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혁명 떠받든
신영복, 교보가 띄워주는 까닭?
감옥간 한명숙
뒤엔 '좌파의 핵심' 신영복 있다
자본주의 단맛 빨아
먹은 <교보문고> <중앙일보>, 앞다퉈 '혁명전사'를
홍보
1964년
3월 15일. 역사적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약속장소에 와서 보니 이미 김질락, 이문규 동지가 와
있었다. 신영복 동지가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전보다도 훨씬
고조됐다.
그러면 전원
모이셨습니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께서 교시하신 주체의 당 창건 방침을 받들고, 그 사이
동지들께서 필사의 노력으로 분투하신 결과 오늘로서 우리는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의 결성을 보게 됐습니다.
어디까지나 우리 당이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의 혁명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한국혁명의 전위당인 만큼 당원과 각계의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으로 결속해야 할 것이라는
정치활동의 목표로부터 출발해 우리 당 기관지를 <혁명전선>이라고 하면 어떤가 하고 생각합니다.
전원이 찬성했다...철필로 긁은 등사판으로 인쇄된 수십 부밖에 안 되는 신문이었지만
한국에서 발간된 최초의 김일성주의 출판물에 접했던 순간, 편집위원 전원의 눈이 잠시 뜨겁게
빛났다.
우리들은 이 힘 있는
정치선전수단으로 보다 많은 김일성주의자를 육성하고 각계각층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 통일혁명의 깃발 아래 강고하게 결집시키도록
합시다.
- 통일혁명당 기관지 <혁명전선> 중에서
지난 89년
도서출판 '대동'이 펴낸 <통혁당>에는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이
67년 발간한 비합법기관지 <혁명전선>의 내용이 자세히 언급돼 있다.
<혁명전선>은 제 3자가 아닌, <통혁당>
주축 세력들이 비밀리에 기록한 글이라는 점에서, <통혁당>의 실체와 이념적 배경을 여실히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발췌한 부분은 1964년 3월 15일, 비밀리 약속 장소에 모인
<통혁당> 무리들이 <혁명전선>의 창간을 공식 선언하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 참석자로는 김질락, 이문규, 신영복 등의 이름이 언급돼
있다. 이 장면에서 <통혁당>의 임시투쟁 강령과 행동 목표, <혁명전선>의 발간 취지 등을 주창하고 있는 인물은 김종태 당시 <통혁당>
서울시당 위원장이었다.
첫머리만 읽어봐도 이들이 창당한
<통혁당>이 김일성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지도 이념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을 '민족의 태양'이라고 칭송한
이들은 <혁명전선>의 첫 인쇄물이 나오는
순간, 눈시울을 붉힐 정도로 종북주의(從北主義)에 깊이 몰입돼 있는 상태였다.
이날 모임에 마지막으로 참석한 신영복은 훗날
노회찬 전 의원으로부터 "마음으로 모시는 스승"이라는 극찬을
받는 '좌파계의 거두'로 성장한다. 오늘날엔 <처음처럼>이란 소주 상표의
원저작자로 더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 통혁당 무기수(無期囚) 출신,
인기 교수로 탈바꿈
68년 통혁당 사건으로 체포될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생도들에게 '경제학원론'을 가르쳤던 신영복은
20년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복역한 뒤에도 지난해까지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와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 박성준 성공회대 겸임교수는 오래 전 신영복의
지도편달(?)로 <통혁당>에 입문한 케이스. 공연연출가 탁현민 교수와 폴리테이너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김제동, 가수 윤도현도 성공회대에 몸 담은 신영복이 배출한 '좌파
명사'들이다.
노회찬처럼 신영복이 옥중에서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추종자'가 된 이들도 부지기수.
임영호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상임감사위원은 "그의 책들은 영혼을 파고드는 매력이 있다"고 극찬한 바 있으며,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나와 이웃의 관계를 성찰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책"이라는 호평을 남기기도 했다.
대중에게 친숙한
김제동이 존경해마지 않는 신영복은 젊은이들에겐 '꼰대 되기를 거부한', 쿨한 어르신으로 통한다.
그의 '과거'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당수의 청년들은 신영복을 군사독재정권 시절
용공(容共)조작에 휘말려 누명을 쓴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다. 영화
<변호인>의 거짓 선동에 눈이 멀어, 명백한 공산화운동이었던 학림(學林)-부림(釜林) 사건을 용공조작사건으로 치부하는 행태와
마찬가지.
심지어 어떤 무리들은 신영복을 2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에 견주며 "우리 시대의 지성"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붙이기도 한다.
이처럼 신영복이 '거룩한 투사'이자 '대표적 철인(哲人)'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잘못된
정보'가 마치 사실처럼 왜곡돼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본인의 입을 통해, 혹은 지인들을 통해 전파된 각종 미화(美化)된 이야기들이 '신영복을 수식하는
역사'로 알려지면서, 김일성 사상 전파에 매진했던 그가
'존경 받는 지성'으로 둔갑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
◆ 신영복, 통혁당 창당준비위부터
관여
서울상대 재학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몰두했던 신영복은 60년대 중반 무렵 학교 선배인 김질락,
이진영 등과 친분을 나누게 되면서 <통혁당>의 핵심 멤버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신영복이 <통혁당>의 합법 기관지로 알려진 <청맥>에서 활동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이전부터 <통혁당>의
비합법기관지인 <혁명전선>에도 깊이 관여돼 있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2006년 <한겨레21>에 기고한
<신영복의 60년을 사색한다>라는
제하의 글에서(신영복 본인의 발언을 인용), "신영복은
1965년 2학기나 1966년
초에 <청맥>이라는 잡지를 통해
<통혁당>과 관련을 맺게 됐지만, 최고 책임자로 발표된 김종태나 조국해방전선 책임자로 발표된 이문규 등 핵심 간부들은 사건이 날 때까지 만나본 적도
없다"고 했다면서 신영복을 변호하고 있다.
이문규야 학생운동 선배라서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지만,
김종태에 대해서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영복이 김질락과 만난
횟수는 <청맥> 잡지사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모인 것까지
합쳐 전부 10번 안팎일 것이고, 김질락의 집에서 이진영과 함께 따로
만난 것은 5번 정도라 하니 참으로 비싼 징역을 산
셈이다.
한홍구 교수는
"그런데도 공안당국의 기록은 물론이고, 진보 진영에서 나온 통혁당 관련 일부
서적에는 신영복이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과 함께 통혁당의 강령을
정하는 등 당의 핵심 성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온다"며 "신영복은 '통혁당에 대해서는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고 중앙정보부에 가서야
들었다'고 했다"는 얘기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중앙정보부에서의 수사는
혹독했다. 이미 김질락이 다 불은 터라, 저들은 신영복이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었다. 청년기의 고민과 방황이 어린 수많은 만남과 토론, 그리고
서로 빌려주고 빌려 보았던 수많은 책들은 몇십 장의 자술서와 몇십 장의 조서와 몇 줄의 법률용어에 의해 온통 조직적인 관계로
규정됐다.
신영복의 혐의를 최소화하는 이같은 주장은
"▲신영복이 통혁당에 가입한 적도 없고 ▲김질락 이외에는 통혁당 지도부인
김종태나 이문규를 만난 적도 없으면서 ▲대표적인 통혁당 지도간부로 낙인찍혔다"는 '왜곡된 사실'이 정설로 둔갑·회자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신영복은 <통혁당>의
공식 기관지로 소개된 <청맥> 외에도 비선에서 운용됐던 또
다른 기관지 <혁명전선>에도 필진으로 합류,
종북-반미-반정부 사상 운동을
주도해왔다.
한홍구 교수는 "신영복이
1965년 2학기나 1966년 초부터 김질락
등을 만났다"고 기술했으나, <혁명전선>은 신영복이 1964년부터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등과 '거사'를 도모해왔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통혁당>이 김일성 장군의 혁명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한국 혁명의 전위당인
만큼, 당 기관지 이름을 <혁명전선>으로 하자"는 김종태의 제안에 제일 먼저 찬성표를 던진 이도
신영복이었다.
이는 "신영복이 해당 모임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입장은 아니었다"는 한홍구 교수의 [엄호사격]과도 대치되는 대목이다.
◆ 한명숙 남편 박성준, 신영복에 '포섭'
당해 좌경화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 시절 김종태에게 포섭돼 사상 교육과 학습을 받은 신영복은 학교 후배인
박성준을
끌어 들여 <청맥> 발행을 이끄는 등, 그룹 내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월간조선>에 따르면
신영복은 김질락에게 육사생도 9명에 대한 교양상황과 '박성준을
포섭했다'는 내용이 담긴 철학 노트를 건네고, "박성준 등을 조종해
명동 가두 시위를 벌였다"는 활동 내역까지 보고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67년
오후 3시 김질락은 잔디다방에서 신영복으로부터 "경제복지회 내에 있는
성원인 박성준을 조정하여 시내 각 대학생 100여 명을 규합, 7월 2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명동에
집결시켜 6·8 부정선거 규탄구호를 외치면서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앞
노상까지 데모 행진을 감행했다"는 보고를 받고 신영복을
격려했다.
신영복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대법원 판결문에도 이같은 '이적 행위'가 자세히 기술돼
있다.
1966년 중순경
김질락은 서울 중구 무교동 소재의 한 다방에서 북괴의 이익이 되는 점을 알면서 김종태를 만나 그에게 '신영복을 포섭하였다'고 보고했고, 김종태로부터 '신영복에게 교양을 주어 하부조직을 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아 反국가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했다.
1966년 8월 서울 서대문구 갈현동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신영복에게 '육사교관과 생도를 포섭할 것', '월 2~3회씩 집에서
회합할 것', '각자의 활동상황을 정기 회합 時 보고할 것' 등을
지시하고, '청춘의 노래'라는 불온서적을 제공하여 反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
<통혁당>의
하부조직인 <민족해방전선>의 대학가 책임자였던
신영복은 88년 출옥 후
"자기가 통혁당에 가담한 것은 이념
때문이기보다 양심의 문제였다"는 궤변을 토해 논란을 빚었다. "이념에
휩쓸려 움직인 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양심에 비추어 거리낌 없이 행동했을 뿐"이라며 사상적 전복(顚覆)을 시도했던 자신의 행위를
미화하는 모습을 보인 것.
그러나 <통혁당>의 주역 김질락이 감옥에서 집필한 수기 <주암산>을 보면 <통혁당>과 산하 조직은 개인의 양심이 아닌,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인 지하당이었음이
명확해진다.
통일혁명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비밀 지하당 조직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리 없고 통혁당의 조직상황과 활동상황이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 됐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 통혁당은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힘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각계각층에 대한 군중공작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다.
<통혁당>은
61년 간첩 김수영에게 포섭돼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전남 무안 출신 최영도가
김종태를 포섭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한 최영도는 김종태를 통해 <남로당> 조직의 부활을 꿈꿨고, 마찬가지로 직접
북한에 들어가 조선노동당원이 된 김종태는 김질락과 이문규를 꼬드겨 <통일혁명당>을 만들었다.
<통혁당>은 서울시당 위원장을 맡은 김종태를 중심으로, 김질락-신영복이 주도한 <민족해방전선>과 이문규-이재학이
주도한 <조국해방전선>, 두 개의 하부조직으로
구성됐다. 당시 <통혁당>은 <새문화연구회>, <청맥회>, < 동학회> 등의 서클을
운영하는 한편, <혁명전선>과
<청맥> 등 당 기관 잡지를 발간해 젊은층을 반정부 사상으로 고취시키는
공작을 전개했다.
우두머리격인 김종태는 당시 북한의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으로부터
미화 7만 달러, 한화 3천만
원, 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으며 지령대로 움직였던 하수인에
불과했다.
북한은 김종태 등 <통혁당> 조직이 공안 당국에 검거되자 이들을 구하기 위해 753부대 소속 공작선을 보내기도 했다. 68년 8월 20일 14명의 무장공비를 태운 간첩선은 제주도에
상륙을 시도했으나 12명이 사살되고 2명은 생포됐다.
69년 7월 10일 김종태가
사형되자 북한 내각은 그에게 최고훈장인 '금성메달'과
'국기훈장제1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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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배웅 나온 지지자 "진실은 승리한다"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을 확정 받은 한명숙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24일 오후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기 전 배웅 나온 동료의원들과 지지자들과 함께 "한명숙은 무죄다.
진실은 승리한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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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복과 박성준, 잘못된
만남?
한명숙 전 총리가 학창 시절 <경제복지회> 활동을 하지
않고 박성준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적어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쇠창살에 갇히는
지금의 운명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걸었을 것이다.
어찌보면 <통혁당>의 핵심 리더였던 신영복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신영복이 박성준을 포섭하지 않았다면, 한명숙이 남편을 따라 서슬푸른
'재야운동가'로 변신할 일도 없었을 터. 신영복의 설득에 넘어가 본격적인 공산화운동에 뛰어든 박성준은 연합서클인 경제복지회 활동을 하면서 당시 대생이던 한명숙을
만났다.
한명숙은 1967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박성준과
혼례를 올렸다. 이로부터 6개월 뒤 박성준-한명숙 부부는 신영복과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재판 결과 한명숙은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 형을 언도 받으며
풀려났지만, 박성준은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무려 12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했다.
남편을 대신해 좌익 깃발을 높이든 한명숙은 197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으로 2년간 감옥생활을 하는 등
꽤 거친 '광야 생활'을 하다 2000년 DJ의 부름을 받고 정치권에 입문했다. 여성부 초대
장관을 지냈고 2006년엔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로 지명돼 화제를
모았었다.
<통혁당> 활동 혐의로 검거될 당시
박성준은 서울대 경제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 신분이었다. 그는 66년
신영복에게 포섭돼 김일성 사상 교육을 받고, 6.8부정선거 규탄 데모를 벌이는 등
<통혁당> 멤버들의 수족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당시 박성준은 자신에게 유죄를 언도한 재판부의 판결에 불복, 항소심을 제기했는데 "사상을 전수해준 신영복을 지나치게 믿었다"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민족해방전선>을 구성한 바 없으며, 4.19 묘지에서 북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 사실도 없고, 그 밖에 이 사건 책자를 구입하거나
빌려 보거나, 빌려 주고, 필기시키고 한 모든 행위가 북괴를 이롭게
한 것이 아니며, 신영복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경솔한 소행을 하기에 이른 것이니 기독교인으로서 깊이
반성한다.
◆
'반자본주의자' 신영복을 <중앙일보>가
미화?
1964년 서울에서 발족한 <통혁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인 '지하당'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민족해방전선> 조직비서를
맡았던 신영복의 역할은 꽤 컸다.
서울대 재학 시절, 아래로는 <혁명전선>이라는
지하신문을, 위로는 <청맥>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반미-반정부 사상을 고취하는데 앞장서 온 신영복은 출옥한 이후에도
여전히 '비뚤어진' 사고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발췌한 신영복의 '어록'을 살펴보면 그가 아직도 철저한 '반미-반자본주의자'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이 한국의 은인이라는 환상을
청산하고, 미국이 한국에 친미적 분단정권을 창출하고 미국경제의 하위 경제구조를 편성한 나라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한반도의 전쟁위험은 북한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올 수 있다.
한반도의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북한이 자기들의 경제문제에 전력투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북한 핵의
기본이다. 북한 핵을 북한 정치지도자의 야심이나 북한의 정치적 오판으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놀라운 사실은 자신이
'반자본주의자'라는 것을 감추지 않는 신영복을 자본주의의 '최대 수혜 집단'인 삼성의 <중앙일보>가 수차례 대서특필했다는 점이다.
일례로 <중앙일보>는 지난
4월 25일 신간 안내 코너를 통해 신영복이 지은 <담론>을 그의 약력과 함께 성심껏 소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이름 석 자는
한때 '갇혀있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내고픈 편지의 대표 발신자였다.
1988년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20년 20일을 '짐승의 시간'에 묶여 지내야 했던 한 양심수의 고백이자 연서로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고전에서 읽은 세계 인식'을 한 손에,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을 또 한 손에 든 인간 농부가 되었다. 인간과
세계, 사람과 삶을 파헤쳐 농사짓는 일이 공부라며 그 고생길에 함께 나서자고 손을 내민다.
사상범들이 한데 모여 있어 '한국의 모스크바'라 불리던 대전교도소에서 맺었던 스승들과의 관계를 그는 이제 이웃에게 되돌려
보낸다.
<중앙일보>는 이
기사에서 "1988년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20년 20일을 '짐승의 시간'에 묶여 지내야 했던 한 양심수의
고백이자 연서"라며 "무기수와 장기수의 방에서 휴지며 엽서에 철필로
쓴 그 서신은 창백한 지식인이 가슴에 긁은 자기개조의 기록"이라고
묘사했다.
신영복을 '양심수'로, 그가 써 내려간 옥중서신을 '자기개조의
기록'이라고 표현한 <중앙일보>는 신영복의 '전향(轉向)'을 눈꼽 만큼도 의심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신영복은
1970년 옥중에서 '전향서에 도장 찍은 것'을 후회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젊은 시절 <통혁당> 하부 조직에서 활동했던 그 사상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음을 실토한
것.
이같은 점은 신영복이 지난 2002년
1월 17일 연세대에서 가진 한 강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자본주의
체제, 종속적 자본주의, 천민적 자본주의가 우리나라에 언제까지 갈 것인가? 나도 몰라. 그러나 논리적 이론적 사고를 한다면 비인간적 근본적 모순구조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자본 축척은 근본적 모순체제다. 힘들어도 샛길은
없다. 사회를 바꾸어 내자. 정말 황폐화된 인간관계 삶의 일부로서
실천해야한다.
◆
"스승들의 스승 신영복"
<교보문고(대표
허정도)>는 지난 6월 25일부터 7월 25일까지 광화문점 삼환재에서
'신영복 서화전' 기획전시회를 열었다. 이번
전시에선 신영복의 대표적 서예작품 7점과 서화작품 8점 및 관련소품과
도서가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스승들의 스승 신영복'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 전시회를 위해 <교보문고>는 해시태그를 달아 SNS에 올리면 다섯 명을 뽑아 신영복 작가의 소품을 증정하는 이벤트까지
벌였다.
'스승들의 스승'이란 제목은 대체 누가 붙인
걸까? 노회찬 전 의원이 신영복을 "마음 속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한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신영복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는 또 다른 스승의 얘기는 도통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신영복의 실체에 대해서 여전히 '무지한 상태'였다면 이같은 표현이 눈에 거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지인들의 증언 ▲검찰-법원의 공식 기록 ▲관련 행적
▲남파간첩의 진술 등을 통해 신영복의 죄과(罪過)가 결코
'세치 혀'로 지워질 수 있는 가벼운 성질이 아님을 알게
됐다.
<교보문고>가 어떤
곳인가? '대산(大山)' 신용호
선생이 창립한 <교보생명>의 계열사다.
신용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자금으로 거액을 쾌척했고, 해방 이후엔
현재의 <교보생명>을 세워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
죽기 전 아들(현 교보생명
회장)에게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형성이라는 회사 창립 이념을 잊지
말라"는 당부를 할 정도로 애국애족정신이 남달랐던 분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창업주가 세운 <교보문고>에서
나라의 '근간'을 해치려했던 인물을 떠받드는 '낯뜨거운 기획전'이 벌어졌다.
여전히 '혁명'을 꿈꾸고 있는 반자본주의자가 후세들에
의해 '스승들의 스승'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하늘에
있는 '대산'이 알게 된다면 어떤 심정이
들까?
◆
'좌파 띄우기' 종편 JTBC도 앞장
<교보문고>에서 신영복의
기획전이 열리고,
<중앙일보>에서 신영복 특집 기사가
연재되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교보문고>는 신영복의 신간이 나올 때마다 저자 초청강연회를 열고, 도서MD를 방송에 출연시키는 등 대대적인 홍보를 벌여왔다.
이는
<중앙일보>도 마찬가지. 출옥
직후부터 신영복의 수필 등을 장기연재하는 과잉 친절을 베푼 <중앙일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육필원고와 동정을 지면에 실으며 그 의 이미지 개선에 일조하는 행태를
보였다.
일각에선 이같은 <중앙일보>의 이상 행보를 <조선>과 <동아>를 앞지르기 위한 나름의 비책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보수 독자층을 선점한 이들
매체에 밀려 만년 2~3위에 머물고 있는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3대 일간지'의 취약점인 '좌성향
독자'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것.
실제로 <중앙일보>는
70년대부터 '박헌영 일대기'와
'진보당 사건', '죽산 조봉암'을 다룬
연재물을 실어 주목을 받았다. 재야 친일문제연구가 임종국의 글도 당시 문화면에 자주 오르내리던 단골
메뉴였다.
좌파매체 <한겨레>와 과감히 사설 교류를 천명하고, <광주사태>에 대한 탈북자 증언을 소개한 종편을 맹비난하는 독설논조를 펼친
신문도 <중앙일보>다.
제 18대 대통령선거 특집 방송 중 '문재인
당선자'라는 표현을 써 물의를 빚은 <중앙일보> 계열 JTBC는 손석희,
진중권, 표창원 등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좌파 성향'의 방송인들을 대거 영입하는 파격 행보를 보였다.
심지어 손석희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뉴스프로그램에선 당시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출연해
'삼성그룹 노사 전략 문건'을 폭로하는 충격적인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쯤되면 단순한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신문사의
정책이나 노선이 실제로 '좌향좌'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
이와 관련, 논객 '강철군화'는 <조갑제닷컴>에 게재한 칼럼(좌파의
'문화 게릴라戰' 돕는 '배 부른
돼지들')에서 "언론이나 대기업, 그리고 그 기업의 오너들은 전부 대한민국에서 혜택을 받은 이들"이라며
"이들은 만에 하나 대한민국이 친북좌파나 '빨갱이'들에게 먹힌다면 가장 잃은 것이 많은 자들이기도 하다"고
꼬집었다.
그들에게는 대한민국에 대한
고마움도, 이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사명감도, '대한민국이 잘못되면 나도 잘못
된다'는 절박감도 없는 듯하다. 아니면 혹시 대한민국이 잘못되더라도
그동안 좌파에게 곁눈질 한 덕으로, 혹은 돈의 힘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는 '신영복류'로 대변되는 좌파를 일종의 '문화
권력'으로 의식한 '배 부른 돼지들'이 앞날을
도모하기 위해 좌측 인사들과 '화해의 악수'를 청하고 있다는 논리다.
◆ 입맛에 맞는 문화권력 생산..결국 시장
논리?
<교보문고>의
'좌파서적 띄워주기'와 <중앙일보> 계열사의 '좌파 스타
만들기'는 젊은 세대의 호기심을 자아내며 시장에 유의미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김제동이 존경하는 신영복'이라는
수식어에, 유행에 민감한 청소년들이 마구잡이로 달려들고,
온갖 미사여구로 장식된 글귀엔 댓들들이 쇄도하며 신영복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고
있다.
'강철군화'는 "'배 부른 돼지'들이 문화권력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분석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보면 '배 부른 돼지'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문화권력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그들이
만들어낸 '문화권력'이 새로운 시장과 부를 형성하고,
이들로 인해 '배 부른 돼지'의 영향력이
확대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터.
한 언론사 사주는 최근 한 강연에서
"통일은 대박이다라고 얘기하지만 통일은 그렇게 쉽게 오지 않는다. 가장 바람직한
건 경제공동체, 문화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에서 말한
'문화공동체'라는 게 혹시 '좌우합작물'을 의미하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배 부른 돼지의 야망'이 부디 '국익'에 이로운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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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가 서울대학교 위탁교육(문리대 영문과)을 마치고 처음 육사 교단에 섰던 1968년. 신영복은 중위 계급장을 달고 출근 버스를 타고 내리면 의례것 장교다방 한 구석에 혼자 쭈구리고 앉아 뭔가 고민이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 때 이미 공안 당국에서 낌새를 채고 있었던 듯. "젊어서 가슴이 뜨겁지 않으면 바보요, 나이들어서 머리가 차겁지 않으면 그 또한 바보"라는 말도 있어서 평범하게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다. 자기가 신봉하던 이론을 바꾸기는 배운 사람 치고는 정말 어렵다는 걸 신영복에게서 다시 확인한다. 그를 받아주는 추종 세력과 언론... 한심하지요. 조금 안다고 제자랑하는 얼간이들 아닐까요? 북한에 가서 살아보도록
신영복은 추방하고, 얼간이들의 물건은 사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읽지도 맙시다. 신영복이 육사 교단에서 사라진 것은 1968년 겨울이 지나기 전이었던 것 같다. 짧은 재직기간이었으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백산의 열정을 함께 하고 싶읍니다. 할 말은 하는 그런 용기 말입니다. 건강을 빕니다.
합작이라는 융합이 문화권력을 창출해 가고 있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