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에게 명하신 대로(수1:7-8), 좌우극단을 피하고 적절한 중간을 걸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일석이조’(killing two birds with one stone)일까? 그보다는 ‘다석’(多石)으로 라도,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아야 한다는 것일까?
최근 사회적 급변들을 보면서, 두 마리 중 하나에 목숨 건 사람들이 매우 많고, 그들은 이 한 마리를 놓칠 때, 큰 상처와 부적응, 혼란을 경험하며, 함께 늪에 빠져들기를 주저하지 않음을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탐욕과 나태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다스려야 한다. 공동체적으로는 적절한 성장과 효율적 나눔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활성화해야 한다. 그런데 탐욕적 구조 악을 이야기하며 나눔을 통한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 그리고 나태 및 ‘내로남불’ 성향의 개인 악을 이야기하며 성장을 통한 변화를 추구하는 보수 사이의 치열한 공방이 있어왔다. 진보는 까발려지고 보수는 중도로 끌려가는 변화를 겪었던 것 같다.
이러한 구조 및 개인 악에 관한 진단들과 구조변경 및 파이(Pie) 확장을 우선시하는 처방들의 적절한 조합은 가능할까? 이러한 새로운 진단 및 처방의 조합을, 하나님께서 오늘의 세상 안에서 일하실 수 있는 하나의 표현으로 겸손히 풀어내면서, 온유함으로 세상에 의견을 개진하는, 덕스러운 공공신학이 복음주의적 교회의 구성원들을 통하여서 세상에 제공될 수 있을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도 얼마나 좋아하시며 비그리스도인들도 얼마나 좋아할까?
로잔대회의 권고처럼, 다양한 사회적 책임에 관한 입장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겸손하고 온유한 논의를 통해서, 본질(Essentials)을 추구하는 단일성(Unity)를 도출하고, 비본질(Non-Essentials)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음을 동의함’(Agree to Disagree)을 통해 다양성(Diversity)를 인정하면서, 모든 것에 사랑(Charity)을 놓치지 않는 원칙들을 통해, 지혜로운 중간의 새로운 안들의 도출을 시도한다면, 사회의 공민으로서 무책임하거나 분열적이라고 비난받는 교회에 대한 큰 반전이 되며, 젊은이들을 다시 예수님께로 이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근무하는 병원은 비영리 의료법인이고, 적자를 메워주는 공공기관이나 후원단체가 없기에 공립병원으로 볼 수 없고, 수익을 법인에 재투자해야만 하는 법적 원칙을 고려하면 사립병원도 아닌 중간자적인 존재이며, 사회적기업과 비슷한 특성이 있으며, 간호사, 의료기사, 행정직, 그리고 의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병원 내 직종별 입장은 크게 다르다. 한편으로는 선교단체 같은 미션과 비전을 절반의 구성원이 마음으로 고백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대다수가 기여한 만큼 보상받기 원하는 기본적인 보상 욕구도 있기에, 함께 모여 자기 나름의 판단에 근거하여 기여한 만큼의 보상을 요구할 때, 이런 요구들을 합쳐보면 항상 10~20% 정도가 부족하다. “받은 것보다 더 일하여 기여하겠다! 기여한 만큼 다 요구하지는 않겠다!”라는 마음으로, 어느 정도는 희생하려는 사람들이 상당수를 차지하지 않으면 굴러가지 않는다. 구성원 중 의사들만 놓고 보면, 60%는 그리스도인 의사인데, 그중 3분의 2, 약 40%는 가정, 교회, 직장 간의 균형 있는 삶을 추구하면서도, 직장에서의 몰입이 충분치 못하다. 반면에 약 40%의 비그리스도인 의사 중 절반인 약 20%는 직장에 몰입한다. 교회 활동이 없고, 가정 충실성도 부족할 수 있는 중에도 직장에서 보람과 인정을 구한다. 그런데 몰입하는 비그리스도인 의사 중 약 20%는 몰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의사 약 40%를 보며 힘겨워하고 분노하기도 하는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직장과 가정과 교회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는 삶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고, 반대로 가정을 약간 희생하고 신앙에 무심한 비그리스도인들의 희생과 헌신을 언제까지 고마워하며 당연시해야 할지도 알 수 없고, 참 어렵다. 다양한 죄인들이 함께 동역하는 모습에서는, 역사적으로 그 유명한 인류의 칠 대 죄악 중에서, 한쪽에는 탐욕의 우측 줄, 반대쪽에는 나태의 좌측 줄, 그 사이에는 교만의 중간 줄이 삼겹줄로 단단히 꼬여있는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적절한 이윤을 여러 존재의 목적들을 달성키 위한 도구로 활용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우측 줄에 있는 탐욕을 다스리되 어느 정도 관리되는 선 안에서 하고, 개인과 기업 전체의 발전 도구로 선용하는 것이 긴요함을 본다. 이것이 매년 물가와 무관하게 1%대 의료수가 상승으로 의료비를 통제하는 상황에서 비공익, 비사립 병원의 생존에 절대적인 것을 본다. 예를 들면, 적절한 성과급이 그 한 사례이다. 성과급은 과도하면 환자에게 피해가 가지만 이것 없이 고정된 급여시스템만으로는 나태와 비효율의 거미줄에 전체가 질식되고 말 것이다. 작은 병원 공동체 안에서도 자기중심적 개인들을 격려하여 앞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이렇게 힘겨운 데 더 큰 규모의 사회와 국가와 세계일 때이랴!
주위를 둘러보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로 다른 출발점을 가지고, 또 다양한 정도의 이윤을 남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섞여 있다. 많게는 ‘다섯 + 다섯 + 하나’를 모두 합한 열한 달란트의 사람에서부터 한 달란트마저도 빼앗긴 무(無) 달란트의 사람이 섞이게 되고, 무(無) 달란트의 사람에게서는 더 가진 자와 비교함과 연관된 나태를 보게 된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강도 만나 다침으로 인해 치료와 간병을 위한 도움이 절실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강도 만난 자들'을 돕는 노력과 수고가,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 축적의 소명 달성을 위협할까 하여 돕는 손길 됨을 주저하는 실질적 탐욕의 모습도 종종 보게 된다.
구성원들의 탐욕 및 나태에 관한 관리, 성장과 나눔, ‘개인선’과 ‘공공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 기업의 사명으로 명확히 표현되고 추구되는 공동선적이고 사회적인 기업 및 ‘소셜벤쳐’(social venture)를 만들어 감을 통해, 모든 족속을 제자 삼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부르심에 순종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