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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스님 법문, 부처님의 가르침은 생명의 원리
청화스님/ 전남 곡성 태안사 조실
이 설법은 본지의 주선으로 청화스님께서 동부지역 순회법회때인 지난 1992년 10월 28일 보스톤 범어사에서 하신 설법을 녹음하여 채녹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이 작업을 도와주신 뉴욕의 김묘안심 보살님께 감사드립니다.-편집자 주-
우리 불자님들 대단히고생이 많으십니다. 정든 고향땅에서도 살림을 꾸리고 살려면 많이 힘든 것이데 이른바 선진국이라 해서 굴욕이라든가 수모도 많을 것인데 역경을 극복하시고 생활도 잘하시고 우리 스님들과 더불어 절까지 만든 것에 대하여 참으로 감사 를 드리고 찬탄을 드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불안이 좀 없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 범부중생들은 항시 불안 가운데서 방황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과 여러가지 철학 기타 성현들 모두가 불안을 해소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안을 확실이 해소를 하고 인류가 정말로 참다운 행복을 누리게 되는 가르침은 이 산승이 생각할 때는 부처님 가르침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사시는 이 나라는 기독교 나라나 마찬가지이고 한국에서 건너오신 분들도 살아온 여건따라 기독교에 귀의를 많이 하였는데 여기에서 오래 사신분의 말씀이 기독교인과 불교인은 30:1 정도로 희귀한 상태라는데 그런 가운데 여러분들이 포함된 것을 장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미국에는 처음이고 온지도 며칠 안돼서 미국의 어두운 면을 아직 못봤습니다. 다만 짐작만하고 또 언론을 통해 대체로 알고는 있습니다만 좋은 면만을 우선 봤습니다. 사막을 주거지로 바꿔 살고 있는 나성지방, 뉴욕에 와서 빌딩 숲을 이루고 있는 여러 고층 건물들을 봤을 때 압도당할 정도로 위압감을 느꼈습니다. 그런 고층 건물들 하나 하나 모두가 벽돌로 쌓아 올려졌습니다. 그런 저런 위대한 노력들 ,힘들을 저는 가슴 깊이 생각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장엄스런 장관도 놀라왔습니다.
아무튼 미국의 에너지기 이렇기 때문에 세계 최강국이구나 하고 절감을 했습니다. 사실 외형적인 면으로 봐서는 우리가 미국 백인들을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다 고 생각됩니다. 생긴 것으로 봐서도 우리보다 훨씬 잘 생겨보이고 사는 것이나 이른바 힘 문제등은 우리보다 훨씬 월등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안 믿었다면 좌절때문에 미국에서 단 하루도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이 불교를 믿었기 때문에 조금도 열등감이 없는 한국인의 긍지를 느끼고 있습니다.
문명이라 하는 것이 참으로 발달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상적인 문제 상대 유한적인 문제로 머물때는 문명 자체의 종말이 절대로 좋은 쪽으로 끝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할 문제가 되겠습니다만 사람이 자기가 갈 길의 방향을 잘 모르니까 원시공산시대, 농노시대., 중세 암흑시대, .자본주의,공산주의를 다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실패로 끝났습니다. 공산주의도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인데 74년간이나 탄압하고 별짓을 다했지만 결국은 붕괴된 것 보십시요. 그런다고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의 대안이 될 것인가? 대안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본주의도 거기에 따른 모순이 굉장이 많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대로 자유경쟁적으로 끝없이 끄달린다면 거기에 따른 비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는 길이 어데서 왔는가? 인간은 대체로 어디로 갈것인가?"같이 불교적인 관점으로 볼 것 같으면 방향도 모르고 헤매고 있단 말입니다. 지금 이 토대 위에서 사회복지정책도 쓰고 있지만 그런 논리위에서도 해결이 안되니까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미국에서 들어본다 하더라도 어두운 면은 굉장히 어둡지 않습니까?
기독교인구가 17억 이스람교도 중동지방에서 10억쯤 됩니다. 이렇게 되어도 여러가지 퇴폐풍조, 범죄문제 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런것이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의 마음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금 불안이 그러한 방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째서 불안한 것인가 그것은 자기가 무엇인가 자기 스스로를 모른단 말입니다.
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갈 것인가? 대체로 우리 생명이란 것은 어떤 것이며 물질이란 또 무엇인가? 지금 최고 도로 발달된 것이 과학인데 과학문명을 이끄는 근본은 무엇인가? 물질이란 우리정신과 관련은 무엇인가 이걸 모른단 말입니다.
불안스러운 때에는 자연적으로 그런 깊은 회의에 안 빠질수가 없습니다. 회의에 빠지니까 더욱 더 불안스런 것이고 그러다 보니까 이것 저것 해보지만 해결이 안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자기문제, 내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인 근본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여기에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또는 실존철학자등이 모두가 모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굉장이 깊이 연구해가지고 나름대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간해지-자기 마음이 인생과 우주의 근본 실체인 그 자리를 깨달지 못하고서 그냥 바싹 마른 그런 체계적인 지혜로서는 뚫을 길이 없단 말입니다. 여기에 부처님의 가르침과 우리가 믿는 그런 자랑 사명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역사적인 위기-어디로 갈것인가 방황하는 우리 인생들을 구제하는 길은 개인적인 구제나 사회적인 구제나 또 어떤 문제건 간에 부처님의 가르침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사 한 가정을 두고 본다고 하더라도 아들이나 딸이나 지금은 웬만한 사람들은 대학 나오니까 기독교를 믿을 것인가? 이스람교를 믿을 것인가? 불교를 믿을 것인가? 이런것에 대하여 이론적으로는 제법 아는 소리를 하겠지요. 이러한 젊은이들을 과연 아버지 어머니가 명확히 올바른 관점에서 지도할 수 있겠습니까?
또는 학교에서 교수들이 그런 진리 문제로 방황하는 학생들을 정말로 바르게 확신을 가지고 인도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는 회의적이란 말입니 다. 아무튼 부처님 가르침 아니고서는 도저히 구제할 길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면은 부처님 가르침은 어째서 이런 사회적인 문제 개인적인 문제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인가 ?
부처님 가르침은 일체 생명을 하나로 봅니다. 가사 기독교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저편에 와 있고 나는 여기에 있고 저편에 가 있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의 이분법적이고 대립적인 그런 신앙이란 말입니다. 이슬람도 마친가지입니다. 물론 예수님이라든가 마호멧트 그분들의 본뜻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적어도 현행 기독교, 이슬람은 대상적으로 자기 신앙을 추구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부처님은 어떤 것인가 이것에 관해서 말씀을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개념은 법신, 보신.화신으로 구분해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법신은 진리자체, 생명자체인 부처님이십니다.
보신은 무엇인가? 이것은 법신 부처님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법신 부처님 진리 자체에 들어있는 하나의 무한의 공덕, 자비라든가 지혜라든가 행복이라든가, 님이라든가 법신부처님 가운데 들어있는 무한공덕이란 말입니다. 무한한 가능성 이것이 보신부처님입니다. 화신 부처님은 무엇인가? 화신 부처님은 거기에서 법신, 보신을 본체 근본으로 하고서 이루어지는 모든 현상계 석가모니 부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인간이나 또는 기타 다른 동물이나 또는 하늘에 있는 그런 성자라든가 하여튼 일체 존재 모두가 다 우리가 대승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화신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에 대한 확실한 그러한 개념을 확립하십시요. 아까 말씀드린 바와같이 우리가 믿는 것은 바로 부처님인데 부처님은 원융무애한 하나의 생명자체, 진리 자체인데 구태여 우리중생들이 알기 쉽게 설명하다보면 진리자체는 법신부처님이고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끝도 갓도 없는 우주생명 자체가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그런 생명자체가 법신부처님이고 그 가운데는 일체가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능력이나 그것이 보신부처님인데 거기에서부터 일체 존재가 인연따라 나왔단 말입니다. 그것을 불교의 어려운 말로 법계의 연기라 또는 진여의 연기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깊은 인연법입니다. 인연이란 이런 저런 것들이 합해서 무엇이 이루어진다 이런 단순한 것은 소승법인 것이고 대승법에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입니다.
불성이란 바로 인격이기 때문에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그런 무한 가능성이 부처님의 도리가 그때 그때 인연따라서 우주만물이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대승법에서 본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사실은 우주 문물이 화신부처님입니다. 또는 부처님 자리는 그것이 시간 공간적인 어 느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화신부처님이나 보신부처님이 나 법신부처님은 거기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이 끝도 갓도 없는 바다에서 바람 따라서 거품이 일어나고 파도 일어난다고 생각합시다. 파도가 천파만파 일어난다고 생각합시다. 파도가 천파만파일어나고 거품이 마치 수십억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항상 거품이나 파도가 물 아닙니까. 같은 물이란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부처님한테서 일어난 우주 존재가 모두 다 똑같은 부처란 말입니다. 제가 이와 같이 대승적인 또는 철학적인 어려운 말씀을 드린 것은 무엇인고 하면 소승적인 법으로는 현대사회의 또는 지성인들의 불안의식을 제거할 수가 없단 말입니
다.
전자電子는 무엇인가? 중성자는 무엇인가? 또는 가장 미세한 소립자인 광자는 무엇인가? 현대같은 과학만능 시대에 있어서 종교가 이런 것에 대해서 명확한 해답을 못내리면 그때는 우리 불안의식은 해소를 못 시킨단 말입니다. 원자 핵은 무엇인가?
항상 부처님한테 참회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그런 면에서 우리가 껌껌해서 해답을 못 내릴 것 같으면 항시 불안한 마음이 있겠지요. 그 러나 물질의 기본에 관한 그런 것들이 부처님 가르침에는 명확히 풀이가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은 소승적인 가르침, 그런 가르침으로서는 제대로 해답을 못내린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나오신 것은 대승적 인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 중생들 마음을 안심시키고 영생 안온한 해탈로 이끄는데 부처님 가르침 목적이 있습 니다.
우리가 대승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인연따라 이루어진 모든 것은 다 부처님 진여불성이 되어 있습니다. 진여불성이 되여 있으니까 우리 인간도 역시 머리카락 부터 발 끝까지 불성으로 안된 것이 없습니다. 티끌 하나 어떤 것 할 것 없이 불성으로 되어있던 말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모두 학식도 높으시고 선진국에서 공부도 많이 하신 분들이니까 물리학분야등 자연과학분야도 저보다 훨씬 더 알으시겠지만 에너지 불변의 원칙, 에너지 보존의 원칙으로 본다면 사람이 생겨났다가 죽고 또는 물건이 있다가 없어지고 하더라도 에너지는 전혀 조금도 감소가 안된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현상으로 있는 모든 것이 소멸되고 없어지고 한다 하더라도 현상을 이룩한 에너지 정기라는 것은 조금도 감소나 소멸이 안됩니다. 그와 같은 의미로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주의 생명자체도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에너지가 증가 된 것도 아니고 사람의 목숨이 다 한다 하더라도 불성이 조금도 감소가 안됩니다. 에너지가 적당히 진동하고 또는 결합되고 해 가지고서는 이것이 탄소가 되었든 탄소가 결합하여 다이야몬드가 되었든 에너지 근본은 조금도 가감이 없습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다 아는 반야심경에서 말 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佛心이나 佛性의 인연따라서 태양이 됐든 하늘에 별이 되었든 인간이 되었든 불성자체는 조금도 변질이 없단 말입니다. 상만 다르게 보일 뿐입니다. 그렇게 아는 것이 인과적으로 연기법으로 불교를 아는 것입니다. 이런 이론들이 기신론이나 화엄경등에 풀이가 되어 있어요. 진여불성이 인연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천차만별로 구분이 되었다. 하더라도 조금도 진여불성의 본성은 변질이 안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현상 그대로 이것이 진여불성이고 진여불성이 인연을 따르면 바로 그것이 일반 중생인 것 입니다. 이것이 대승적인 연기법이고 따라서 모든 것은 결국은 진여불성뿐입니다.
우주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불성이나 불심이나 법성이나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는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마음으로 되었단 말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전자라 하더라도 전자가 별도로 어디에 공연히 있지 않단 말입니다. 에너지가 어떻게 진동해서 어떤 상을 낼 때에 물리학자가 전자라고 칭했습니다. 또는 순수에너지가 어떻게 진동하고 그래서 물리학자가 양성자라 이렇게 정했습니다. 에너지가 진동해 서 마이너스(-) 성품을 떤것이 전자요 에너지가 진동해 서 (+) 성품을 띤것이 양성자란 말입니다. 그것들이 결합해서 그때는 산소나 수소의 각 원소가 나온단 말입니다. 그것들의 결합인 분자구조로 해서 사람 모양이고 무 슨 모양이고 나옵니다. 따라서 사람이 되었건 무엇이 되었건 에너지 자체는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천지는 나와 더불어 뿌리가 같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란 말입니다. 지금 당장에 나한테 배신한 사람이 있으면 때려 죽이고 싶고 미워지겠지요. 그 사람도 겉은 미운소리를 했지만 생명자체를 진여불성으로 보면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진여불성으로 본다고 할 것 같으면 뿌리는 하나가 아닌가 생각할 때는 그때는 미운 마음이 가신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에서 볼 때 흑인형제가 우리한테 주먹으로 때린다 할 때, 두대 세대 더 때려서 그 사람을 넘어뜨리고 싶으시겠지요. 그러나 저 사람은 겉만, 상만 다른 것이지 본 성품은 같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할 때 용서가 된단 말입니다. 인종적인 문제 국제간의 문제 민족적인 문제가 이렇게 생각해야 실마리가 풀립니다.
자연과 인간과의 문제, 나무, 흙, 물등은 생명자체로 볼 때는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나무를 해치면 보복을 받습니다. 그대신 물, 나무, 흙을 존중하고 아낄 때에는 그 만큼 우리가 혜택을 받습니다.
이러한 원리로 볼 때 현대사회의 문제, 공해의 문제, 무슨 문제이든간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아무튼 현대는 불교와 같이 하나의 생명을 철저히 규명한 가르침만이 현대의 위기를 구제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 불교인의 자랑이 있습니다. 우리불자님들은 그런 의미에서 축복받은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공부를 해가면 해 갈수록 더욱 더 그것이 절감될 것입니다. 내 생명이 무엇인가? 지금 내가 비록 못나고 학식이 없다 할지라도 내 생명의 본 바탕은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란 것은 지혜나 자비나 행복을 원만히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가 부처인 것이 우리 생명 자체인데 따라서 다른 것으로 만족을 추구한다고 할 때 절대로 만족을 못 채웁니다. 감투를 써봐도 만족을 못채우고 제 아무리 황금이 많아도 만족을 못채우며 이성을 아무리 추구해 봐도 못채웁니다. 왜 그런고 하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본래 부처 자리로 가야 비로서 그때 참으로 안온한 평안이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은 우주자체입니다. 우주자체인 이것이 도리입니다. 따라서 봄.여름이 오는 것이나 모두가 다 우주 자체의 목적의지에 따라서 그것이 오는 것입니다. 자연이나 인간이나 그런 것들은 모두가 다 종단에는 부처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본래가 부처인데 부처가 안되겠습니까? 우리가 항시 외우는 사홍서원 이것이 우주의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나는 불교인이 아니다고 합니다. 이렇다 하더리도 우주의 그런 의지에 따라서 부처님이 돼가는 것입니다. 다만 게으름을 부리면 금생에도 못되고 몇 천생 윤회를 하겠죠.
그러나 분명히 100%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믿고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금생에 불성을 이루어 부처가 된단 말입니다. 인간의 목적은 불교인이든 아니든 모두가 다 불자란 말입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은 불자임을 모른단 말입니다. 마치 공기를 마시면서 공기 은덕을 모르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 종말론 같은 것이나 시한부 종말론 같은 것은 모두 어리섞은 무지에서 온 것입니다. 무지란 불교적 용어로 무명입니다.
생명자체는 나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시간 공간을 떠나서 우주생명을 항상 영위하는 것 입니다. 다만 인연따라 이루어진 몸뚱아리라든가 현상만 그때 그때 변화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에 대해서 너무 집착을 마십시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우리 몸은 물질 아닙니까? 몸뚱아리 이대로 지금 공이란 말입 니다. 소중이 아끼는 자기 몸뚱아리가 공이라면 그때는 허무감을 느끼시겠지요. 그러나 물리학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요. 각 원소가 세포로 구성되어서 한몸이 되었던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몸을 구성한 세포는 지금 순간도 변치 않고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1초 전과 1초 후의 우리 몸뚱이가 신진대사에서 같지 않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그런 변한 것을 모르니까 아침 몸이나 저녁 몸이나 일초 전과 일초 후가 같은 몸이라 생각하지만 엄격히 물리학적으로 생각할 때는 일초 전과 일초 후가 같지 않습니다. 일초 전과 일초 후가 다르다고 생각할 때는 어떠 한 순간도 같은 모습으로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 않단 말입니다. 또한 우리 몸을 구성한 산소나 수소나 그것은 무엇인가? 앞서 말한 바와같이 전자와 양자들의 진동이 적당이 결합되어서 산소가 되고 뭐도 된단 말입니다. 물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아닌 시간 공간성이 없는 것이 진동되어 그것이 하나의 상을 낸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라 금강경에 나와 있는 그런 도리 아닙니까? 0을 몇 천번 곱해도 0은 0입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느끼지 말고 하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최선으로 자기 건강을 관리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런 원리를 알아두어야 이 몸뚱이 때문에 죄를 안범한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 몸을 함부로 할 수 없단 말입니다. 같은 생명이니까 내 몸둥이 때문에 다른 사람 몸뚱이 함부로 하면 그냥 우리가 보복을 받습니다. 따라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명이란 오직 하나의 생명이요, 현상적인 것은 공입니다. 색, 소리, 맛 이런 모든 것이 공입니다. 이것을 우리중생들이 지금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중생과 성인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성인들은 근본을 보기 때문에 상에 집착할 리가 만무하나 우리 중생들은 반대로 근본성품을 못보고서 거죽의 가상만 보기때문에 집착합니다. 거기에 범부와 성자의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네들이 참다운 뜻을 모르니까 불교를 다르게 말하는 것이지 기독교나 각 성인들이 말한 가르침 모두가 다 허무 무상한 상을 떠나서 본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네들은 틀림없이 세월이 흘러가서 보다 더 자기들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부처님 가르침을 다소라도 맛본다고 생각할 때 자기들 하나님이 불교 부처님 같이 안이나 밖이나 다 존재하고 천지우주가 바로 하나님이다 이렇게 그때는 말이 나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뜻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을 떠나서 상을 여의고서 허무 무상한 거품같은 꿈같은 상을 떠나서 본성품으로 간 것입니다. 본성품으로 가야만이 죽음도 초월하고 다 초월합니다. 또는 본성품자리는 무한 공덕의 자리이기 때문에 자비나 지해나 행복이나 어떤 것이나 완벽한 자리이기 때문에 성품자리로 우리가 가까와지면 가까와진 만큼 우리 행복도 차근 차근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차근 차근 안심이 된단 말입니다.
견성오도가 미처 못되어 성자까지 못된다 하더라도 어렴풋이나마 하나의 생명이구나 이렇게 느끼기만 해도 그때는 우리 마음이 평온이 온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이라 하는 불성은 하나의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의 빛입니다. 생명의 빛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가까와지면 가까와질수록 우리한테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마음도 밝아지고 우리 표정도 밝아집니다. 저 부처님 뒤에 계신 후불탱화를 보십시요. 그 광명으로 천지우주를 두루감고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영원한 생명의 빛입니다. 기도를 많이 모시고 참선을 많이 한 분들은 오로지 그 빛과 생명이 하나가 못된다 하더라도 어렴풋이나마 그 빛의 감득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관세음보살님을 부르고 아미타불을 외우시고 또는 무자나 이 무엇고? 화두를 하시고 모두가 다 성품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생명이 온 길이고 그 자리가 바로 종국에 우리 생명이 돌아갈 길 입니다. 그 성품으로 간 길외에 그 길보다 더 중요한 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기에 왕자를 그만두고 승려가 되지 않았습니까?
신라때 법흥왕도 승려가 되고 자기 아내도 똑같이 승려가 되었습니다. 또 진흥왕도 자기와 자기 아내가. 승려가 되었습니다. 물론 다 승려가 되라는 의미가 절대로 아닙니다만 아무튼 그와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우리 인간에게 지상명령입니다. 그 길 외에는 다르게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좋은 어머니가 되고 좋은 아내가 되고 스승이 되고 좋은 사회인이 되며 참다운 민주주의를 하고 어떤 의미에서나 인간의 참다운 행복을 위해서는 부처님 가르침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관세음 보살 하신 분들은 관세음보살을 열심이 하십시요. 관세음보살도 바로 우주의 생명자리를 대변하는 길입니다. 지장보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은 우주 생명자리이 기 때문에 지장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그렇게 외운다 할 지라도 별도로 뿔뿔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대승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지장보살은 별로다 또는 아미타불이 별로다 이렇게 하지만은 그렇게 되면 그때는 불교가 아니 됩니다. 원융무애한 원만무결한 생명자체가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표현한 말은 다 하나란 말입니다. 다만 부처님의 광명과 생명의 공덕이 하도 많아서
하나의 개념으로 다 표현을 못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을 자비로운 쪽으로 표현한 것을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것으로 표현한 것을 문수보살, 중생의 영혼을 다스려서 저 인간이나 천상이나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것은 지장보살, 모두 통합해서 대명사는 아미타불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것이지 뿔뿔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장보살을 외거나 무엇을 하거나 스님들한테 배워 가지고 자기들이 하나의 수행법을 선택했으면 모두가 다 가림없이 상을 여의고 상을 떠나서 본 성품으로 가는 것입니다. 화두도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서 어떤 것이나 다 대도무문이고, 다 성불의 법이란 말입니다.
오직 하나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공부를 하시면 됩니다. 염불을 한번하시면 한 만큼, 화두를 참구하면 한 만큼, 그때는 그것이 우리 상을 제거하는 공덕으로 우리한테 쌓여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잘 안되어 공부를 무던이 해도 조금도 더 나은 것이 없는데 그러나 염불을 한번하고 화두를 한번 참구하고, 주문을 한번 외고, 경을 한번 외고 하면 외운 만큼 잠재의식에 차근 차근 쌓이게 되어 우리한테 나쁜 습관상을 다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그것이 차근 차근 적어지고 나중에 비우게 돼서 나중에는 텅텅 다 비워버리면 그때는 진여불성만 남는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부처님 이름을 외우면 다 들으시는 것입니다. 생명이기 때문입 니다. 또 부처님한테 참배하면 절하는 만큼 부처님은 다 보신단 말입니다. 부처님한테 가만히 마음속으로 우리가 기원만 드려도 다 아신단 말입니다. 부처님은 무한의 가능을 갖춘 생명자체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볼려고 간절히 마음먹으면 그때는 분명히 부처님이 광명으로 우리한테 보이신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금생에 성 불을 하십시요.
장사하는 분들은 부처님께 너무 몰두하면 장사가 안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장사가 훨씬 잘 됩니다. 모든 사람을 다 부처님같이 보고 상대해 보십시요. 고객도 더 많아지고 표정도 밝아지고 판단도 빨라지고 부처님의 지혜는 무량지혜입니다. 따라서 어떤 분야 예를 들어 정치인이 된다 하더라도 가사 정 적을 미워햐더라도 사람을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해서 생활불교 참다운 생활불교는 부처님을 안 여의고 하는 생활이 참다운 생활불교가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대승적인 가르침 또는 예수나 공자나 석가.노자 모두가 다 자기를 지향하는 가르침입니다. 진리가 절대로 둘이 아닌 것이고, 성자의 마음은 절대로 두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다만 그네들은 깨달음이 석가모니과 같지 못하기 때문에 석가모니 같이 철저한 가르침을 못피웠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에는 자랑과 앞으로 우리가 할 사명이 있습니다. 저 네들은 설사 우리를 잘 모르고서 마귀라고 한다 하더라도 그런것이 별 문제가 아닙니다. 몇 십년, 몇 백년 차근 차근 세월이 흘러보십시요. 틀림없이 그들은 차근 차근 부처님의 품안으로 흡수가 됩니다. 이것은 바로 역사의 필연인 것입니다. 잎으로 새로운 시대 이른바 제 3의 물결 말입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다시 수정이 되어가지고 참다운 사회가 온다고 할때는 꼭 부처 님의 가르침이 지도원리가 안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을 열심이 믿으셔서 절대로 나한테 갖추고 있 는 불성을 개발하십시요. 부처한테 가면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하고 다 편한 것 입니다. 우리 생리와 신의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한테 온전히 비운다고 생각할때는 아픈 사람도 낫습니다.
• 그렇게해서 무상의 행복을 얻으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이 설법은 본지의 주선으로 청화스님께서 동부지역 순회법회때인 지난 1월 28일 보스톤 범어사에서 하신 설법을 녹음하여 채녹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이 작업을 도와주신 뉴욕의 김묘안심 보살님께 감사드립니다.
1992년 12월호 미주현대불교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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