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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72
11월12일[연중 제32주일(평신도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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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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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YVxsnBK38M
[서울대교구 조정래 시몬 신부님 집전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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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인(聖人)이란? 가장 큰 사랑으로 사소한 일상을 정성껏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세번째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는 교황님께서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신 ‘성덕(聖德)에로의 초대장’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성덕’과 관련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핵심 정신인 ‘보편적 성화’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강조하셨습니다.
“성인(聖人)의 길은 주교나 사제, 수도자의 전유물이 절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건조하고 평범한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성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덕이란 예수 그리스도 삶의 신비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특히 소외된 이들에 대한 친밀성, 그분의 가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는 것이 성덕입니다.”
따지고 보니 주님께서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시는 평신도들께 아주 적극적인 초대장을 보내고 계십니다. 성인이 되는 길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각자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각자에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서, 각자 고유한 벙법으로 성덕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들은 최선을 다해 요리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길입니다. 최선을 다해 도마질을 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힌 방법에 따라 정성껏 지지고 볶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흡족해하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요리의 달인’이 되는 것이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거기다 조금 더 보탠다면, 요리할 때 억지로, 짜증내며 하는 것이 아니라 환하고 기쁜 얼굴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드는 요리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요리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요리하고 계신다면 그는 이미 훌륭한 성인 후보자입니다.
저는 가끔씩 우리 형제들 가운데, 성인 후보자가 있을까? 싶어서 형제들을 살펴봅니다. 정말 깜짝 놀란 일은?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몇명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로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형제들은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 사람, 늘 자주 차 한 잔 했으면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 아마 이 시대 성인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에 조금 더 보탠다면 가장 큰 사랑으로 사소한 일상을 정성껏 살아가는 사람, 작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 안에 깃든 하느님의 손길을 찾는 사람,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곧 오늘의 성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 성인은 대단한 기적을 일으킨다거나 특별한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열중합니다. 그 무엇도 물리치지 않고 그 어떤 청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존재, 사건, 만남을 하느님께로 더 나아가는 계기로 삼습니다.
성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와 완전 동떨어진 별세계 사람들도 아닙니다. 우리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사람들도 아닙니다.
대신 그들은 우리 보다 조금 더 기도에 집중했던 사람들, 그래서 우리보다 조금 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긴 호흡을 지녔던 사람, 우리보다 조금 더 넓은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겸손했고, 우리보다 조금 더 따뜻한 인간미를 지녔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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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SRjV_O5z7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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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높은 기도』: 나는 기도가 기대되는가?>
오늘 복음은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현명한 처녀들은 여분을 가지고 있었고 미련한 처녀들은 챙겨 놓지 못했던 ‘기름’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입니다. 신학에서 “성령과 기름 부음은 동의어로 쓰일 정도”(『가톨릭교회교리서』 695)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붙은 등잔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령의 열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참 포도나무에 접목 시켜 주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23)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736) 주십니다. 이것으로 미루어본다면, 미련한 처녀들은 사랑, 기쁨, 평화와 같은 감정들이 사그라졌을 때 성령을 받겠다고 기도하러 가는 사람을 의미하고,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감정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를 잘하는 신앙인을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기도와 영성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기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규칙적으로 하느냐’, ‘필요할 때만 하느냐’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막 달리기 경주할 때 선수들은 일정 걸음을 내디딘 후에는 반드시 물을 마신다고 합니다. 사막에서는 땀이 바로 증발해버리기 때문에 목마를 때만 물을 마신다면 탈수증으로 쓰러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탈수증에 쓰러진 선수들을 보면 물통에 물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마셔야 내 것이 됩니다. 만약 수험생 자녀를 위해 어떤 엄마가 100일 기도를 했다면 그 엄마는 영성이 높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필요할 때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녀의 시험과 상관없이 매일 그렇게 기도할 수 있다면 그제야 ‘기름’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환경은 이렇게 기도의 수준이 높아지는 데 큰 방해를 주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만약 미사를 몇 번 했는지, 묵주기도를 몇 번 했는지 보고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이는 묵주기도에 천천히 젖어 드는 것을 방해하는 원인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복음 나누기 7단계’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3분 묵상하고 무슨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적어도 30분은 집중해서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묵상은 3분만 해도 된다고 여기게 만듭니다. 그리고 더욱 안 좋은 것은 기도가 ‘부담’이 되게 합니다. 묵주기도를 더 많이 바치기 위해 빨리 바쳐야 하고 묵상 나누기를 위해 묵상한 것도 아닌 자기 생각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면 레지오도 힘들어지고 소공동체 모임도 부담스러워 나가지 않게 됩니다.
만약 기도가 행복한 것이라면 남이 시키지 않아도 혼자서 꾸준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 큰 형은 한때 매일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가위에 눌렸고 심지어 악마에게 공격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신 잡는 해병대, 그리고도 수색대 조교였던 형은 자존심상 주님께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느 날은 성호를 긋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날은 오랜만에 편히 잠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다음 날도 성호를 긋고 잤습니다. 그런 습관이 수십 년이 지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은 이제 성호경을 제대로 긋는 기도의 수준에 오른 것입니다. 이렇게 영성을 높여갈 수 있습니다.
가끔 자기를 키우던 가족이 먼저 죽자 반려견이 매일 무덤에 와서 슬퍼하다가 돌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반려견이 주인을 사랑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한 번 왔다가 다시는 안 온다면 이는 그저 자기 위로일 뿐입니다. 그러나 매일 같은 시간에 온다면 정말 그분과 그분한테서 나오는 사랑이 그리워 오는 것입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살기가 싫다는 한 자매에게 저는 매일 한 시간씩 성체조배를 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20~30%만 꾸준히 실천합니다. 그 자매는 매일 성체조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1년 동안 꾸준히 그렇게 한 이유를 물었더니, 남편이 아닌 자신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남편이 밉지 않고 며칠 만에 집에 돌아와도 밥을 차려주고 이부자리를 마련해준다고 합니다. 미워할 때보다 기도할 때 행복하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자매는 성체조배 한 시간 할 정도로 영성이 높아진 것이고 그렇게 현명한 처녀로 인정받게 됩니다.
사실 기도는 힘이 드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봉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꾸준히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좋은 열매가 맺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매일 새벽 만나를 거두러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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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습니다. 짧은 말이지만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분수를 알라.’는 뜻입니다. 성서를 보면 분수를 모르고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시작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낙원’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만했던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은 후 하느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많은 능력으로 업적을 쌓은 사람도 인생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모세는 그 또한 하느님의 뜻임을 알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일은 ‘여호수아’의 몫임을 알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였습니다. 자신의 역할은 광야에서 길을 내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기꺼이 예수님께 자리를 양보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교회를 개척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씨를 뿌리고, 아폴로는 거름을 주지만 키우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나 자신을 아는 첫 번째 길은 ‘겸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교만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와 겸손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으면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시작은 ‘겸손’입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은 만물에 생기를 주는 자양분입니다. 순리대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막히면 돌아가고, 기꺼이 낮은 곳에 머물기 마련입니다.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고,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납니다. 다투지 않고, 상처를 주거나 받지 않습니다. 그 유연성이 만물에 덕이 된다고 합니다.
성서를 보면 분수를 모르고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그 시작은 ‘카인’입니다. 카인이 하느님과 멀어진 이유는 ‘분노’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생 아벨의 제물을 받아 주셨지만, 카인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분노한 카인인 동생 아벨을 들판에서 죽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자기 제물을 받아 주실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카인이 자신의 분수를 알고, 하느님께 더 합당한 제물을 준비했다면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제물을 받아 주셨을 것입니다. 동방박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지 않고 다른 길로 갔을 때입니다. 분노한 헤로데는 예루살렘 인근에서 태어난 2살 이하의 어린이를 모두 죽여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동생을 죽인 카인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있는 병중에 ‘화병(火病)’이 있습니다. 분노를 삭이지 못해서 생기는 병입니다. 화풀이를 잘못해서 패가망신하는 예도 많습니다. 화를 참지 못해서 애꿎은 그릇을 깨는 일도 있습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도 대부분 ‘화’를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이 잘못하면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나 자신을 아는 두 번째 길은 ‘용서’입니다. 묶인 것을 풀고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므로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통해서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야 했을 여인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는 아들을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말씀하셨습니다. 용서에는 두 가지의 모습이 있습니다. 용서를 청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용서하는 것은 ‘자비’입니다. 회개와 자비가 만날 때 참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등잔에 채워야 할 기름은 ‘겸손과 용서’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용서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된 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지혜는 바라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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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5,1-13: 열 처녀의 비유
오늘 복음을 보면,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으러 가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고 한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등불을 밝혀 들고 혼인 예복을 입어야 한다(마태 22,11-14). 이 때문에 전례 주년 마지막 세 주간의 전례는 신자들에게 항구하게 깨어 기다리라고 한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4).
오늘 복음의 열 처녀의 비유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체에 있어야 하는 깨어 기다림의 의미를 강조한다. 이 비유의 내용은 신랑의 집에서 신부의 집으로 신랑을 기다리던 열 명의 처녀들에 관한 이야기이다(1-4절). 이야기는 신랑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던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의 비교이다(6-12절). 슬기로움은 신랑이 늦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견하고 등불을 계속 켤 수 있는 기름을 따로 준비하고, 그것이 열 처녀 모두에게는 부족한 양이라는 이유로 기름을 나누어주기를 거부하는 것이다(9절). 실제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대신에 우리에게나 남에게나 해를 끼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녀들 모두가 신랑이 늦게 오는 바람에 모든 처녀는 “졸다가 잠이 들었다”(5절). 슬기로운 처녀들까지도 깨어있지 못하였다. 처음에 등불을 켜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모습은 초기 교회가 가진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고 있고, 나중의 자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방심하고 있는 순간을 말한다. 즉, 초대 교회 시대에 열화와 같던 기다림의 열망이 누그러져 이천여 년간 교회가 처해오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는 깨어 기다리는 슬기로운 자세를 잊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면서 평온하게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 이때 우리는 그분이 언제 오시든지 더 기다릴 수 있는 기름이 잘 준비된 등불을 밝혀 들고 그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 비유는 우리에게 매일 매일의 현실에 열심히 참여하며, 현재를 충실히 삶으로써 미래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적 삶의 의무에 대해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의 내용에서도 나타난다. 거기서도 슬기로움과 미련함을 가늠하는 척도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자세만이 아니라 행하려고 하는 자세이다. 이 비유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한 의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슬기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슬기는 하느님께서 원하신 목적이 달성되도록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등불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랜 여정을 위해 충분히 마련된 기름이라는 사랑의 행위가 필요하다. 행동으로 실천되고 깨어 기다림의 자세로 표현되는 사랑에 관한 주제가 이 비유 전체에 혼인의 개념으로 흐르고 있다. 여기에는 신부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지만, 주님을 맞으러 나가는 처녀들이라는 개념 자체에 포함되고 있다.
이렇게 예수께서 당신의 돌아오심을 혼인을 배경으로 하는 것은, 당신과의 결정적인 만남이 기쁨과 사랑의 표징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혼인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이신 신랑을 더욱 정성스럽게 마음을 다하여 기다려야 한다. 당황하게 된다면 그것은 사랑 때문이어야지 두려움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 앞에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두려움을 영원히 몰아내셨기 때문이다(1요한 4,18).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라.”(13절). 이 말씀은 위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 속에 삶으로써 언제라도 당신이 원하실 때,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뵐 때, 그분께 합당한 자들이 되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산다면 그분이 한밤중에 오시더라도 대낮같이 그분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등불이 환히 켜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이러한 평온한 기다림의 자세로 이끌어준다. 사도는 몇 가지 근본적인 진리를 상기시킨다. 가) 그리스도인은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1테살 4,13). 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담보이다(1테살 4,14). 다) 그러므로 이미 죽은 사람들과 살아있게 될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죽은 사람들이 더 먼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1테살4,15-17). 여기서 살아있는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1테살 4,17절)의 의미는 그들 모두가 주님께서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 살아있게 되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 대목의 메시지는 위로(1테살 4,18)부터의 메시지요, 희망(4,13)의 메시지이다. 그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 신자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정적인 영광의 만남이기 때문이고, 둘째, 신자들의 공동체는 죽음 뒤에 다시 모여 부활의 기쁨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과 항상 함께 있기 위하여”(1테살 4,17)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위로하십시오.”(1테살 4,18).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을 두고 쓸데없는 생각과 지나친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깨어있지는 못하더라도 다섯 처녀처럼 평온한 마음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슬기로움이다. 이러한 슬기를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그분은 그것을 지혜서가 말하듯이(지혜 6,12-16 참조), 그것을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아주 기꺼이 나누어주실 것이다. 항상 깨어 기다림으로 주님께서 언제 우리에게 오시더라도 기쁨 중에 혼인의 만남과 같이 맞아들일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마라나, 타! 우리 주님, 오소서!”(묵시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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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번 주일 성경 말씀을 관통하는 주제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종말’입니다. 제1독서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를 의인화합니다.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구약 전통에서 하느님 말씀인 ‘토라’(오경, 율법)는 후대에 ‘지혜’로 변경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던 유다인들의 전통이 ‘하느님-토라-지혜’ 순서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의인화된 지혜를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합니다.(요한 1,1-18 참조) 참된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 뵙게 될 희망이 그리스도인의 종말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제2독서 테살로니카 1서에서 바오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세상을 떠난 교우들 때문에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합니다. 이 위로 안에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종말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열 처녀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종말은 정확히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닥쳐올지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하라는 신앙의 권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종말은 두려움이나 공포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신 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영광스러운 순간을 기다리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재회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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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 처녀의 비유>
“그때에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1-6)
여기서 ‘열 처녀’는 ‘신부’가 아니라 신부의 ‘들러리’입니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라는 말은, 다섯은 머리가 나쁘고, 다섯은 머리가 좋았다는 뜻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만 성실하게 보이고 내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신앙인들과 겉으로나 내적으로나 항상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이 섞여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6)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생활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지혜’이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고 대충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열 처녀가 모두 ‘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모두 신앙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기름’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는 ‘삶’을 상징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의 경우에, 등을 한 번 켤 수 있는 기름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평소의 일상적인 신앙생활에서는 충실한 신앙인들과 잘 구분되지 않고 겉으로 보기에는 잘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의 진짜 모습은 심판 때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산상설교에 있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열 처녀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는 말은, 신랑의 도착이 늦어지는 상황을 나타내는, 즉 주님의 재림이 인간들의 생각보다 많이 늦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일 뿐이고, “깨어 있어라.”라는 가르침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재림과 종말이 늦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일이 이루어지면 너무 빠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조금만 더 늦추어 달라고 간청할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재림과 종말이 아니라, 개인의 임종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주인’은 내가(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7-13)
실제 상황이라면 기름을 나누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비유’이고, 사용된 표현들은 ‘상징’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회개와 신앙생활은 본인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의 덕’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대신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보속’을 대신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를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경우에도, 믿음을 갖도록 도와줄 수 있고,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데, 믿는 일 자체를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그렇게는 안 됩니다.>
“문은 닫혔다.”라는 말은,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문’이라는 말에서 산상설교의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라는 말씀을 연상할 사람이 있겠지만, 문을 두드려서 열리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나기 전의 일이고, ‘열 처녀의 비유’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한 번’이고, ‘불가역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신앙생활은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문이 언제 닫히는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지금’ 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은, “나는 너희를 모른다.”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는 들어올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종말과 재림과 심판의 날과 시간이 인간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닥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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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 고난수도뢰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전 베트남에서 생활할 때, 저는 ‘호치민’ 시내 항산 로터리 근처에 있는 ‘티 응에 성당’에 가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베트남 미사 경본 낭독 연습을 했습니다. 어느 날 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저에게 뭐라고 말하고는 저를 어디론가 이끌더군요. 영문도 모르는 채 따라가서 보니 그곳은 성당 부속 건물 2층 추모관에 유해를 모셔둔 방이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는데, 잠시 후에야 왜 이분이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을까를 생각하면서 부끄러움과 고마움이 한꺼번에 다가왔습니다. 그날은 바로 위령의 날이었기에, 저를 그곳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 방에서 잠시 돌아가신 연령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순간을 가졌지요. 그런데 지난 11월 2일 서울에서 동반자 부부가 저를 방문했습니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도 하고 처음 안성을 방문했다기에 무심코 미리내 성지로 가게 되어 자연스레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묘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뜻밖의 선물을 그분들에게 제가 드렸다기보다, 오히려 제가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이 성지를 찾으셨고, 성인의 묘지 앞에서 기도하시더군요.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그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늘 깨어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티응에 성당 추모관에서 그리고 미리내 성지의 성인의 묘 앞에 잠시 머물면서, 그리스도를 믿고 살다가 하늘로 귀천하신 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새삼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늘 깨어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위령의 달, 오늘 복음에서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처럼, 우리 또한 각자의 등잔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살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복음에 의하면 열 처녀는 똑같이 등잔을 준비하여 신랑을 맞이할 충분한 채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도 겉보기에는 신랑을 기다리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등잔을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남들이 보기에는 열심히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녀들은 신랑을 기다릴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등잔의 불을 밝힐 수 있어야 하는데, 그녀들은 등잔을 들고 있었지만, 불을 밝힐 기름을 마련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들은 단지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의 의무로서 등잔만을 가지고 있었지, 왜 등잔이 필요한지 잘 몰랐나 봅니다. 빈 등잔은 어둠이 짙어지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기름 없는 등잔은 불을 밝힐 수 없으므로 있으나 마나 합니다. 그녀들이 신랑을 맞이하려면 등불을 밝혀야 하는데,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들이 신랑을 올바로 기다리지 못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세례를 통해 등잔은 준비하고 있었지만, 신앙과 신앙 행위로서의 사랑이라는 기름은 전혀 준비하지 못했고, 준비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들은 겉으로만 준비한 껍데기 신앙,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신앙이었을 뿐입니다. 남들이 보기엔 훌륭한 종교인이었지만, 결코 구원받을만한 올바른 신앙인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주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겉만이 아니라 속까지도 준비해야 합니다.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도 주님을 만나기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 속에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랑을 생각하며, 신랑을 맞이하면 불을 밝힐 수 있도록 준비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녀들의 신앙은 겉만이 아니라 속까지도 꽉 채워진 신앙이었고, 진실로 기다리며 준비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녀들의 신앙은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적 신앙이었으며, 참다운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겉만 아니라 속 깊은 곳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는 신앙인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맞이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서는 ‘사랑’으로 드러나고 표현되는 참다운 신앙이라는 기름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겉이 화려하고 번지레하더라도, 아무리 율법이나 계명을 잘 지킬지라도 마음속에 믿음과 사랑을 담고 있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떠나지 않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왜 슬기로운 처녀들은 미련한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주지 않은 것일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나눔은 자기 것을 다 챙기고 난 다음, 그 나머지를 필요한 사람에게,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또한 나눔의 한 측면인 것은 분명하지만, 교회가 가르치고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나눔의 의미는 나눔의 참된 의미는 충분하지 않음에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없지만 함께 먹고, 함께 나누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나누는 것입니다. 곧, 자기 자신을, 자신 삶의 수확들을 나누는 것이 참된 나눔입니다. 때문에,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달라고 청할 때, 나눠주어야 하는 게 마땅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혹, 잔칫집에 가다가 등잔불이 꺼져버리면, 비록 좀 어두워서 불편하겠지만, 신랑의 손을 잡고 잔칫집에 가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모습입니다. 참된 나눔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미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동료들과 기름 나누기를 거절합니다. 그 까닭은 혼인 잔치에 가기 위해, 마지막 날에 하느님 앞에 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지만, 나눌 수 없고, 또한 남과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등잔 속의 기름을 꺼내어 남과 나누거나 남에게 빌려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름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신앙 행위로서 사랑이란 기름은 남에게 빌려주거나 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미련한 처녀들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고소했을까요? 샘통이다, 잘난 척하더니만 하면서 좋아했을까요? 그렇지 않았다고 봅니다. 오히려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을 것입니다. 십수 년 동안을 함께 지내며 혼인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동료들이었습니다. 이웃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기름을 빌려주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름은 나눠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나 형제, 자식이 아무리 나를 사랑하고, 나 대신 희생과 자선을 할지라도 마음속에 있는 믿음과 사랑까지 대신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도록 하는 믿음과 사랑의 행위란 오직 본인의 것이지, 그 어떤 사람의 것을 대신 가지고 하느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 안에 믿음과 사랑을 키워가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문이 닫힌 뒤에는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주십시오!”(25,11) 하고 목을 놓아 소리 질러도 문은 다시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깨어 살아야 합니다.”(25,13 참조)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세속성 곧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세상 안에 살아가는 평신도는 자신이 생활하고 활동하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참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평신도의 존재 이유이며 역할이라고 봅니다. 더욱 급변하는 세상 안에 살아가는 평신도들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히 요구되며, 특히 예전 한국을 처음 방문하셨던 프란치스코 교종도 <평신도 사도직 지도자들과 만남>에서 “평신도들이 인간 증진에 힘써 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 평협은 평신도 주일을 맞아 인간 증진을 <인간의 잃어버린 하느님의 모상성 회복>이라고 화답했었습니다. 이는 곧 하느님의 모상성 회복은 교회 가르침에 따라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일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현존하고 활동하는 평신도는 이런 차원을 의식하면서 어떻게 자신이 살고 활동하고 있는 곳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절박한 요구를 해결해 줄 것일 것인가를 명심하면서 사제요 예언자요 왕으로 직분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평신도인 여러분은 자신이 소속한 본당 사제와 수도자들과의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인간 증진’에 매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껏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실천해 온 모든 평신도에게 감사드립니다. 혹여 본의 아니게 여러분들 가운데 본당 사제나 수도자와 불편한 관계 혹 갈등으로 상처받으셨다면 죄송하게 생각하면서 기도드립니다. 사제인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제는 세상 안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자기의 말과 행동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지지하면서 평신도들이 신앙과 사랑으로 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그들의 ‘바람막이와 비빌 언덕’이 되어 주어야 하며, 평신도들 역시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제를 존경하고 순명하고 기도하면서 함께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준비해야 하리라 봅니다.
하느님 백성인 우리 모두(=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다 함께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참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내 아들과 딸들아! 너희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나의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5,21.23)라는 말씀을 듣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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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땅과 하늘, 똑같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평신도 주일, 사제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합니다. 그동안 제 삶을 채웠던 교만과 허세와 자만을 꺼내어 보여드립니다. 내면의 상처를 감추지 않고 진득이 묻어있는 모든 불순물을 주님께 깡그리 봉헌합니다.
지금 저는 현대의학이 해석하지 못하는 매우 독특하며 알쏭달쏭한 병을 앓고 있습니다. 처음 수술을 받고,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주님께로 더욱 의탁하며 감사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 생각과 다른, 예상치 못한 결과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순간 몸을 혹사했던 많은 날과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제 몸의 온갖 장기와 세포들이 힘들게 힘들게, 저를 지탱시켜주기 위해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버티어줬다는 걸 느꼈습니다.
스스로 힘을 자신했던, 자신의 건강을 뽐냈던 갖은 행위들이야말로 자신의 약함을 숨기려는 오만, 주님께서 주신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마구 부려댄 교만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 몸에게 진심으로 미안했습니다. 사제의 체면보다 사제의 권위보다 훨씬 무거운 인간의 무지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참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열했습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이 미련함에 오래 울었습니다. 아직 병명조차 아리송한 병과의 싸움이 진행 중이지만 매일 몸에게 사과를 건네며 지냅니다. ‘미안타’, ‘애썼다’라고 용서를 청합니다. 아니, 몸을 선물해주신 주님께 사죄드리며 몸을 아끼고 사랑하겠다 다짐합니다.
무릇 삶은 완만하게 흐르지 않습니다. 삶에는 모든 것을 뒤엎는 소용돌이가 존재합니다. 그 요란한 소용돌이 앞에 이르러서야 인간은 권태롭고 단순하여, 시시하게 느껴지는 그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비로소 실감하게 됩니다. 바로 지금, 제 모습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늘 다른 삶을 꿈꾸고 추구하려 합니다. 지금보다 나은, 현재보다 우월한 자신의 모습을 위해서 지금을 낭비합니다. 제 이야기입니다.
때문에 성녀 카타리나는 “시간을 기다리지 마세요. 시간은 당신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도 지금, 즉시 실천해야 하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용서해야 하는 절호의 기회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열심한 신앙생활을 성경 공부나 신학을 알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분을 봅니다. 물론 틀리지 않고 그릇된 생각도 아닙니다.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온통 자신의 것을 비우고 주님의 것으로 채우는 작업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지식’에 불과합니다. 거룩한 삶과는 동떨어져, 허무를 향할 위험이 큽니다. 더해서 거룩한 하느님의 것을 이용하고 소유하려는 유혹에 걸려들 소지도 다분합니다.
심지어 신앙과 기도조차도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는 도구로 오용할 위험이 따릅니다. 지금 제 몸은 깊이 앓으며 우리 영혼이 세상의 어떤 좋은 것으로도 결코 채울 수 없으며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 오직 거룩한 하느님의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진리를 몸부림치며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한계에 주저앉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비록 약하고 모자랄지언정, 주님 안에 머물며 당신의 평화를 누리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이 세상 그림자에 영혼이 젖어, 자기만족과 자기성취와 자신의 영예를 위해서 쉼 없이 달리고 또 달립니다.
마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주님을 향한 최선인 양, 힘을 소진하는 것이 주님의 기쁨인 줄 오해합니다.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며 때로 으스댑니다. 이 죄인이 그랬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정열적으로 주님의 뜻을 살아낸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은 그분께 거룩한 것이었고, 아버지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임을 한시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삶에는 지루함도 분주함도 없었고 신경과민도 없었습니다. 자기과시를 위해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고 자화자찬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을 값지게 살았습니다. 온 마음을 하느님께 봉헌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삶에서 본받아야 할 모범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오늘 복음으로 선포되는 말씀, 즉 사랑의 도움을 받고 사랑을 나누는 것에도 모두 때가 있다는 진리를 허투루 듣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이제서야 그분의 멋진 성심을 본받아서 그분의 복음을 살아낼 꿈을 꾸고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크신 그분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만 제가 가진 힘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내 꿈이 아니라 주님의 꿈을 이루어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제야 겨우….
설사 누군가에게 “기름을 나누어다오”라는 어이없는 청을 듣더라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라고 차갑게 대하지 않는 찐 사랑을 살게 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용당할 줄 알면서도 아낌없이 내어주시던 예수님처럼, 느닷없이 뒤통수를 맞을지라도 맞서지 않는 아량을 지녀 살 수 있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삶이야말로 복음을 제대로 온전히 살아내는 단 하나의 방법이기에, 딴 길로 들어서지 않으려 합니다.
하여 하루가 저무는 저녁,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가슴을 치며 불순종의 허물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더 자주 그분을 닮으려 애쓴 이야기를 전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쫓아, 성인들을 본받아 믿음과 사랑을 살아보니, 정말 좋고 너무 기뻤다는 고백을 올리게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천국의 은총에 매료되시어,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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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김연범 안토니오 신부님(사목국장)]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
사제로 살아가면서 참 많은 부류의 신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신자이면서도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만날 때도 있지만,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바보스러우리만치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조금 손해를 본다고 생각되더라도 착하게 살아가는 신자분들을 만나게 될 때가 참 많 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열 처녀의 비유' 말씀입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가 등불을 켜놓고 늦어지는 신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다섯은 슬기롭게 등과 함께 기름도 준비했는데 나머지 다섯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신랑이 오게 되었고 그제야 등이 꺼져 가는 것을 알게 된 다섯 처녀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렇게 되면 모두 다 기름이 모자라 등불이 꺼지게 되니 필요한 기름을 따로 구해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섯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도착하여 문은 닫히고 잔치가 시작되어 그 다섯은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이 복음을 들으며 앞에서 이야기한 그 착한 신자들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아는 그 착한 신자들은 그런 요청을 받으면 자기 등이 꺼질 것을 알면서도 거절하지 못하고 자기 기름을 나누어 줄 것이 분명한데 자기도 못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모른척하지 못할 그 착한 신자들 어떡하지?
앞으로 세 주간에 걸쳐 듣게 되는 복음 말씀은 종말을 준비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언제일지 모르는 그 마지막을 늘 준비하며 깨어 있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는 '기름'을 마련하는 것이 그 준비입니다. 비유의 그 기름은 지금 당장 사 올 수 있는 그런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지금 나누어 준다고 해서 나누어 받을 수 있는 것도 분명히 아닙니다. 그 기름은 우리 각자가 평생의 삶을 통해 늘 준비해야 하는 기름, 누군가 대신 사거나 만들어 줄 수 없고 나의 노력과 선행을 통해 준비해야 하는 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기름을 잘 준비하며 살아갈 때 그분의 오심이 두렵거나 피하고 싶은 일이 아닌 행복과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날과 그 시간을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오늘도 기쁘게 그 기름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오늘은 제56회 평신도 주일입니다. 세상 속에서 평신도의 사명과 사도직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깊이 묵상하는 오늘 우리 모두 그 기름을 준비하기 위한 노력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초대하고 그들을 환대하며(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그들과 함께 그리스 도를 우리의 왕으로 고백하며(연중 제34주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연중 마지막 세 주간을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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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주보》 오늘의 말씀
[인천교구 윤석민 베드로 신부님(간석4동성당 보좌)]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연중 32주일이며 평신도 주일이기도 합니다. 평신도 주일은 거룩한 보편 사제직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평신도 신자를 위한 날입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아, 모든 신자 여러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넵니다. 오늘 하루, 신자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약 한 달여 전,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경기를 치르는 선수들의 멋진 모습을 보고 감탄하며, 열심히 응원했습니다. 2주간 진행되었던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우연히 선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영상은 태릉선수촌에서 열심히 대회를 준비 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었습니다. 영상에는 대회가 시작되기 몇 달 전부터, 대회를 위해 궂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준비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담겨있었습니다. 영상을 보고 난 뒤, TV를 통해서 바라보았던 국가대표 선수들의 멋진 모습들이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보았던 선수들의 멋진 모습은 훈련장에서 흘린 땀방울과 수많은 준비가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내는 평신도 주일은 평신도를 위한 날입니다. 동시에,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평신도의 사명 곧 그리스도의 보편 사제직에 초대된 사명을 일깨우는 날이기도 합니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라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보편 사제직에 동참하는 평신도는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들의 사명을 일깨우는 오늘, 우리는 혼인을 앞두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 말씀을 듣습니다. 이 비유 말씀에서 등장하는 열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며, 혼인 잔치에 들어가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결국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간 처녀는 오직 다섯 명의 슬기로운 처녀들뿐이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며. 등과 기름을 성실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부족한 준비로 인해 신랑을 찾지 못했던 어리석은 처녀들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 그 모습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등과 기름을 언제나 준비했던 슬기로운 처녀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소명을 일깨우는 평신도 주일을 지내며, 오늘 복음 말씀에서 전하는 슬기로운 처녀의 모습과 같아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도록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그 소명에 우리는 성실히 또 슬기롭게 준비해야 합니다.
다시금 국가대표 선수들의 영상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여, 열심히 땀을 흘리고 대회를 준비하였던 그 모습은 곧 우리들이 되어야 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국가대표로서 경기를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리며 준비하였듯이, 우리들 역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도록 초대받은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소명을 다시금 떠올리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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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신호철 토마스 신부님(죽림동주교좌성당 주임)]
<평신도 – 세상의 빛과 소금>
연중 제32주일인 오늘은 동시에 제36회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평신도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하느님 백성으로 구성되고,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에 자기 나름대로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 그리스도교 백성 전체의 사명 가운데에서 자기 몫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교회현장 31항) 즉 평신도로서의 본질적 신원은 거룩한 세례성사로부터 시작됩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 된 후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적절한 모습으로 참여하며, 세상 안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평신도입니다.
한편 평신도들이 세상 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자신과 이웃의 구원을 위해 활동하는 것을 '평신도 사도직'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역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복음화와 인간 성화에 힘쓰며,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그 질서를 완성하도록 노력하여 실제로 사도직을 수행한다. 이렇게 평신도들은 그 활동으로 현세 질서 안에서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증언하며 인간 구원에 봉사한다. 세상 한가운데에서 세속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평신도의 신분이므로, 바로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인 정신으로 불타올라 마치 누룩처럼 세상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하느님께 부름받았다."(평신도 교령 2항) 그러므로 모든 평신도는 자신 삶의 현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과 세상의 구원과 복음화를 위한 사도직을 수행해야 합니다.
다변화되고 전문화된 현대 사회 속에서 교회와 교회의 복음 선포에는 평신도들의 다양한 협력과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하느님 백성은 대부분이 평신도이므로 평신도들은 자발적으로 복음적 사도직을 수행하고, 성직자 수도자들과 협력하여 세상의 복음화를 위한 활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특히 평신도들의 삶이 이루어지는 세상은 누구보다도 평신도들의 영역이기에, 각자의 전문성과 능동적 자발성으로 복음화의 여정에 온전히 투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단지 개인적인 구원이나 행복의 추구만이 아니라, 사회적 모순과 불합리를 극복하고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가 완성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수용함으로써 설립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과 순교자들은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스스로 신앙을 찾아 받아들였으며,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이 놀랍고도 자랑스러운 신앙 유산이 우리 평신도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후대에도 잘 전수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평신도 주일을 지내면서,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한국 교회의 모든 평신도가 언제나 깨어 있는 신앙 정신을 지키고 살아가기를, 그래서 이 겨레와 온 세상에 참된 빛과 소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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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주보》 주일의 말씀
[대구대교구 김상호 야고보 신부님(대잠성당 주임)]
<빌려줄 게 따로 있지>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묻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슬기로운 처녀들은 이걸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렸어요. 그게 뭘까요?" 아이들이 대답합니다. 기름이요. 그런데 요즘 기름값이 너무 비싸요"
열 처녀가 신랑을 기다립니다. 마침내 신랑이 온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열 처녀는 신랑을 맞으러 나갑니다. 그런데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탈락하고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만 이 신랑을 맞이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기름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혹시나 하고 넉넉하게 기름을 준비했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준비를 소홀히 했습니다. 복음의 교훈은 이러합니다. 우리 역시 언제 오실지 모를 신랑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기름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그 믿음에서 비롯된 사랑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자가 확고한 믿음이 없다면 어떨까요? 그의 삶 안에서 진정 어린 기도와 이웃 사랑이 없다면 어떨까요? 등은 있지만 기름이 없는 어리석은 처녀와도 같을 것입니다. 당연히 언제 오실지 모를 주님을 반갑게 맞이하지도 못하겠지요. 기름값이 비싸다는 주일학교 아이의 대답에서 우리 믿음의 가치도 그만큼 귀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말을 하곤 하지요. "빌려줄 게 따로 있지" 그렇습니다. 빌려줄 게 따로 있지 믿음과 사랑은 빌려주지 않는 것이며 빌려줄 수도 없습니다. 한평생 신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준비한 믿음과 사랑의 마음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배울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나누어줄 수 없는 소중한 그 어떤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신랑을 맞이하는 등과 함께 기름도 잘 준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 기름은 누구에게 빌릴 수도 없는 것이며 어느 한순간 돈을 주고 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삶을 성실하게 살아갈 때 그 기름은 조금씩 조금씩 하느님 말씀에서 짜여 모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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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주보》 말씀
[군종교구 오승수 미카엘 신부님(비룡성당 주임)]
<슬기로운 준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게 비길 수 있다고 하시며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비유에 등장한 열 처녀는 두 부류로 나뉩니다. 어리석은 부류와 슬기로운 부류이지요.
복음을 보면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의 차이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열 처녀 모두 등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신랑이 늦어지자 모두 잠이 들었습니다.
다만, 미리 기름을 준비했던 이들은 신랑이 왔을 때 여분의 기름을 챙겨 신랑을 맞으러 나갈 수 있었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던 이들은 마중을 나가지 못하고 결국 문밖에서 문을 열어주십사고 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지요.
기름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던 처녀들도 자지 않고 미리 기름을 준비하러 갔다 왔으면 함께 들어갈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기름을 준비하러 간 사이에 신랑이 도착하면 그 역시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준비를 해야 했는가?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갈 때, 그때가 오기 직전에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꾸준히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날과 시간을 모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날과 시간이 언제가 되든지 간에 벌어질 일에 대해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깨어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벌 어질지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고 초대받은 우리는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처녀와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하루 보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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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부산》 강론
[부산교구 김현영 마태오 신부님(사직대건성당 성사담당)]
<등(燈)을 채웁시다.>
오늘 복음에는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우리가 등장합니다.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는, 그렇지만 언젠가 오실 그분의 때를 기쁘게 기다리고 있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우리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출발 때의 조건은 모두 똑같습니다. 순수하고, 저마다의 등을 가지고 있으며, 그분이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랑이 늦어지자 조는 모습도 똑같습니다.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이었습니다. 등이 필요합니다. 내 앞도 비추어야 하고, 오실 분의 앞길도 밝혀야 하는데, 어떤 이의 등에는 길을 밝힐 기름이 없습니다.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말하는 것을 보니 처음에는 기름이 있었던 듯합니다. 그들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단 한 번도 다른 이를 위해 쓸 만큼의 기름을 준비해 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어리석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어리석은 이들에게는 영원한 어둠이 장막처럼 내려옵니다.
세례 때에 우리의 영혼은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습니다."(마르 9.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영을 선물로 주기도 하셨습니다.(요한 20.22 참조)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요한 13.34)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똑같은 출발선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지요? 그날을 밝힐 사랑과 용서 그리고 기쁨이라는 기름을 가득 채우고 있으시겠지요!
"지혜는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 돌아다니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상냥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의 모든 생각 속에서 그들을 만나 준다."(지혜 6.16)
수고하지만 등에 진 십자가를 무거워하거나 귀찮아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분의 앞길을 밝히고 살아가는, 믿는 이들을 찾아서 만나 주시는 하느님의 상냥하신 모습을 우리의 영에 새기고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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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주보》 말씀 담기
[수원교구 한영기 바오로 신부님(성 라자로마을 원장)]
<그러니 깨어 있어라.>
성 라자로마을에도 가을이 짙어지고 봄, 여름 내내 푸르던 나뭇잎들이 형형색색 예쁘게 물들었습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생명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생명의 신비를 마을 전역에서 보며 우리 인생을 묵상하게 되는 '위령성월입니다.
오늘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인생을 사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 너무나 명확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신부들은 새벽에 올지도 모르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등잔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잘 채워두고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신랑이 언제 방문하는지 정확히 안다면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문제는 신랑이 언제 올지 알 수 없기에 신랑과 함께 기쁜 혼인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천상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워놓고 깨어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위령성월에,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 기다려야 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는 바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우리는 항상 깨어 있는 마음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우리 성 라자로마을에 부임한 후 첫 번째로 주님 곁으로 보내드린 분은 안금옥 데레사 님이십니다. 봉성체를 해 드리기 위해 오산 요양병원에 계신 데레사 할머니를 처음 방문한 날, 저는 당시 105살이었던 고령의 할머니가 당연히 환자복을 입으시고 누워서 저를 맞이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정갈한 사복 차림으로 앉아서 손가락도 성치 못한 손목에 묵주를 감으신 채 저를 기다리셨습니다. 안내를 해주신 간호사가 설명하기를 새로 부임한 마을 원장 신부가 성체를 모시고 온다는 말을 들으신 할머니는 '새 신부님이 주님을 모시고 오시 는데 환자복을 입고 누워 기다릴 수는 없다.'라고 하시며 이른 아침부터 식사도 안 하신 채 일반복으로 갈아입혀 달라고 부탁하고는 앉아서 기다리셨다는 것이었습니다.
16살 나이에 나병에 걸리신 데레사 할머니는 강제로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생활하시다가 성 라자로마을로 들어오셨습니다. 데레사 할머니는 누가 봐도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는 서럽기만 한 삶을 사셨는데도, 제 손을 잡고 '주님께 감사하고, 방문해 주신 신부님 수녀님에게 감사하고, 늘 정성껏 돌보아주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님에게 감사하다."라고 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병자성사를 드리러 가서 뵌 데레사 할머니는 산소마스크를 착용하시고 가쁘게 숨을 쉬며 누워계셨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제가 성유를 발라 드리고 마지막 안수를 드리는 그 순간까지도 온 힘을 다해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데레사 할머니는 비록 그 누구보다 힘들고 고단한 일생을 사셨지만,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이 마련하신 천상 잔치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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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안동》 말씀의 샘
[안동교구 권상목 요한 신부님(사벌퇴강성당 주임)]
<깨어 있어라>
오늘은 '평신도 주일'이고, 전례력으로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은 이때 교회는 '종말(세말)을 합당하게 준비하라.'라는 말씀을 연속적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열 처녀의 비유'를, 다음 주일(연중 33주)에는 '달란트의 비유'를, 그리고 마지막 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에는 '최후의 심판'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의 '열 처녀의 비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혼인 풍속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열 처녀'들은 신부의 친구들로서 신부의 화장을 돕거나, 신부를 데리러 오는 신랑을 마중하러 나가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랑이 도착하면 혼인 잔치가 시작되는데, 이 잔치는 며칠 동안 벌어졌습니다. 신랑이 제시간에 도착하면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문제가 발생하곤 했습니다.
오늘의 비유 말씀은 신랑이 늦게 왔을 때 발생했던 일로,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늦게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대비해 미리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이를 예상치 못하고 여분의 기름을 준비해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때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이 떨어져 가자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누어 달라고 청했는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쌀쌀맞게도 그 청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슬기로운 처녀들의 이러한 대답을 통해 '종말을 준비하는 일은 결코 다른 사람이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강조하신 듯합니다.
종말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단호하고 분명한데, 그것이 개인의 종말이든 세상의 종말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개인이든 세상이든 종말에 대한 준비는 서로 나눌 수도 미룰 수도 없는데, 기름을 사러 갔다가 늦게 돌아온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신랑이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은 종말은 그처럼 단호하고 분명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처녀들은 벌을 받은 것일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그들은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아픔을 맛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인생을 잘 준비하지 못해 천상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은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랑이신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아픔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지옥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슬픔이 가득한 곳'이라는 말처럼,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을 만나지 못하는 슬픔을 자초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를 보면 바오로 사도는 희망을 품은 이들의 기쁨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희망'이란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이런 믿는 이들을 하느님께서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시리라는 것을 희망하는 것(1테살 4,14)입니다. 이 희망의 기름을 넉넉히 간직한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기쁨을 맛보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슬픔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11월은 위령성월이고 이 시기 동안 우리는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다른 한편 자기 죽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맞이하는 현실이기에 이런 죽음 앞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살 것이 아니라,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하느님께 대한 희망의 기름을 가득 채우고 깨어 기다리며 산다면, 오시는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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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등 밝힐 기름은 무엇인가?>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마태 25,1)
오래전에 도보 여행을 하다 잔칫집에 들어가 푸짐하게 얻어먹은 적이 있습니다. 걷다 보니 그 흔한 식당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알고 보니 혼인 잔칫집이었습니다. 행색과 냄새가 말이 아닌 길손도 먹고 마시는 혼인 잔치, 하늘나라에 비유될 만합니다. 요즘 결혼 피로연 문화에서는 생각할 수 없긴 합니다.
혼인 잔치는 예수님의 하늘나라 비유의 단골 메뉴입니다. 혼인 잔치를 벌인 임금의 비유도 있고, 예수님이 첫 번째 징표를 보인 곳도 혼인 잔치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열 처녀 비유는 그다지 와 닿지 않습니다. 신부도 아니고 들러리 열 처녀가 뭐 그리 대수인가 싶습니다. 메시지가 약하게 느껴집니다. 두 가지 점에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왜 혼인 잔치에 신부가 아니고 들러리 처녀인가? 둘째는 깨어 있음의 의미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입니다.
1. 왜 신부가 아니고 들러리 처녀들인가?
혼인은 인륜지대사이고 거룩한 것입니다. 혼인으로 가정이 생기고 창조사업은 이어지고 세상은 번창합니다. 참으로 큰 경사이며 축복의 자리입니다. 여기에 잔치가 없을 수 없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몇 날 며칠 혼인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혼인 잔치는 잔치 중의 잔치입니다.
혼인(예식)의 주인공은 신랑 신부인데 신부는 보이지 않습니다. 구약에 보면 예언자들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신부로 맞이하지만, 이스라엘은 배신하고 불륜을 저지른다고 고발합니다. 신약에선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셨지만 역시 유다인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박해하고 죽이려 듭니다. 우리는 지금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우리 자신이 신부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혼인 잔치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오매불망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신랑 맞이 이벤트에 뽑힌 열 처녀는 또 다른 우리 모습입니다.
2. 어떻게 기쁨이 넘쳐나는 흥겨운 잔치로 만들 것인가?
잔치에 필요한 것들은 무엇일까요? 넉넉한 음식과 흥을 돋우는 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잔치에 참석한 이들은 각자 역할이 있습니다. 성모님은 가나에서 열린 혼인 잔치에서 주방을 책임 맡았나 봅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걸 아시고 예수님에게 청을 넣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향기 가득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아무도 모르고 성모님과 물을 퍼간 일꾼들만 아는 신비로운 포도주입니다. 주님의 첫 징표가 포도주라니? 하늘나라는 무엇보다 즐거워야 하나 봅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즐겁게 먹고 마셔야 합니다. 사람들로 복작대야 잔치입니다. 자기 아들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의 비유에선 오죽하면 길거리에서 만난 어중이떠중이 모두 데려와 잔칫상을 채웠겠습니까.
그러나 혼인 잔치에 신랑이 없으면 혼인 잔치가 아닙니다. 열 처녀는 등을 밝혀오시는 신랑을 마중 나가야 합니다. 신랑이 늦어지자 열 처녀 모두 졸다 잠이 들고 맙니다. 한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저마다 등을 챙깁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 다섯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기름은 등 안에 있어 보이지 않기에 간과한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 다섯은 보이지 않지만 기름까지 챙겼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깊이 생각하는 것, 그것이 예지이고 사랑입니다.(지혜 6,15) 깨어 있음은 파수라기보다는 지금 여기, 해야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등잔의 기름은 가게에서 살 수 있는 물품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마련하는 것이 아닐까요.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한 방울, 사랑스러운 눈길 한 번에 한 방울, 의로운 결단에 한 방울, 어려운 이를 위한 손길 한 번에 한 방울씩 말입니다. 등불에 불을 밝힐 기름은 바로 사랑이라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합니다. 너무 늦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날 그 시간은 모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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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평신도의 사명>
평신도는 “성품의 구성원과 교회에서 인정한 수도 신분의 구성원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이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이해된다. 곧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의 백성으로 구성되고,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 왕직에 자기 나름대로 참석하는 자들이 되어, 그리스도교 백성의 전체 사명 가운데에서 자기 몫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교회 31)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사명은 현세적 일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관리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일상생활의 현세적 임무를 자기 생활에서 분리시키지 말고 오히려 맡은 일을 하느님의 뜻대로 계속하면서 그리스도님과 일치를 더욱 깊게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평신도 교령)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하늘나라는 먼 훗날 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충실히 살아야 합니다. 등잔에 기름이 없으면 등잔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등잔불을 밝히려면 언제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을 희망하는 만큼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천상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행동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실천이 요구됩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오시더라도 더 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누가 보나 보지 않나 언제나 준비된 삶을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입니다. 한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다짐합니다.
우리는“각자의 능력과 시대의 요구에 따라” 각자의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살아있는 삶의 터입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완성으로 한 발 더 내딛기를 소망합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서로 남을 위해서 봉사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갖가지 은총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 4,10)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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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부모가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많은 부모는 자녀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라고 대답합니다.
“아빠, 엄마 덕분에 행복해.”
이 말을 들은 부모는 아이에게 아마 “아빠, 엄마도 너희 덕분에 행복해.”라고 말할 것입니다.
자기 행복을 고백하는 말은 듣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고 합니다. 특히 부모 자녀 사이의 이 말은 안도감과 동시에 기쁨을 갖게 합니다. 부모 자녀는 일 촌 관계, 자신이 아닌 타인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타인’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서로 행복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부모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을 때는 “부모 때문에 불행하다”라는 말을 들을 때라고 합니다. 사실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각종 육아 관련 방송을 보면 문제 있는 부모투성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방송에 나오는 부모와 달리 완벽한 부모일까요? 마찬가지로 부족함이 가득합니다. 이제 자녀는 어떨까요? 완벽한 자녀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부족함이 가득한 나약한 인간일 따름입니다. 부족한 부모와 부족한 자녀가 만나서 완벽한 사랑을 향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긍정의 말, 사랑의 말, 행복의 말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만의 관계만이 아닙니다. 나의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말과 행동에 있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완벽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완벽한 사랑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 우리에게 오실 주님을 마중할 준비가 됩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늘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잠들어 있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열 처녀의 비유는 이 점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등과 함께 기름도 준비했지만, 어리석은 처녀는 등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등’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도록 부름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기름’은 부름을 받은 이로 맡은 바 사명에 충실하며 깨어 있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뜻을 늘 깨어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기름까지 충실히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상대방 때문에 행복하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이를 위해 사랑의 말과 행동은 필수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삶을 통해 오시는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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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끝을 향한 삶의 길을 걷습니다>
마태오 25,1-13 (열 처녀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끝을 향한 삶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삶의 길을 걷습니다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끝날 길입니다
생각보다 오래 갈 수도 있지만
갑자기 끝 앞에 설 수도 있습니다
언제든 어떤 모습이든
그 끝 앞에서
함께하지 못했던 안타까움보다
함께할 수 있었던 고마움이
조금이라도 더 크면 좋겠습니다
언제든 어떤 모습이든
그 끝 앞에서
사랑하지 않았던 부끄러움보다
사랑할 수 있었던 뿌듯함이
조금이라도 더 크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마주하게 될
그 끝을 향하여
두려움보다 설렘으로
오늘도 삶의 길을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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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마태25,1)
<살아있는 믿음!>
오늘 복음(마태25,1-13)은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열 처녀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와 깨어있음'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계십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준비했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서, 한밤중에 온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기름을 함께 준비해 가지고 있다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이 말씀으로 끝맺으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함께 준비된 등과 기름!'
이를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된, '살아 있는 믿음'으로 묵상했습니다.
매일 드리는 미사 때 주님의 기도 후에 우리는 사제와 함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한평생 평화롭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다시오심)'을 기다리고 있고, 이 재림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서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잘 준비된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56번째 맞이하는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는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신자들을 가리키는데, 신자들이 없으면 교회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교회의 보물'입니다.
'일치와 화해의 공의회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6년)'를 시작으로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역할이 계속 강조되어오고 있습니다.
십자가 믿음 안에서 나의 삶이 기쁘고, 나아가 너와 세상이 기뻐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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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uzuW0xkp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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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 6)
이 땅에서
꽃이 피고
이 땅에서
뜨거운 가슴이
나누어지는
복음이 됩니다.
사람이란
아는 것만큼
행하고
행하는 만큼
알게 됩니다.
이렇듯
앎과 행위
믿음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복음입니다.
사제와 평신도들은
함께 주님을
맞이하고
함께 믿음을
지켜나가야 할
신앙의 주체들이며
신앙의
기쁨입니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최소한
공동체 구성원
우리만이라도
서로 화합하여
반목하지 않는 것이
조화로운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라
믿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신앙의 참된
실천의
장(場)이 됩니다.
올바른
신앙의 실천인
기도와
봉사야말로
그림자를 빛으로
바꾸는 은총이
됩니다.
부정적인
마음의 습관들이
이제부터는
바뀌어
진실되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 공동체는
소유를 나누고
재능을 나누어
서로를 돕는 것이
신앙 공동체의
본질이며
정신입니다.
그래서 실천하는
공동체의 주역은
다름 아닌
평신도 분들입니다.
한분 한분은
모두와 함께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성전입니다.
가톨릭은
널리 두루 미치고
모든 것에 공통되는
보편의 종교입니다.
이 땅의 역사적
사회적 실천의
주역들은
복음과 결합되었던
평신도 분들이었습니다.
이웃형제들을
생각하고
봉사하고
기도하는
마음이
한마음이
되게합니다.
이렇듯이
예수님의
참 모습과
참 뜻은
사제와 평신도들을
통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뜨거운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평신도 분들의
진실한 뜻과
진실한 실천은
우리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오늘 은총의
주일이
우리가
누군지를 묻는
시간이기를
기도드립니다.
깊고도
소중한 기도는
서로를 향한
감사의 기도임을
깨닫는 평신도
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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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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