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노무현을 처음 만난 것은 1988년 13대 총선 때다. 그 때 나는 부산민주청년회(부민청)이라는 재야청년단체에 몸담고 있었다. 그 때 노무현은 인권변호사로 명망을 얻고 있었고 당시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의장을 맡고 있었다. 그런 그가 13대 총선에서 당시 김영삼이 총재로 있던 통일민주당 공천을 받아 부산 동구에 출마한 것이다. 당시 민정당 후보로는 전두환 정권의 막강 실세 삼허(허삼수, 허화평, 허문도)가운데 한 명인 허삼수가 출마했다.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부산민주청년회에서는 부민협 상임의장인 인권변호사 노무현 변호사가 출마한 만큼 부민청 차원에서 적극 조직적인 지원을 하기로 했다. 조직적인 지원이라고 해봤자 돈이나 무슨 힘이 있는 기관이 아니므로 오직 몸으로 때우는 게 유일하고 전부인 그런 지원이었다. 그래서 나는 노무현 선거캠프의 홍보부에서 방송담당을 맡음으로써 노무현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 더구나 노무현이 출마한 부산 동구는 내가 당시 살고 있던 곳이기도 했다. 나는 그 때 동구 초량동에 살았다. 선거캠프가 차려지고 그로부터 꼬박 한 달을 캠프와 여관에서일하고 먹고 잤다. 내가 맡은 일이란 선거방송차량의 아나운서였다. 나와 여자 1명이 방송원이었는데 내가 그 일을 맡게 된 데는 부르짖는 내 목소리가 꽤 호소력 있게 들린다는 내부의 판단 때문이었다. (나도 한 때는 열혈남아였다)
아침 일찍 캠프회의를 통해 유세 일정이 잡히면 방송차량요원이었던 나와 또 한 명의 여성동지는 제일 먼저 방송원고를 작성했다. 그 날 방문하게 되는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서 원고를 작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예를 들어 수정동 산복도로의 시장지역을 방문할 때와 범일동 안창마을(부산의 대표적인 슬럼가인데 이곳은 문선명의 탄생지로 통일교의 성지이다)을 방문할 때의 방송원고가 달라야 했다.
방송원고가 XXX 작성되면 방송차량이 제일 먼저 출발한다. 통상 1시간 정도 후보보다 앞서 유세지에 가서 바람을 잡는다. 후보가 도착하기 전에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를 먼저 어느 정도 이끌어내야만 한다. 그게 방송차량에게 주어진 임무다. 나와 여성동지는 번갈아 가며 약간 목소리를 업하여 방송하기 시작한다. <친애하는 부산민주애국시민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민주당 기호 2번 부산의 자존심 인권변호사 노무현 선거방송차량입니다. 노동자와 서민의 벗, 인권변호사 노무현 후보가 이 곳에 곧 오십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이렇게 한 30, 40분을 유세홍보방송을 하고 있노라면 노무현 후보가 도착을 한다. 그러면 방송차량 지붕 위에 노무현이 올라가 즉석유세를 한다. 이런 식으로 아침 출근시간부터 저녁 퇴근시간까지 선거구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이나 출퇴근 시간엔 교통의 요지를 찾게 되지만 주택가를 일일이 돌 때도 많았다. 그럴 때는 방송차량이 주택가 골목엘 들어갈 수 없으므로 여성동지는 차량을 지키고 나는 핸드마이크를 들고 노무현 후보와 함께 골목을 누볐다. 10미터 정도 앞서가며 예의, <부산 시민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민주당 기호 2번 부산의 자존심 노무현 후보가 오셨습니다. 여러분 나오셔서 노무현 후보를 격려해 주십시오. 노무현 후보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내주십시오.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렇게 나는 1988년 부산 동구의 산동네들을 거의 안 가본 곳 없을 정도로 노무현과 함께 뛰어 다녔다.
나는 그 때 민주화운동의 대선배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 노무현의 소탈하고 정직하고 꾸밈없는 모습에 꽤 반했었고 인간적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지금 이 글을 쓰려고 하니 그 때의 많은 크고 작은 일들이 기억 속에 떠오르나 인간 노무현의 면목을 잘 보여주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소개 하고자 한다.
1. 적진에 뛰어든 노무현
앞서 말했다시피 상대 민정당 후보는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허삼수였다. 그는 민정당 창당 주역의 한 사람이자 막강 실세 삼허의 핵심인물로 중앙당의 막강한 자금지원과 조직에 힘입어 꽤 당선을 자신했던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당시 허삼수 측의 선거전략은 두 가지였다.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금포살포와 유권자매수가 그 첫째요, 두 번째는 색깔론이다. 즉 노무현은 빨갱이라는 거다.
그의 자금 동원력은 상당해서 그 당시 허삼수가 동구에만 100억 가까이 뿌린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실제로 당시 허삼수 측에서는 지역구민의 대다수가 가난한 하층민인 것을 노려 당선이 되면 곧바로 쌀 한 가마니와 바꾸어준다는 노랑딱지를 산동네를 중심으로 살포하기도 했다. 날 찍어라 그래서 당선되면 그 표를 가지고 와라 쌀한가마니 주마 경상도말로 과연 앗싸라 한 유세방법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가 흑색선전이었다. 그 때 노무현은 분명 김영삼이 이끌고 있던 통일민주당 후보였음에도 허삼수 측은 노무현은 당선되면 XXX인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입당할거라는 근거 없는 흑색선전을 폈다. 반전라도, 반김대중의 지역감정을 건드리는 동시에 이념문제에서 꽤 보수적인 부산의 정서를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참으로 택도 없는 날조된 거짓말이었지만 때론 이런 거짓말이 진실을 가리고 현실정치에서 종종 승리하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아왔다. 노무현 찍으면 김대중한테 간다. 노무현은 김대중과 함께 빨갱이다. 자고 나면 전봇대에 이런 흑색선전물이 나붙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걸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캠프의 날마다의 회의주제요 고민거리였다. 선거판은 정말 추악해져 가고 있었다. 거짓과 날조, 비방과 중상 모략이 판치는 그야말로 이전투구 개판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 강도는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더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그 날은 마침 퇴근시간 무렵 유세지가 수정동의 허삼수 후보의 선거사무소가 있던 부근이었다. 방송차량에선 87년 대선 에서 김영삼의 로고송으로 썼던 <군정종식 김영삼>이 이름만 바꿔 <군정종식 노무현>이 흘러나오고 그 위에 꽤 호소력 있는 내 목소리로 <부산 민주애국시민 여러분, 통일민주당 기호 2번 노무현입니다>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고 순식간에 즉석유세대 근처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노무현은 그 날 그 자리에서 허삼수 선거운동본부가 앞에 있는 것을 의식한 듯 근거 없는 흑색선전을 하지 말 것과 금품으로 유권자를 매수하지 말 것, 택도 없는 지역개발 공약으로 유권자를 우롱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사람들의 뜨거운 박수와 노무현 연호아래 방송차량 지붕에서 내려온 노무현은 순간 갑자기 허삼수 선거운동 사무실 쪽을 향해 냅다 뛰는 게 아닌가? 경호를 맡았던 친구와 방송차량에 있던 나와 몇 사람의 스탭들은 너무도 갑작스런 일에 놀라 노무현을 따라 뛰었다. 노무현은 거침없이 허삼수 선거사무소로 뛰어들더니만 으레 그 특유의 돌쇠 같은 웃음을 지으며 허삼수측 스탭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수고한다고 격려를 했다. 그리고선 허삼수 후보를 만나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지금도 그 때 허삼수측 선거스탭들의 벙∼ 찐 얼굴이 기억이 난다.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상대후보에 대한 인신테러 가능성까지 나돌던 살벌한 그 때에 경호원도 안 데리고 느닷없이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장을 만나겠다고 하니!
뒤따라간 우리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얼른 정리가 되지 않았다. 허삼수 측에서는 긴급으로 허삼수를 수배했고 어딘가 유세를 나갔던 허삼수가 급하게 돌아왔다. 노무현은 허삼수와 반갑게 악수를 한 다음 서로 정치를 하자니 표를 다툴 수밖에는 없는 형편이긴 하지만 서로가 공명정대하게 겨루고 국민의 심판을 받자고 허삼수에게 제안했다. 허삼수가 거기서 뭐라고 할 것인가? 못 한다고 하겠는가? 허삼수는 물론 그래야 된다며 그간의 흑색선전이 본의가 아니었다며 정중히(?) 유감을 표했다. 그리고 노무현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고 한 10여분 후에 다정히 나왔다. 둘이서 뭔 얘길 그 때 했는지는 모르나 나중에 노무현에게 물어본 즉 별 얘기는 없었다고 한다. 허삼수가 꽤 놀랬던지 미안하다는 말을 다시 한 번 했다고 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로도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그 다음 날 저녁에 우리측 캠프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자신을 허삼수 캠프의 총무를 맡고 있다고 소개한 그는 자신은 허삼수의 친척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인즉 어제 노무현 후보를 보고 너무 감동을 받았다. 나 뿐 아니라 여기 스탭들 모두가 노무현이 돌아가고 난 다음 노무현의 그 용기와 당당함에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친척이라 어쩔 수 없지만 노무현 같은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야 한다며 여러분 정말 수고하시고 꼭 승리하시길 빈다는 얘길 했다. 그리고 자기가 전화한 사실은 꼭 비밀에 붙여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 전화를 받은 우리측 스탭들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어떤 여성동지는 감격해서 울음을 터뜨리고 노무현에게 재발방지를 요구하며 잔뜩 불어있던 경호원친구도 감동했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던 게 기억난다.
허삼수 친척의 간절한 소원대로 노무현은 막강 허삼수를 누르고 결국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었다.
진실을 요구함에 있어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용기, 나와 많은 사람들은 그 때 노무현에게서 그 용기를 보았다. 그 용기가 바로 정치인 모두가 거대족벌언론의 눈치나 살피고 있을 때 그 거대언론에 단기필마로 맞설 수 있는 노무현만의 용기인 것이다. 요새 조선일보가 새로운 고민에 빠졌단다. 노무현이 일찍이 조선일보와는 인터뷰조차도 응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바라 노무현이 대통령후보가 되면 여당의 대통령후보와 인터뷰조차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뭘로 장사해 먹을꼬?
노무현은 용기 있는 사람이다. 나는 1988년에 이미 그걸 보았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그 용기를 보여주었다. 3당합당을 거부했고 국회에 나와 무성의하고 뻔뻔한 증언을 읽어 내려가던 전두환에게 명패를 집어던지며 항의했다. 낙선이 불을 보듯 뻔한 정치현실에서 지역감정의 견고한 벽을 깨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 이 모든 게 용기 있는 자가 아니면 걸을 수 없는 길 아닌가?
2. 눈앞의 돈 뭉치를 돌려보낸 가난한 노동자의 벗
선거 때 선거자금은 실탄이라고 하지 않은가? 전쟁에서 실탄이 떨어지면 더 말해 뭐하겠는가? 요새 야당이야 과거 37년 간 대대로 도적질 해먹던 놈들이 야당의 탈(!)을 쓰고 있으니 말이 야당이지 여당 보다 형편이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게 없지만 1988년 그 때만 하더라도 진짜 야당엔 돈이 씨가 마를 때 아니었던가? 그런 상황에서 야당후보로 나선 노무현에게도 돈은 늘 궁했다. 그런데 노무현에게는 몇 몇 돈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노무현은 한 때 지방법원판사를 지냈다. 이른바 하이클라스에 속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노무현이 인권변호사로 활약한 것이 대략 1981년부터의 일이니까 그 전의 삶은 그저 여느 법조인의 삶과 다를 게 없었다. 자신의 출세와 부가 인생의 전부요 목적인 그런 삶이었다. 노무현에겐 그 때 사귀었던 친구들 가운데 사업하는 몇 몇 친구들이 있다. 내가 그 당시 노무현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놀란 것은 그의 친구가 상당히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요트클럽회장이 있는 가하면 가난한 노동자도 있었다. 이것은 순전히 노무현의 인생역정을 통시적으로 서베이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런데 선거 중반 한 참 실탄이 딸릴 때 그의 옛 친구가 하루는 선거사무실엘 찾아왔다. 사업을 하는 친구인데 그는 노무현에게 정확한 액수는 모르나 최소 몇 천만 원에 달하는 후원금을 보태 쓰라며 내 놓았다. 우리는 야! 이게 웬 떡이냐, 최소한 오늘 저녁엔 모처럼 뱃속에 기름칠이라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런데 노무현은 그 돈을 앞에 두고 무척 곤혹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이 양반이 친구의 우정에 너무 감격했나? 왜 아무 말도 못해? 맘 변하기 전에 얼른 받아 넣지 뭐하나? 사업하는 저 친구로서도 쉽지 않은 결정일텐데, 저러다 세무조사라도 나오면 어쩌려고, 내 머리 속엔 그런 생각들이 명멸했다. 그런데 노무현은 한참을 망설이다 특유의 돌쇠같은 웃음을 지으며 그 돈을 정중히 사양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 순간 고깃국에 이밥을 말아먹는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 콩나물국밥에 시래기김치를 얹어 먹어야 하는 처절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노무현이 말한 사양의 이유는 이랬다. 나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며 가난한 노동자, 서민의 벗으로 살아왔다. 나는 그들의 진정한 벗이 되고자 애써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이유는 국회의원이 되면 더욱 힘있는 자리에서 그들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사업가 아닌가? 너는 내 친구임에는 분명하지만 너는 엄연히 사용자 아닌가? 내가 사용자인 네 돈을 받아쓰며 어떻게 노동자를 위해 일한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네 돈을 내가 받은 후에 네 회사에서 쟁의가 일어났을 때 나는 그 때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가?
나는 그 때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돈을 들고 왔던 그 친구조차 눈시울이 빨개지며 입을 꼭 다문 채 노무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때 선거가 끝날 때까지 콩나물국밥 외엔 더는 먹지 못한다 할지라도 노무현은 꼭 국회의원으로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는 일종의 비장한 사명감 같은 걸 느꼈다.
나는 그 때 노무현은 정말 말로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노동자, 서민의 친구로 살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임을 느꼈다. 당시의 선거자금은 중앙당에서 내려온 쥐꼬리만한 선거자금과 시민들이 보내오는 후원금들이 전부였다. 그 당시 노무현의 그런 모습을 보며 내부에서조차 지나친 결벽증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결벽증은 옳았다. 얼마나 많은 정치인들이 현실정치가 요구하는 정치자금의 유혹 앞에 너무도 무력하게 쓰러지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결벽하지 않고서는 이 문제는 깨끗할 수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한 번은 선거사무실에 밤늦게 전화가 걸려왔다. 술이 한 잔 거나하게 들어간 중년의 남자인데 자기는 지금 서울에 살고 있다고 했다. 신문 파는 일을 하며 겨우 목구멍에 풀칠하며 사는데 노무현이 국회의원에 출마했다는 얘길 듣고 전화 드린다는 말을 해놓고선 그는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흑흑, 제가 사람이라면 가서 전단지라도 돌리며 도와드려야 하는데…흑흑 제가 XXX이라 …흑흑, 제가 울산에서 일할 때 프래스공장에서 팔이 한쪽 짤렸거든요, 회사에선 내가 잘못했다고 …XXX덜 …근데 노무현 변호사가 돈을 타내 줬어요. …흑흑, 변호사 쓰려면 돈이 엄청 든다던데 돈도 안 받고 …제가요, 아들놈이 하나 있는데 그놈더러 법대 가서 변호사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노무현 같은 사람되라고… 이 애비처럼 못 배운 놈들 팔짤리고 다리 짤리고 허리 XXX 되도 XXX같이 돈 못 받아내는 이 애비같은 사람들 도와주는 변호사 되라고 …흑흑
저기요, 제가 XXX이라 가서 돕고 싶어도 못 가요. 가면 노무현은 XXX이 돕는다고 사람들이 놀릴 거고, 그리고 하루라도 돈을 벌어야 … 저기 그래서 말인데요, 거기 통장 같은 거 없어요? 내가요 몇 푼 안 돼도 돈을 좀 보내고 싶어요. 아니 쪼끔인데 그래두 내가 그거라도 안보내면 사람XXX도 아니잖아… 여러분 내 대신 수고 많이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노무현 그 분 꼭 국회의원 되야 합니다. 거 누구요? 허 뭐야 거? 아! 허삼수? 그런 XXXXXX 말고 노무현, 노무현 변호사, 그런 분이 되야 해요, 여러분 꼭 수고해주시오, …내가 가서 도와 드려야 되는데 …>
4.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1988년 13대 총선을 치르며 내가 만난 노무현의 모습은 용기 있고, 정직하고 인간적인 소탈한 성품의 사람이었다. 그는 결국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콩나물국밥만 먹으며 발로 뛰었던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고 이어 열린 5공 청문회에서 일약 전국적인 청문회스타로 떠올랐다. 우리는 그 때 그를 국회의원으로 당선시키는데 일조를 담당했던 것을 얼마나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하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런 그가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대통령후보로 나섰다. 엊그제 방송3사의 여론조사 결과 한나라당의 이회창을 누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나라당의 이회창이 집권하는 것은 우리 역사의 퇴행이요 시계바늘을 냉전시대로 거꾸로 돌리는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나는 서울이 고향이라 지역감정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내가 호남사람이거나 단순히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자이기 때문에 이회창을 싫어하는 그런 게 아니란 뜻이다.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이렇다.
이회창은 지역 분열주의자이므로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선 안 된다. 내가 이회창이 소망 없는 정치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는 지역분열의 현 정치구도의 수혜를 가장 많이 누리고 있는 덕분에 그걸 가장 많이 조장하는 정치인이라는 점이다. 이회창은 3김청산을 주장하며 낡은 정치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며 그 덕을 보려고 하면서도 정세에서 수세에 몰리면 반드시 대구나 부산을 찾아 장외집회를 하고 그 무슨 규탄집회를 밥먹듯이 해왔다. 집회를 하는 건 좋다. 하지만 왜 가까운 보라매공원이나 서울역 나두고 그 멀리 부산, 대구까지 기어내려 가는가? 지역분열정치작태를 정치의 기본기로 사용하는 데 그 수준이 삼김 뺨칠 지경이다. 삼김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른바 이회창 대세론의 근거가 영남몰표인데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민의 분열을 일부러 조장하는 이런 정치인은 절대 최고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회창이 걸어온 길은 민주주의를 위한 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한 길은 충실히 걸어 왔을지 모르나 그가 민주주의를 위해 어떠한 기여를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반민주주의의 편에서 기득권을 누리며 살아왔다. 1961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게 간첩혐의를 씌워 5.16 혁명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해 사법 살인할 때 민간인으로써 혁명재판부에 참여해 사형언도를 내린 판사가 바로 이회창이다. 민족일보사건은 박정희 군부가 정권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계획된 진보인사에 대한 명백한 사법살인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 조직의 일원으로써 어쩔 수 없었다고 이회창은 변명했으나 그것은 대쪽을 자처하는 그에게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궁색한 변명이다. 정의를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조직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문부식이 주도했던 81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때 주모자들에게 주저 없이 사형언도를 내렸던 사람이 바로 이회창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때 그들을 무료변론하며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배후지원 내지는 방조했던 미국의 책임을 물은 사람이 노무현이다. 그리고 청년학생들의 충정을 이해해 달라고 선처를 호소했다. 거기에 이회창은 사형으로 답했다. 이회창은 반민주주의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왔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 이홍규는 마루야마라는 이름으로 일제하 검찰의 사상담당 검사보로 일하며 독립군을 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