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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부커상 수상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
(세계적인 문학 감상)
[책 소개]
한국인 최초 맨부커상 수상작가 한강의 새로운 시도!
한국인 최초 맨부커상 수상작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한강 지음/출판사 창비/ 2007.10.30 발간
10년 전의 이른 봄, 작가는 한 여자가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고, 함께 살던 남자는 그녀를 화분에 심는 이야기 『내 여자의 열매』를 집필하였다. 언젠가 그 변주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이다.
표제작인 1부《채식주의자》,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2부 《몽고반점》, 그리고 3부《나무 불꽃》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가 2002년부터 2005년 여름까지 쓴 이 세편의 중편소설은 따로 있을 때는 일견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합해지면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담기는 장편소설이 된다.
단아하고 시심 어린 문체와 밀도 있는 구성력이라는 작가 특유의 개성이 고스란히 살아 있으면서도 상처 입은 영혼의 고통을 식물적인 상상력에 결합시켜 섬뜩한 아름다움의 미학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린 시절 자신의 다리를 문 개를 죽이는 장면이 뇌리에 박혀 점점 육식을 멀리하고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간다고 생각하는 영혜를 주인공으로 각 편에서 다른 화자가 등장한다.《채식주의자》에서는 아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남편, 《몽고반점》에서는 처제의 엉덩이에 남은 몽고반점을 탐하며 예술혼을 불태우는 사진작가인 영혜의 형부, 세 번째 《나무 불꽃》에서는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을 목격했으나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혜가 화자로 등장한다.
잔잔한 목소리지만 숨 막힐 듯한 흡인력이 돋보이는 이 소설은 상처받은 영혼의 고통과 식물적인 상상력을 결합시켜 섬뜩하지만 아름다운 미적 경지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저자가 발표해온 작품에 등장했던 욕망, 식물성, 죽음, 존재론 등의 문제를 한데 집약시켜놓은 것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 저자 한강 소개
한국 문학사상 `가장 큰` 이름을 가진 작가.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내놓았을 때부터, `치밀하고 빈틈없는 세부, 비약이나 단절이 없는 긴밀한 서사구성, 풍부한 상징과 삽화들 같은 미덕으로 한 젊은 마이스터의 탄생을 예감케 한다`는 파격적인 찬사를 받았다.
고등학교 때 임철우의 글을 읽으면서 소설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지웠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학교에 갔다 오는 도중에 차에서 많은 시를 읽었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1993년 「문학과사회」에 시가,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이후 저자는 소설집『여수의 사랑』(1995년), 장편『검은 사슴』(1998년)을 통해 드러나듯이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과 외로움을 보여주는` 작품을 발표해왔으며. 2005년 육체적인 욕망과 예술혼의 승화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수작으로 극찬을 받은 『몽고반점』이 심사위원 7인의 전원일치 평결로 이상문학상으로 선정되었다.
이상문학상 역사상 1970년대 생 작가로는 첫 번째 수상자인 한강은, 여타의 70년대 생 문인과 달리 진중한 문장과 웅숭깊은 세계인식으로 93년 등단 이래 일찌감치 '차세대 한국문학의 기수 중 한 명'으로 지목받아 왔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이 작품에 대해 “한강의 「몽고반점」은 기이한 소재와 특이한 인물 설정, 그리고 난亂한 이야기의 전개가 어색할 수도 있었지만, 차원 높은 상징성과 뛰어난 작법으로 또 다른 소설 읽기의 재미를 보여주고 있다. ”라고 평하고 있다.
또 다른 그녀의 작품으로는 여행산문이면서 소설이기도 한『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있다. 이 책은 여행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이라곤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여행기로, 작가의 감각이 만나고 받아들인 사람과 사물에 대해 기억에 의지해 재구성한 소설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알 수 없는 광기가 각 도는 한 여성의 실종과 그녀를 찾으려는 인물들이 미로 찾기 같은 여정의 기록인 『검은 사슴』, 젊은 날의 상실과 방황을 진지하고 단정한 문체로 그려 보이는 『여수의 사랑』등이 있다. 타인이 주는 고통을 구도자의 행각처럼 받아들이고 끌어안는 것을 표현한 수상작 『아기부처』로는 제25회 한국소설문학상을 받았다.
한강의 소설은 신세대 소설가답지 않게, 세상을 다 살아버린 자의 좌절과 비애의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 그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결손 가정이나 비참한 죽음을 과거사로 안고 있거나, 발작이나 허무한 복수의 장면을 연출하거나,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비탄한 삶을 통해 실존의 문제에 천착하며 서정적 방식으로 이를 풀어 나간다.
그늘진 정서의 소설을 즐겨 쓰는 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그늘진 풍경을 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고 한다. 자신의 소설을 읽고 너무 슬펐다는 독자를 만났을 때가 가장 기쁘다고도 했다.
작업 중에는 새벽 3,4시에 일어나 오전까지 글을 쓰고, 작업이 잘 되지 않으면 줄곧 살아온 수유리 일대를 산책한다. 마지막 탈고를 끝낼 때까지 줄곧 긴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작품이 완성되면 그만큼 해방감도 크다. 『검은 사슴』을 내고 나서는 너무 좋아서 방안을 왔다갔다 하다가 스테플러에 찔려서 제법 피가 나기도 했다.
지출은 많지 않지만 그 중 상당 부분이 책값이다. 교보나 종로서적 같은 대형서점을 들르거나 단골인 동네 책방도 자주 찾는다. 아홉 평 남짓한 책방의 주인은 그에게 `무기한 무한정'책을 빌려줄 정도로 친밀한 사이라고 한다.
「샘이깊은물」 「출판저널」 「샘터」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1995년 7월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펴낸 후, `사놓기만 하고 못 읽었던 책도 읽고 여러 곳을 여행하고 싶어서` 직장을 그만 두었다. 전남 장성으로 귀거래한 소설가 한승원의 고명딸이며, 오빠 한동림(본명 한국인)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 집안이다.
출생 1970년 11월 27일, 광주
데뷔 1994년 서울신문 단편소설 '붉은 닻'
학력 1989 ~ 1993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수상
2016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2015 황순원문학상
2014 만해문학상
2010 동리문학상
2006 이상문학상
2000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1999 제25회 한국소설문학상
◆ 출판사 서평
존재의 숙명적 상처와 세상의 근원적 어둠에 대한 처연한 인식에서 출발하여 식물적 상상력으로 그에 대응해온 작가가 도달한 이 새로운 미적 차원은 놀랍고 신선하다. 상처와 어둠의 극한까지 밀어붙여 존재의 처음과 끝, 그 신비로운 근원을 엿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도달한 놀라운 상상력의 세계는 우리 소설을 일상과 탐욕의 저잣거리로부터 끌어올려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시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황도경 「한강의 작품세계」(『문학사상』 2005년 2월호)
작가는 상처와 치유의 지식체계를 오랜 시간 동안 기록해온 신비로운 사관(史官)이다. 그녀의 많은 소설은 일상의 트랙을 벗어나 증발해버린 타인을 찾아나서는 이들의 움직임을 그린다. 이런 여러 탐색담은 대상을 찾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정상성을 벗어난 인물들을 찾아나선 ‘정상적’인 인물들은 스스로 감추었거나 잊었던 트라우마와 조우한다. 마치, 애초에 그들이 그토록 닿으려 했던 목적지가 그 깊은 상처였던 것처럼. - 허윤진(문학평론가)「해설」 중에서
70년대생 작가의 선두주자였던 소설가 한강이 표제작인 「채식주의자」,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몽고반점」, 그리고 「나무 불꽃」으로 구성된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를 창비에서 출간했다.
단아하고 시심 어린 문체와 밀도 있는 구성력이라는 작가 특유의 개성이 고스란히 살아 있으면서도 상처 입은 영혼의 고통을 식물적인 상상력에 결합시켜 섬뜩한 아름다움의 미학을 완성한 수작이다.
나직한 목소리지만 숨 막힐 듯한 흡인력이 돋보이는 『채식주의자』는 지금까지 소설가 한강이 발표해온 작품에 등장했던 욕망, 식물성, 죽음, 존재론 등의 문제를 한데 집약시켜놓은 완결편이라 할 수 있다.
◆ 상처, 욕망, 그리고 죽음
『채식주의자』의 1부 「채식주의자」는 영혜 남편인 ‘나’의 시선으로 서술된다. 어린 시절 자신의 다리를 문 개를 죽이는 장면이 뇌리에 박힌 영혜는 어느 날 꿈에 나타난 끔찍한 영상에 사로잡혀 육식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영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나’는 처가 사람들을 동원해 영혜를 말리고자 한다. 영혜의 언니 인혜의 집들이에서 영혜는 또 육식을 거부하고, 이에 못마땅한 장인이 강제로 영혜의 입에 고기를 넣으려 하자, 영혜는 그 자리에서 손목을 긋는다.
2부 「몽고반점」은 인혜의 남편이자 영혜의 형부인 비디오아티스트 ‘나’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남편을 떠나 보내고 혼자 사는 동생을 측은해하는 아내 인혜에게서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영혜의 몸을 욕망하게 된다. ‘나’는 영혜를 찾아가 비디오작품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청한다. 벌거벗은 영혜의 몸에 바디페인팅을 해서 비디오로 찍지만, 성에 차지 않은 ‘나’는 후배에게 남자 모델을 제안한다. 남녀의 교합 장면을 원했지만 거절하는 후배 대신 자신의 몸에 꽃을 그려 영혜와 교합하여 비디오로 찍는다. 다음날 벌거벗은 두 사람의 모습을 아내가 발견한다.
3부 「나무 불꽃」은, 처제와의 부정 이후에 종적 없이 사라진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져야 하고, 가족들 모두 등돌린 영혜의 병수발을 들어야 하는 인혜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영혜가 입원한 정신병원의 연락을 받고 찾아간 인혜는 식음을 전폐하고, 링거조차 받아들이지 않아 나뭇가지처럼 말라가는 영혜를 만나고, 영혜는 자신이 이제 곧 나무가 될 거라고 말한다. 강제로 음식을 주입하려는 의료진의 시도를 보다 못한 인혜는 영혜를 큰 병원으로 데리고 가기로 결심한다.
영혜를 둘러싼 세 인물, 영혜의 남편·형부·언니의 시선으로 구성되는 3부작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장면은 가족 모임에서 영혜가 손목을 칼로 긋는 장면이다. 아내의 육식 거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남편으로서는 그 충동적인 행동이 그저 끔찍한 장면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피를 흘리는 처제를 들쳐업고 병원에 간 형부는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비디오작업이 송두리째 모멸스럽고 정체 모를 구역질을 느끼고 그 후로 전혀 다른 이미지(바디페인팅)에 사로잡힌다.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서 본 동생 영혜가 죽음을 불사하고, 식물이 되기를 원하는 것을 알게 된 언니는 그 장면을 안타깝고 원망스럽게만 기억한다.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나무 불꽃」 중에서
동일한 장면을 다른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영혜’와 ‘아버지’에게서도 발견된다. 어린 딸의 다리를 문 개를 오토바이에 묶어 끌고 다니다 죽이는 아버지에게는 개의 살육이 그저 부정(父情)의 실천이었을 뿐이겠지만, 모두에게 ‘불분명한 동기’인 영혜의 육식 거부가 실은 그 어린 시절의 끔찍한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다.
육체적인 욕망과 예술혼의 승화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수작으로 극찬을 받으며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2부 「몽고반점」은 연작소설 『채식주의자』 전체 줄거리에 연결되면서 이 소설의 차원을 확장하고 심화한다. 각 부에서 각기 다른 시선으로 조명되는 욕망의 근원은 결국 영혜라는 주인공의 상처와 기억의 문제로 수렴된다.
◆ 숨막힐 듯한 식물적 상상력의 궁극
「작가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작가가 10년 전 발표한 단편 「내 여자의 열매」(『내 여자의 열매』, 창비 2000 수록)에서 선보였던 식물적 상상력을 궁극의 경지까지 확장시킨 인물이다. 희망 없는 삶을 체념하며 하루하루 베란다의 ‘나무’로 변해가던 「내 여자의 열매」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 각인된 기억 때문에 철저히 육식을 거부한 채로 ‘나무’가 되기를 꿈꾸는 영혜와 통한다.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 봐, 놀랍지 않아?
영혜는 벌떡 일어서서 창을 가리켰다.
모두, 모두 다 물구나무서 있어.
[…]
어떻게 내가 알게 됐는지 알아? 꿈에 말이야. 내가 물구나무서 있었는데…… 내 몸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
나, 몸에 물을 맞아야 하는데. 언니, 나 이런 음식 필요 없어. 물이 필요한데. ―「나무 불꽃」 중에서
단순한 육식 거부에서 식음을 전폐하는 지경에 이르는 영혜는 생로병사에 무감할뿐더러 몸에 옷 하나 걸치기를 꺼리는, 인간 아닌 다른 존재로 전이된 모습으로 그려진다.
더 나아가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채식주의자」)라고 믿는 영혜는 아무도 공격하지 않고, 공격받지 않는 순결한 존재가 되는 듯하다.
반면 영혜 주위의 인물들은 육식을(영혜 남편), 혹은 영혜의 몸과 몽고반점 그리고 자신의 예술혼을(영혜 형부) 지독하게 욕망한다. 그들의 욕망은 결국 누군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고 끔찍한 기억을 남긴다. 인간의 욕망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생명이 있는 한,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욕망할 수밖에 없는 동물적인 육체로 살아가야 하는 정체성을 포기한 영혜는 결국 죽음에 이르는 길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영혜로 표상되는 식물적인 상상력의 경지는 소설가 한강의 작품세계를 가로지르는 소설 미학이며, 이야기로서든 상상력으로서든 감각으로서든 우리 소설의 차원을 확장시키는 시도임에 분명하다.
◆ 책 속으로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 '채식주의자' 중에서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 '나무 불꽃' 중에서
어쩌면 그녀의 내면에서는 아주 끔찍한 것,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 단지 그것과 일상을 병행한다는 것만으로 힘에 부친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호기심을 갖거나 탐색하거나 일일히 반응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그런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은, 이따금 그녀의 눈이 단지 수동적이거나 백치스러운 담담함이 아니라 어떤 격렬함을, 동시에 그것을 자제하는 힘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105
그것은 구석구석 일체의 군더더기가 제거된 육체였다. 그는 그런 육체를, 육체만으로 그토록 많은 말을 하는 육체를 처음 보았다. -106
이즈음처럼 무수한 색채들이 그의 안에서 터져나온 적은 없었다. 마치 몸의 내부가 힘찬 색채들로 가득 차올라, 그 격렬함이 더 견디지 못해 분출되어 나오는 것 같았다. 매우 격렬하게 그는 존재하고 있었다. -122
나는 어두웠다고 그는 느낄때가 있었다. 그는 어두웠다. 어두운 곳에 그가 있었다. 그가 이즈음 경험하는 색채들이 부재했던 그 흑백의 세계는 아름답고 고즈넉했으나 그로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잔잔한 평화가 주는 행복을 그는 잃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상실감 따위를 느낄 수 없었다. 지금 이순간 이 격렬한 세계가 주는 자극과 고통을 견디기에도 그의 에너지는 벅찼다. -122
◆ 한강 귀국 후 첫 기자간담회
“최대한 빨리 방에 숨어들어 다시 소설 쓰고 싶어”
한강이 중국 대륙으로 흐른다. 소설가 한강(46)의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중국 문학시장에 진출한다는 얘기다. 계기는 물론 맨부커인터내셔널상 수상이다.
24일 낮 서울 동교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수상 이후 첫 기자간담회. 널찍한 카페 공간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수의 국내외 취재진이 몰렸다. 특유의 침착함을 잃지 않은 한씨는 가만가만 그러나 또박또박, 수상 순간의 심경, 번역의 중요성, 새 장편 『흰』(난다·사진)의 내용, 다음달 열리는 관련 미술전시에 대해 설명했다.
오래 전 작품으로, 이렇게 먼 곳서 상 받는 사실이 무척 이상했다
질의응답 중간쯤 한씨 소설의 해외 판권을 관리하는 KL 매니지먼트의 이구용 대표가 그간의 계약 진행 상황을 공개했다. 대뜸 “중국의 한 출판사가 한씨의 장편을 모두 출판하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이미 출간된 『채식주의자』『검은 사슴』 이외에 나머지 장편 네 편을 마저 수입하겠다는 얘기다. 특히 “『소년이 온다』는 처음에는 계약을 꺼렸으나 곧 마음을 바꿔 역시 계약 의사를 밝혔다”고 했다.
『소년이 온다』는 ‘80년 광주’의 희생자들을 소재로 한 작품. 정치적 소재에 지극히 민감한 중국 당국 심기를 거스르는 내용일 수 있지만 맨부커인터내셔널상 수상이 그런 걸림돌마저 무력화시켰다는 얘기다.
이 대표는 “『채식주의자』의 경우 인도 남부의 한 소수 언어권에서도 계약을 맺고 싶어 한다”고 소개했다. 지금까지 27개국에 판권이 팔렸다. 영국에서는 추가로 2만 부를 찍기로 해 수상 이후 제작 부수가 4만 부로 늘었다.
『소년이 온다』는 중국까지 포함하면 11개 나라에 팔렸고, 이날에야 서점에 깔린 『흰』에 대한 관심도 크다고 했다. 느리지만 한눈 팔지 않고 자신 만의 골방에서 뚜벅뚜벅 걸어온 한강 소설의 국제적 약진이다.
한씨는 “수상작 발표 순간 시차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졸린 상태였다”고 했다. “발표 직전 커피를 한 잔 마셔 둬 시상식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큰 동요 없이 담담했던 이유는 “오래전 작품인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려서 이렇게 먼 곳에서 상을 받는다는 사실이, 좋은 의미로, 무척 이상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뜨거운 관심이 부담스러워 앞으로 작업이나 생활에 영향이 없겠느냐고 묻자 “처음에는 택시를 탔다가 차가 막혀 지하철을 갈아타고 오늘 간담회장에 왔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며 “이런 자리가 모두 끝나면 최대한 빨리 내 방에 숨어들어 소설을 다시 쓰는 게 소란을 극복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의역이 원작 훼손이라고 생각 안해 중국서 모든 장편 출판 제의 들어와
번역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한씨는 “한 줄의 문장을 번역하더라도 수 많은 다른 번역들이 있을 수 있다. 언어의 섬세함, 예민함에 항상 매료되기 때문에 그런 번역의 세계가 무척 흥미롭다. 한 세계를 다른 세계와 연결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일대일 직역(直譯)과 원문을 일부 수정하는 의역(意譯) 가운데 어느 게 맞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소년이 온다』의 영어 번역은 80년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외국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세 부분에 걸쳐 한글 원본과 일부 다르게 했는데 나중에 문장 별로 대조해보니 원작에 충실한 번역이었다. 원작훼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65편 짧은 글 모은 새 장편 『흰』태어나자마자 죽은 언니 그려
이날 간담회는 『흰』 출간에 맞춰 출판사 난다와 『채식주의자』의 창비가 함께 주최했다. 예약 판매만으로 4만 부를 찍은 『흰』은 65편의 짧은 글을 모아 시집 같기도 산문 같기도 한 작품이다.
한씨는 “2차 대전 때 폭격으로 도시의 90% 이상이 파괴됐던 폴란드 바르샤바에 2013년 하반기 머물렀는데, 당시 희생자들과 태어나자마자 죽은 내 언니에게 더럽힐 수 없는 투명함, 생명, 빛, 밝음, 눈부심 같은 것들을 주고 싶어 쓴 작품”이라고 했다.
작가 자신이 영매(靈媒)가 돼 진혼이라도 하려는 듯 소설은 간곡하면서도 서정적이다. 한강식 도발도 있다. 눈 오는 밤, 전신주 밑에 엉망으로 넘어져 있다가 일어서던 한 사내의 속내를 한강은 다음과 같이 상상한다.
"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세상 모든 어려움을 흰색은 어쨌든 덮는다는 얘기다.
[어깨뼈] – 한강
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지.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두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때면 활짝 넓어지는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소리였으면.
처음으로 당신과 나란히 포도를 걸을 때였지.
길이 갑자기 좁아져서 우리 상반신이 바싹 가까워졌지.
기억나?
당신의 마른 어깨와 내 마른 어깨가 부딪친 순간,
외로운 흰 뼈들이 달그랑, 먼 풍경 소리를 낸 순간.
– 아홉개의 이야기 중 <내 여자의 열매 (창작과 비평, 2000)
(김종원님이 주신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