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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군 부인 원씨 묘지명을 읽고 아래글과 관련된 내용 수정
● 익재공 2배위의 계대에 관한 함양박씨 카페 내용 중 오문관련 글
*이 글은 지난 번에 족보 복사본과 함께 올린적이 있는 글입니다.
아래 평원군부인 원씨 묘지명부터 새 글입니다.
관련된 글이기에 함께 올립니다.
함양박씨 카페에 아래와 같은 글이 올라 있습니다.
[이제현(李齊賢)은 함양 박거실(咸陽朴居實)의 사위는 잘못된 기록이다.
박충좌와 이제현은 1287년생 동갑내기인데
이제현은 박충좌의 증손서(曾孫壻- 증손녀 사위)가 되었다는 것은 잘못되었다.]
이를 경주이씨 세보의 기록과 함양박씨 거실 계대와
춘천박씨 계대를 알아보고 그 연관성을 살펴
위의 함양박씨의 오문 관련 글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 경주이씨 대종보 총편 P207 족보 ‘제현(齊賢)’ 의 2배(二配) 기록
[배 춘천 박씨 사복시정 거실의 여요(配春川朴氏司僕寺正居實의 女요.)
대언 경의 손이요(代言瓊의 孫이요.) 판서 충좌의 증손이요(判書忠佐의 曾孫이요.)
찬성 원주 원관의 외손이다.(贊成原州原瓘의 外孫이다.) 생2남3녀(生二男三女)]
-배는 춘천박씨 사복시정 거실의 따님이요. 대언 경의 손녀이고. 판서 충좌의 증손녀이며
찬성사 원주 원씨 원관의 외손이다. 2남 3녀를 낳았다.-
▲ 함양 박씨 무신보 정조 12년(咸陽朴氏戊申譜正祖十二年) (1788)
함양박씨 지빈파(咸陽朴氏之彬派) 거실(居實) 계대
○ 6세- 지빈(之彬)- 문과(文科). 조청대부(朝淸大夫). 위위(尉위). 치사(致仕)
○ 7세- 장(莊)- 문과(文科) 총랑(摠郞) 추봉 함양부원군(追封咸陽府院君)
○ 8세- 충좌(忠佐)- 자 자화(子華). 호 치암(恥菴-心=止). 문과(文科). 찬성(贊成).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 시 문제(諡文齊)
○ 9세- 경(瓊)- 문과(文科). 판서(判書)
○ 10세- 거실(居實)- 우윤(右尹)
○ 11세- 5남 1여 중 여 이지유(女李之柔)에게 출가
▲ 춘천 박씨 세보(春川朴氏世譜) 거실(居實)의 계대
○ 1세- 중시조 항(中始祖 恒)- 초휘 동보(初諱東甫). 자 혁지(字革之). 등문과(登文科).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
증시 문의(贈諡文懿). 사림(士林)에서 구봉서원(九峰書院)을 건립하여 향례(享禮)
○ 2세- 원굉(元宏)- 개명광정(改名光挺). 등문과(登文科). 대광문하평장사(大匡門下平章事).
김부만호(金符萬戶)
○ 3세- 안구(安具)- 등 문과(登文科).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
○ 4세- 거실(居實)- 사복시정(司僕寺正)
○ 5세- 1남 3녀 중 장녀
- 이제현(李齊賢). 경주인(慶州人). 호 익재(號益齋). 시 문충(諡文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 6세- 외손 달존(子達尊)- 호 운와(號雲窩). 보문각 직제학(普門閣直提學).
......자 창로(子彰路)- 밀직(密直). 유효행(有孝行)
......1녀- 박동생(朴東生)- 영해인(寧海人) 판사(判事).
......2녀- 송무(宋懋)- 진천인(鎭川人). 판전(判典)
......3녀- 공민왕 혜비(恭愍王惠妃)
위와 같이 춘천 박씨 세보(春川朴氏世譜)에 기록하고 있다.
O. 함양박씨와 춘천박씨 세보의 비교
위의 함양박씨 세보와 춘천박씨 세보의 계대를 살펴보니
함양 박씨 10세 거실의 딸은 이지유에게 출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춘천박씨 4세 거실의 3녀 중 장녀가 경주인 이제현에게 출가하여
달존. 창로의 2남과 3녀를 출산한 것으로
춘천박씨 세보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오문의 족보에 기록된 익재공 2배 춘천박씨 계대(代言 瓊의 孫이요. 判書 忠佐의 曾孫.)는
잘못 오기(誤記)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하면 경주 이씨 중조 17세 익재공(휘 제현) 2배(二配)인 춘천 박씨의 계대는
춘천박씨 세보의 계대가 아닌 함양 박씨 박거실의 계대를 올려놓은 것이 분명하다.
박거실의 행적을 쫓다가 춘천박씨가 아닌
함양박씨 거실의 계대를 실수로 오기(誤記)한 것으로 보인다.
17세 익재공(휘 제현) 2배(二配)인 춘천 박씨의 경주이씨 대종보의 계대는
[춘천박씨(春川朴氏) 사복시정(司僕寺正) 거실(居實)의 녀(女)요.
대언(代言) 경(瓊)의 손(孫)이요. 판서(判書) 충좌(忠佐)의 증손(曾孫)] 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함양박씨(咸陽朴氏)의 세보(世譜)에는 그 계대(系代)가
[10세 우윤(右尹) 거실(居實). 9세 판서(判書) 경(瓊). 8세 찬성사(贊成事) 충좌(忠佐)]
로 기록하고 있다.
익재공(益齋公- 휘 제현)에게 출가(出家)하였다는 거실(居實)의 1녀는
충좌(忠佐)의 증손(曾孫)이라고 하였으나
실지 우윤(右尹) 거실(居實)의 1녀는 이지유(李之柔)에게 출가하였다.
벼슬명도 달라 오문(吾門)의 족보에는 휘 거실(居實)의 관직이 사복시정(司僕寺正)인데
함양박씨(咸陽朴氏)의 세보(世譜)에는 우윤(右尹)으로 되어 있고
오문(吾門)의 족보에는 휘 경(瓊)의 관직이 대언(代言)이나
함양박씨 세보에는 판서(判書)이고
오문의 족보에는 휘 충좌(忠佐)의 관직이 판서(判書)이나
함양박씨 세보에는 찬성사(贊成事)로 되어 있다.
춘천박씨(春川朴氏) 휘 거실의 계대를 살펴보자.
1세 중시조(中始祖)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 항(恒)
2세 대광문하평장사(大匡門下平章事). 김부만호(金符萬戶) 원굉(元宏)
3세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 안구(安具)
4세 거실(居實)- 사복시정(司僕寺正)
5세 3녀 중 장녀- 익재문충공(益齋文忠公)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이제현(李齊賢)에게 출가(出家).
6세 외손- 보문각직제학(普門閣直提學) 운와공(雲窩公) 달존(達尊).
밀직공(密直公) 창로(彰路)와 3녀 중 셋째가 공민왕(恭愍王)의 혜비(惠妃)로 기록되어 있다.
오문(吾門) 족보의 기록과 비교해 보면 사복시정(司僕寺正) 거실(居實)의 관직까지는 같으나
윗대의 계대가 모두 틀린다.
그러나 사복시정(司僕寺正) 거실(居實)과
그 아랫대(5세) 3녀 중 첫째가 익재공에게 출가한 사실과
2남 3녀를 생산한 것은 오문 족보의 기록과 같다.
이 사실이 정확하다면 오문 족보의 익재공 2배(二配)의 계대는 아래와 같이 바뀌어야 한다.
[춘천박씨(春川朴氏) 사복시정(司僕寺正) 거실(居實)의 녀(女)요.
대제학(大提學) 안구(安具)의 손(孫)이요.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원굉(元宏)의 증손(曾孫)이요.
중시조(中始祖)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 항(恒)의 현손이다.]
* ‘5세 3녀 중 장녀’에서 장녀라고 한 까닭은
익재공. 왕수. 유진의 차례로 이름이 올라있어 익재공이 거실의 장녀에게 장가든 것으로 보았다.
● 평원군부인(平原郡夫人) 원씨(元氏) 묘지(墓誌)
- 이용주 종친님이 보내주신 메일입니다.
- 평원군부인은 익재공의 장모님입니다.
○ 평원군부인(平原郡夫人) 원씨(元氏) 묘지(墓誌) - 졸고천백 제2권 : 졸옹 최해
고려의 대신(大臣) 가운데 휘가 항(恒)인 분이 있어
세조황제(世祖皇帝) 때에 태사(太師) 충렬왕(忠烈王)의 재상을 지냈으니,
성은 박씨(朴氏)요 지위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아들 광정(光挺)이 처음으로 본국의 자제로 선발되어 원나라 궁궐을 숙위(宿衛)하고,
천자의 명을 받아 금부(金符)를 차고 소신교위(昭信校尉)
고려서경등처수수군부만호(高麗西京等處水手軍副萬戶) 겸(兼)
광정대부(匡靖大夫) 평양부윤(平壤府尹)이 되어 졸하였다.
그 아들 정윤(正尹) 거실(居實)과 손자 독만(禿滿)이 능히 그 직책을 세습하여
품계가 모두 소신교위가 되었으니,
고(故) 평양군부인(平壤郡夫人) 원씨(元氏)는
바로 정윤공(正尹公)의 아내이자 독만에게는 어머니가 된다.
11대조 휘 극유(克猷)는 개국 초에 벼슬하여 정의대부(正議大夫)가 되었으며,
이후로 훌륭한 자손이 계속 이어져 세월이 갈수록 더욱 현달하고 번성하였다.
조부 휘 부(傅)는 고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시호는 문순(文純)이며,
부친 휘 관(瓘)은 고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이며,
모친 김씨(金氏)는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에 봉해졌는데
고 밀직승지(密直承旨) 휘 신(信)의 따님이다.
자식으로는 아들 2명과 딸 5명을 두었다.
맏아들은 독만(禿滿)이고 다음은 장명(長命)인데 장명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맏딸은 중정원 장사(中政院長史) 심양(瀋陽) 홍의손(洪義孫)에게 시집갔으나 먼저 죽었고,
다음은 흥위위 낭장(興威尉郞將) 김지경(金之庚)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중대광(重大匡) 낙랑군(樂浪君) 왕수(王琇)에게 시집가서 나라의 종친(宗親)이 되었고,
다음은 선수(宣授) 왕부단사관(王府斷事官) 광정대부(匡靖大夫) 전(前)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제현(李齊賢)에게 시집갔다.
부인은 나면서부터 훌륭한 자질을 지녔고
성품이 부드러우면서도 지혜로워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다.
나이 열세 살 때 남편을 택하여 박씨 집안에 시집을 왔는데,
시댁에 들어와서는 시부모 봉양하기를 마치 친정 부모를 사랑하듯이 하면서도
예는 그보다 더 극진하였다.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지 광정공(匡靖公)이 돌아가시고
시어머니 정씨(鄭氏)만 살아 계셨는데,
정윤공(正尹公)이 부친을 대신하여 원나라 궁궐을 숙위(宿衛)하러 연경(燕京)에 가 있었으나
부인이 정씨의 좌우에서 수발을 들며 한 치도 어김없이 봉양하여
잘 모시는 가운데 편안히 돌아가실 수 있었다.
그 후 정윤공이 또 세상을 떠나고 아들딸 가운데 혼인하지 않은 자식이 다섯 명 있었는데,
부인이 집안을 주관한 지 9년도 되지 않아 모두 짝을 찾아 혼인을 시켰다.
원씨(元氏) 집안의 동생들이 모두 부귀 현달하고 태부인(太夫人)도 아직 무고하며
집안 친척들이 날이 갈수록 번창하였는데,
부인이 일찍 홀몸이 되어 그 사이에서 처신하면서도 시댁 식구들을 받들고
대우함에 공손함을 다하고 예법으로 자신을 지켰으므로 온 집안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집안에 본디 재물이 풍족하였으나,
정윤공은 이에 대해서 일절 관여하지 않았고 부인이 법도에 맞게 처리하였다.
거느리는 비복(婢僕)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으나
어느 누구도 거역하거나 원망하는 말 한마디를 하는 경우가 없었다.
원통(元統) 2년 갑술년(1334, 충숙왕 복위 3) 12월 갑술일에 병으로 졸하니, 향년 47세이다.
아, 부인께서는 어질면서도 오래 살지 못한 분이로다.
아들과 사위가 상을 치르면서
이듬해인 을해년(1335, 충숙왕 복위 4) 2월 기미일로 날을 잡아
아무 곳의 언덕에 장례를 지내기로 정하고는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맏사위 홍 장사(洪長史)와는 동년(同年)의 벗이고
또 막내 사위 이 광정(李匡靖)과도 매우 잘 아는 사이이니,
명(銘)을 써달라는 부탁을 어찌 감히 거절하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딸로서는 부모를 잘 받들고 / 女承而親
아내로서는 자신을 잘 지켰으며 / 婦信而身
어머니로서는 자식을 사랑했으니 / 母慈而子
때에 맞고 고르도다 / 維時維均
어질면서 오래 살지 못하니 / 賢不克壽
슬프도다 부인이여 / 嗟嗟夫人
● 평원군부인 원씨 묘지명(平原郡夫人元氏墓誌銘)을 읽고
* 평원군부인 원씨는 사복시정(司僕寺正) 거실(居實)의 부인이다.
* 평원군부인 원씨와 사복시정(司僕寺正) 거실(居實)은 익재공의 장모와 장인이다.
* 평원군부인과 사복시정 거실과의 사이에 2남 5녀를 두었다.
* 아들 2명
장자 독만(禿滿)- 소신교위.
차자 장명(長命)- 아직 벼슬하지 않음.
* 딸 5명은 각기 다음과 같이 출가하였다.
장녀 중정원 장사(中政院長史) 심양(瀋陽) 홍의손(洪義孫)에게 출가
차녀 흥위위 낭장(興威尉郞將) 김지경(金之庚)에게 출가,
3녀 중대광(重大匡) 낙랑군(樂浪君) 왕수(王琇)에게 출가
4녀 선수(宣授) 왕부단사관(王府斷事官) 광정대부(匡靖大夫) 전(前)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제현(李齊賢)에게 시집갔다.
^ 맏딸부터 차례로 ‘다음은‘이라는 표현으로 딸들이 출가한 것을 말하고 있다.
5녀 중 1녀가 빠졌는데 막내딸로 출가하지 않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아래쪽에 밝혀짐)
○ 평원군부인 원씨 묘지명에 춘천박씨 계대에 대한 내용을 보면
△ 충렬왕 때 박항(朴恒- 춘천박씨 시조)은
원나라 세조황제(世祖皇帝) 때에 태사(太師).
고려왕조에서는 지위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 아들 광정(光挺)은 원나라 궁궐을 숙위(宿衛)하는 소신교위(昭信校尉)로
고려서경등처수수군부만호(高麗西京等處水手軍副萬戶) 겸(兼)
광정대부(匡靖大夫) 평양부윤(平壤府尹)이다.
※ 광정(光挺)은 본이름이 원굉(元宏)이고
족보에도 원굉(元宏)으로 올라 있는데 작은 글씨로 [改名 光挺]이라 기록하고 있다.
△ 아들 정윤(正尹- 졸옹께서 묘지명을 쓸 당시 관직) 거실(居實).
손자 독만(禿滿)이 직책을 세습하여 품계가 모두 소신교위이다.
※ 묘지명의 춘천박씨 계대는
1세 박항→ 2세 광정(光挺)→ 3세 거실(居實)→ 4세 독만(禿滿)으로 되어 있고
족보에는
1세 박항→ 2세 광정(光挺)→ 3세 안구(安具)→ 4세 거실(居實)→ 5세 독만(禿滿)으로 기록.
※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4세 거실(居實)의 父 안구(安具)의 휘가
평원군부인 묘지명에서는 생략 되었다.
거실(居實)의 父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 안구(安具)의 휘가 생략된 것은
의외로 졸옹 최해의 실수인 것 같다.
※ 평원군부인 묘지명에는 독만(禿滿)과 장명(長命)이
4세 거실(居實)의 아들로 5세로 기록되나 족보에는 독만(禿滿)과 장명(長命)의 휘가 없다.
다만 子 의공(義公)으로만 기록하고
행적을 [登文科 官尙書兵部判事. 配貞敬夫人宜寧南氏]로 기록하고 있어
독만(禿滿)이 의공(義公)으로 개명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 거실(居實)의 딸 5명 중 4번째로 출가한 분이
[선수(宣授) 왕부단사관(王府斷事官) 광정대부(匡靖大夫) 전(前)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제현(李齊賢)에게 시집갔다.] 라고 평양 군부인 원씨 묘지명에서 밝히고 있는 반면
족보에는 아들 의공(義公) 다음 맨 앞에
[女 李齊賢 慶州人 號益齋 諡文忠 鷄林府院君]에 출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묘지명에서는 맏딸부터 차례로 ‘다음은‘이라는 표현으로 순서를 나타내어
4녀가 익재공에게 출가한 것으로 보이나
춘천박씨 세보에는 익재공을 맨 앞에 기록하고 다음이
[女 王琇 開城人 樂浪府院君]으로 왕실 종친에게 시집간 것으로 기록하고.
다음이 [女 柳鎭 文化人]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묘지명에 기록하지 않은 5녀가 [女 柳鎭 文化人]에게 출가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 묘지명의 기록대로 본다면
1. 거실(居實)의 아버지 3세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 안구(安具)의
관직과 휘가 생략된 점을 곱을 수 있다.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이라면 제일 영예스러운 관직이다.
더 높은 관직은 생략해도 집현전과 뒤의 홍문관. 춘추관의 관직은
행적기록에서 꼭 기록할 정도인데 父 안구(安具)의 휘와 관직이 생략된 점은 좀 의아스럽다.
2. 거실(居實)의 아들 독만(禿滿)과 장명(長命)의 휘는 없고
[子 의공(義公)]으로만 족보에 기록하고 있어 개명 유무의 확인이 필요하다.
(수정부문)
족보에서 익재공이 거실(居實)의 맏딸에게 장가간 내용은
4녀에게 장가든 것으로 수정하여야 한다.
(묘지명에서 거실의 4녀에게 장가를 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