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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3부: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4).
사탄의 맹렬한 고소와 대적이 있지만, 결국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변호인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다!
스가랴 3장에 나오는 이상 가운데 4절은 이 계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면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마련하신 구속의 비밀이 압축된, 그리고 사탄의 고소를 통쾌하게 침묵시켜버리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아름다운 사랑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명장면이다. 구약 성경 중에서 이 스가랴 3장만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복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진리가 잘 나타나 있는 곳은 없다. 죄지은 인간들에게 소망의 빛을 비춰주고 우리의 입술에서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놀라운 진리가 담긴 4절을 함께 연구해 보자.
1) 중보자 예수그리스도의 탄원
‘여호수아(또는 예수아)’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오른쪽은 변호와 보호의 위치를 의미한다. 시편 기자는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16:8, 44:3 참고)라고 하였다. 이런 경우 고소자는 반대편에 선다(시 109:6). 여호수아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고소를 당하는 동안,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변호하신다.
히브리서 여러 곳에 강조되고 설명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중보자되신 예수님은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셔서 회개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영혼들 위해 탄원하신다. 그분께서는 대언자가 되시고 변호인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며 갈보리 십자가의 강한 사랑의 논증으로 사탄의 비난과 고소를 물리치신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완전히 순종하심으로써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가 그분께 주어졌으므로, 그분은 범죄한 인류를 위하여 자비와 화해를 그분의 아버지께 주장하신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한 최고의 변호사와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이유는, 친히 성육신 하셔서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고, 또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히 2:17, 18)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인간의 처지를 잘 이해하는 훌륭한 자격을 갖춘 변호사인가! 예수께서는 그분의 무죄하신 생애와 상하고 찔림을 받은 몸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서서셔 중보하신다. 또한, 상하신 손과 찔림을 받으신 옆구리와 상처 난 발을 가지고 죄에 빠진 인류를 위하여 탄원하신다. “아버지여, 나의 피를 기억하옵소서. 이들을 위하여 내가 목숨을 버렸나이다! 이들이 통회하며 회개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들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무한한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위해 탄원하시는 주님의 중보는 우리 인간의 최대의 희망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2) 더러운 옷을 벗는다는 의미 – 회개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는 장면과 같이, 4절에는 마침내 여호와의 사자의 명령에 따라 백성의 죄를 상징하는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이 제거되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는 장면이 연출된다. 앞에서 공부했듯이 더러운 옷, 곧 죄와 결점과 허물과 부족한 성품을 상징하던 더러운 옷이 드디어 벗겨지는 것이다. 더러운 옷을 벗는다는 것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더러운 옷을 벗는다는 것은 회개를 의미한다. 참된 회개란 더러운 옷을 아주 벗어버리듯이 옛 생애를 완전히 청산하고 죄를 버리고 생애를 개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자복하지 않고 버리지 않은 죄를 덮는 가면이 아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고백하고 생애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철저한 개혁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악한 행실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슬퍼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회개의 지름길은 십자가 밑으로 가는 것이다. 십자가 밑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며 죄의 악함을 깨닫는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주님을 징벌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배은망덕과 반역으로 일관된 생애를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성령님께서는 구주를 모욕하고 슬프시게 한 우리의 악한 마음을 드러내어 우리로 십자가 밑에서 통회하게 하신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로 말미암아 다시 상처를 입으시는 예수님, 우리 죄 때문에 찔림을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께 고뇌를 안겨 준 죄를 슬퍼하게 된다. 또한, 우리의 죄가 직접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상처를 받아 피가 흐르는 그분의 심장을 찔러 온 것을 깨닫고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낀다. 이러한 애통이 죄를 버리게 하며 참된 회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죄를 슬퍼하며 다윗과 같은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그러므로 회개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돌이키고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회개가 일어날 때에 비로소 완전한 용서가 성립되는 것이다.
3) 아름다운 옷을 입히심의 의미 – 칭의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4).
이제 사탄의 고소를 침묵시키시고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계시의 장면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옷을 벗기신다. 그러나 그 더러운 옷을 벗기시는 것만이 아니다. 그에 더하여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기까지 하신다!
여기서 아름다운 옷은 그리스도의 순결한 의를 상징한다. 곧 믿음으로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흠이 없는 품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표상한다. 그런데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다는 것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것의 의미는 “칭의”이다. 칭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칭해주시는 것을 말한다. 죄인이 죄를 슬퍼하고 그 죄를 미워하여 버리고 돌아서 완전히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의인처럼,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의인처럼 간주하시고 의롭다고 칭해주시는데, 이것을 “칭의”라고 한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것, 곧 칭의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속의 비밀과 사랑의 계획이 담겨있다. 이 비밀이 곧 복음의 비밀이며, 인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길을 만들어놓으신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이다. 이 심오하고 흥미로운 복음의 비밀을 함께 공부해 보자.
1. 칭의는 선물
스가랴 3장의 계시에서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정점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사건은 여호수아를 놀라게 하고 사탄의 참소를 침묵시킨다. 마치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이십사 장로와 모든 생물과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로우심과 그분의 통치와 승리를 찬양하고 경배하며 영광 돌리는 요한 계시록 4장과 5장의 장면처럼, 인간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모든 죄과를 제하여 버리시며 아름다운 옷을 입혀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구원의 행위와 선고는, 이 사건을 보고 있거나 하늘의 법정에 참석하고 있는 천사들이나 우주 거민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할 뿐 아니라 찬양과 경배를 절로 우러나오게 한다. 그 지혜롭고 오묘하신 구속의 경륜에 모든 입이 다물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구원 얻을 자격이 없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마련하신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가! 그렇다! 구원은 놀라운 선물이다. 그리고 구원받기 위해 꼭 필요한 칭의,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일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선물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칭의를 받게 한 것은 인간 여호수아의 행위가 아니었다. 그의 회개와 통회가 열렬했기 때문도 아니었고, 혹은 그의 간구와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가 하나님께 가납되고 의롭다는 선고를 받은 것은, 곧 아름다운 옷 칭의를 받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물론 우리의 회개는 하나님의 의를 받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의 회개의 행위가 하나님께 의롭다는 칭의를 받게 하는 수단은 아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내려주시는 선물, 곧 갈보리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2. 칭의에 숨어있는 구원의 공식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장면에는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구원의 공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더러운 옷이 인간의 죄의 오점과 불의를 상징했다면, 아름다운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하신 의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의를 입을 수 있는가? 그것은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인데,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우신 놀라운 공식이 적용된다. 그 공식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질 때에, 우리의 죄가 예수그리스도께 전가되고, 대신 그분의 의가 우리의 의로 전가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의와 순종이 우리 계정에 오르게 되고, 그분의 죄 없는 품성이 우리에게 입혀지게 되고 그분의 순결이 우리의 것으로 하나님 앞에 제시되는 것이다. 곧 우리의 불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교환되는 공식이다. 그리하여 회개한 죄인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의인으로 서게 되는 것이다. 놀라운 공식이 아닌가!
회개한 죄인을 하나님께 가납되게 해주고 칭의를 이루어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 밖에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셔서 우리의 형벌을 중지하시고 우리에게 당신 자신의 의를 옷 입혀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칭의를 받는 것이다. 우리의 생애가 아무리 죄악적이었을지라도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으면 그리스도의 입혀주는 의의 흠 없는 예복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다. 칭의는 유죄선고와 반대이다. 예수님의 희생은 공의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킨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어지고 우리의 죄를 위해 속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의 범죄와 죄악이 용서되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죄인이 하나님의 은총 안으로, 그리고 영생의 영원한 소망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하늘의 베틀로 짜인 흠 없는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가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회개한 영혼들에게 입혀지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는 선고를 받게 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놀라운 구원의 공식으로 죄인은 그 자비의 공식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4) 겉과 속이 같아야 칭의가 이루어진다
잠깐 여기서 칭의에 대한 부가적 의미를 조금 더 짚어 보기로 한다. 앞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를 칭의라고 배웠다. 그런데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지 모른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데, 죄를 회개할 이유가 무엇인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면 왜 회개가 칭의의 한 조건이 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의롭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간주하고 의로 살짝 덮어주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되는 것이 아닌가? 4절의 언급을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의의 옷으로 입혀주실 때에 죄를 그냥 놔두시지 않고 없애버린 후에 의의 옷을 입혀 주신다는 사실이다. 죄의 용서는 한낱 하나의 형식에 지나는 것이 아니다. 죄의 용서는 엄연한 현실로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실제로 깨끗하게 죄 씻음을 받는 것이다. 만일 죄 씻음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의로워지면 하나의 철저한 변화가 분명히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되는 변화이다. 다시 말해 겉에 의의 옷이 입혀진 것처럼, 속도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죄인을 의롭게 여기실 수 있지만, 어떤 사람도 알고 있는 죄를 그대로 행하거나 알고 있는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 그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로 덮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칭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완전한 마음의 복종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의 의는 품고 있는 단 하나의 죄도 가려 주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으로 하여금 죄를 묵인하게 하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 죄를 못 본 체하시거나 우리의 품성 가운데 있는 어떤 결점도 묵과하지 않으실 것이다. 대신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극복하기를 바라신다. 어떻게 거짓말하실 수 없고 불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죄를 그대로 사랑하고 있고 버리지 않는 사람을 그냥 의롭다고 칭해 주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의의 옷을 입는다는 것에는 더러운 옷을 먼저 벗어버리는 것이 선제한다. 더러운 옷 위에 그냥 의의 옷을 덮어씌워 가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셔서 의롭다고 칭해 주시며 의의 옷을 입혀주시면, 그는 의의 옷을 입은 사람으로서 마음속의 의도와 모든 동기가 의로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은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죄 없이함을 받고 흠 없고 순결한 의를 얻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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