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조명 15/김이랑
일수불퇴(一手不退)
김광규
들판 위를 휘 둘러본다. 차가운 바람살 같은 기운이 달려든다. 경지정리가 잘된 들판은 반듯하지만 황량해서 선뜻 발을 들여놓기 쉽지 않다. 어디에다 무엇부터 심어야 할까. 첫 삽은 설렘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바둑판을 상변부터 하변까지 몇 번이고 훑어 내린다.
검은색 돌 하나가 힘 있게 착지한다. 화점이다. 우하귀에 아들이 먼저 자리를 잡는다. 나는 장고에 들어간다. 포석만 잘 짜도 절반은 성공이라지 않는가. 좌상귀를 먼저 차지할 것인가. 날 일자로 다가가 공격하면서 여차하면 하변을 노릴 것인가. 부자간 삶의 대화는 묵언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들은 평소에도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서로 속을 터놓기에는 바둑판 앞이 안성맞춤이었다. 아들이 입시를 코앞에 두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원하는 전공이 달랐다. 아들은 물리학과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나는 향후 진로를 고려하여 현실적인 과를 권유했다. 바둑판 앞은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었다.
아들이 박아놓은 말뚝에 날 일자로 응수타진을 해본다. 아들은 곧바로 마늘모 형태로 방어를 취한다. 아래로 젖힐까, 위로 젖혀 세력을 만들 것인가. 평범하게 옆으로 한 칸이나 두 칸 벌려 놓을까. 한 칸 위쪽으로 뛰어나가 향후 중원을 기대해볼까. 다시 고민에 빠진다. 아들은 내가 어떻게 두던지 이미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모양이다. 왼쪽으로 두 칸 벌려 놓자 차분하게 오른쪽으로 두 칸을 벌려 맞대응을 한다.
아들이 한창 자랄 때 둘의 대화에서는 내가 늘 우선이었다. 아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생각을 서둘러 꺼냈다. 아들의 말은 대부분 밑천이 없는 철부지 같은 생각이라 단정했다. 제대로 이해하기보다는 늘 설득하고 회유하고 내 생각대로 따라 주기만 강요했다. 내게 부족한 결곡한 삶을 아들에게 바랐을 것이다. 대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의 입술은 굳게 닫히기 일쑤였다.
여전히 말이 없는 가운데 포석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우상변과 하변은 아들이, 좌상변과 하변은 내가 선점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중원 싸움이다. 수십 수가 더 진행된 후 바둑판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아들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돌을 둔다. 자신이 생각하는 삶은 분명히 나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 이럴 땐 아들이 둔 한 수를 준엄하게 심판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바둑에서나 삶에서나 아직도 아들을 읽지 못하고 있다.
눈목자로 뛰어나간 자리를 일단 끊고 본다. ‘적의 급소는 나의 급소’ 아들은 내 삶에도 급소가 있지 않으냐며 이내 맞끊어 온다. 서로의 돌들이 양단되었다. 쫓고 쫓기는 공방 속에 무궁한 변화가 생기고 박진감이 증폭되었지만, 양곤마가 되어버려 미로 속을 걷는 기분이다. 각각의 삶도 도모해야 하지만 대세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면 그만한 대가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현실적인 이유로 아들의 진로를 막아서야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결정이었을까. 수없이 반복되는 물음이 나를 괴롭혔다. 아들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양단된 처지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갈등이 많았으리라.
중원에서는 치열하게 공방만 하다 서로가 큰집을 얻지 못했다. 서로 미생이었던 돌들이 살아가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 와중에 무턱대고 끊었던 돌을 살리기 위해 우하변을 포기해야 했다. 수능을 치른 후 아들은 방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선 듯 말도 못 붙이고 옆에서 눈치만 봐야 했다. 쉽게 풀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진로 문제는 아들의 수능 실패가 오히려 타협의 실마리가 되었다. 아들은 일 년간 내가 추천하는 곳에 다녀보고 적성에 맞지 않으면 다른 길을 찾아보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녀석이 언제 대학을 그만둘까 노심초사했는데 벌써 4학년이 되었다. 어느 정도 포석이 정리되었으니 중원에서 차분한 삶만 도모하면 되겠는데, 일 년간 졸업을 미루고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겠다고 한다. 낯선 불편함이 밀려온다. 아들은 아직도 포석에 미련이 남았는가 보다. 지금부터 새로운 틀을 짜야 하는 아들은 무엇을 설계하고픈 것일까.
바둑판 위에 의미 없는 돌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중앙에서 치열하게 싸움을 하다 아들은 느닷없이 손을 빼고 우상변에 돌을 두었다. 이해되지 않는 수순이었다. 그 돌이 오히려 중원에서 곤마가 된 돌들을 살렸다. 아들에게 정석대로 살 것을 늘 강요했었다. ‘정석은 숙지하고 잊어버리라’는 바둑 격언을 알기나 한 듯 아들은 빤히 보이는 길로는 잘 가지 않았다. 내가 수긍할 수 없는 사소한 것들도 아들에겐 다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돌이켜 보면 느리지만, 묵묵히 제 길을 찾아가던 아이였다. 무조건 내 뜻에 따르라고 윽박지르기만 한 지난날이 문득 부끄럽다.
형세를 조심스럽게 살핀다. 미세하지만 실리가 조금 더 많은 내가 약간은 유리하게 보인다. 다만, 중원이 문제다. 여기저기 퍼질러만 놓고 정리하지 못한 돌들이 눈에 띈다. 엉성한 내 삶을 엿보는 듯하다. 아이에게만 싹을 제대로 틔우기를 요구했지 정작 내 인생의 설계도는 서툴기 짝이 없다. 살아오면서 만든 욕심의 흔적도 이런 형태일 게다.
우상변에 날 일자로 끝내기하자 아들은 좌상귀로 바로 뛰어든다. 그곳만은 내 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미처 보지 못한 빈틈이 있었나 보다. 옆 눈짓으로 아들의 표정을 읽는다. 고개를 약간 기울여 바둑판을 응시하고 있지만 별다른 동요는 없다. 다만, 아버지는 자기 삶에 자신 있느냐는 표정이다.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라고 했던가. 자기 집도 허술하면서, 남의 땅에 콩 놔라 팥 놔라 하지 말라는 아들의 일침이리라.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더니 그만 헛발질을 하고 말았다. 잘못 든 길이니 한 수 물리자고 했지만, 아들은 손사래를 친다. 일수불퇴(一手不退), 바둑에서나 인간사에서나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이다. 묘수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그 돌이 결국 패착이 되고 말았다.
“아빠 한 판 더 둘까요.”
멍하니 바둑판만 들여다보고 있는 나에게 아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나보다도 아들이 오히려 내 마음을 읽어내고 있다.
내 생각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아들은 이미 성큼 내디디고 있는지 모르겠다.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이기에 서툴지만, 아들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리라. 라디오에서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잔잔히 흐른다. 들판 위에는 새로운 씨앗들이 리듬을 타고 차분히 뿌려진다.
작품조명
반상 위에 펼치는 수담手談
부자 사이에 펼쳐지는 팽팽한 신경전
똑·똑·똑
정적을 깨는 돌들의 가르침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포석, 공격, 방어, 타협, 계략, 타진, 수읽기 같은 전략이 있고, 회돌이, 패, 외통수, 먹여치기, 어깨짚기 등 전술이 있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안다, 용어 하나하나가 인생을 깨우는 돌이라는 것을.
바둑에서 경우의 수는 ‘361!’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의 개수보다 많다. 인류가 망할 때까지 잠도 자지 않고 바둑을 두어도 같은 판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만큼 무량하고 오묘해서 인간의 두뇌로는 정복할 수 없는 분야가 바둑이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에서 이세돌이 패하자 다들 경악했다. 그렇다고 인간이 패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부자가 반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앉는다. 신경전이 팽팽하게 펼쳐지고, 수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온갖 계략을 동원해 일합을 겨룬다. 결국 아버지가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을 두지만, 한 판의 싸움에서 승자도 패자도 없다. 정중동, 수담手談에서 서로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인생이나 문장이나, 인공지능도 입신入神의 경지에 들 수 없다. 그래서 조금 서툰 문장이 오히려 미학으로 읽힌다.
첫댓글 바둑 얘기를 하셨군요.
제가 바둑 고수입니다.
아니 고수는 아니고, 뭐랄까, 그냥 바둑 애호가입니다.
지금도 가끔 바둑 웹사이트 들어가서 우스개 소리나 바둑 관련 글을 계속 쓰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바둑 얘기를 올리는 분이 있으니 재밌네요.
아 그러세요.. 멋있어보이시네요. 바둑 고수라하시니 ㅎㅎ
바둑에 대해 할말씀이 많우시다니^^
고수 바둑 잘 읽었습니다. 서툰 문장이 미학이라는 교훈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