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2권, 1년(1660 경자 / 청 순치(順治) 17년) 5월 2일(병진) 4번째기사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죽었다.
시백이 별다른 재능도 없고 또 재상으로서의 업적도 없었으나, 청백하고 충의롭고 근신한 절의만은 당시 재상 지위에 있던 여러 사람들의 미칠 바가 아니었다.
그는 병 중에 있으면서도 지성으로 하는 말들이 모두 나라 걱정하는 말이었고, 임종시에는 입으로 몇 줄의 유소(遺疏)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그 유소에,
“신이 두 조정에 걸쳐 지우(知遇)를 받고 은총은 분에 넘쳤으나 보답은 티끌만큼도 한바 없고, 다만 힘이 미치는 데까지 하다가 죽은 뒤에야 말려고 마음먹었을 뿐입니다. 다행히도 성명을 만났으나 죽음이 이미 임박하여 대궐을 우러러 보아도 천안(天顔)은 영원히 뵈올 수가 없습니다. 구구한 생각은 다만 성상께서 덕을 힘쓰고 업을 닦을 것이며, 정형(政刑)을 신중히 하여 비록 대벽(大辟)을 집행할 죄인이라도 쾌하게만 여기지 말고 반드시 더 어렵고 더 신중하게 하소서.”
하고, 후로도 많은 말을 하였으나 끝맺음을 못하였다.
그의 아들 이흔(李忻) 등이 정서하여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이 유소를 보니 슬픈 마음 더욱 간절하다. 비록 끝맺음을 못한 글월이지만 그 꾸밈없는 충절과 못잊어하는 성의에 대하여 이를 띠에다 쓰고 가슴에 새겨두지 않을까보냐.”
하고, 이어 근시를 보내 조의를 표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시백은 배우지도 못하고 술업도 없으면서 송시열·송준길 등을 추켜세워 심지어 이윤(伊尹)과 부열(傅說),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으로까지 소차에서 칭하였고, 능소를 수원(水原)으로 정하려 할 때에도 그곳은 안 된다는 쪽으로 강력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시열에게 붙어 그의 주장을 합리화시키려는 뜻이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흠으로 여기었다.
현종 실록은 숙종초에 권력을 잡은 남인들이 편찬하였다.
이시백을 높게 평가하지 않음
그러나 그 후 서인들이 집권하여 다시 펴낸 현종개수실록에서는 높게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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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개 3권, 1년(1660 경자 / 청 순치(順治) 17년) 5월 3일(정사)
원임 영의정 연양 부원군 이시백의 졸기
원임(原任) 영의정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졸하였다.
시백은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장자이다.
광해군이 모후(母后)를 폐하자 이귀가 시백(時白) 및 막내 아들 시방(時昉)과 함께 은밀히 광복(匡復)시킬 것을 모의하였다. 그리하여 반정(反正)하고 나서 시백이 정사 공신(靖社功臣) 이등(二等)에 참여되었다.
병자년에는 수어사(守禦使)로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서성(西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적의 잠사(潛師)가 공격하여 왔다. 이때 시백은 갑옷도 입지 않은 채 몸소 사졸들에 앞장서서 활을 쏘았는데 두 번이나 날아오는 화살에 맞았으나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며 싸움에서 이긴 뒤에야 비로소 화살을 뽑으니 피가 흘러 등에 흥건하였다.
동성(東城)·남성(南城)·북성(北城)의 사졸들은 체부(體府)의 미지(微旨)를 받고서는 일제히 외치며 궐(闕)을 핍박하면서 화의(和議)를 배척하는 신하들을 결박하여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유독 시백이 거느리고 있는 서성의 군대만은 끝내 동요가 없었다.
오랫동안 서전(西銓 병조)을 맡았으며 총재(冢宰 이조판서)79) 를 거쳐 정승으로 들어갔다.
타고난 천성이 충효스럽고 인애스러웠으며, 젊어서 정승 이항복(李恒福)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면서 조익(趙翼)·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 등과 친구가 되었다.
비록 질박하였으나 일찍이 《소학(小學)》을 수천 번을 읽었는데 집에 있을 적에는 항상 이것으로 자신을 통제하였다.
38년 동안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청렴하고 삼가고 공손하고 검소한 것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인조가 일찍이 박승종(朴承宗)의 옛집을 이귀(李貴)에게 하사하였으므로 시백이 거기에서 살았다. 거기에는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이라 이름하는 한 떨기 꽃이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중국에서 전래된 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액정(掖庭)의 사람이 와서 상의 명이라고 하면서 옮겨가려 하자 시백이 몸소 꽃나무에 가서 뿌리째 뽑아 던지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오늘날 국세(國勢)가 조석(朝夕)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인데 주상께서 어진이를 구하지 않고 이 꽃나무를 구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차마 이 꽃나무로 임금에게 아첨하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볼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이런 내용으로 계달(啓達)하였다. 뒤에 상이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이는 그의 진규(進規)를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는 뜻에서였다.
기축년(1649 인조 27년) 3월 상이 세자와 함께 어수당(魚水堂)에 임어하여 시백 등 몇 사람을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상이 직접 술잔을 잡고 마시기를 권하면서 세자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내가 팔다리처럼 여기고 있으니 너도 뒷날 나처럼 대우해야 한다.”
하니, 시백이 눈물을 흘리면서 물러나왔다.
효묘(孝廟) 초년에 자점(自點)의 역옥(逆獄)이 일어났는데, 시백이 자점과 인척(姻戚)이었던 탓으로 외손 세창(世昌)이 복주(伏誅)되자, 시백이 궐문 밖에 나아가 명을 기다렸다.
그러나 상은 시백을 불러 국문(鞫問)에 참여하게 하였는데 뒤에 반목하는 사람이 있자 상이 그를 귀양보내고 시백을 위유(尉諭)하기를,
“청백(靑白)한 지조와 충적(忠赤)한 마음을 어찌 국인들만 알고 있겠는가. 실로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 성유(聖諭)는 실로 시백의 정성을 잘 표현한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위독하여졌는데 자상하게 하는 말이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말이었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그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물어보게 하려 했으나 연제(練祭)가 임박한 탓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급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물어보게 하였다.
시백이 유소(遺疏)를 입으로 불러 말하기를,
“신이 두 조정의 지우(知遇)를 받았으니 은혜가 분수에 넘쳤습니다. 그런데도 티끌만큼의 보답이 없었으므로 단지 근력이 미치는 한 노력하면서 죽은 뒤에야 그만두려 하였습니다. 다행히 성명을 만났는데 운명(殞命)이 이미 박두하여 대궐을 우러러 바라보니 천안(天顔)을 뵈올 길이 영원히 막혔습니다. 신의 구구한 생각은 단지 성상의 덕업(德業)이 진수(進修)되는 데 있습니다. 형정(刑政)을 삼가서 큰 죄인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통쾌하게 여기지 마시고 반드시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여기는 마음을 지니소서.” 하였는데, 소고(疏藁)가 반에도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기운이 끊겨 버렸다.
사관이 도착하니 막 속광(屬纊 코에 솜을 대어 죽음을 확인하는 것)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아들 이흔(李忻) 등이 반쯤된 소고를 올리니, 상이 이르기를,
“이 유차(遺箚)를 살펴보니 애통스러운 마음 매우 간절하다. 이것이 완성되지 못한 글이기는 하지만 그 간절한 충정과 연연한 성심을 띠에 써 두고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특별히 관재(棺材)와 어의(御衣)·비단 이불을 하사하여 염습(殮襲)에 쓰게 하였으며 대내(大內)에서 특별히 전수(專需)를 준비하여 중사(中使)를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모두 특이한 은수(恩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