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플롯
소설을 쓰려면 세 가지 플롯을 알아야 한다.
플롯이 뭐냐고요?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뭐, 그런 것이다.
내가 소설가는 아니니까 여기에 대해 더 이상 묻지 마시기를!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아크 플롯(arc plot), 안티 플롯(anti plot), 미니 플롯(mini plot).
아크 플롯은 정통 플롯이다.
여기 주인공이 있다.
주인공은 성취해야 할 목표가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데 어려움, 장애물, 해결해야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어찌저찌해서 결국, 마침내,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한다.
주인공이 장애를 극복하고 어려움을 해결하고 목표에 도달하는, 그러니까 시간의 순서대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상업예술에 속하는 소설, 드라마, 영화 시나리오가 아크 플롯이다.
아크 플롯은 매우 안정적이고 대중적인 플롯이다.
안티 플롯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크 플롯과는 반대되는 형태이다.
여기서는 시간의 역순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거나, 목표가 의미를 잃고 결말 없이 끝나거나, 하여튼 정통이 어난 구성이다.
여기서는 이야기의 3막구조, 목표가 있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목표를 이룬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주제가 중요하다거나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중요하다.
미니 플롯은 사건의 전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한 부분만, 절정의 부분만, 핵심만 보여주는 것이다.
뭐, 난 전문가가 아니니까 대충 여기까지 설명하기로 하고…
갑자기 소설에서나 사용하는 플롯 이야기를 왜 들고 나왔냐고요?
깨달음을 성취한 성인들의 말씀이 서로 다르게 이야기하는, 어쩌면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는 구성(플롯)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무지몽매한 대중들을 어리둥절케하고, 헷갈리게 하고, 팔로워들을 서로 갈라지게 하고 지루한 논쟁과 거부감과 심지어 서로 비난까지 하게 한다.
정통 플롯
붓다의 가르침, 그러니까 니까야(대승 경전은 붓다의 가르침이 아니고 후대의 저술임.)는 대체로 정통 플롯이다.
이 괴로운 세상에 내던져진 주인공이 있다.
그는(그녀)는 생각한다.
“삶이 평탄치가 않구나. 나는 왜 태어났지? 사람들은 왜 태어나서 개고생하다가 죽는 것일까? 존재란 무엇인가?”
그에게 목표가 생긴다. 존재의 문제를 파헤쳐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는 명상을 통해 내면을 통찰해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문제, 이 세상에 태어나게한 원인, 존재의 원인을 발견하고 그 문제를 제거한다.
“태어남을 다했다. 할 일을 다 해마쳤다. 다시는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목표를 성취했다.
이것은 정통 플롯이다.
초기불교는 대체로 정통 플롯을 따른다.
먼저 주인공은 번뇌로 얼룩진, 온갖 욕망으로 가득한, 지혜가 부족하고 통찰지가 없는 무지한 상태라고 전제한다.
여기가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그에게 존재란 괴로움이며, 거기서 벗어나려면 수행을 해야 한다고,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시작한다.
명상을 하며, 내면으로 들어가 존재하게 만든 원인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나간다.
마침내 모든 원인들을 무너뜨리고 청정함에 도달한다.
그 청정한 그 자리에서, 거기에 원래 ‘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은 다해마쳤다.”
로 끝을 맺는다.
안티 플롯
육조단경이나 심신명은 안티 플롯과 비슷하다.
“깨달음의 자성은 본래 청정하다. 이 마음을 잘 이용하면 바로 부처를 이룬다.”
(菩提自性 本來清淨 但用此心 直了成佛)<혜능 대사>
“깨달음은 어렵지 않다. 간택만 하지 않으면 된다. 좋아하고 싫어하지 않으면 분명하고 명백하다.”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승찬 대사>
여기서 이야기의 플롯은 결말에서 시작한다.
“당신은 원래 청정해. 깨달아 있어. 오히려 깨닫지 못했다는 착각이 장애야. 넌 원래 해탈해있어. 그런데 왜 구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왜 그렇게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는 거야? 깨닫고 나면 네가 원래 청정했었다는 것에 놀라고, 원래 그 자리였다는 것에 놀랄 거야. 진리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어. 없던 진리가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야. 그럼 진리가 아니지. 진리는 원래 영원불변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넌 그 청정한 그 자리를 지켜. 어떤 대상이든지 좋아한다고 붙잡지 말고 싫어한다고 밀어내지 마. 그럼 진리는 명백해져.”
이렇게 어떤 스승들은 깨달음의 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이건 모두에게 해당하는 플롯이 아니다.
천재들에게나 해당하는 플롯이다.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한용운>
이걸 이렇게 바꿔봅시다.
“지리한 수행 끝에 통찰지에 몰려가는 검은 번뇌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청정한 그 자리는 누구의 본래면목입니까?”
“당신은 원래 푸른 하늘이긴 해, 그런데 지금은 검은 구름에 쌓여서 푸른 하늘이 잘 안 보여. 그러다가 명상 중에 마음이 쉬고 고요해질 때가 있어. 그때 청정한 마음이 잠깐 얼굴을 드러내긴 하지.”
그러니까 당신은 원래 청정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번뇌의 어둠에 묻혀서 그걸 볼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 청정한 그 자리를 잘 지키면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상이 나타나면 좋아하고 싫어하지 않으면 된다고?
좋아하고 싫어함을 넘어 대상을 붙잡고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 사람에게 좋아하고 싫어하지 않기만 하면 도가 명명백백히 드러나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안티 플롯은 통찰지가 타고났거나, 구부 능선에 도달해 세상을 발 아래 두고 위로 푸른 하늘만 있는 사람에게나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미니 플롯
미니 플롯으로 구성된 가르침은 문제의 핵심만 다룬다.
어떤 제자가 와서 붓다에게 하소연했다.
“스승님, 율사 스님은 저에게 계율을 외우고 조그마한 계율도 어기지 말라고 강요하고, 강사 스님은 온갖 어려운 교리를 저에게 들이밀며 이해시키려고 하는데, 이게 저를 힘들게 합니다. 저에게 스승님의 가르침은 어려운 거 같습니다. 저는 속가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럼 너는 다 무시하고 이거 한 가지만 지켜라. 마음 하나만 지켜라.”
그는 숲으로 들어가 마음 하나만 지키며 평생을 수행해서 아라한이 되었다.
재가자인 바히야는 거리에서 탁발하고 있는 붓다를 붙잡고 애원했다.
“저에게 지금 당장 죽음이 닥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탁발하는 도중에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 가르침을 주십시오.”
“바히야여, 보일 때는 보기만 하라. 들릴 때는 듣기만 하라. 보일 때 보기만 하고 들릴 때 듣기만 하면 거기에 네가 없다.”<바히야 경>
바히야는 그 자리에서 언하대오했다.
마조 선사에게 대매 스님이 찾아와 불법의 요체를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음이 부처이니라.(即心是佛)”
대매 스님은 이것을 가지고 산으로 들어가 삼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매실이 익어 스승의 인가를 받았다.
화두는 미니 플롯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뭣고?”
여기서는 이야기의 삼 막 구조, 서론 본론 결론이 없다.
화두가 단순해보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평생을 화두 하나 붙잡고 살아가지만, 그 하나가 수만 대군의 적을 무찌른다.
그러나 화두가 매우 직관적이기는 하지만 논리성과 개연성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다.
여러 가르침들이 서로 모순되어 보인다고 해서 전혀 다른, 상반대는 가르침이 아니다.
이야기의 시점이 다른 것이다.
또는 이야기의 핵심만 다루고 다른 것은 무시하기 때문에 다르게 보일 뿐이다.
사람마다 지혜가 다르고, 근기(꾸준함)가 다르고, 성향이 다르고, 인내력이 다르고, 의지가 다르므로 모두에게 똑같은 방법을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정통 코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역방향 코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단순 코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가르침도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지혜의 영역이거나 성향의 영역인 것이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여차저차해서 드디어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와 “원래 청정해. 다만 물들지만 않으면 돼.”가 다르게 보인다고요?”
그건 공부하다보면 알 게 됩니다.
다 때가 있다는 것을….
첫댓글 천천히 몇번 읽어보겠습니다
감기조심하십시요
고맙습니다 스님
사두ㅡ사두ㅡ사두
_()_
좋은 비유입니다. 👍
사두 사두 사두 _()_
마하 반야바라밀 _()_
나무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