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대수를 처음 들은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부잣집 아들인 친구의 집에 가니 네 벽에 서라운드 스피커가 달려 있는 엄청난 음량의 전축이 있었고, 거기에서 나는 LP 음반으로 그의 <물 좀 주소>를 처음 들었다. 한마디로 말해 충격이었다. 당시 나는 제도 교육에 환멸을 느껴 학교 공부를 다 포기하고 나만의 교과과정(?)을 따로 만들어 책 읽기에 빠진 불우한(?) 문학 소년이었는데, 그의 절규에 가까운 노래를 들으며 왠지 모르게 피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그의 노래를 통해 나는 ‘개기는 인생’의 중요성, ‘자유’의 가치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학교 공부를 때려친 ‘꼬마 반골’이었던 나의 삶을 합리화할 수 있었다. 한대수는 환갑 나이에 우연히 자식(한양호)을 갖게 되었는데,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자유인’이었던 한대수에게 다 늙어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아래 인터뷰에도 얼핏 나오지만, 다른 인터뷰에서도 자유인 한대수는 “생계를 위해서는 음악을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평생 음악에 미쳐 산 그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진짜 자유인이다. 내가 처음 그의 이런 고백을 들었을 때 나는 예술가로서의 그에 대해 실망이 아니라, 한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그에 대하여 모종의 존경, 그리고 ‘장엄함’을 느꼈다. 문학과 예술을 핑계로 빈둥거리며 온 가족을 불행에 몰아넣는 ‘무책임한’ 삶을 나는 거부한다. 멀쩡한 몸을 가지고 빛나는 노동 대신 무의미한 유락(遊樂)으로 생을 탕진하는 자칭 예술가들을 나는 싫어한다. 어느 티브이 인터뷰 프로그램에서 내가 본 인상 깊었던 한 장면이 있다. 한대수가 알코올 중독인 아내(옥사나) 때문에 경기도 오산에 있는 어느 병원을 찾아 의사를 만나는 모습이었다. 아내의 치료 때문에 지상에서 가장 ‘겸손한’ 자세로 의사와 상담하는 자유인 한대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가슴이 아팠지만, 그 안에서 ‘예술가’보다 훨씬 위대한 한 ‘인간’을 보았다. 얼마 전 한대수는 딸의 교육 문제 때문에 뉴욕으로 다시 건너갔다. 뉴욕의 살인적인 물가와 끝없는 가난과 책임져야 하는 생계 앞에서 그는 지금도 껄껄거리고 낄낄거리며 잘 늙어가고 있다. 늦은 나이에 낳은 딸도 이제 초등학생이다. 그는 가난 속에서도 “행복의 나라”를 만들 줄 아는 ‘진짜’ 예술가이고 훌륭한 ‘아빠’이다. 부디 건강하시기를, 그리고 생계 때문에 쓰러지기 없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