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얼마전 젊은이들 한테 설문하니 6.25 전쟁은
조선시대에 발생했다는것이 30%이상되고
6.25 전쟁은 일본과 싸운전쟁이라는것도 상
당수에 이른다는 것이다.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만 1129일간 지속되었다.
필자는 6.25 전쟁에 대한 관련사실을 보다더
정확히 알기위해 육군 군사연구 자료를 참고
하였고 일부는 육군대학 전쟁사 교관에게 문의하였다.
■ 중요사실들
1. 북한이 남한을 기습남침한 명백한 증거
6.25 전쟁이 북한의 남침임을 증명하는 근거
는 4가지만 제시한다.
첫째, 공개된 구소련 비밀문서다
냉전후 공개된 구소련 비밀문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1950년 3월 30일 남침을 승인
하였다.
※ 소련수상 후르시조프 회고록에도 김일성이
전쟁을 발의하고 스탈린이 승인했음이 명시
되었다.
※북한 주재 소련대사도 1950년 6월 15일 본
국에 보고한 문건에 의하면 6월 25일 새벽에
공격을 개시함을 알렸다.
※1992년 이후 러시아 교과서에도 북한의 남
침이 명시되어있다.
둘째, UN은 북한을 침략국으로 최종결정함
제 2차대전후 새로이 창설된 국제연합인 UN
은 6.25 전쟁에 소련, 중국 및 북한을 최종 침략국으로 결정하였으며 미국을 위시한 16
개국은 북한과 중국의 불법남침에 응징하기 위하여 참전하였다.
6.25 전쟁을 북침이라면 UN 참전 16개국은 침략국이 될것이며 6.25 전쟁을 내전이라
면 UN 참전국들은 남북한에 내정간섭이 될 것이다
하긴 모 전직 대통령은 재직시 용산 미군기지
는 침략과 간섭의 상징이라는 망언을 하였다
셋째, 공개된 북한의 남침근거다.
북한군 정찰명령 제 1호(1950년 6월 18)에
는 공격준비를 6월 22일 24시까지 완료할것
을 명하였고
1950년 6월 24일에 발급된 전투명령 1호에
는 공격개시후 임무를 명시하였다.
※북한군 작전국에 소속된 유성철은 내가 남침
선제타격계획을 작성했음을 증언하였다.
넷째, 당시 남한은 북침능력이 전혀안되었다.
전쟁에서 공격을 하는 군대는 방어하는 군대
보다 적어도 전투력이 2배~3배이상은 강해야 한다는것은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1950년 우리군은 북침할 전투력도 부
족할뿐만 아니라 북침을 할 전투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다.
단적으로 북한군은 약 20만여명의 정예화된 병력에 전차와 야포 및 전투기로 무장되었으
나 우리 국군은 전차나 전투기도 없이 단지 10만여명의 치안유지의 보잘것없는 전투력
에 불과하였다.
북한의 남침 3일만에 국군 전방사단중 6사단
만 제외하고 44,000여명 인명피해를 입었으
며 초전피해가 큰 2ㆍ5ㆍ7사단은 해체되었다
게다가 당시 국군의 전투준비는 한심하기 그
지없었는바 6.25 전쟁발발 2주전 전군 주요
지휘관들의 인사이동, 1950년 6월 24일 전군 장병들1/3에게 휴가 및 외출 그리고 6.25 전
쟁 발발직전 용산 장교구락부에서 장군들의 만찬등이 있었다.
예컨데 6.25 전쟁은 북한의 명백한 남침인데
이제는 황당한 북침을 주장하는일은 더이상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2. 6.25 전쟁시 쌍방 군사력 비교
ㆍ보병 전투력은 2:1로 절대열세
북한군은 201050명(10개보병사단+ 2개보병
여단+ 1개전차여단)에 비해 국군은 103827
명(8개 보병사단)이었다
ㆍ포병은 북한 2492문, 국군 1051문
ㆍ전차는 북한 242대 국군은 0
ㆍ항공기는 북한 226대 국군 22대(연락기)
ㆍ함정은 북한 110척 국군은 36척
※ 지식익이라면 알아야할 중요한 사실
당시 남북한 병력수로 보면 북한군 규모가
국군보다 2배에 이른다.
그러나 전차ㆍ전투기등 무기등을 반영한
피아 전투력 지수로 환산하면 최소한 4:1
로서 국군은 절대열세한 입장이었다.
※ 국군 배치
국군은 1개독립연대(17연대)와 4개사단
(1ㆍ7ㆍ6ㆍ8사단)을 38선에 좌로부터 옹진
반도ㆍ개성/문산축선ㆍ동두천/의정부축선ㆍ
춘천/홍천축선ㆍ주문진/삼척축선으로 배치
하였다.
4개사단(2ㆍ3ㆍ5ㆍ수도사단)은 후방주요도
시와 서울에 배치하여 평시 공비토벌과 전시 전방증원이었다.
※ 국군 재편성과 군단창설
북한이 남침을 하자 국군은 초기 8개사단을 5개사단으로 재편하였고 초전피해가 큰 2ㆍ5ㆍ7사단은 해체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제 1군단(수도사단ㆍ8사단)과 제 2군단(1사단 ㆍ6사단)을 추가창설하였고 3사단은 육본 예비로 하였다.
3. 피아인명피해
6.25 전쟁시 발생한 인명피해는 공산군과 북
한 민간인 피해는 어디까지나 추정치임으로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략 500만명으로 추산
된다.
※ 인명피해는 전사ㆍ부상ㆍ사망ㆍ포로 및 실
종등을 망라한다.
※인명피해= 국군 62만여명+ UN군 15.5만여
명+공산군 178만여명(추정)+ 남측 민간인 99만여명+ 북한민간인 150만여명(추정)등
ㆍUN군 전ㆍ사망자 40,667명중 미군은 36,
940명으로 91%를 차지한다.
4.국제사회가 대한민국에 지원국은 63개국
병력파견 16개국+물자지원 32개국+ 의료지
원 5개국+ 전후복구지원 7개국 +지원의사표
명국 3개국등 당시 전세계 93개국중 63개국
이 대한민국을 지원하였다.
※ 한국전쟁에 참전한 UN군 연인원 194만여
명중 미군은 179만으로 92%를 차지하였다.
지금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우리의 입장은 역지사지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사료된다.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
즉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도와줌이 진정한 친
구라는 의미다.
5. 낙동강 방어와 인천상륙작전 의미
ㆍ낙동강 방어
무려 45일간(8월 1일~9월 14일) 지속되었다
필자가 본 낙동강 고수방어에 성공할 중요한 4가지 요소은 다음과 같다.
첫째, 최초 방어선 240km를 180km로 대폭
조정하여 적 돌파방지를 위해 방어종심을 강
화시켰다.
둘째, 워커장군은 신속기동예비대를 돌파구에
적시역습으로 돌파구를 회복시켰다.
셋째, 학도의용군ㆍ소년병(14~17세) 및 심지
어 노무자(탄약 및 식량운반등)까지 가담한것
이 큰힘이 되었다.
넷째, 미 전투기 1000여대와 40여대 폭격기
로 적을 집중강타하여 적은 공격능력은 상실
하였다.
※ 국군 1사단 다부동 전투(8월 16일~28일)
고 백선엽 장군은 너무 상황이 긴박하여 학도
병ᆞ신병들은 단지 3~4시간 사격과 수류탄 투척훈련만 받고 전선에 투입하였으며 한번 전투를 치룰때마다 부대원 30~40%가 사라
졌다고 한다.
당시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내가 후퇴
하면 내 뒤에 총을쏘라"고 하여 부하들의 전투
의지를 붇돋아 만 30분만에 적에게 빼앗긴 고
지를 탈취하자 당시 미 27연대장(마이켈러리
대령)은 "한국군은 신의 군대"라고 감탄하였다
ㆍ인천상륙작전 의의
첫째, 북한군은 65,000여명(포로13,000여명
포함)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둘째, 인천상륙작전은 낙동강에서 정면반격시
간을 1/3로 줄이고 아군 14만여명과 국민 피
해 200만여명을 줄일 수 있었다.
※ 한편, 인천 자유공원 내 맥아더 장군 동상은 한국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을 지휘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7년 9월 설치됐다.
6. 시기별 주요작전
● 중공군 개입과 UN군 힘든 철수(1950년.
11월 27일~12월 26일/ 총 30일)
※ 장진호 전투(1950년 11월27~12월 10)
미 해병 1사단이 중공군 12개사단과 전투로
6000여명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나 구사일생
으로 함흥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함으로서 흥
남철수작전준비시간을 제공하였다.
※ 흥남철수작전(1950년 12월 15~26일)
미 10군단과 한 1군단 및 민간인을 철수시켰
다.
역사이래 최대 흥남철수작전에서 전투병력 10만 여명 인도주의적 피난민 약 10여 만명 더해서 전투장비를 포함하면 덩케르크 34만 여명 철수작전 보다도 훨씬 규모가 컸던것
이다.
당시 한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은 미측이 북한
피난민들을 해상철수시키지 않으면 우리가
피난민들과 함께 육상으로 철수하겠다고 한
것이 미측을 감동시켜 해상철수를 시켰다는
것이다.
흥남철수에 민간인 10만여명 철수는 세계전
쟁사에서 최고의 휴메니즘을 보여준 것이다.
● UN군 재반격과 38선 교착전(1951년 1월
23일~1951년 7월 9일/5개월18) 주요 전투
1950년 10월 24일 중공군 25만여명의 개입
으로 국군과 UN군은 1951년 부득히 1.4후퇴
를 하여 서울을 다시 적에게 넘겨주고 37도선
인 평택~ 제천선까지 밀린 상태였다.
이에 UN군은 재반격하여 다시 수도 서울을 탈
환후 38선에서 교착전을 하는데 당시 반격발
판을 마련한 대표적인 전투는 다음과 같다.
※ 지평리 전투(2월 13일~16일/4일)
미 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중공군에게 막대
한 손실을 가해 반격발판을 마련하였다.
※ 설마리 전투(4월 22일~25일/4일)
영국군 글로스토 힐 대대는 중공군 공격을 4
일간 저지하여 아군이 서울북방에서 방어준
비시간을 제공하였다.
※용문산전투와 파로호전투(5월18~28/11일)
국군 6사단은 중공군 3개사단 공격을 격퇴후
추격하여 파로호에서 중공군 수만명을 수장
시켰다.
● 휴전협상과 고지 쟁탈전(1951년 7월19~
53년 7월 27일/2년 9일)
1951년 7월부터 휴전협정이 개시되자 남북
쌍방은 유리한 상태에서 휴전협정을 이루고
자 한치의 땅이라도 얻기위해 피비린네나는 고지 쟁탈전을 하였으며 대표적 고지쟁탈전
은 다음과 같다.
※ 피의능선과 단장의 능선 전투(1951년 8월
18일~10월 13일)
미 2사단과 북한군 2개사단간 피아 17000여
명 인명손실로 능선전체가 피로 물들여졌다.
필자는 연대장 (1996~1997년)근무를 피의
능선이 바라보이는 양구지역에서 하였다.
※저격능선전투(1952년10월 14~11월 24)
국군 2사단과 중공군 2개사단이 42회 치열한
공방전을 치루었다.
필자 육사동기들은 매년 5월 4일이면 저격능
선 지역에서 대대장 근무시 지뢰사고로 목숨
을 잃은 고 강병식 대령의 추모식에 참석한다.
특히 올해는 대형버스로 동기생 34명이 동참
하여 고인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필자도 건강이 허용하는한 매년 강병식 동기
의 추모식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 백마고지 전투(1952년10월 6~10월 15)
국군 9사단과 중공군 3개사단과 공방전으로
주인이 7번이나 바뀌었다.
지금 철원평야(650평방 km)가 대한민국영토
에 편입된것은 백마고지전투에서 승전한 덕분
이었다.
필자는 소령ㆍ중령때 백마고지가 보이는 사단
에서 근무하였으며
예편후 철원 주상절리를 걸을때마다 멀리 백
마고지를 바라보면서 많은것을 느끼곤 한다.
■ 결론
지금까지 6.25 전쟁을 개관해보면 6.25 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밀어붙였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후 주요전투는 피의능선과 단장의 능선 전투만 제외하고 용문산 전투ㆍ
저격능선전투 및 백마고지전투등은 모두 중공
군과의 전투였다.
이제 호국의 달인 6월이 다가오고 있고 필자
는 육사동기들과 현충원을 참배 할 것이다.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 장군은 전쟁승패는 나라가 크고 작음에 있지않고 국민들의 싸우
고자하는 의지에 달려있다고 하였는바 국민
모두는 현충일을 맞아 戰意를 다져야한다.
필자 선친은 전북 고창 선운사 빨치산 토벌작
전에 가담(부상)하였으며 당시 참전한 동료들 기념하는 충혼탑에 묵념할때마다 눈시울을 적시곤 하셨다.
필자도 선친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건강이 허
용하는한 애국집필을 계속 할 것이다. - 끝
한국문화안보연구원. 김명수(육사 31)박사
2023년 5월 29일
PS : 6.25 전쟁에 미군참전은 [神]의 가호다
미 합동전략분석위원회는 보고서에 “미국국
가안보에 중요지역을 주변지역(Peripheral)
과 핵심지역(Vital)로 분류하고,
그 중요도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한 후 여기에 맞춰 대외 원조를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한국을 주변지역으로 분류 하고 안보지원우선순위에서는 16개국 중 13
위로 매우 낮게평가하였다.
이렇게 전략적 가치가 낮은 한반도에 1950년 6월28일 UN군 파병을 결의하고 7월 5일부터 미지상군이 투입된것은 정말 하나님이 보우하
사였다.
첫댓글 우리 세대는 알고 있는 <한국전쟁>의 진실을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알려주어야 국가 안보관이 튼튼해지겠지요. 종종 문화안보에 대한 폭넓은 재정리로 신세대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당부합니다.
학교 교육을 통해 한국전쟁의 정확한 이해를 가르쳐야 하는데 좌파정권은 군대에서조차 이를 부정하는 국방정책을 이행했으니 일반국민의 6.25전쟁에 대한 인식이 낮아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옆집 불구경하듯 하는 일부국민의 인식을 보더라도...한심합니다. 언론매체의 보도도 불만스럽고요. 70년 전에 전쟁을 겪은 국민인가 싶을 정도로 안이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남침이라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호도 왜곡하는 종북주사죄파의 무리가 우리의 역사와 니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서슴없는 반역을 저질렀지요. 다행이 그 무리를 권력의 정상에서는 몰이냈지만, 그들의 역주행은 계속 이어지고 있읍니다. 능화가 제시하는 역사적 사실 등을 바탕으로 우리 후세에 대한 교욱을 가일층 강화해나가야 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