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복수 전쟁인가?
태안장로교회 원로목사
사회복지사
글:-남제현목사
태안신문사 칼럼니스트
"당한 만큼 갚아주겠다" 노골적인 복수 의도 담긴 극단적인 주장에 자리를 내줄 순 없다는 것이다. 다시 대선에 뛰어든 트럼프는 8년 전, 4년 전보다 섬 뜸하게 보여 "당한 만큼 갚아주겠다" 노골적인 복수전 선포이다. 2016년 유세 때 “내가 당신의 목소리 ”이번엔 “내가 당신의 복수”에 거침없이 외쳐댄다. “내가 당신의 전사이고, 당신의 정의이며, 당신의 복수다.” 트럼프는 “내가 지면 미국은 피바다가 된다”거나 “이주민은 짐승들”이란 식의 거친 말이다.
이런 비판에 극단적인 키워드가 ‘복수’로 여기에 열광한 지지자들을 계속 붙잡아두려면 자극적인 거친 언어에 대중들에게 동정을 가져올 수 있다. 민중을 선동하는 여론조사가 득세하고 허위의식이 넘치는 비정한 사회가 된 것이다. 27년 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정치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 이후 그간 지켜졌던 선거판은 세월이 흐를수록 거꾸로 퇴보하여 진영 사이의 골을 깊이 파놓고 말꼬리 물고 늘어 저 공공연히 복수를 외치는 지경에 왔다. 그래서 사회는 더욱 혼란스러워 걱정된다.
살다 보면 누군가가 이유 없이 미워지기도 하고 때로는 좋아 보이기도 할 수 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뉴스에 천하에 못된 사람이 등장하여 분노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분노를 부추기어 자기의 분노 갚아 보려는 노림수에 이용되고 있다. 특히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직접적인 자극을 주기 때문에 쉽게 감정의 동요가 일어난다. 더구나 그 사건이나 사람의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 보여주기 때문에 쉽게 판단하게 된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그림자의 투사’라는 융의 설명을 이해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그림자’의 예를 들면 어린 학생들이 담배 피우는 것에 대해 가장 분개하는 사람은 깡패들이다. 깡패들은 자신의 불량스러운 행동을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자신이 인정하기는 싫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그림자라고 한다. 어린 학생이 담배 피우는 것을 보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게 되어 강한 분노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가정에서는 아내가 시부모의 흉을 볼 때면 남편은 이성을 잃고 흥분한다.
자기 자신도 인정하기 싫은 부모에 대한 불만을 무의식에 감추고 있었는데, 남이 지적할 때 자신이 그것을 의식하게 되는 경우를 피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점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부모를 비난하는 일을 조심한다. 그러나 여자들은 남자들의 이러한 특징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 사소한 일로 아무 생각 없이 시부모에 대해 비난을 하다가 큰 부부 싸움으로 번지는 수가 있다. 투사란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 마음의 일부분이 마치 밖에 있는 것처럼 지각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그것에 대해 좋다 나쁘다고 판단하는 것들의 상당 부분은 우리의 무의식에 있는 것들이 투사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똑같은 것을 보고도 호불호로 갈리는 것이다. 마치 자기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정치 권력 집단의 상호 비난, 지역감정, 비방과 뒷이야기, 흑색선전 등은 자기의 무의식에 있는 그림자를 투사하여 상대방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미숙한 성격을 더욱 어둡게 채색하여 나쁜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라거나 ‘자기 눈의 들보를 모르고 남의 눈의 티를 탓한다’라는 말도 투사의 전형적인 예가 된다. 집단적 투사는 사회적 편견에 성경에 “간음한 여인을 단죄하러 모인 군중에게 예수님은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만이 이 여인을 쳐라!’ 하나둘 사람들이 물러났고 나중에는 예수님과 여인만이 남게 되었다. 예수님의 그 말을 듣고 물러선 그 시대의 군중은 그래도 순진한 편이다. 요즈음 같으면 한층 더 큰 소리로 ‘저 여인을 죽이라’ 고함침으로써 내부의 의혹을 잠재우려 했을 것이다. 집단적 투사는 모든 사회적 선입관념과 편견을 강화해 준다.
대중매체가 선동적으로 그런 집단적 투사를 부추기는 일을 해서 안 된다. 그러니 우리는 괴롭더라도 남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투사된 것은 자기의 무의식 일부분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배려와 존중보다는 미움과 분노가 팽배해져 있다. 누군가가 미워질 때 흥분하기전에 그것이 나의 그림자의 투사가 아닐까 하는 점을 검토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인격은 한 단계 성숙할 것이다.
카트리나는 어릴 때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다른 가정에 입양되어 성장한다. 카트리나는 낳은 어머니가 왜 나를 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양어머니한테 화풀이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어리석게도, 양어머니를 괴롭히면 실제로 친어머니에게 어떤 식으로든 앙갚음이 된다고 생각이 희고. 폭언하고, 발을 구르고, 짜증을 내기도 하고 문을 쾅 닫는 등 너무 너무나 싫고 미웠어…. 그런데 분노 때문에 일어난 행동이 믿어지지 않는 새로운 변화는 성서를 읽는 데서 생긴 성격의 변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