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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량(鄭希亮)
암천
2023. 5. 16. 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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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량(鄭希亮)
무신란(戊申亂)을 주도한 풍운의 혁명가
정희량(鄭希亮,?~1728)의 본명은 준유(遵儒)이고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출생년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무신란 때 40대 초반으로 명문의 자손이었다. 부친은 참봉을 지낸 정중원(鄭重元)이며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현손(玄孫)으로 안음에서 살다가 순흥(順興)으로 옮겨가 살았다. 준유는 희량(希亮)으로 이름을 바꾸고 안음현 남리면(마리면 대동리)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인좌(李麟佐), 박필현(朴弼顯) 등과 공모하여, 영조 즉위 후 벼슬에서 밀려난 소론 일파와 모의하여 영조를 몰아내고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할 모의를 하고 이인좌를 도원수로, 스스로는 원수가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좌는 청주를 점령한 후 크게 세력을 떨쳤으나 안성죽산에서 정희량군(鄭希亮軍)을 기다리던 반란군은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이 이끄는 관군에 크게 패하였다.
정희량은 안음, 거창, 함양, 합천, 삼가 등의 여러 고을들을 장악하였으나, 거창에서 선산부사 박필건(朴弼建)과 곤양군수 우하형(禹夏亨)등에게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그때가 영조 4년 무신년(戊申,1728)에 일어났으니 무신란(戊申亂)이라고 하며 국사에서는 ‘이인좌의 난’으로 기록되었다. 이인좌의 난을 우리고장에서는 정희량이 거병하여 난을 일으켰기에 ‘희량의 난’으로 불리었다. 초계정씨 족보에는 의거혁명가로 기록하였는데 정희량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정희량은 조선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고조부가 정충대절의 충신 동계 정온이며 증조부는 여러 고을수령을 역임하고 공조정랑을 지낸 사천공 창시(絲川公 昌詩)다. 조부가 제천현감을 지낸 기수공(岐壽公)이며 부친은 동몽교관과 세자부솔을 지내고 도산서원과 소수서원의 원장을 지낸 천옹 정중원(喘翁鄭重元)이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정희량이 영조 무신년(1728)에 이인좌의 아우 이웅보와 나숭곤과 더불어 거병하였던 것이다.
무신란(戊申亂)이 일어난 배경은 숙종 6년(1680)의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도 노론과 소론으로 갈려 당쟁을 벌이다가 무자다병(無子多病)한 경종(景宗)대에 이르렀다. 김창집 등 당시의 노론 4대신은 왕제 연잉군 금(延礽君 昑:영조)을 세제로 책립하고 곧이어 정무를 대리케 하였다. 이때 소론계는 김일경, 목호룡으로 하여금 노론계 4대신이 역모하였다고 고발케 하여 노론파를 숙청하고 권세를 잡았으나, 1724년 세제였던 영조가 즉위하자 무고임이 드러나 김일경, 목효룡이 참형되고, 노론은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당시 정권은 극소수의 소론과 퇴계 연원(淵源)의 경북 사림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노론파 훈척(勳戚)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인조반정 때 정인홍이 실각된 이후 북인들과 조식을 연원으로 하는 경남의 남인들은 사실상 정계진출의 길이 막혀 한낱 지방사호로 전락되었고, 경종의 죽음과 영조의 옹립이 노론들의 흉계에 의한 것이라는 풍문도 있어서 차제에 정부를 전복시키고, 선왕의 원한을 풀기위해 밀풍군 탄(坦:소현세자의 손자)을 세워서 왕통을 바로잡겠다는 격문을 뿌리고 난을 일으킨 배경으로 보고 있다.
무신란(戊申亂)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정희량은 경종 때 복주(伏誅)된 소론파의 여맥(餘脈)인 이인좌를 만나 그를 대원수로 삼고 자신은 원수가 되어, 평안도 병사 이은성과 서울의 총융사 김중기, 금군별장 남태징 등의 내응을 약속받는 한편, 서북경남의 지방사호(地方士豪)의 규합에 성공하였고, 그와 남매간인 합천 거부 조성좌로부터 막대한 군자(軍資)를 제공받았다. 또 안동사림의 집회에 나가 동조를 얻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때는 순흥으로 이주한 부친 중원은 1년 반 전에 타계한 뒤였다.
3월 15일 청주를 점령한 이인좌는 그의 아우 이웅보를 안동으로 파유하여 희량과 행동을 함께 하도록 하였으나, 희량이 이미 안음으로 떠난 뒤라 웅보도 뒤따라 안음으로 왔다. 정희량, 이웅보, 나숭곤 등 3인은 3월 21일 안음현 남리면(현 마리면 대동리)에서 거병하였다. 당시 거창현감 신정모(申正模)는 당황하여 군사를 맡길 수 있는 문무겸비한 사람을 구하려고 하니, 웅양 화동에 사는 이술원이 중망(衆望)에 따라 천거되어 좌수가 되었다. 이 좌수는 곧 정찰원을 안음으로 보내어 그곳 상황을 살피게 하니 22일에 돌아와 알리기를 ‘처음 희량은 안음현 남리면에서 조부 기수공의 묘이장(墓移葬)을 가장하여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한 다음 이웅보를 원수(元帥), 희량은 부원수(副元帥), 나숭곤을 기총(旗總), 정중항, 정세유, 정관유 등을 중군으로 삼고 의병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군중을 유인 또는 협박하여 기치를 날리며 징, 꽹가리,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고현(위천)으로 가서 창곡을 털어 배불리 먹인 다음 안음읍으로 쳐들어가 현감 오수욱(吳遂郁)을 내쫒고 군기를 모조리 빼앗았다.’고 하였다.
23일 새벽 현감 신정모는 노모를 업고 아내와 함께 내아(內衙)뒷담을 넘어 달아나니 이술원 좌수는 20 리를 뒤쫓아 주상면 고대 산골짜기에서 신정모(申正模) 현감을 만나 소매를 붙들고 ‘신하로서 나라를 위해 죽어도 마땅한 이때에 어찌 부녀를 위해 자리를 떠난단 말이오.’라고 꾸짖으니 신현감은 울면서 ‘노모가 계셔서 이렇게 되었소이다. 적을 막는 일은 공이 맡아주시오.’하고 달아났다, 이술원은 맨손으로 반란군 수명을 때려눕힌 후 힘이 빠지자 포박되어 객사로 끌려갔다.
“희량은 객사에 앉아 위세를 갖추고 큰 소리로 이술원을 향해 ‘어제 격서를 보내 병사를 정돈하고 기다리라 하였거늘 어찌 그렇지 않았느냐.’하고 호통을 쳤다. 이에 이술원은 크게 꾸짖어 ‘너는 문간공의 후손으로서 대대로 국록을 먹고 더욱이 나라에서 너에게 무엇을 잘못했기로 이따위 군사를 일으켜서 조상을 등지고 나라에 반역하느냐.’하니 희량은 크게 노하여 ‘너의 생사가 내손에 달렸는데 어찌 감히 굴복하지 않느냐?’ 소리치니, 이술원은 ‘내 이미 너를 죽이지 못하게 되었으니 차라리 나를 빨리 죽여라.’ 하였다.”
이런 사실은 이승원의 『무신일기(戊申日記)』에 시종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거창을 점령한 희량은 호남의 반군들과 합세하기 위해 27일 함양으로 이진(移陣)하였다. 당시 함양군수 박사한(朴師漢)은 저항도 않고 운봉으로 넘어가 팔량령에서 그곳 군사들과 합세하여 대치하니, 희량군은 재를 넘는 것을 단념하고 안음은 신수헌(愼守憲), 함양은 최존세(崔存世)를 수령으로 임명하여 지키게 하고, 30일 거창으로 진을 옮겼다. 이 때 거창가수(假守:임시수령) 정재흥과 이술원의 재종 용원(龍原)과 붕원(鵬原)이 ‘웅보는 우두령에, 희량은 성초역에 포진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3일 영장 이석복이 이끄는 군사는 안음 동쪽의 새재(鳥峴)을 넘어서 우두령으로 향하고, 우하형이 이끄는 군사는 우방, 우태와 함께 안음 무월리를 지나 성초역에 있는 희량군을 치기 위해 진격하였다. 우방은 관군을 독촉하여 성초의 적진 앞 전승동 높은 곳에 올라서서 큰소리로
‘거창 군교와 장사들아! 관군이 당도해서 역적을 치려한다. 너희들은 적괴를 묶어서 죄를 씻어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하니 갑자기 적진이 술렁이더니 장사 여해달, 배두필, 남태정, 김인상 등이 과연 희량, 웅보, 숭곤 등과 20여명을 묶어서 관군막하에 바쳤다. 정희량, 이웅보, 나숭곤은 이우방에 의해 현장에서 참수되었다. 이로써 2주 동안(14일간)의 난동이 끝났다. ”
무신란의 사회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면
무신란 이후 영남의 인사들은 영조, 정조중기까지 박해를 입어 정치적 지위를 얻을 수 없었고, 안음현은 반역향으로 혁파되어 주민들은 많은 고통을 받았다. 하빈인 이성택(李聖擇)은 안음을 복현 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복현(復縣)은 9년만인 영조12년(1736)이었고, 안음현(安陰縣)은 영조 43년(1767)에 안의현(安義縣)으로 개명되었다.
무신란의 여파는 궁중에까지 미쳤다. 한중록(恨中錄)에는 사도세자의 기행(奇行)이 영조에게 알려져 결국은 뒤주 속에 갇혀 8일 만에 죽었다. 이런 영조의 성격이 무신란 이후부터 믿을 사람이 없기에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난(逆亂)의 아들로 인하여 천옹 정중원(喘翁鄭重元)의 글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으나 거창문화원향토사연구소에서 『천옹유고(喘翁遺稿)』를 2019년 간행하여 천옹 사후 300여 년 만에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참고문헌】
『거창군사』, 거창군사편찬위원회, 1997.
『위천면지』, 위천면지편찬위원회, 1998.
조찬용, 『무신사태고찰』, 1998.
이승원, 『이승원무신일기』, 거창박물관, 2014.
정중원, 『천옹유고』, 정량원 역, 거창문화원, 2019.
정 시 균|거창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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