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예언37,12ㄹ-14) (로마 8,8-11) (요한1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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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당신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어 다시 생명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애타는 사랑의 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요한 11,3).
평소 예수님과 가까운 마리아 마르타 자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전합니다. 무척 다급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곧 라자로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지요.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자매들에 비해 라자로의 모습은 특징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성경은 그에게 가장 보편적인 인간상을 투영하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한 11,11).
예수님께서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시는 동안 라자로는 세상을 떠납니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맞는 죽음은 한 인간과 그를 사랑하던 가족에게는 가장 비극적인 일이지만, 예수님은 그의 병과 죽음이 결국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1,4).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32).
라자로의 자매들이 안타까움과 원망이 뒤섞인 신앙 고백을 예수님께 쏟아냅니다. 아마도 라자로 역시 자매들 못지않게 예수님을 기다리다가 숨을 거두었겠지요. 자매들의 목소리에는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던 라자로의 바람도 묻어 있습니다.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요한 11,34)
예수님께서 죽은 이가 어디 있는지 물으십니다. 라자로는 공포와 우울과 상실과 경계심으로 질식되어, 더 이상 영으로 숨쉬기를 포기한 채, 어두운 절망의 동굴에 갇혀버린 인간 실존을 대변합니다. 그를 되살리려면 그가 묻힌 자리, 정확히 그 지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돌을 치워라"(요한 11,39).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라자로는 지금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육신의 죽음 상태에 있습니다. 살아 생동하는 바깥 세상과 어둠만이 짙게 드리운 동굴 사이를 가로막은 돌은 생명과 죽음의 경계이고 인간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입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생명이 약동하는 바깥에서 살아있는 누군가가 힘껏 굴러내어 주어야만 합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마르타의 현실적 우려로 잠시 잡음이 일었지만 결국 돌이 치워집니다. 성경 안에서 내내 침묵하고 또 지금도 무덤 안에서 침묵하던 라자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을 건네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빛 한가운데 서서 동굴이라는 어둠, 죽음이라는 어둠 속에 갇힌 사랑하는 이를 부르고 계십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아가 2,10-11).
예수님의 목소리는 아가의 한 대목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아가의 연인이 사랑하는 이를 불러내는 장면입니다. 아가에서 연인과 여인은 하느님과 당신 백성인 우리를,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 우리를 상징합니다.
"그러자 죽었던 이가 ... 나왔다"(요한 11,44).
과연 라자로가 나옵니다. 나오기 전에 되살아난 게 먼저겠지요. 그는 사랑하는 분, 마지막 순간까지 간절히 기다렸던 분의 목소를 듣고 기꺼이 순종합니다. 마지막 숨을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순간까지 온 존재로 붙잡고 있었을 그분이 이제 오셔서 그를 깨우신 것입니다. 사랑이 부르니 일어나야지요. 사랑이 시키시니 시키는 대로 나와야지요.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요한 11,44).
막 죽음에서 깨어난 라자로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자신을 부자유스럽게 하는 천과 수건을 사람들이 벗겨내도록 그 손길에 자신을 내어맡기면 됩니다. 예수님 명을 따르는 이들이니 두렵지 않습니다.
제1독서에서도 무덤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에제 37,12).
이스라엘은 유배라는 무덤에 갇힌 상태입니다. 예루살렘과 성전과 축제와 경신례를 잃어버린 상실의 무덤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백성이고 율법을 소유한 탁월하고 위대한 민족이라는 자긍심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그 무덤을 하느님께서 여시겠답니다.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에제 34,14).
자기들 힘으로는 도저히 되돌릴 수도 재건할 수도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그 무덤을 열고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는 주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는 한 줄기 빛입니다. 그런데 되살리시는 힘이 "주님의 영"이라고 하십니다. 창조 때 우리를 살아 숨쉬게 만드신 힘 역시 "하느님의 숨"(창세 2,7 참조)이었지요. 첫 생명도, 부활의 생명도 하느님의 영(숨)에서 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영으로 사는 삶을 언급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로마 8,9).
하느님의 영이 머무르는 이는 주님을 몰랐을 때의 육적인 삶을 버리고, 주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머물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옛 인간의 욕정과 탐욕과 야망은 주님 영의 순결하고 거룩한 힘에 밀려나게 되고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납니다.
우리가 오늘 만나는 부활은 첫째, 라자로에게 일어난 육신의 되살아남입니다. 영혼과 육신의 부활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기도 하지요.
둘째는 제1독서에서 보듯 죽음과 같은 상실과 절망 상태에서의 부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불어넣어 주신 당신의 영이 우리의 흩어졌던 정신과 뼈마디와 힘줄과 살을 다시 이어붙여 생기를 심어 주실 겁니다.
셋째로 우리가 새롭게 살아가는 성령 안의 삶이 곧 부활의 삶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으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다(로마 8,9 참조).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올해 죽음을 매우 가까이에서 보고 듣고 체험하는 특별한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전염병으로 사랑하는 이를 마지막 인사도 못한 채 보내야 하는 슬픈 소식부터, 숫자로만 전해지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지구 반대편의 죽음까지 연일 우리의 애도와 전구를 기다리는 소식들이 마음의 문을 두드립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3)
주님께서 오늘, 이 순간, 전 인류와 함께 인간 실존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 물음엔 이미 답을 갖고 계십니다.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에제 34,14). 이것이 하느님의 바람이시고 의지입니다.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마음이고 이스라엘을 살리신 하느님의 속마음입니다.
우리는 결연히 신앙을 고백한 마르타이기도 하고, 함께 울어 주는 마리아이기도 합니다. 또 사랑하는 분의 목소리에 무덤에서 뛰쳐나온 라자로이기도 하고, 돌을 치워 준 이웃이기도 하고, 묶인 것을 풀어 주는 벗이기도 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예, 주님!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며 부활을 앞당겨 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를 통해 희망의 영이 온 세상, 저 무덤 속에까지 퍼져나갈 것입니다. 아멘.
◆ 출처: 원글보기;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