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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배 전에 제가 좀 일찍 와서 항상 본당에 이렇게 있잖아요. 앞에 이제 찬양단이 연습하는 거 이렇게 보고 또 일찍 온 성도들이 있으면 옆에 가서 인사도 하기도 하고 또 개인적인 기도도 하고 그렇게 그 시간을 보내요. 그러다가 갑자기 이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요즘 제가 좀 부지런하지 않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나를 안 쓰신다고 하면 어쩌지 이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남 목사 나 여기 여기까지만 내가 너를 쓸게 내가 오늘까지만 내가 너를 사용할게
이렇게 하시고 이후에 나를 안 쓰시면 어떡하지 이런 마음이 막 생겨나는 거예요. 그래서 빨리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죽을 때까지 쓰임 받게 해 주십시오.
혹시 내가 육체가 세력이 다해서 쓰임 받을 수 없으면 내 장기라도 쓰임 받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하고 그 약간의 불안함을 마무리했습니다. 옆 사람과 내용은 좀 칙칙하지만 좀 밝은 모습으로 인사할 텐데 쓰임 받음에 감사합시다. 인사하겠습니다. 시작
쓰임 받음에 감사합시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에는 여러 명의 유명 인물들이 나와요. 첫 번째 인물은 아비아달이라는 사람입니다. 아비아달은 아버지 아버지 대제사장인 아히멜렉을 이어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된 인물이에요.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있어서 가장 영적으로 중요한 사람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대제사장이니까 하나님 앞에 직접 서는 사람이니까 어쨌든 이스라엘에 있어서 영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트라우마가 있어요. 어떤 트라우마냐 하면 도망다니는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로 이 아비멜렉의 가족들이 무려 85명이나 학살을 당합니다. 그러니까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아비 아달인 거예요. 가족들 다 죽고 85명의 가족들이 사울의 종들의 손에 의해서 다 죽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이 아비 아단입니다. 이런 거죠. 가족이 다 죽는 것을 최소한 받거나 아니면 아무튼 그 후에 수습하는 과정을 다 본 사람인 거죠. 이 아비아들에게 있어서 사 85명 중에 살아났다는 건 엄청난 은혜인 거잖아요. 그런데 혼자만 살아났으니까 이것 또한 너무 인생의 트라우마인 거예요.
제가 말씀을 준비하다가 이게 은혜의 양면성이구나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정말 어렵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트라우마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비아달의 노년은 그렇게 좋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솔로몬을 지지하지 않고 그 다윗의 후계자인 솔로몬을 지지하지 않고 아도니아의 반란에 참여했다가 대제사장직을 박탈당하고 아나도스로 추방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아비아달이 솔로몬을 지지하지 않고 아도니아를 지지했을까요?
트라우마가 어떤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만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 것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대제사장인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이런 거죠. 내 선택의 결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몰랐던 거죠.
여러분 자기 선택의 결과를 잘 아는 사람이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는 사람인 거예요. 반대로 하면 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는 사람은 선택을 책임 있게 잘 합니다. 자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올바른 선택을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올바르지 않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기나 자기의 직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거죠. 목사인 제가 제 직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모르면 저는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이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잘못된 선택의 배경에는 자기가 얼마나 어떤 사람인지를 몰라서 잘못된 선택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비아달은 평생 이 트라우마에 갇혀 있을지도 몰라요. 성경은 그렇게 기록한 거는 없어요. 어쩌면 그것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게 좀 알아야 될 게 그럼 이미 이 아비아달이 아두니아를 선택했을 때 솔로몬을 하나님이 선택했을 때냐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이미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다윗의 후계자로 선택한 후였던 거예요. 하나님의 결정이 난 이후에 다시 자기가 결정을 내리고
여러분 이게 얼마나 우스워요? 하나님이 이미 결정을 하셨어요. 근데 자기가 하나님과 다른 결정을 내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도니아를 추종하고 그러다가 결국 대제사장직을 박탈당하고 아나도스로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아비아잘이 왜 이런 선택을 했을지 성경은 기록해 놓지 않았어요. 그래서 되게 마음이 아파요. 하나님이 이미 솔로몬을 선택한 후인데 왜 굳이 그때 다시 아도니아를 선택하는 행위를 했을까 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 그래서 한번 추측을 해봤습니다. 왜 이 아비아달이 이런 선택을 했을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비아달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었을까라고 좀 추측해 봤어요. 아비아이데이 왜 이렇게 정말 트라우마 때문에 이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 그런데 좀 더 정답에 가까운 것은 아비아 달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이미 하나님이 답을 내린 것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의 답을 또 내린 거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이런 일들이 우리의 삶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이미 답을 하셨어요. 근데 내가 또 답을 내리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누구의 답이 맞을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응답이 맞죠. 이미 하나님은 우리 교회든 여러분의 삶이든 여러분의 개인적인 문제든 간에 이미 답을 하셨을 수 있어요. 그럴 가능성이 되게 높아요. 왜냐하면 성경 곳곳에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들을 향해서 당신의 뜻과 계획을 이미 많이 수없이 알려주셨기 때문인 거예요. 그렇다면 이미 이 부르짖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수없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려주셨어요. 근데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영적인 수준이어서 또 다른 답을 내가 내렸던 거죠. 아비아들이 그랬던 거예요.
이미 하나님의 답은 정해져 있어요. 근데 자신이 답을 내린 거예요. 그래서 아도니아를 추정하다가 대제사장직도 박탈당하고 아나도스로 쫓겨나게 됐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 최악의 선택은 언제 일어나냐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경제적으로 힘들 때 최악의 선택을 하는 게 아니에요. 삶이 어려워서 최악의 선택을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육신의 귀는 어두워도 영적인 귀는 점점 더 밝아져야 돼요. 왜요?
왜냐하면 결국 우리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인물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이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 번째 인물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사랑했고 지금도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다윗이에요.
저는 오늘 이 두 사람을 좀 비교하려고 합니다. 아비아달을 이렇게 먼저 이야기한 것은 아비아달과 또 이 사루가 다윗의 이야기가 맥락이 다르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두 번째 인물의 인물이 사울인데, 이 사울의 가장 큰 불행은 그의 노년에 하나님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사울의 불행은 그의 인생 노년에 집중돼 있어요. 여러분 사울이 얼마나 준수한 사람이었어요 그가 왕으로 세워지는 것을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만큼 정말 준수한 사람이었어요. 그의 젊은 시절은 그랬어요.
근데 이 사울의 불행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냐 하면 사울의 인생 노후의 노년에 집중되어 있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울의 노년의 불행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건이 성경에 있습니다. 블레셋과 이제 이스라엘이 전쟁이 일어났어요. 사울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근데 하나님은 이 사울에게 어떤 것으로도 대답하지 않은 거예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않으셨어요. 이 말은 그 어떤 사인도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떤 징표도 사울에게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그러자 사울이 어떤 결정을 했을까요?
무당을 찾아간 거예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거예요. 하나님이 답을 하지 않으시자. 그 어떤 고술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해석할 수 없게 되자 그가 찾은 것이 무당 신접한 여인이었어요.
여러분 이것도 엄청난 아이러니인데 왜 아이러니냐 하면 사울이 왕이 되고 난 이후에 우상의 제단들을 다 부쉈어요. 신접한 자들을 다 찾아내서 다 죽였어요. 아마 이 여인은 그때 피했던 사람이거나 아니면 타국에서 온 여인일 수도 있어요. 자기가 그렇게 미워해서 다 죽였던 사람들을 그가 다시 찾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생,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인생의 최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서지 않으면 내가 가치 없게 여기는 것들을 내가 의미 없게 여겼던 존재들을 다시 쫓아가고 다시 찾아다니고 그것에 무릎 꿇는 일들이 우리 생애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스라엘의 희망이 되었을까요?
여러분 다윗을 생각하면 우리가 대표적인 사건이 딱 두 개 떠올라요. 골리앗을 이긴 거예요. 또 하나는 뭐예요?
되게 안 좋은 사건이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것. 우리 생각에는 제 생각에 여러분은 저보다 믿음이 좋을 수 있으니까 제 생각에는 왜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왕으로 세우셨을까? 그 당시에 다윗보다 도덕적으로 더 정결한 사람은 없었을까 있었겠죠
여러분 세상에는 목회자보다 더 정결한 성도들이 많아요. 저보다 죄 짓지 않은 성도들도 많아요. 제가 여기 죄가 없어서 제가 여러분보다 더 깨끗해서 이 자리에 있는 건 아니에요.
하나님은 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을까요?
여러분 넘어진 사람. 그러니까 밧세바 때문에 넘어졌잖아요. 다윗이 이 넘어진 사람이 다시 공동체의 희망이 되기란 어려워요.
제가 정말 결정적인 실수를 해서 넘어졌어요. 넘어졌어요. 그런데 제가 다시 이 교회 강단에서 정말 다시 은혜롭게 말씀을 선포하고 교회가 다시 부흥되는 걸 경험하는 일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에요.
여러분 고대와 현대가 어느 사회가 더 윤리적일까요?
저도 이게 답이 안 와요. 그래서 제가 챗GPT한테 물어봤어요. 고대와 현대 중에 어느 사회가 더 윤리적이야? 이렇게 물어봤더니 얘도 헷갈리나 봐요. 자기도 잘 모르겠대요. 고대가 더 윤리적인지 현대가 더 윤리적인지 자기도 잘 모르겠대요.
근데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고대가 더 윤리적이지 않을 수는 있지만 상대방에게는 더 윤리를 요구했던 사회는 맞는 것 같아요. 윤리적인 사회가 아닐 수는 있지만 상대방 내가 아닌 타인에게는 왕이나 이런 사람들에게는 더 윤리적인 것을 요구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들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어떻게 다윗이 다시 이스라엘의 희망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다윗이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사울의 삶을 대표적으로 비교한다면 다윗은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고, 사울은 늘 사람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어요.
1절과 5절이에요. 오늘 본문 이전에 말씀을 보면 다윗은 사람이 자기에게 보고해도 하나님께 물었고, 사람이 의문을 품어도 하나님께 물었고, 사람들의 음모를 다윗이 알아도 하나님께 물었어요. 놀랍죠.
여러분 누군가가 보고했다는 건 어떤 사람에게 보고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최고의 결정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결정을 요청하는 도구인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의 신하들이 다윗에게 보고했다는 것은 다윗이 말하면 곧 그게 답이라는 그런 의미예요. 그러니까 다윗에게 물었던 거죠. 다윗은 그 시대의 왕정 시대잖아요. 그 시대에 얼마든지 답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백성들에게 그런 존재였죠. 그래도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물었어요.
이게 다윗의 탁월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윗에 주신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어요.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다윗이 탁월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은 한 번도 예외 없이 다윗의 삶에 응답하셨고 이것이 곧 다윗의 삶의 탁월함이 된 거죠. 하나님의 응답을 가졌기 때문에 그가 탁월한 사람이었던 거예요. 그가 도덕적으로 온전해서 탁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응답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탁월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삶에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소리가 있었다면 반대로 사울의 삶에는 끊임없이 사람의 소리가 있었어요.
오늘 본문인데 7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림에 13절에 다윗이 그 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여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그러니까 사울은 들을 수 있는 게 사람의 소리밖에 없었던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던 거죠. 다윗의 탁월함은 도덕적인 우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사울의 패배는 사울이 도덕적으로 더 못해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없었던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사람의 소리만 듣고 온전히 살 수 있을까요?
우리 자녀들을 정말 잘 가르치려고 해요. 그래서 자녀들이 자녀들에게 선생님 소리도 잘 들으라고 하고 자기의 소리도 잘 듣게 하려고 해요.
왜요?
우리는 그 사람의 소리가 우리 자녀를 잘 키울 거라 생각하기 때문인 거죠. 우리 아이가 학교 가면 선생님 소리를 잘 들었으면 좋겠고, 가정에 왔으면 부모의 소리를 잘 들었으면 좋겠고, 교회에 왔으면 교회 리더십의 소리를 잘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렇게 요청을 해요. 왜냐하면 그 소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온전하게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인 겁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정말 잘 자라던가요?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들어야 될 진짜 들어야 될 소리는 부모의 소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소리 선생님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를 자녀가 들을 수 있어야 돼요.
7절을 보면 사울은 사람의 소리를 하나님의 소리로 여기는 습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어떤 사람이 다윗이 그 일라에 온 것을 보고하자 하나님이 다윗을 자신의 손에 넘겼다고 생각했어요.
여러분 이상하지 않나요?
신하가 보고했어요. 이제 척후병이겠죠. 사울에게 보고했어요. 다윗이 그릴라에 왔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하나님이 다윗을 내 손에 맡겼구나라고 생각한 거죠. 사울은 하나님이 더 이상 자기에게 말씀하지 않자 사람의 소리를 하나님의 소리로 듣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두 사람의 삶의 출발점을 보면 이 두 사람의 삶이 왜 이랬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돼요.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졌다면, 사울은 사람에 의해서 왕으로 세워졌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왕을 요구했고 그 왕의 요구에 의해 사울이 왕이 된 거죠.
반면에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왕으로 세워진 거죠. 하나님이 시작인 인생과 사람이 시작인 인생의 이렇게 차이인 거죠. 그러니까 두 사람은 시작 전부터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있을 때 대제사장인 아비아달이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사울의 군대가 그 일라를 에워싸려는 계획을 알게 되었을 때 아비아달이 가져온 에버스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두 가지를 물었는데, 사울이 그 일라로 내려올 줄을 물었고, 그 일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울의 손에 넘길지를 이 에봇에게 물었어요.
그래서 되게 슬픈 소식을 들었어요. 사울은 내려올 것이고 그 일라 사람들은 자기를 사울의 손에 넘길 것이다. 이 소식을 드린 거예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다윗이 한 일은 600명의 자기의 가족과 신하들을 데리고 신속하게 그 자리를 피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렇듯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답을 하시는지가 그의 삶에 집중하고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만약에 우리는 어땠을까요?
그 일리가 나를 배신해 그 일라가 어떤 사람이 다윗이 도와준 사람들이잖아요. 생명을 살려준 사람들이 근데 그 사람이 다윗을 비판한 거잖아요. 우리라면 거기에 집중했을 거예요. 막 화를 내고 막 분노하고 있을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막 소리 쳤을 거예요. 다윗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답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저였다면 사울이 내려온다는 사실에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배신했다는 사실에 막 분노했을 거예요. 하나님의 답보다는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14절 말씀 우리 같이 한번 우리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14절 같이 읽습니다. 시작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의 소리가 사울의 위협에서 다윗을 보호했던 거예요. 사람의 소리에 집중하는 사울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다윗을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소리와 사람의 소리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소리가 이기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교회와 사람의 음성을 듣는 교회 교회가 싸운다면 이상하지만 누가 이길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교회가 이기죠.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성도들과 사람의 음성을 듣는 성도 중에 누가 이길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성도가 이긴 거죠.
이게 다윗의 삶의 탁월함이에요. 윤리나 도덕적으로 탁월했다는 것보다는 그가 그의 삶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어요. 그것을 그것이 그를 탁월하게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여러분이나 제가 경험하는 절망은 사람의 소리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교회에도요. 사람의 소리가 정말 많아요. 세상은 당연히 더 많죠. 우리가 하나님의 소리를 못 들으면 사람들은 세상의 사람들의 소리를 정답으로 여겨요. 그래서 인생이 어려움이 오고 곤란이 오고 혼란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소리가 답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의 소리는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문제 때문에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에요. 내 삶의 어려운 상황 때문에 어려운 게 아니라 내 삶에 하나님의 음성이 없어서 하나님의 소리가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상황과 현실에 매이지 말고 우리가 오늘도 하나님의 음성을 구하고 하나님의 소리를 우리가 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이용도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어요. 이분이 감리교 목사이고 약간 신비주의적인 경향 또 이런 신학적인 사상 때문에 초기에는 이단으로 좀 규정됐던 목회자이긴 해요. 그래도 이분의 예화나 또 그분의 삶을 통해서는 충분히 도전받을 만한 아주 훌륭하신 목사님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고향이 이 용정이에요. 한국이 아니에요. 용정 중국이죠. 중국 이 용정에 이 이용도 목사님이 이제 부흥회를 갔어요. 이렇게 설교를 하려고 단에 이렇게 올랐다가 그냥 내려가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뭐를 성도들에게 말씀해야 할지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한 번쯤 우리가 우리 저 목사님 대단하시다 내일 다음 시간 내가 은혜롭게 말씀을 들어야지 이럴 거예요. 근데 그다음 날 새벽에도 또 하나님이 자기에게 뭐를 설교해야 될지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또 내려간 거예요. 이게 그다음 날 저녁까지 계속됐어요. 그래서 목사님은 부흥회를 취소하고 용정을 떠나버렸어요.
정말 역사에 몇 번 없을 만한 사건인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의 머리에 되게 각인이 된 사건이긴 합니다. 근데 이 교회 성도들이 좀 좋은 분들이었던 것 같아요.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말씀을 하지 않는다는 이 사실이 너무 성도들을 회개한 거예요. 왜냐하면 이분이 모든 부흥에서 이런 식으로 한 게 아니에요. 대부분의 부흥에는 가서 말씀을 다 전했어요. 이 교회만 그런 거죠. 우리가 얼마나 잘못했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말씀을 하지 않으려고 하셨을까 이 교인들이 2박 3일 동안 이 사실을 부여잡고 회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없음을 우리가 회개해야 돼요. 은혜롭게 말씀 듣지 못함을 회개해야 하고 내 인생을 지도하고 가르칠 말씀이 지금 내 삶에 없음도 회개해야 돼요. 내가 무릎 꿇고 복종할 말씀이 내게 없는 것 또한 회개해야 됩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소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희망이 있는 분들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의 소리만 들린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소리가 큰 교회는 머지않아 혼란이 오더라고요. 사람의 소리만 집중해 듣는 성도에게도 머지않아 혼란이 와요. 반면에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면 교회도 인생도 질서가 생겨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 여쭤야 돼요. 그럼 하나님은 어떤 방편으로든 가르쳐 주셔요. 깨닫게 하시든, 듣게 하시든, 느끼게 하시든, 사건으로든 반드시 알려주셔요. 알려주시지 않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