 카타리나를 부모에게 소개하게 되었을 때, 루터의 아버지는 얼마나 놀랐을까를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수도원에서 독신서원을 한 아들이 결혼을 한다는 말에 아버지는 충격적이었으나, 반면 이제 손자를 볼 수 있게 됨을 생각할 때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루터를 향하여, “그의 아버지는 행복하였을 것이며, 교황은 아주 화가 났었을 것이며, 하늘의 천사들은 즐거워하였을 것이며, 사탄들은 통곡하였을 것이다. 그의 결혼은 복음의 음성을 들은 루터의 확신에 찬 증거임이 틀림이 없다”는 말은 적절하다 하겠다.
그럼에도 루터의 결혼에로의 결단은 엄격히 볼 때, 그녀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앞섰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당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을 때, 여기 저기서 혼인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신앙고백적 과시적 행위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잘못된 카톨릭의 이원론적 결혼관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새로운 성경적 결혼관에 동의하면서 이에 따른 신앙고백적 행위를 새롭게 제시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루터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루터와 카타리나 사이에 찾아온 부부간의 사랑은 얼마간 살고 난 후 였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친구에게 한 루터의 말을 통해서도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도 아니했고, 내 마음이 그녀를 향해서 뜨거워지지도 아니하네. 그럼에도 내가 나의 아내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캐테(카타리나의 애칭)를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뺏길 수는 없네. ... 하나님께서 그녀를 나에게 선물하셨고, 나를 그녀에게 주셨기 때문이네. ... 다른 여인들과 나의 캐테를 비교할 때 다른 여인들에게서 나는 보다 많은 결점들을 발견하게 되네. 물론 그녀 역시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것들을 뛰어넘는 훨씬 큰 덕성들을 그녀는 가지고 있다네.”
“하나님의 선물”
토마스 뮌쩌(Thomas Müntzer,1490?-1525)가 이끄는 농민전쟁의 회오리바람이 한참 불어닥치고 있는 1525년 6월 13일 네 명의 증인 앞에서 루터는 케테와 소박하게 그러나 역사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두 주 후에 울려퍼지는 나팔소리와 함께 루터와 카타리나의 결혼을 축하하는 거리축제가 열렸다. 풍족한 향연이 베풀어졌는데, 이 축제에 루터의 부모도 기쁨으로 참석하였다. 루터의 행복한 결혼과 사랑스런 부부를 바라보며 독일의 교회사가 마틴 브레히트(Martin Brecht)도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을 향한 신앙고백적 행위였다. 케테는 의식 있는 인격의 소유자로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될 때에는 기꺼이 남편인 루터에게 소신을 말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였다. 1526년에 태어난 요한네스를 위시하여, 1527년 엘리자베트, 1529년 마그달레네, 1531년 마틴, 1533년 파울 그리고 끝으로 1534년 마가레테가 출생하였는데, 그 중에서 엘리자베트는 1528년에 마그달레나는 1542년에 아깝게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났다. ... 점점 규모가 커져 가는 집안 일을 활동적이고 규모 있는 이 여인은 무엇보다도 더 잘 감당하여야만 하였다”고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루터가 그녀와 결혼한 후 1년 정도 되었을 때, “그녀는 나에게 상냥하며, 모든 점에서 순종하며, 내가 바랬던 그 이상으로 예리하고 영특하여, 이제 나는 나의 가난을 대부호로 소문난 크레수스(Krösus) 왕의 부귀와도 바꿀 마음이 전혀 없네”라고 말하였다. 그녀를 자신의 은사(Carissima)로 칭하기까지 했던 루터는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캐테”라고 불렀다.
루터의 명성이 커짐과 동시에 수많은 친척들과 수시로 찾아드는 손님들 그리고 적지 않은 학생들을 겉으로 보기에는 나약한 이 여인이 지혜와 신앙으로 기꺼이 감당하였던 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당시 프리드리히 현공은 루터의 생명의 은인이자 동시에 루터의 추종자로서 후한 생활비와 함께 당시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쓰던 40개의 방이 있는 큰 건물을 루터의 가정을 위해 내놓았다. 그럼에도 엄격히 볼 때 수많은 식솔들 때문에 그렇게 생활은 풍족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카타리나 부인은 이 큰 규모의 살림을 잘 감당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루터의 결혼은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분명히 성공적이었다 하겠다.
비난의 편지들
그렇다고 루터의 결혼을 마냥 축복스럽고 흐뭇한 눈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다. 루터가 케테와 부부생활을 시작한지 2년 정도 되었을 때, 케테 앞으로 비난의 글이 전달되었다. 사실 수도원의 수도사였던 루터와 수녀원의 수녀 출신인 카타리나가 독신서원을 깨고 함께 결혼하여 부부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당시 루터를 원수처럼 여기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절호의 비난거리임과 동시에 세상사람들에게는 이야기 거리가 족히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불쌍하고 가련한 유혹에 빠진 계집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네가 빛에서 어두움으로, 수도원적인 거룩한 신앙에서 저속하고 추잡한 생활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은혜 없는 삶으로 타락되었다는 단지 그러한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 너의 그러한 사악한 삶의 모델을 통하여 아직 때묻지 않고 가련한 어린아이들을 역시 이러한 비참함으로 이끌어서 영혼뿐 아니라, 육체까지도 더욱 가련하게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수없이 많은 핍박 가운데서도 이 두 사람은 결혼은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신 축복이며 질서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더욱 깊고 거룩한 사랑으로 돈독한 부부애를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나갔다. 둘 사이에는 언제나 신선한 유모어를 잃지 아니했으며 격려와 용기를 아낌없이 서로를 향해 쏟아 부었다. 예를 들어 루터는 크나큰 살림을 감당하는 아내를 향하여 한 번은 “우리의 여 주인장 케테, 여 주방장님”(Unsere Herrin Käthe, Oberküchenmeisterin)이라고 친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유모러스하게 쓰고 있음은 신선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루터 역시 아내의 수고를 익히 알고 있었으며, 이해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게다가 루터는 그녀를 “케테씨”(Herr Käthe)라고 편지들 가운데서 종종 부르고 있는데, 물론 농담 섞인 호칭인 것은 분명하지만, 루터는 그녀의 탁월성을 염두에 두면서 그 어떤 남자 못지않은 여인이라는 존경의 의미로서 부른 것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케테는 여러 면에서 강한 생활력으로 활약을 했는데, 밭을 사들이고 경작하며, 가축들을 치며, 시장을 보고, 맥주를 담그는 등의 행위를 훌륭하게 감당하였다. 카타리나가 많은 밭을 샀는데, 만약 남편이 죽었을 때 혼자서 아이들을 먹여 살릴 것을 생각하면서 준비하였다. 당시 혹시 찾아올지도 모르는 남편 없는 위기 상황을 예비하면서 그녀는 가장 안전한 준비인 토지를 사들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루터에게 있어서 이러한 점은 하나의 부담이기도 했다. 루터 역시 토지를 팔거나 농사를 지을 때 축복스런 부로 이해했지만, 그저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는 행위를 기꺼 하지 않았다. 루터에게 있어서 많은 곡식은 황금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종교개혁의 조언자
루터 역시 아내 케테의 말에 묵묵히 귀기울일 줄 알았다. 한 번은 한 친구가 루터에게 결혼식 축제를 집례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루터는 정중히 이 부탁을 아내 케테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거절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나 그리고 나의 케테도 그것을 허락할 수가 없구려. ... 나는 너의 부부 그리고 나의 부부에게도 하나의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구려. 내 생각에는 자네가 프라이부르그(Freiburg)에서 잔치를 행하든지 아니면 가까운 친지들만을 불러서 두 세 식탁 정도로 소박하게 점심 먹기 전 간식 정도로 준비하는게 어떨는지 하네.” 우리는 루터가 이 결정을 할 때 아내 케테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뿐만아니라 카타리나는 무거운 신학적 물음에도 많은 흥미를 가지고 참여하였는데, 예를 들어 1529년의 「마부르그 종교회의」(Marburger Religionsgespräch)에서 루터가 어떻게 성찬론에 관하여 토론을 이끌어 갈 것인지를 생각할 때, 그녀는 성경을 읽을 것을 제안하였다. 물론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부부의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이 되지만, 어쨌든 당시의 급박한 위기적 상황과 더불어 당시 종교개혁자 루터의 역사적 무게를 기억할 때 남편 루터를 위한 케테의 야무진 역할은 특별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아내 케테를 향하여 루터는, “나는 케테를 사랑한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나는 내 자신보다도 그녀를 더 사랑한다. 만약 그녀가 아이들과 더불어 죽어야만 한다면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이다”(TR 2, 1563)라고 아낌없는 사랑을 토로하였다. 그녀를 향한 루터의 각별한 사랑은 비단 여기서만 제시되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생활에서 누리는 은혜와 평강은 분명 하나의 선물로서, 복음의 인식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다. ... 사랑하는 케테,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좋은 남자를 소유하고 있소. 당신은 진정 여자 황제올시다. 그것을 아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시구려!”(TR 1,1110) 부부애와 그리스도의 사랑에로의 인식은 가까이 있는데 루터에게 있어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루터는 로마서와 함께 갈라디아서를 종교개혁를 위한 중요한 두 영적 무기로 생각하였는데, 갈라디아서 주석을 쓰면서 루터는 “내가 진실로 신뢰하는 사랑하는 케테 폰 보라”를 일컫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각별한 루터의 부부애는 자신의 유언(1542년)에서도 잘 나타나 있는데, 그녀를 걱정할 뿐 아니라, 다시 한 번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녀는 경건하고 신실하며 부군된 남편 나를 언제나 한결같이 자비와 품위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사랑했으며, 본인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섯 자녀들을 낳았으며, 장성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루터는 그녀를 향한 진심 어린 감사도 잊지않았다(BR 9, 572f.).
평화로운 가정
루터는 가정의 평화를 참으로 귀하게 여겼다. “우리의 몸과 생활, 아내와 자식, 집과 정원을 위시한 모든 지체들인 손, 발, 눈 그리고 모든 건강과 자유가 평화에 의해서 주어진다. 이 평화의 울타리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자리를 잡는다. 평화가 있는 곳은 거의 천국이 이뤄지는 곳이다. 평화가 있을 때, 한 입의 빵 조각은 마치 설탕처럼 달 것이며, 한 모금의 물도 저 유명한 이태리 산(産) 말바의 포도주처럼 달콤한 맛을 낼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에게 있어서 이처럼 귀하게 느껴지는 평화는 카톨릭 교회를 위시하여 대외적으로 닥쳐오는 시련과 어려움으로 여지없이 깨어지곤 하였고,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그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이러한 종교개혁자의 힘든 생애에 있어서 포근한 가정이 가져다주는 사랑과 평화는 너무도 큰 위로와 힘이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루터는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온 가족이 하나님께 함께 찬송함으로 극복하며, 큰 위로를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 찬송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였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루터는 찬송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모른다. “마치 잘못된 신앙을 가진 모든 자들이 그렇듯이 누구든지 찬송을 함부로 무시하는 자들에게 나는 동의를 할 수 없다. 음악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능이며,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며 사람들의 심령을 기쁘게 만든다. 게다가 음악은 모든 분노, 불순, 거만 그리고 다른 무거운 짐들을 잊게 한다. 나는 신학 다음 자리에 음악을 놓으며, 최고의 영예를 부여하고 싶다.” 음악은 루터에게 있어서 큰 위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은혜와 영적 고양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음악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최고의 은사이다. 그러한 음악은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영적 힘이 되었으며, 감동을 주어 말씀을 설교함에 있어서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의 찬송으로 오늘 날 우리가 즐거이 부르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384장)를 기억하게 되는데, 가사를 음미할 때 참으로 핍박과 시련으로 위기 가운데 불렀던 찬송임을 실감하게 된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과연 루터에게 있어서 찬송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임재를 실감하는 능력 있는 또 다른 기도였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루터는 또한 카타리나를 포함하여 가정의 모든 다섯 자녀들과 함께 자신이 직접 기타의 전신인 라오테를 연주하면서 하나님께 즐거운 찬송의 시간을 수시로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별히 1866년 독일의 화가 구스타브 아돌프 슈팡엔베르그(G.A. Spangenberg)는 이러한 루터의 가정을 연상하며 그림으로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 인상깊은 한 대목은 루터의 동료 멜랑히톤이 함께 참석하여 루터 가정의 아름다운 합창을 흐믓한 얼굴로 청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찬송의 은혜 가운데 젖어 있는 종교개혁자 루터의 가정은 참으로 바람직한 개신교 성직자 가정의 아름다운 모델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그림 참조).
“하나님이 주신 기업들”
“사랑하는 딸아, 천국에 너의 또 다른 아버지가 계시단다. 거기로 네가 옮겨가는 거란다.” 이 말은 1542년 큰 딸 마그달레나가 14살의 다 큰 나이로 죽어가고 있을 때 아버지 루터가 최후의 순간에 그녀에게 들려준 가슴 찡한 위로의 메시지였다. 루터는 이 마그달레나를 잃었을 때 얼마나 가슴 아파했는지 모른다. 또한 그 딸의 묘비에 루터는 친히, “여기에 루터 목사의 사랑스런 딸이 모든 성도들과 함께 안식 가운데 잠들다. 나는 죄 가운데 태어나서 마땅히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영원한 생명과 기업을 얻었노라”고 기록하였다. 우리는 영생의 확고한 소망 가운데서 딸을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보내는 아버지 루터의 다른 면을 확인하게 된다. 카타리나 역시 이 사랑하는 딸을 장례 치르는 순간에 깊은 슬픔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 없어, “사랑하는 딸아, 너는 다시 살아 날거야. 그리고 별처럼 빛날 거야. 아니 태양처럼 빛날거야. 물론 이는 놀라운 사실이지만, 그리고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지만, 그래도 이 슬픔을 감당할 길이 없구나!”라고 절규하였다.
루터와 카타리나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로는 아들 셋, 그리고 딸 셋으로 조화를 이루었으나, 그 중 일년도 채 안되어 딸 엘리자베트를 1528년 잃고 난 후, 15년만에 너무도 사랑스런 큰 딸 마그달레나를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보낸 것이다. 이제 남은 루터의 자녀들로는 아들 셋, 딸 하나였는데, 과연 그들은 어떠한 성장과정이 있었을까? 아이들과 아내 카타리나에 대한 사사로운 정보들을 우리는 루터의 담화록(Tischreden)과 편지들에서 거의 대부분 얻고 있다. 카타리나가 임신하여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1526년에 얻은 할아버지 이름 따라 부르는 첫 아들 한스가 걸음마를 어느 정도 빨리 하는지, 그가 이제는 제법 중얼거리고 말을 따라하며, 얼마나 귀찮게 하는지를 루터는 편지에서 흥겹게 이야기한다. 한 편지에서 루터는 어린 아들 한스의 “모든 성가신 일들마저도 우리에게는 기쁨입니다. ... 이는 축복된 부부에게 내리시는 열매이며, 행복입니다만, 교황에게는 이러한 가치가 인정되지 않지요”라고 행복한 개신교 첫 번째 목사가정을 서술하였다. 아들 한스가 거의 열 한 살이 되어가고 있을 때 루터는 친구에게가 아니고 한스에게 라틴어로 쓴 편지를 보냈다. 바쁜 중에서도 자랑스런 아들 한스에게 아버지 루터는 학문의 언어인 라틴어로 격려와 함께 기대 섞인 편지를 보낸 것임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 살도 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딸 엘리자베트를 생각하면서 루터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사랑하는 딸 엘리자베트가 죽었다네. 나는 얼마나 슬픈지 말로 형용할 수 없네. 마치 슬픔에 빠진 한 여인의 모습이라네. 자식의 죽음이 이토록 아빠의 마음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는지. 이전에 나는 이러한 상상을 전혀 해 본 적이 없다네”라고 토로하고 있다.
1531년 11월 9일 카타리나는 둘째 아들 마틴을 출산하였다. 이 마틴을 루터는 “가장 사랑하는 보물”(mein liebster Schatz)이라고 묘사하곤 하였다. 또한 카타리나가 마틴을 쓰다듬으면서 하는 서로간에 사랑넘치는 대화를 보면서, 루터는 “나의 아내 케테가 사랑스런 아들 마틴에게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하나님은 나에게 자애로운 대화를 하실 것이 분명하다”고 행복한 소망을 표출하였다. 이러는 중에서도 루터는 늘 카톨릭과의 긴장어린 관계 가운데 있는 자신의 현실을 잊지 않았는데, 아들 마틴이야말로 대적자들인 교황, 주교들, 게오르그 공작, 황제 페르디난트 그리고 모든 사탄들을 물리치는 진리에 충실한 종이 되어 그 어느 때고 그러한 이들에게 “진정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고 외치길 원하였다. 루터는 또한 이 마틴이 출생하였을 때, “천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 어떠한 주교들에게도 나에게 베푸신 이 큰 복을 주신 적이 없었다”고 감격해 마지 않았다.
1533년 1월 29일 막네 아들이 태어났을 때, 카타리나와 루터는 사도 바울과 같은 인물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 바울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 케테를 통하여 이 밤에 선물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교황과 터어키인들의 새로운 대적자로 양육시키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이 저녁이 지나기 전에 한 시라도 빨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한 복판에서 태어난 루터의 아이들은 종교개혁자 아버지 루터에게 있어서 확실한 동역자였던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인식하게 된다.
1534년 12월 17일 카타리나는 막네 마가레타를 여섯 째로 출산하였다. 할머니의 이름을 따라 그녀는 마가레타로 불리었다. 루터는 마가레타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녀에게서 아름다운 목소리와 함께 음악성을 발견하였고 가정 음악회에도 종종 참여하게 하였다. 여섯 아이를 낳았지만 카타리나는 건강하였다. 이러한 가정의 행복을 만끽하면서 루터는 늘 사랑하는 아내 케테와 많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는데, 독일어뿐 아니라, 때로는 라틴어로 대화를 하였으며, 서로가 멀리 떠나 있을 때는 독일어와 라틴어를 함께 쓰는 편지로 부부애를 나누었다.
카타리나의 성경지식
루터는 바쁘게 살아가는 아내 케테가 영적으로 침체되지 않도록 마음 따뜻한 좋은 조언을 늘 아끼지 않았는데, 무엇보다도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도록 권면 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녀 역시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 번은 루터가 아내에게 재미있는 약속을 하였는데, 부활절이 오기 전까지 만약 아내 케테가 성경 전체를 다 읽을 경우 독일 돈 50 굴덴을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돈을 그녀가 받았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부부지간에 표출되는 숨길 수 없는 흥겨운 사랑만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아내 케테가 성경을 읽지 않았다거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고 추측해서는 성급하다. 루터는 종종 아내의 성경 지식이 뛰어남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이 말씀대로 살기를 노력하는 것을 볼 때 늘 감사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한 번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야하는 아브라함을 루터가 해석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아내 케테는 동의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때 가질 수 있는 고통에 대하여 루터가 언급하였을 때, 부인 케테는 다른 입장을 밝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아들을 살해하라 하실 수 있을까요.” 이에 루터는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시키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외아들까지도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심을 결코 망설이지 않으셨다고 대답하였다.
루터가 보낸 편지들
또한 우리는 루터 부부의 편지를 볼 수 있다. 부인 케테가 남편 루터에게 쓴 편지는 유감스럽게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루터가 아내 케테에게 보낸 편지들은 상당수 남아있어 부부지간의 사랑을 우리는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다.
1523년 2월 27일 루터는 외유 중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사랑하는 케테, 휴식을 취하기 위해 부뤽 박사가 휴가를 내어 곧 내가 그분과 함께 집으로 갈 계획이오. 아마도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 같구려.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사히 그리고 건강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하오. 어제 저녁 나는 잠을 잘 잤소. 여섯 일곱 시간을 푹 잤고, 연이어 두 세시간을 또 잤소. 아마도 맥주 덕분인 것 같구려. 아무튼 빨리 당신이 있는 비텐베르그에 가고 싶구려.”
1541년 9월 18일 비텐베르크에서 루터는 쮤스도르프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소식이 없으니 놀랍구려. 과연 이곳의 우리가 잘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는지 말이요. ... 어쨌든 당신이 할 수 있는 대로 (땅을) 사시고 또는 계약을 하시구려 그리고 제발 빨리 집으로 오시구려.” 루터는 당시 어쩌면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의 위험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피난의 세월 속에서
구교와 개신교의 입장에 선 위정자들 사이에 발생한 여러 번의 내란, 터어키 군과 프랑스 그리고 로마 카톨릭의 교황과의 충돌들은 당시의 상황을 매우 힘들게 하였다. 루터가 아내 케테와 21년간의 결혼생활을 뒤로하고 1546년 2월 18일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럴 때마다 케테는 아이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한 번은 교황측의 군대에 의해 비텐베르그가 포위되었을 때, 케테는 자녀들과 함께 마그데부르그(Magdeburg)로 도피해야만 했다. 점령군이 철수하고 그녀가 가족과 함께 다시 비텐베르그로 돌아왔을 때, 밭의 곡식들은 온통 못쓰게 되었으며, 가축들은 점령군에 의해 잡혀 먹혔고, 가옥은 불에 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비참한 상황이 반복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흑사병은 무참히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는데, 이러한 전염병이 휩쓸 때에도 사람들은 특별한 대책이 없어 또 다시 피난의 길을 떠나야 했다. 한 번은 케테가 아들 바울과 딸 마가레타를 데리고 이 흑사병을 피해 토르가우(Torgau)로 가서 전염병이 수그러질 때까지 그 곳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해야만 했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 카타리나 부인이 말을 타고 다소 험한 길을 가게 되었는데, 이 때 얼음물이 고여있는 무덤 옆을 지나다 미끄러져 마차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쳐 그녀는 토르가우로 옮겨졌고 당시 18세의 딸 마가레타의 정성어린 간호를 받았으나, 3개월 후 1550년 12월 20일 51세의 나이로 길지 않은 그러나 결코 평범하지 않은 한 여인으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먼저 간 남편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보다 4년 10개월 뒤에 그녀 역시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영원한 품에 안긴 것이다.
맺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16세기에 등장한 교회 속의 한 여성, 특히 가장 첫 번째 목사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를 향한 우리의 특별한 관심은 무엇보다도 종교개혁자 루터의 아내라는 이유가 가장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실 우리의 기대는 조금은 달랐는데, 교회사 속의 한 여인으로서 그녀의 독자적인 활약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것이었다. 이를 향한 우리의 기대는 그렇게 충족되지 못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중 필자는 첫째, 그녀에 대한 역사적 자료의 빈곤을 우선적으로 제시하게 된다. 주로 역사가들은 루터를 연구하는 중 만나게 되는 그녀에 대한 자료를 활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남편 루터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만나지는 카타리나 폰 보라 부인의 모습이 우선적으로 제시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인데, 이러한 자료의 빈곤은 결국 연구의 한계성으로 부각 되어진다. 둘째, 당시 16세기가 비록 종교개혁이라는 엄청난 전환의 순간을 창출해내고 경험하는 역사적 창조적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여인들의 교회적, 사회적 위치와 활약 그리고 봉사에 대한 기대가 크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은 여인들의 역할이 주로 남편과 자녀들 그리고 집안 생활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교회가 여인들의 또 다른 활약에 건 기대가 얼마나 미약했는가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미약한 기대는 결국 여인들의 다른 활동에 제재를 가하는, 어떤 면에서는 적극적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어쨌든 이제 우리는 카타리나 폰 보라의 역사적 의미를 정리하면서 끝을 맺어야 하겠다.
첫째, 종교개혁 이후 가장 첫 번째 개신교 목사 부인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카타리나 폰 보라에게 있어서 확인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이 역사적-신학적 역할은 크고 위대했는데, 수도사 출신 루터와 수녀 출신 카타리나의 개인적 신앙결단에도 힘입은 바 크다 하겠다. 여기서 신학적이란 이신칭의에 의한 종교개혁적 새로운 인간실존이 선언하는 진정한 삶의 유형을 성직자 독신생활의 굴레를 벗기고 축복된 결혼이라는 또 다른 자유의 모습으로 떳떳이 제시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는 가정생활에 있어서 나타나는 종교개혁적 신학의 선언적 의미가 놀랍다.
둘째, 카타리나는 정숙한 목사의 사모, 신앙의 아내, 종교개혁자 루터의 지혜로운 조언자였으며, 다섯 자녀들의 성실한 어머니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무겁고 힘겨운 역할을 위기의 시대에도 최선을 다해 감당하였다. 아내로서 그녀는 인격과 용기, 예민성과 강직함, 강한 의지와 큰 사랑을 소유하였다. 수많은 사상적 대적들을 늘 곁에 두어야 했던 종교개혁자 남편 루터에게 그녀의 따뜻하며 예리한 조언은 정금같이 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공개적인 활약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러한 카타리나의 모습은 어쩌면 남편 루터의 여성관 내지는 가정관에 일치하고 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루터에게 부과되는 너무도 막중한 종교개혁적 사명이 그녀로 하여금 또 다른 역할을 기대하게 못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즉 오직 이 위대한 종교개혁자 남편을 위해서 부름받은 신실한 여종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 지혜로운 아내 숨은 동역자 카타리나와 함께 이루어진 신적(神的) 작품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의미있다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카타리나 폰 보라의 역사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끝으로, 카타리나를 통해서 제시되는 개신교 첫 번째 사모의 모습은 오는 시대 개신교 목사 부인들의 상(像)을 그리는 데 있어서 어렵지 않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루터는 1525년 6월 13일 폰 보라(Katherine Von Bora, 1499-1552)와 결혼했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신부는 16세 연하의 전직 수녀였다. 루터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동료들은 모두 반대했다. 그들은 루터가 결혼하면 온 세상과 사탄이 웃을 것이며, 그동안 이루어 놓은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걱정했다.
폰 보라는 1499년에 태어난 그녀는 10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재혼과 함께 독일 님브센(Nimbschen)에 위치한 수녀원에 들어갔고, 16살이 되었을 때는 비로소 공식적인 서원을 하여 수녀로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종교 개혁의 불길이 번져가고 있을 때 새로운 믿음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그녀는 과연 진정한 신앙 생활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9명의 님브센 수녀들은 자신들의 가는 길에 의혹을 가지게 되어 함께 루터의 상담을 받게 되었다.
이에 루터는 말할 것도 없이 수녀원을 벗어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교제하면서, 이를 위해 루터 역시 나름대로 도울 준비를 하였다. 그녀는 1523년 종교 개혁의 이상에 감동을 받고 시토회의 님브센(Nimbschen) 수도원을 동료들과 함께 탈출하였다.
루터는 그녀를 다른 이들에게 소개해 주었으나 그녀는 루터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사실 카타리나는 당시 덴마크의 왕과 귀족 가문의 청년이 첫 눈에 반할 만큼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그 중 제일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루터의 결혼은 독신 생활을 크리스천의 이상으로 본 일천 년 동안의 전통을 깨는 사건이었다. 특히 농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결혼 선언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강한 신념은 이런 통념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루터는 종교 개혁과 함께 복음이 전파되자 사탄이 마지막 공격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루터는 자신이 결혼하려는 목적이 늙으신 아버지에게 손주를 안겨드리기 위해서, 또한 결혼을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설교한 것을 몸소 실천하면서 본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나는 내가 가르쳐 온 것을 실천으로 확증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복음으로부터 오는 그렇게 커다란 빛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소심한 이들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행동을 뜻하셨고 또 일으키셨다. 왜냐하면 나는 ‘사랑에 빠졌다’거나 욕정으로 불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한다.”
“나는 내 결혼식으로 천사들을 웃게 하고, 마귀들을 울게 했다.”
“그의 아버지는 행복하였을 것이며, 교황은 아주 화가 났었을 것이며, 하늘의 천사들은 즐거워하였을 것이며, 사탄들은 통곡하였을 것이다. 그의 결혼은 복음의 음성을 들은 루터의 확신에 찬 증거임이 틀림이 없다”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였다.
루터가 그녀와 결혼한 후 1년 정도 되었을 때, “그녀는 나에게 상냥하며, 모든 점에서 순종하며, 내가 바랬던 그 이상으로 예리하고 영특하여, 이제 나는 나의 가난을 대부호로 소문난 크레수스(Krösus) 왕의 부귀와도 바꿀 마음이 전혀 없네”라고 말하였다. 그녀를 자신의 은사(Carissima)로 칭하기까지 했던 루터는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캐테”라고 불렀다. 케테란 독일어로 ‘묶는 사슬’이라는 뜻이다.
루터는 바쁘게 살아가는 아내 케테가 영적으로 침체되지 않도록 따뜻한 조언과 교제를 아끼지 않았는데, 무엇보다도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도록 권면하였다. 카타리나는 단순히 식사 시중을 드는 주부만이 아니었다. 그는 신학적인 대화에도 적극 참여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루터로부터 “당신은 로마교황청의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알고 있구려”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한편 자상한 아버지였던 루터는 엘리사벳이 8개월에 죽었을 때와 막달레나가 13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깊은 슬픔에 잠겨야 하기도 했다. 막달레나가 죽었을 때 루터는 너무나 가슴 아파하면서
“사랑하는 딸아, 천국에 너의 또 다른 아버지가 계시단다. 거기로 네가 옮겨가는 거란다.”라고 말했다. 그 딸의 묘비에 루터는 친히 “여기에 루터 목사의 사랑스런 딸이 모든 성도들과 함께 안식 가운데 잠들다. 나는 죄 가운데 태어나서 마땅히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영원한 생명과 기업을 얻었노라.”고 기록하였다.
카타리나 역시 이 사랑하는 딸을 장례 치르는 순간에 깊은 슬픔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 없어, “사랑하는 딸아, 너는 다시 살아 날거야. 그리고 별처럼 빛날 거야. 아니 태양처럼 빛날거야. 물론 이는 놀라운 사실이지만, 그리고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지만, 그래도 이 슬픔을 감당할 길이 없구나!”라고 절규하였다.
루터의 명성이 커짐과 동시에 수많은 친척들과 수시로 찾아드는 손님들 그리고 적지 않은 학생들을 겉으로 보기에는 나약한 이 여인이 지혜와 신앙으로 기꺼이 감당하였다. 루터는 가정살림에는 전혀 무심한 편이었고 살림을 꾸려가는 것은 전적으로 카타리나의 몫이었다. 결혼 후 10여년간 루터 부부는 경제적으로 무척 쪼들렸다. 수많은 식솔들 때문에 그렇게 생활은 풍족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카타리나 부인은 이 큰 규모의 살림을 잘 감당하였던 것이다.
카타리나에게도 걱정거리가 있었다. 루터의 건강 문제였다. 건장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루터는 지병이 많았다. 특히 담석증은 루터를 계속 괴롭혔다. 루터의 건강을 돌보는 일도 카타리나의 중요한 몫이었다. 루터는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글 쓰는 일에 집중할 때는 서재에서 식사도 거른 채 며칠씩 두문불출했다.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는 아내로서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루터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 과묵한 독일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아내 카타리나에 대한 아름답고 따뜻한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았다. “만일 내가 아내를 잃는다면 비록 여왕이라 할지라도 나는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하지 않으리라."
루터는 이런 사모의 지혜로운 내조를 받아가며 개혁 운동을 계속해 나아갔다.
카타리나는 정숙한 목사의 사모, 신앙의 아내, 종교개혁자 루터의 지혜로운 조언자였으며, 다섯 자녀들의 성실한 어머니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무겁고 힘겨운 역할을 위기의 시대에도 최선을 다해 감당하였다. 아내로서 그녀는 인격과 용기, 예민성과 강직함, 강한 의지와 큰 사랑을 소유하였다. 수많은 사상적 대적들을 늘 곁에 두어야 했던 종교개혁자 남편 루터에게 그녀의 따뜻하며 예리한 조언은 정금같이 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공개적인 활약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러한 카타리나의 모습은 루터의 여성관과 가정관에 일치하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가정개혁
1517년 10월 30일, 루터는 95개 조항을 내걸고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다. 이것을 통해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총을 재발견하게 되었고,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는 성경의 진리를 재천명하게 되었다. 하지만 루터의 개혁은 단지 종교개혁만이 아니었다. 그의 종교개혁은 성직자의 가정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궁극적으로는 개신교 생활 전체에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일부 천주교는 루터가 성욕을 이기지 못해서 결혼했다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을 개인의 스캔들로 축소시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과는 매우 다르다. 1517년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가 결혼한 것은 1525년이었다. 만일 결혼을 위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면 종교개혁을 일으킨 다음에 8년이나 기다릴 이유가 있었을까?
종교개혁 당시 결혼이 중요한 이슈가 된 것은 사실이다. 천주교는 구원을 얻으려면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쳤고, 이 때문에 중세시대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확보하는 지름길로 수도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루터 또한 이러한 이유로 수도원에 들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루터는 성경을 연구하는 과정 가운데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는 것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구원의 길은 수도원에서 죄 없이 독신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진리가 그에 의해 밝혀졌다. 이렇게 되자 수도원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났다.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박차고 나온 것이다. 독신생활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면 수도원에서 썩혀 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무척이나 바빴다. 그는 교황과 싸워야 했고, 제후의 지지를 받아야 했고, 젊은이들에게 종교개혁의 정신을 가르쳐야 했다. 이 모든 것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당시 인쇄술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루터는 밤낮으로 글을 써서 출판하였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루터가 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중매하는 일이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하자 많은 수도사와 수녀들이 수도원에서 탈출하였다. 또 신부들도 더 이상 독신생활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독신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지금까지 독신으로 살던 성직자들에게 결혼이라는 문을 열어 놓은 것이다. 루터는 수도원을 탈출한 수녀들에게 열심히 신랑감을 소개해 주었다. 대부분의 신랑감은 천주교에서 개신교로 전향한 성직자들이었다. 이렇게 결혼한 개신교 부부들은 확고한 개신교 지지자가 되었다. 루터는 중매를 통해서 개신교의 세력을 확대해 나갔던 것이다.
루터의 결혼과정
그러면 루터는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나? 사실 루터 자신은 결혼하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은 개혁자로서 언제 사형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결혼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만 결혼시키는 데서 문제가 생겼다. 사람들이 루터의 신앙을 의심하게 된 것이다. 즉, 루터가 개혁자로서 확신이 없어서 결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루터에게 “당신이 진정으로 천주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결혼으로 그것을 입증하라.”고 요구했다. 이제 루터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는 결혼함으로써 자신이 개신교인임을 입증해야 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루터는 수녀원에서 나온 수녀들에게 신랑감을 소개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한 수녀가 남았다. 그 이름은 카타리나 폰 보라였다. 루터가 여러 사람을 소개하여 주었지만 그녀는 거절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루터가 어떻겠냐고 물었고 카타리나는 좋다고 대답하였다. 당시 루터는 부모님으로부터 손자를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결국 노처녀도 구하고, 부모님의 청도 들어주며, 아울러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기도 할 겸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다.
일단 결혼이 결정되자 루터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6월 10일에 결혼을 결정하자마자 그 달 13일에 약혼식을 하고 27일에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루터의 제자들은 이것이 혹시나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약혼기간을 길게 잡으면 어떨까 제안을 하였다. 여기에 대한 루터의 대답은 “노(NO)”였다. 루터는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늑장을 부리다 한니발은 로마를 잃었다. 늑장을 부리다 에서는 장자권을 빼앗겼다. 그리스도께서도 ‘너희들이 나를 찾겠으나 발견하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지. 그러므로 성경, 경험, 만물의 모든 이치를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의 선물은 그것이 날아들어 올 때 당장 받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대답하였다. 노총각 루터는 서둘러서 결혼하였다.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필자는 기독교의 역사상 가장 결혼을 잘한 사람이 루터라고 생각한다. 어거스틴은 젊은 날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존 웨슬리는 수많은 좋은 여자를 놓치고 의부증이 있는 여자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루터는 카타리나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으며 그의 가정은 독일인들의 모델이 되었다.
카타리나의 어머니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카타리나를 수녀원에 맡기고 재혼하였다. 카타리나는 수녀원에서 살림하는 것을 배웠고 결혼 후에는 알뜰하게 살림을 하였다. 하지만 루터는 씀씀이가 헤펐다. 루터는 “내가 노랑이 욕을 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빚을 갚기 위해 고생하는 것은 카타리나 몫이었다.
또한 루터는 항상 병을 달고 살았다. 통풍, 불면, 감기, 치질, 변비, 결석, 현기증, 그리고 도시의 모든 종소리가 들리는 귀 울림 등이 그를 괴롭혔다. 카타리나는 약초, 찜질, 마사지에 능했다. 그의 아들은 카타리나를 반(半) 의사라고 불렀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서 불면증에 좋다는 맥주를 만들었다. 사실 루터는 알뜰하게 자신을 보살피는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루터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보다 아내를 더 사랑하고 있다. 사실은 그리스도가 날 위해서 하신 일이 더 많은데 말이야.”
루터의 가정도 일상적인 가정의 모습과 비슷했다. 루터의 집에는 항상 루터로부터 배우려고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루터는 종종 대화에 몰입한 나머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루터는 식사 시간에 학생들과 대화를 즐겼고 이것은 「식탁대화」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어느 날 루터는 한 학생의 질문을 받고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카타리나는 루터가 잠시 쉬는 틈을 타서 “박사님! 그만 이야기하고 식사하시죠.”라고 말했다. 그러나 루터는 여자가 남자의 대화에 간섭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여자들은 입을 열기 전에 주기도문을 외우든지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밥도 먹지 않고 일어나 버렸다. 카타리나는 남편의 건강을 먼저 생각했고, 루터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루터의 결혼관
루터는 성직자가 결혼해야 하는 것을 인간의 성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개중에는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독신은 인생의 커다란 장애물인 것이다. 루터는 독신생활이 오히려 간음을 조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신부와 수녀가 같은 성당에서 일하면서 아무 일이 없을 수 없다.”라면서 “나무와 성냥을 함께 놔두고 타지 마라.”는 것은 비상식적이라고 말했다. 이런 생각으로 루터는 성직자의 독신제도를 반대하고 결혼생활을 지지했다. 결혼생활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장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루터 자신이 결혼하고 가정생활을 하면서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그가 실제로 가정생활을 하면서 가정에는 단지 성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가장은 죽을 때까지 가정의 빵을 걱정해야 하며, 아내는 임신의 순간부터 고통을 받기 시작한다. 가정에는 온갖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가정생활이야말로 진정으로 신앙을 시험해 보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루터는 가정생활과 수도원생활을 비교해 보았다. 사실 가정과 비교해 보면 수도원은 너무나 단순한 삶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일하면 된다. 사실 수도원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은 매우 쉽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유혹이나 탐심이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정은 그렇지 않다. 가정은 돈이 없으면 안 되고, 아내의 욕구도 만족시켜줘야 하고, 아이들도 교육시켜야 한다. 이런 모든 것은 인내와 신앙이 요구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진정한 훈련은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수도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누가 못하겠는가? 하지만 아내가 잔소리를 하고, 아이들이 울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하는 것이 진정으로 훌륭한 신앙이라는 것이다. 루터는 가정이야말로 인격을 수련하는 최상의 장소라고 보았다.
루터는 가정에서 온갖 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부싸움은 아담부터 지금까지 있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루터는 여기에서 귀한 진리를 배웠다. 그것은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루터에게 가정의 많은 문제는 낙심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게 만드는 희망의 근거였던 것이다.
또한 루터는 좋은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첫사랑이란 술 취한 것과 다름없다. 술이 깨고 난 다음에야 진짜 부부애가 싹튼다.” 루터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충고를 받아들였다. 신부에게는 “얘야, 밤에는 즐겁게 남편이 현관에 들어서도록 하거라.” 신랑에게는 “네가 출근하는 것을 아내가 아쉬워하도록 하거라.”, “가장 멋진 인생은 하나님을 믿고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아내와 더불어 한마음이 되어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라고 조언하였다. 하루는 카타리나가 아파서 고통을 받고 있을 때가 있었다. 루터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오! 카티!(카타리나의 애칭) 날 두고 죽으면 안 돼.” 루터는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루터의 일생은 파란만장했다. 하지만 루터가 피곤하고 힘들 때 가정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루터는 중세 천 년 동안 가장 축복받은 성직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루터 자신이 아내와 자식이 있고 쉴 가정을 가진 첫 번째 성직자였기 때문이다. 루터는 힘든 사역에 대해서 불평하다가도 자신이 받은 축복을 생각하고 감사를 드렸다. 루터에게 가정은 풍랑 가운데 피난처였다.
루터의 가정과 오늘의 기독교
루터는 성직자에게 가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루터가 만든 변화 가운데 목사관의 변화도 결코 작지 않은 변화였다. 그는 목사관에 여자가 살 수 있게 하였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을 없애버린 실질적인 일이었다.
천주교는 독신제도를 통해서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였다. 성직자는 독신으로 살기 때문에 평신도보다 우월하고, 따라서 평신도는 무조건 성직자에게 순종해야만 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 가정을 가지고 있다.
천주교가 결혼을 금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아내와 가정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아내를 즐겁게 하고 자식을 먹여 살리려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할 수 없으므로 전적인 헌신을 위해서는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목사가 가정을 갖지 않으면 사역을 하기 힘들다. 많은 경우 사모가 사역의 방해가 되기보다는 사역의 동역자가 된다. 훌륭한 목사 뒤에는 거의 예외 없이 훌륭한 사모가 존재한다. 이점이 천주교와 개신교가 서로 다른 점이다. 천주교는 결혼을 성직에 방해물로 생각하는 반면, 기독교는 결혼을 성직의 필수요소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결혼이 성직에 장애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성직에 대한 소명이 없이 성직자와 결혼한 경우,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려는 마음이 없는 사모는 하나님의 사역에 걸림돌이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 목사의 가정은 이런 부정적인 방향이 나타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직자의 결혼은 자신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 일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성직에 들어서려는 사람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정말로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려는 소명과 그런 자세가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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