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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이라는 수레바퀴
동북(東北)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정(校庭)에서 동기생(同期生)의 인연을 맺은지도 어언 60여년에 다다르고 있다.
1957년도 이제 막 코흘리개를 벗어나는 열네살의 나이로 동북중학교 1학년부터 만난 중학교 친구들, 여타 중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에 동북고등학교에 입학한 고교 동기들도 있다.
동북중학교 동창이든 고등학교 동기생이든 모두 동북의 동기생 동창들이다.
오늘처럼 송년회에서 많은 동북중고등학교9회 동기들을 만나면 언제나 추억은 강물이 되어 가슴을 적셔 내린다.
청소년기의 집 없는 설움과 굶주림의 아픔이 흑백 필름의 영화가 되어 되살아나곤 한다.
그 당시의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1950년 6.25 전쟁의 악몽에서 헤여나지 못한 상태이다.
우리 가족 여섯 식구도 1.4후퇴 때에 북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의 신세가 아닌가.
나의 부모님은 몸서리치는 공산치하가 싫어서 어린 네 자식을 데리고 무작정 내려온 것이다.
물 설고 땅 설고 낮선 하늘 아래에는 아는 사람 한명 없고 집도 먹을 것도 입을 옷도 돈도 한푼 없는 알몸의 알거지 신세일 뿐이다.
이 때 내 나이가 철 모르고 칭얼대기 일쑤인 일곱살로 만으로는 여섯살이 아니더냐.
북녘에는 아직도 나의 할머님이 살고(?) 계시고 있다.
연세는 아마도 127세 정도 되리라고 생각도 든다.
광(창고)에는 가을에 추수한 나락들로 가득하고 겨울나기 김장을 앞마당에 가득히 묻어 놓은 상태이리다.
이것을 버리고 집을 떠나시기가 그토록 힘드셨나 보다.
감정이 북받쳐 목이 메이셨는지 잘 가라는 한마디의 말씀도 없으시다.
어서들 가라는 손짓 한번 하시고는 돌아서신다.
옷소매로 계속 눈물을 흠치시던 할머니의 뒷모습이 지금도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고 맴돌고 있다.
일주일이면 보름이 지나면 아니 늦어도 한달 후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풍문을 믿으시기도 했으리다.
이제는 나의 아버지 어머니도 저 세상으로 떠나신지도 50년 40년이 지났다.
그토록 가고 싶어 하시던 고향산천을 뒤로 하시고 홀연히 떠나신 분이시다.
꿈에도 보고 싶은 어머니를 그리며 눈도 차마 못 감으셨으리라고 생각도 든다.
이제는 당신의 자식이 칠십대 중반으로 희미하게 꿈속에서라도 고향땅을 그리고 있다.
해마다 명절이면 어머니를 목놓아 부르시던 아버지의 절절함이 가슴을 짓누르곤 한다.
그토록 질기고 질긴 질곡의 삶의 세월에 동북이라는 울타리에서 여러분들을 만난 것이다.
지금의 오장동 중부시장 자리에 대여섯 평 남짓의 판잣집에서 어머니 아버지 큰누님 작은누나 남동생 그리고 나 우리 여섯 가족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화장실은 어드메 있는가. 나무 판자로 둘러쌓은 곳으로 나무발판 밑에는 바로 똥통이다. 허연 회충들이 살아서 꿈틀대고 있는 그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곳에서 을지로 4가에 있는 영희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소년 시절을 보낸 것이다.
공부는 고사하고 매일 세끼의 꽁보리밥이라도 감지덕지 하며 먹으며 삶의 끈을 이어간다.
어머니는 을지로 5가 버스 정류장 앞에서 자그마한 노점을 펼쳐 놓으셨다.
아버지는 서울운동장 옆 골목에서 토정비결이나 역리학 서적을 도소매점을 하기도 한다.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동생과 함께 엄마에게로 달려 나가곤 한다.
엄마가 따라 주시는 시원하고 달작지근한 냉차 한잔이 어린 마음에는 행복의 전부가 아니랴.
냉차라고 해야 한말 정도 들이의 유리통에 어름 한 덩어리를 띄워 넣는다.
수박 한 조각도 넣고 커피 색상의 분말과 당원이라는 하얀가루를 넣은 것이 전부이다.
컵은 서너개가 냉차통 위에 엎어 놓여 있다.
컵을 씻을 물도 장소도 없으니 하루 종일 뭇 사람들이 사용을 한다.
그 시절 위생에 대한 관념은 언감생심으로 하루 연명하기에 급급하던 시절이렸다.
좌판에 있는 오징어 다리 하나라도 더 먹고 싶어서, 양키껌 한조각이라도 씹어 보고픈 생각일 뿐이다.
좌판이라야 사과상자 두개 넓이 정도이다.
양담배 이름은 CAMEL, SALEM, MALBORO, KENT등 대여섯갑이다. 또 뭐드라 그저 가물가물이다.
국산 담배로는 화랑담배, 아리랑이 생각되고있다.
내 아버지는 술은 무척 즐겨 드시지만 담배는 얼씬도 않하신다. 그 취향을 70대 연세(?)인 맏아들이 여지껏 이어받은 모양이다. 담배 피우는 사람만 봐도 10여 미터 이상 거리를 둔다. 담배연기를 스치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오징어 대여섯 마리, 미제껌 몇통, 눈깔사냥 두 주먹, 낱담배, 건빵등 이것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상품(商品)이다.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시면서 어린 자식들의 속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보고 계신다.
싫은 소리 한번 역정내는 한 마디 말씀도 없으시고 모든 것을 내어주시곤 한다.
어느 날인가 오마니는 잠깐 자리를 비우신 때이다. 동생과 둘이 나란히 앉아서 노점상을 지키고 있다.
" 담배 한가치만 줘라 " 근심 가득한 모습의 아주머니이다.
" 내가 지금은 돈이 없으니 집에 가서 한갑의 돈을 줄테니 동생을 같이 데리고 갈거다 "
이 한마디가 너무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담배 한개피를 피우고 한갑의 돈을 준다니 얼마나 고마운 분이신가.
저녁녘이 되고 컴컴한 밤이 오도록 동생은 보이지를 않는다.
" 정호야 ~~~~ 어드메 있는 거가 ~~ 어 ~ 대답을 하려므나 ~~ 야 ~~~" 목청껏 울부짖으며 아버지 오마니 누님 두분이 을지로 온 거리를 헤매고 있다.
파출소도 찾아가 보지만 모르겠다는 시큰둥한 답변만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오마니는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서 가슴을 치며 끝없이 울고만 계신다.
" 어떻게 무슨 말씀을 해야 되나 " 오마니와 같이 울먹일 뿐이다.
밤 9시즈음에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걸어오고 있는 동생 모습이 보인다.
아버님이 쫒아가셔서 가슴에 끌어 안으신다. 한참을 눈물로 온몸을 적시고 있으신 순간이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서 내렸는데 들어선 방에는 문둥이들이 앉아 있다는 동생의 얘기이다.
" 얘는 너무 커서 안되니까 다시 돌려보내라 " 나이가 많은 문둥이 할아버지가 던진 한마디란다.
그 당시만 해도 문둥병에는 어린애 생간(生肝)을 먹으면 완치가 된다는 헛소문이 있었던 시절이다.
아버지에게 엄청 야단을 맞을 것이라 걱정이 태산이던 그 당시가 생각키도 싫다.
" 앞으로는 누가 데리고 간다고 해도 절대 그러지 말거라 , 알겠지 ~ 정 남아 ~~~ "이 한마디가 전부이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떨리고 답답함만이 앞을 가리곤 한다.
어쩌면 남동생을 그들의 제물이 될 수도 있었던 아찔한 때가 아닌가.
유소년 국민학교 시절에 각인되어 있는 나만의 처절한 악몽과 같은 생과사의 나락이리다.
네명의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먹여 살리시느라, 공부시키시느라고 온갖 고통과 희생을 마다 하지 않은 부모님이시다.
아무리 바다가 깊고, 산이 높고, 하늘이 높다고 해도 부모님의 끔찍히도 베푸시는 사랑을 그 누가 알 수가 있을까.
살아 생존에 비행기 한번, 여행 한번, 용돈 한푼 드리지 못한 불효자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미여지고 눈물이 앞을 가리곤 한다.
땅을 치고 통곡을 한들 저 머나 먼 세상으로 떠나신 부모님은 대답이 없으시다.
그저 벅차 오르는 죄스러움과 미안함만이 가슴을 쥐여짜고 있을 뿐이다.
국민학교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떠오르지도 않으며 생각키도 싫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때의 숙제는 있기나 했는지 있으면 하기나 했는지 전혀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중학교 시험에 1차 2차 모두 낙방의 고배를 받아들여야 한다.
장남(長男)이라는 녀석의 앞날이 걱정 되셨는지 내 아버님은 한달 뒤에야 손을 잡고 동북의 교문을 들어선다.
시험도 치르지 않고 그냥 동북중학교 교모의 마크와 뺏지를 달게 된다.
이북 출신인 피난민의 아픔을 학교에서 너그럽게 받아준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동기생 여러분을 만날 수도 없었을 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상상키 어려운 나락으로 떨어지고 지금의 나라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르곘다.
그 당시는 절깐의 동북이요, 3류도 아닌 4류의 보잘 것 없는 최하층(最下層)의 학교이며 말 그대로 똥통이었다.
지나고 보니 지금은 동북(東北)이라는 수레바퀴는 내 삶의 햇살이었으며 꿈의 원천(源泉)이기도 하지 않았을까.
더하여 동기생 여러분들이 있으매 마음의 위로가 되는 힘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장미꽃이 깨끗하고 맑끔한 정원에서만 피는 것이 아니리다.
보잘것 없는 울타리 밖에서도, 눈길 한번 닿지 않는 오지(奧地)만이 아닌 오지(汚地)에서도 활짝 피여 나리라.
동북중고 동기생 여러분들도 별 볼일 없는 비탈길에서 아니면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외딴 풀섶에서 아름답게 활짝 피어난 장미꽃이 아닐런지 모르겠다.
이런 자부심과 자긍심으로 지금까지 살아 왔으며 앞으로도 여러분과 함꼐 살아가야 할 세상이 아니더냐.
요즘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추잡상은 대한민국이 국가라고 이게 나라라고 하기에도 창피하고 부끄럽고 비참한 모습들이다.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와 책임은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가정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가장(家長)에게 있으며 한 국가에는 최고 통수권자이자 대통령이 있다.
그 이름은 누구이던가. 부르기도 듣기도 보기도 싫은 발음대로 바끄네여사가 아닌가.
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유명무실한 식물인간 상태와 같은 허수아비일 뿐이다.
이미 국민들의 마음에서 삭제되어 버린지 오래이다.
어처구니 없는 일개 최튼실이라는 여인과 함께 온갖 불법과 비리로 국정을 농단하고 헌법을 짓밟은 공범이며 주범으로 전락한 탄핵의 표적일 뿐이니 말이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을 했으며 무슨 범법(犯法)을 저질렀는지 자체도 모르고 있는 가장 악랄한 철면피의 소유자이리라.
이런 지도자를 믿고 하루 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백성들이 불쌍하고 바보스럽기까지 하다.
밤 늦도록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불신과 배신감만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하늘을 찌를듯한 권력을 가진 자와 금은보화 비자금을 비밀 창고에 가득 채운 재벌들도 언젠가는 진실 앞에 무릎을 꿇게 마련이다.
시간과 정의는 언제나 약자(弱者)의 손을 들어줄 것이며 역사는 국민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사이비 무녀(巫女)와 같은 에미를 너무나도 잘 만난 덕분에 결국에는 사랑하는 딸의 고등학교 졸업은 말할 것도 없으며, E 여자대학 입학도 취소가 된다.
한 마디로 학적 자체가 모두 박탈되고마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름이나 국적은 바꿀 수 있으며 살다보면 배우자도 바꿀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이처럼 모든 것은 바꿀 수 있어도 하지만 학적만큼은 절대로 바꾸기는 불가능한 사실인데 말이다.
국기를 문란시키고 국정 모든 사업을 온갖 불법과 탈법과 협박으로 어지럽히고 국민을 우롱하고 기만을 한 것이리다.
주모자이며 추종자인 바끄네와 최튼실의 일당을 끌어 내리고 법원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매주 토요일이면 100만명 이상이 촛불을 들고 민주광장으로 변한 서울 광화문을 가득 메우곤 하고 있다.
" 바끄네 구속, 하야해 ~~~ 탄핵해~ 체포해~ 이게 나라냐 ~~~"등의 절규를 터뜨리곤 한다.
이 노객도 일찌감치 약국샷다를 내리고 그 곳으로 달려갈 수 밖에 없다.
내 자식과 손주녀석들이, 우리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가야 할 나라이며 조국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싸늘한 겨울 밤바람이 온몸을 움츠러들게 한다.
반드시 이 나라를 바꾸고야 말겠다는 의욕만큼은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이다.
촛불 보다 더 밝은 5,000만의 5%를 제외한 4,800만 백성들의 눈망울이 어둠을 거두고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그녀에게는 용서를 구걸할 기회도 용서를 베풀 국민들의 마음도 떠나 버린지 벌써이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지고 열차는 저 멀리 떠나 버린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열차는 누구를 위하여 잠시라도 멈출 수는 없지 않는가.
더 맑고 깨끗하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공평한 의무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국가여야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한 차원 더 높게 UPGRADE 시켜야겠다.
당장 하야를 하고 내려오든지 말든지 탄핵의 열차는 종점으로 치닫고 있다.
탄핵을 거꾸로 부르면 핵탄(核彈), 핵폭탄(核爆彈)이 된다는 것을 왜 그리 몰랐는지 모르겠다.
그저 애처러운 존재일 뿐이 아닌가.
끊임 없이 이어지는 상념을 뿌리치려고 쓰디 쓴 쐬주잔을 거푸 들이키기도 한다.
세상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동북이라는 같은 수레바퀴에 올라탄 공동 운명체이다.
동북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야 할 것이다.
각자의 지나온 인생의 궤적은 달라도 동북중고 동기생이라는 벗들은 변함없이 영원할 것이다.
오늘 송년회를 위하여 장충동 맛집에 참여한 동기생들의 이름을 순서 없이 무작위로 불러 보리다.
" 김지웅 이부춘 윤석팔 문병수 최지섭 임철남 우희택 김흥식 김영균 최길호 주상수 김광세 장소웅 박삼봉 정신수 우관희 손수웅 김홍배 강용희 박현규 홍정덕 최정남 " 이상 22명이다. 졸업생의 인원은 180여명이리다.
이중에 겨우 10분의 1정도의 동기들 뿐이지만 180명을 대표하는 정회원들이다.
막걸리 맥주 쐬주를 각자의 취향대로 완샷한 벗들의 불그스레한 얼굴에는 웃음이 떠날 줄을 모르고 있다.
이야기의 꽃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다음에 또 만나자는 작별의 인사는 아쉬움을 더하고 있으며
헤여짐의 섭섭함을 조금이나마 달래려고 약수동 로타리로 발길을 향한다.
여기에서 합류한 KJW 친구를 포함하여 여덟명이 알콜의 농도를 추가로 올려 놓는다.
너무나 소중하고 보고픈 동기생들이 아니더냐.
이미 저 하늘로 날아오른 동기들도 흐뭇한 마음으로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이다.
내년에도 내 후년에도 아니 10년, 20년, 28년후에도 함께 어깨 동무하고 교가와 권주가를 목청껏 불렀으면 하는 바램이다.
2016년 12월 5일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