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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때로 가다가 돌아서기도 합니다. 잘못된 곳을 찾아 제자리로 돌이키기도 합니다. 고치기도 하고 바꾸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 지나가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완전한 회복이란 세상에 없습니다. 그만한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지요. 바로 시간입니다. 금년의 끝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다른 감정을 가져볼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는 것은 이제 2년이 되어 가는데 내년까지도 전망이 밝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참! 이게 사는 건가?
하기야 집콕을 하더라도 시간은 변함없이 갑니다. 새해도 오겠지요. 흥청대며 가고 오지는 못해도 갈 것은 갈 것이고 올 것은 올 것입니다.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라도 맞아야 할 것은 맞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 우리네 마음 다 구겨져도 맞이해야 합니다. 기분은 그렇지 않더라도 희망을 파랗게 그려줘야 합니다. 돈 드는 일도 아닌데 못할 것도 없지요. 아무튼 남은 기간 파란색 조합을 해두기는 해야 합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정말 바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열두 달이 짧지만은 않은 시간인데 말입니다. 마스크 속에서 거친 숨을 쉬더라도 희망은 버릴 수 없습니다. 살아있기에 말이지요.
새로 한 주간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건강한 날들을 빕니다. ^&^
2021년 12월 11일 김종우 목사
쉽게 읽는 요한계시록 19
바벨론 심판 (계 18장)
계시록에는 3 가지 비밀이 나옵니다.
① 계 1 :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② 계 10 : 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③ 계 17 : 7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어쩌면 이 세 가지 비밀을 풀면 계시록이 풀린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 말씀하신 그 날까지는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차 마지막 때 비로소 펼쳐지고 열리고 풀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실 그 때까지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성경에서는 비밀을 ‘봉했다’라고 말씀하고 그것은 물리적으로 열쇠를 채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거나 읽어도 알 수 없도록 기록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즉 그것은 묵시요 비유로 기록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 29 : 11 - 12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유식하든 무식하든, 가르치는 자든 배우는 자든 구분 없이 모두 모를 것이라는 말입니다.
단 12 : 9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찌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합 2 :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예를 듭니다. 구약성경에는 ‘천국’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때는 천국이 없었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 때는 천국을 말할 때도 이룰 때도 아니었습니다. 언약의 사자(말 3 : 1) 곧 약속하신 목자인 예수님이 오셔서 비로소 하나님 나라 천국을 선포하십니다. 마 4 : 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그런데 전파하신 천국은 그 때도 이루어질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소위 ‘묵시’입니다. 그리고 약속하십니다. 요 16 :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러므로 마지막 때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그 때는 일곱째 나팔이 불어지는 때이고 복음이 약속(예언)대로 이루어집니다. 천국이 완성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로 계시를 받고 소망으로 가지고 믿었지만 그 당시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기록으로만 남겨주었습니다. 사실 ‘마지막 나팔’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고전 15 : 51 - 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마지막 나팔이 계시록에 와서 보니 바로 ‘일곱째 나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나팔이 불릴 때 하나님의 비밀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열리는 것이지요.
잘 아는 대로 우리가 죽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롬 6 :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메시야로 당신 백성에게 보내셨습니다. 그 몸으로 값을 치른 것입니다. 아담 이후 사람들이 죽는 이유는 바로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죄 문제가 해결되면 사망이 없어야 하는 것이 합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잘 아는 대로 예수님 다녀가신 이후에도 계속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값은 치렀는데 계속 죄를 생성하는 놈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귀를 잡아 가두기 전에는 온전히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아시고 순차적으로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히 9 :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구원과 영생은 두 번째 오실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앞에서 마귀 편에는 두 종류의 대적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본래의 원수 마귀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마귀 편에 들어간 배반자입니다. 하나님은 둘 다 심판하십니다. 먼저 배반자를 심판하시고 결국은 마귀를 심판하여 지옥으로 보낼 것입니다. 이제 마귀의 처소(귀신의 처소) 바벨론을 심판하는 내용을 보겠습니다. 계 18 : 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무슨 일 후입니까? 계 17장에서 보았듯이 자기들끼리 싸우게 하여 심판합니다. 다시 봅니다. 계 17 : 16 “네가 본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우리가 짐승이 두 가지 있음을 보았습니다. ‘바다 짐승’과 ‘땅 짐승’입니다. 바다는 세상이고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 곧 본래 하나님 떠난 마귀 소속입니다. 그러나 땅 짐승이란 본래 하나님 소속(하늘)이었다가 하나님을 등져서 땅으로 변한 자, 배반자입니다. 마귀 소속 집단이 하나님의 교회를 침노하여 차지하였는데 땅 짐승이 자기가 세력을 모아(열 뿔을 대동)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벌거벗게 하였다 하니 음녀의 수치를 드러나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심판합니다. 그 음녀의 심판 후에 요한이 다른 천사를 봅니다. 큰 권세를 가졌다 하지요. 그 천사가 외칩니다. 계 18 : 2 - 3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드디어 바벨론(귀신의 처소)이 무너집니다. 만국(모든 교회)이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무너졌답니다. ‘땅의 왕들’은 음녀에게 소속되었던 목자들이지요. ‘땅의 상고’들은 그들의 말을 전하는 자들이니 같은 소속의 무리들입니다. 그 변절자들은 마귀와 교제한 것이니 소위 ‘음행’한 것입니다.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하나님 말씀이라 칭하면서 목회를 하고 교회를 키우고 스스로 높아져서 치부하였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달란트를 배우며 금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맡긴 금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마귀 소속의 목자들이 전하는 말(설교)도 금은보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 예로 11 - 12절을 봅니다.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여기 각종의 물건 이름들이 열거됩니다. 세상에서 사용되는 이 귀한 물건들은 그들 신앙하는데 통용되는 어떤 언행을 상징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13절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일례로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계 5 : 8) 하였으니 그들도 기도는 할 것입니다. 포도주는 말씀이니 그들의 말(설교)을 뜻합니다. 아무튼 마귀가 들어 쓰는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에서처럼 모든 예배 활동을 그대로 합니다. 오로지 전하는 말이 다를 뿐이지요. 하나님의 말씀 진리인가 아니면 하나님 말씀을 빙자한 거짓말(사람의 계명)인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생사를 가릅니다.
요한이 또 듣습니다. 4 - 6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다른 음성이라고 하였으니 앞에서 말한 천사는 아닌 듯합니다. 뒤에 ‘내 백성아’하고 부르는 것을 보니 예수님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서 나오라’ 하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하죠. 하나님을 등지고 다른 말을 전하고 있으니 마땅히 징벌을 받아야 합니다. 마귀와 그 소속한 목자들이 징벌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백성의 영혼들을 도적질하여 사망으로, 지옥으로 보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그 마귀의 미혹에 빠진 성도는 책임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 좀 안다고 잘난 척해보는 거죠.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줄 아셨다면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아담이 죄를 짓게 하셨느냐고 대듭니다. 물론 신자도 가끔 그런 의문을 가지는 때가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 탓하는 겁니다. 아담이 하와를 빙자하여 하나님 탓을 했듯이 말이지요. 아니 누가 배필을 달라고 했습니까? 괜히 하와를 주셔가지고 죄 짓게 만드세요? 그런 마음이었겠지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좋아할 때는 언제고, 잘못하고 나서는 남의 탓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우리는 특별히 부름 받아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 백성입니다. 그것만도 황공하고 감사한 일 아닙니까? 그러면 마땅히 그 언약을 지켜야지요. 욕심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등진 주제에 하나님 탓을 하면 됩니까?
여기서도 당부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나서 여태 듣고 신앙한 말씀(설교)이 잘못된 것을 알았다면 거기서 나와야지요. 그냥 버티고 있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곳은 곧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곳이 됩니다. 그 전에 나오라 하실 때 나와야 합니다. 7 - 10절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그렇게 끝장날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 죽치고 앉아 함께 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과연 깨달은 자들은 바벨론을 떠날 것입니다. 올바르게 신앙하는 성도들은 스스로 분별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경계하셨습니다.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소경이라 하였습니다. 육신의 눈이 멀어서 소경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까막눈이니 소경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해주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아니, 깨달으려 하지 않습니다. 소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소경을 따라가는 소경들입니다. 따라가는 소경은 백성이지요. 오늘날 일반 성도를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변명이 되겠습니까? 목자들이 그렇게 가르쳐주었는데요? 그게 통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도하는 소경(목자)이나 따라가는 소경(성도)이나 둘 다 구덩이(지옥)에 빠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누구 탓할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이 정신 차려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정신 차린 성도들은 자기가 지키고 앉았던 곳을 떠날 것입니다. 그곳이 진리가 나오는 곳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이 나오는 곳임을 깨달으면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계속하여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계 18 : 14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바벨론(마귀)이 탐하던 과실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백성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말씀을 깨닫고 떠났습니다. 15 - 20절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상고들은 상인들을 말합니다. 여기 상고들은 바벨론 상고들이니 마귀의 말을 전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이제는 압니다. 자기네가 더 이상 그것으로 장사할 수 없음을. 거기서 더 이상 목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앞(10절)에서도 이미 한번 나왔습니다. 여기 두 번 반복됩니다.(16절과 19절) 2절에서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했습니다. 얼마나 큰 화인지 반복하여 주지합니다. 마귀 사단은 결국 그렇게 확실하게 끝장날 것입니다. 한 가지, 여기 배에 관한 용어들이 여럿 나옵니다. 성경에서 ‘배’하면 가장 먼저 ‘노아의 방주’가 떠오릅니다. 소위 구원의 방주라고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선장이나 선객, 선인들 모두 그 교회 안의 구성원이라고 보면 됩니다.
참으로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말씀은 우리의 억울함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갚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앞의 ‘일곱 인 재앙’ 때에 신앙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했던 성도들이 하나님께 신원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계 6 : 9 - 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이제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 신원을 들으심을 보게 됩니다. 여기 나오지요. 계 18 : 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이 두 곳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즐거워하라 하신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순교자들’이지요. 그들은 24절에서도 언급됩니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여기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 때문에 순교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예언)이고 ‘저희의 가진 증거’는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것입니다. 예언을 믿는 믿음에서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럴 것이다, 하고 믿고 살면 됩니다. 그런데 그 예언대로 이루어졌을 때 그 이루어진 것을 보고 듣고,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면 그것이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주 쉬운 예로 ‘메시야를 보내줄게’ 하는 선지자들의 예언(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앙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요. 물론 가까이는 선지자 이사야에게서부터 보다 구체적으로 예언되었으니 약 6백 년 정도 됐다고 봅니다. 그 기간은 올 것이다, 하고 신앙하며 살았습니다. 어려울 것도 없지요. 그런데 그 약속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당신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르는 제자들도 이어서 증거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을 자처하던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믿었습니까? 믿는 것은 고사하고 비난하고 핍박하고 비방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행 13 : 26 - 27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선지자들의 말은 쉽게 ‘예언(약속)’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습니다. 알지는 못하면서 외웠답니다. 외웠는데 알지는 못했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읽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암송하며, 또 필사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딱한 일입니다. 그런 신앙을 하면 참으로 억울할 것입니다. 다시 주지합니다. 예언의 말씀은 묵시요 비유로 기록하였습니다. 그 하늘의 언어(천국어)를 배워두지 아니하면 성취되어 증거할 때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읽어도 모르고 들어도 모르고 도무지 모릅니다. 옛날 유대인들의 신앙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물론 마지막 때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면 관계없는 일이 되겠지요. 그런데 행여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그 마지막이 온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저 한 시대에 국한되는 이야기라면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영생’ 곧 영원한 시간이 걸린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 소홀할 수가 없습니다.
마귀의 나라 바벨론의 끝을 보고 있습니다. 계 18 : 21 - 23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만국이 미혹된 바벨론의 ‘복술’은 곧 만국을 무너뜨린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3절)나 마찬가지입니다. 곧 하나님 말씀을 빙자한 사람의 계명, 거짓말입니다. 온 교회(만국)가 그것으로 미혹되었다는 것이지요. 성도들을 다 지옥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이 나옵니다. 모두 소리를 내는 겁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교회에서 나오는 소리는 설교입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문제는 과연 진리의 하나님 말씀인가 하는 것이지요. 어느 교회든 하나님 말씀이라고 선포하지 않는 교회는 없습니다. 우선은 선포하고 가르치는 목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약 3 :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목자가 먼저 배워야 합니다. 먼저 깨닫고 확인하고 믿고 순종하며 가르쳐야 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 배우는 자세가 없으면 자만에 빠지고 독선이 됩니다. 베뢰아 사람의 자세(행 17 : 11)는 먼저 목자들에게 필요합니다.
여기 몇 가지 ‘아니하고’가 나옵니다. 계 18 : 22 - 23절을 정리해봅니다.
①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②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③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④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⑤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바벨론이 무너지면 이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마귀 소속 교회가 무너지면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목자와 말씀과 관련이 있는 비유라고 여기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거문고’를 생각해봅니다. 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교회에서 나는 소리라면 ‘하나님 말씀’이고 그 소리는 ‘성경’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거문고’를 성경이라고 생각해보고 말씀을 읽어봅니다.
계 5 : 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계 14 :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계 15 :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계 18 : 22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하고 찬송가를 부르듯이 신랑을 기다리며 신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등지고 다른 신랑에게로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벨론의 신랑이지요. 이제 그 바벨론이 멸망합니다. 그러니 거기에 신랑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빨리 깨닫고 우리의 참 신랑이신 주님께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유체이탈자>
사람은 왜 마약을 복용 또는 흡입 아니면 주입을 하는 것일까요? 그 효능을 알기에 하는 것입니까? 단순히 호기심 때문입니까? 어느 쪽이든 일단 그 세계로 들어가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고 들어갑니까? 과연 어떠한지 확인하고 싶어서 주입합니까? 우리가 흔히 아편이라고 하는 것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것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적은 양으로 강력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만큼 값도 나가겠지요. 이 못된 것이 왜 그리도 비싼 것인지, 그래서 이것이 돈벌이에 용이하게 써진다는 것이 우리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사람을 피폐시키고 인생을 망치고 그렇게 하여 사회를 혼란 속으로 몰아갈 것이기에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나라와 사회가 이를 통제합니다.
물론 선하게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수술을 할 때 사용하는 마취제도 마약류라고 할 수 있는 약품에서 만들어 사용합니다. 전쟁터에서 부상당하여 고통당하고 있는 부상병에게 모르핀은 꼭 필요한 약품입니다. 잘 알듯이 그게 바로 마약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그러한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사용하도록 제한하고 있습니다. 기분이 좋아진다? 누가 그렇게 경험하였을까요? 아마도 그것으로 인하여 그런 기분에 빠져보려고 시도하다가 중독되어버린 경우가 생겼을 것입니다. 무엇이든 중독이 되면 헤어 나오기가 어려운데 마약은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합니다. 점점 나락으로 빠져듭니다. 의식 속에서보다 그런 환각 속에서 살다가 인생 종치게 만들고 맙니다. 그런 사람들로 채워진다면 사회가, 나라가 제대로 운용이 되겠습니까?
문제는 이것이 돈이 되기에 생깁니다. 왜 돈이 될까요? 세상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다면 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찾는가? 중독되었기에 찾는 겁니다. 그러니 중독이 되지 말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로 맛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돈이 되도록 사람들이 찾게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유혹해야 합니다. 아니면 강제 주입을 하든지.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어진 삶을 감당하기 너무 힘들어서 현실도피용으로 찾는 것입니다.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인기인들이 가끔 빠져들기도 합니다. 현실도피하려다 아예 세상에서 딴 곳으로 가버리고 말지요. 그것도 천천히 망가지면서.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잠깐, 얼마 후에는 조금 전에 보았던 자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으로 바뀝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정말 나인가? 어느 쪽이 진짜 나인가? 자꾸 바뀌니 어느 사람이 자기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한 노숙자의 도움을 받아 어찌어찌 실마리를 찾아갑니다. 그 사람이 뭘 생각하고 심각하게 고려하여 상담하듯 말해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묘하게 사건을 맞추어 가도록 합니다. 모르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시작하는 거야. 어찌 보면 초심으로 돌아가서 시작하라는 말과도 같이 들립니다. 마치 인생의 지혜를 담은 듯합니다. 하기야 살아본 경험이 있다면 그 현장에서 터득한 지식이 빛나는 지혜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하나 찾아가는데 자신이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왜? 누가 나를 찾는가? 본인이 자기를 찾고 있고 사람들도 찾고 있습니다. 묘한 상황이지요. 문제는 그 사람들이 도우려 찾는 것이 아니라 없애려 찾는다는 것입니다. 피하며 쫓기며 숨어있던 본인의 특기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옵니다.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간 노숙자도 깜짝 놀랍니다. 이 사람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하면서도 이상하게 도움이 됩니다. 살다보면 그런 인연을 맺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생이란 요지경이니까요. 그래서 어쩌다 가까이 하는 사람들도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어떤 인연으로도 얽혀 사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은행원의 눈에는 돈이 돈으로 보이면 안 된다고 합니다. 매일 돈을 보며 일하는데, 돈이 항상 가까이 보이는데 행여 욕심이 생기면 무슨 생각으로 발전할지 모릅니다. 마약단속반은 단속하는 사람이지만 마약을 그만큼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다량으로 취급합니다. 그것이 돈으로 환산하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금기의 물건이지만 쉽게 접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개인의 몫으로 빼돌릴 수 있는 기회도 만들 수 있습니다. 일확천금의 기회를 만들 수 있기에 자칫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주제로 이야기도 만들어집니다. 마약단속반이 마약 중개상으로 돌변하는 것이지요.
맞습니다. 그런 이야기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러니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같은 소재를 다르게 풀어가는 것입니다. 환각의 형태도 바꾸었습니다. 독특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한 것이지요. 뻔한 이야기가 다르게 보이는 효과를 가집니다. 나중에는 할리우드 영화 ‘존윅’을 보는가 싶기도 해서 거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특징이 있기에 참고 보았습니다. 영화 ‘유체이탈자’(Spiritwalker)를 보았습니다. 영어제목이 참으로 그럴 듯합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
우리는 죽음을 멀리 있다고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다가옵니다. 그래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막상 닥쳐야 그랬나? 싶기도 하겠지요. 만약 심각한 병으로 시한부 생명임을 알게 되면 좀 달라질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약을 복용하고 검진도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죽음은 보다 가까이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럴지라도 구태여 죽음을 의식하며 살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을 생각하면 좀 더 구체화되지 않을까요? 특히 뒤에 남을 가까운 가족을 생각한다면 아마 더 심각해지리라 생각합니다. 가족이라도 나이 드신 부모라면 감정은 더 복잡해집니다. 때로 참 이상하다 봅니다. 죽을 본인보다 남을 사람을 걱정하는 것이 기이합니다. 아마도 죽은 뒤를 모르기에 그럴 수 있겠지요.
죽음,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닙니다. 성경에도 그런 말이 나옵니다. 죽은 사자보다 산 개가 낫다고 말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신앙인조차 천국보다 이승이 낫다고 여길까요? 아무튼 이왕이면 여기서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죽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문제는 그래도 어차피 죽을 것이라는 운명입니다. 따지고 보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루하루 죽어가는 길을 걷습니다. 탄생이 운명이듯 죽음도 운명이지요. 내가 원해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삶에 애착을 가집니다. 하기야 인류 보존의 법칙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생명의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산다면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고 순응해야 그나마 남은 시간을 보다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난리법석을 떨어봐야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본인도 힘들고 특히 가족이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힘들어집니다. 이왕이면 좋은 인상을 남기고 따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람이 삼십 이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년을 치리하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저를 다윗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 (대하 21 : 20)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잘 뒈졌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죽음을 바라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루를 살아도 사랑하는 감정을 품고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가장 아프면서도 가장 행복한 감정을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목숨까지 겁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만듭니다. 인종도 국경도 시간도 넘어갑니다. 그 무엇으로도 막기 힘듭니다. 하지만 동경은 하되 그런 정도의 사랑으로 빠져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감정도 세대별로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정도의 나이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만 ‘로맨스그레이’에서는 정신 나갔다고 지탄받기 십상일 것입니다. 아무튼 그래도 사랑만큼 우리의 감정을 흐뭇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습니다. 백발이 성성해도 가능합니다.
아마도 사랑하려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진관을 운영하는 ‘정원’은 나이가 적은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많은 것도 아닙니다. ‘다림’이 보기에는 처음에는 기혼자라고 생각했으리라 짐작합니다. 자주 드나들다 보니 아무래도 혼자입니다. 그래서 보다 쉽게 가까워졌겠지요. 문제는 두 사람의 감정에는 간격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정원의 생명이 그리 길게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크게 상처로 남지 않도록 배려하려고 애쓰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알게 모르게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걸요. 정원은 그 간격을 지키려 하지만 다림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날 사진관이 일찍 불이 꺼져 있습니다. 그런 날도 있지, 하고 돌아섭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도 꺼져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 그 다음 날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어떻게 된 거지? 미리 이야기라도 해주지. 아니면 메모라도 남겨두면 안 돼? 요즘처럼 핸드폰이 일상인 때가 아니니 말입니다. 이미 마음에는 불이 지펴있는데 그리고 놀이공원 데이트도 멋지게 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소식 끊고 사라진 거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여태 나눈 시간이 모두 혼자만의 공상이었나? 이렇게 두부 자르듯 갈라질 수 있는 일인가? 가게 앞을 서성이며 별의별 생각을 다했을 것입니다. 화를 이기지 못하여 가게 창문에 돌질을 해버립니다.
그리고 한참을 지났습니다. 그래도 미련이 있는 듯 하루는 사진관 앞에 가봅니다. 가게 안 진열대에서 자기 사진이 액자에 걸려 창을 통하여 웃고 있습니다. 잊지는 않고 있었구나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 마음은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로 왜 떠났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마음은 남겨두었다고 생각을 하며 돌아섭니다. 아프고 힘들었지만 이제는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습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Christmas in August)를 보았습니다. 잔잔한 일상 속에 그려지는 예쁜 사랑의 이야기와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에 조용한 감동을 자아냅니다. 1998년 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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